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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3b3b,#010101><colcolor=#d5d3d3,#dddddd> 장르 | 사극 로맨스 |
저자 | 강미강 |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
출간일 | 2017. 03. 30. |
단행본 권수 | 2권 (2017. 09. 07. 完)[1] |
쪽수 | 928쪽 |
ISBN | 9791104911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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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빈 성씨 덕임의 인생과 정조와의 사랑을 그린 사극 로맨스 소설.[2] 작가는 강미강이다.[3]리디, 네이버 시리즈, 알라딘 등에서 e북으로 읽을 수 있다.
2. 줄거리
도깨비보다 무섭다는 왕이 있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픈 궁녀도 있었다.
이상스레 서로가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다가섰다. 그래도 다가서지 않았다.
어렵고 애매한 한 발자국씩을 나누며 습관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알쏭달쏭한 시절은 기쁨과 배신으로 어지러이 물들어 이지러지고,
이별과 재회는 어색한 질투와 상실감을 동반하였다.
잊은 척은 할 수 있어도 잊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무너진 감정의 둑은 운명을 뒤흔들 홍수가 되었다.
“내 천성을 거스르면서까지 너를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너여야만 한다.”
하지만 선뜻 붙잡지 못할 붉은 옷소매가 달콤할 수만은 없고,
오히려 그 끝동은 오래도록 별러온 양 새침하게 밀고 당길 따름이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픈 궁녀도 있었다.
이상스레 서로가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다가섰다. 그래도 다가서지 않았다.
어렵고 애매한 한 발자국씩을 나누며 습관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알쏭달쏭한 시절은 기쁨과 배신으로 어지러이 물들어 이지러지고,
이별과 재회는 어색한 질투와 상실감을 동반하였다.
잊은 척은 할 수 있어도 잊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무너진 감정의 둑은 운명을 뒤흔들 홍수가 되었다.
“내 천성을 거스르면서까지 너를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너여야만 한다.”
하지만 선뜻 붙잡지 못할 붉은 옷소매가 달콤할 수만은 없고,
오히려 그 끝동은 오래도록 별러온 양 새침하게 밀고 당길 따름이었다.
2.1. 정조와의 만남
동궁전 생각시 덕임은 자신이 맡고 있는 별간에 어떤 남자가 찾아오는데, 덕임은 꼬치꼬치 캐묻는 이 남자를 쫓아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가 자신의 상전인 세손임을 알게 된다. 그 이후 지밀 나인이 되면서 세손과 엮이게 된다. 세손이 왕이 된 후 세손 시절부터 왕을 보좌한 덕로가 권세를 휘두르고 중궁이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보내고, 덕로의 여동생은 숙창궁 원빈이 된다. 한편 덕임은 왕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를 유지하기로 한다. 한편 어린 나이에 후궁이 된 숙창궁은 외로운 궁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입궁 한지 1년 만에 죽고만다. 덕로는 숙창궁의 죽음이 중궁과 관련 있다고 여기고, 어느 날 부턴가 중궁전 나인들이 실종 되고 덕임의 친구 경희도 비밀 암호 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덕임은 중궁전 나인들이 덕로에게 잡혀 문초를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대비에게 서신으로 구명을 요청하고 덕로를 찾아간다. 그러나 대비 대신 왕이 덕로를 실각시키는데 왕은 덕임에게 서신을 보여주며 자신은 세손 시절부터 덕로를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음을 알려주고 덕임이 자신을 배반하고 대비와 내통했다며 분노한다. 한편 덕임 역시 경희를 포함해 애꿎은 궁녀들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이용한 왕에게 실망해서 "전하를 사랑할 일 없을 것이다" 라고 일부러 상처준다. 왕은 그런 덕임에게 강제로 입맞춤하고 날이 밝는대로 떠나라고 말한다.
2.2. 경수궁의 지밀나인이 되다
덕임은 현록대부 댁으로 쫓겨난 후, 시간이 지나 새 후궁인 경수궁이 간택되면서 덕임은 궁으로 돌아와서 경수궁의 지밀나인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경수궁이 친정에서 데려온 본방나인들만 곁에 두고 자신을 비롯한 지밀궁녀들의 말을 듣지않고 멀리 하면서 갈등이 생긴다. 경수궁은 첫 합방을 치르고 금방 회임하지만, 10달이 넘어도 아이가 나오지 않으면서 초조하게 시간만 흐르던 중, 경수궁은 왕이 덕임에게 마음이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덕임을 일부러 힘든 일을 시키며 골탕먹인다. 경수궁이 산더미같은 빨래를 시키자 덕임은 한밤중까지 빨랫감을 두드리다가 우연히 정조의 눈에 띄면서 경수궁은 정조에게 크게 질책당하면서 경수궁은 덕임을 못 본척하면서 조용히 넘어가나 했지만, 경수궁과 그녀의 본방나인들이 외간사내와 사통한다며 덕임을 모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덕임은 그 외간사내가 자신의 친오라비임을 밝히고 경수궁의 본방나인들이 사가의 무속인과 접촉한다며 경수궁의 본방나인들을 역으로 쳐낸다.2.3. 후궁이 되다
그날 밤, 왕은 덕임에게 승은을 내린다. 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입은 후 내명부 정5품 상의를 얻었으며[4] 1782년 정조 6년 아들을 출산하면서 내명부 정3품 소용에 봉해진다. 그리고 덕임이 낳은 아들에 원자 정호가 내려지면서 생모인 덕임은 정1품 의빈에 책봉된다. 덕임은 또 회임하지만 절친한 벗 중 한명인 영희가 유산하고 사통한 혐의로 인해 의금부에 끌려간 후 사망한다. 그 소식에 덕임은 혼절하고, 진작에 말렸어야했다며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친구들끼리 "영희는 죽은 게 아니라 먼저 가서 기다리는거다" 라며 마음을 추스리고 정조에게서 "나를 탓해도 좋으니 또 쓰러지지마라" 라고 위로를 받는다.시간이 흘러 덕임은 이번에는 옹주를 생산한다. 옹주라는 이유로 주목은 덜 받았지만 덕임은 온전한 자기 자식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뻐했다.[5] 그러나 옹주는 고작 2달 만에 병사하고, 슬퍼하는 덕임에게 효강혜빈은 "원래 아기는 약해서 잃기 쉽다. 또 가지면 된다. 그러니 자식을 잃은 전하를 위로해 드리라." 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덕임은 남아 있는 원자 덕분에 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2.4. 세자의 죽음
시간이 흘러 원자가 세자로 봉해진다. 이제 글공부를 시작한 세자의 명목상 어머니는 중전이기에 덕임은 세자와 만날 때마다 "저를 어머니라 부르면 안된다"고 거듭 신신당부해야 했다.[6] 이에 세자는 침울해하고, 덕임 역시 그런 세자의 모습에 슬퍼한다. 그래도 왕과 세자, 덕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덕임은 행복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세자가 유모에게 옮은 홍역을 앓게 된다. 당시 덕임은 셋째를 회임 중이었던 데다가, 어렸을 적에 홍역을 앓은 적도 없었기에 왕은 행여 덕임에게도 홍역이 전염될까봐 애끓어하는 덕임이 세자를 만나는 걸 철저히 막았다. 때문에 덕임은 아들의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어의는 물론 왕까지 처방에 나선 덕분에 세자의 증세는 잠시 호전되는 듯 했으나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했다. 세자의 임종을 앞두고 대비, 효강혜빈, 중전이 찾아오고 마지막으로 왕이 세자를 만나는데 이때 세자는 "어머니만 없다" 라는 얘기를 하고 결국 숨을 거둔다.2.5. 죽음
또다시 자식을 잃은 충격에 덕임은 물 한잔조차 마시지 못하고 토한다. 그런데도 덕임은 후궁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왕, 중전 등 윗전들의 슬픔을 달래야 했던 덕임은 그럼에도 셋째를 위해 억지로 살려고 한다.[7]그러나 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경희에게 만약 자신이 잘못 되면 자신 대신 조사를 계속 해 달라고 부탁한다[8] 그리고 몇 달 뒤에 임신 중이던 덕임은 세자와 똑같은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한다[9] 왕이 덕임의 임종을 지켰는데 죽음을 앞두고 왕이 아닌 친구들인 경희, 복연을 찾았던 덕임은 왕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어야한다며 친구들을 만나지 못 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슬퍼하는 왕에게 "전하는 저 없이도 잘 사실 거다, 저를 정말 사랑했다면 다음 생에는 아는 척 하지 말고 모른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시라" 라며 매몰차게 말하며 냉담한 태도로 끝까지 왕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않고 눈을 감는다.
2.6. 사후
왕은 몹시 슬퍼하지만[10] 이후 왕실은 후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즉시 새 후궁(가순궁)을 간택한다. 3년 뒤 가순궁이 또 다른 원자를 낳아 후사를 잇자, 덕임은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잊혀진다. 하지만 왕은 새로운 세자가 돌아가신 형님에 대해 묻자 일찍 죽은 큰아들이 살아 있으면 지금쯤 어땠을지 남몰래 생각하며 그리워 했고, 말년에 병을 앓을 때 덕임의 친구인 경희를 만나면서 자신이 그녀를 잊은 척은 할 수 있어도 결코 잊을 수는 없었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병사해서 먼저 떠나 있었던 덕임과 아들을 만나는데 돌아가 보라는 덕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덕임의 곁에 남는다. 돌이켜 보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덕임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왕에게는 다행히도 덕임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 뒤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3. 특징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정조 시대 정치사 부분은 배경으로 가볍게 넘기거나 전개에 필요한 만큼만 다룬다. 보통 극의 원활한 전개나 재미를 위해 고증을 희생시키는 데 비해, 본작은 실제 역사에 상당히 부합한다. 굵직한 정치사 이면의 개인적이고 소소한 기록을 잘 발굴하고 활용해 장르 특성에 맞게 녹여냈다. 상상력으로 창작한 에피소드보다 실제 사건의 각색 비중이 크다.두 남녀주인공에 집중한 인물 중심적 진행으로 로맨스 장르 본연에도 충실하다. 다만 정조가 무작정 사랑꾼이라는 식의 드라마틱하게 과장된 서술은 지양했다. 실제 기록으로 볼 때 과연 그렇게 사랑한다는 여자한테 할 만한 행동인가 싶은 의문이 드는 부분까지 전부 짚고 넘어가 현실성을 높였다.[11]
책 말미의 작가 후기도 충실한 편. 작가가 17살이었던 2007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2015년 6월에 완성했다고 밝히고 있다.[12] 또한 집필을 완료한 이후 번역되어 스토리에 반영하지 못한 사료를 정리하여 추가 설명하였다.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역사적 의문점, 작품을 쓰게 된 계기 등도 덧붙였다.[13]
4. 등장인물
4.1. 주인공
- 성덕임[14]
가난한 중인 무관 집안의 3남 3녀 중에 실질적인 고명딸[15] 어머니가 죽기 전 "절대 궁녀가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나 집이 가난해 약조를 어기고 입궁하고 필사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오라비들 무과 급제를 뒷바라지 한다. 동궁의 지밀궁녀이며, 처세술이 뛰어나고 눈치가 좋은 편으로 평소에는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몸을 낮춰 지내지만, 사실 짖궂은 장난을 자주 치고 당찬 면이 있다.
세손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이전부터 의열궁과 선왕의 이야기나 소설 속 궁녀들을 보며 왕의 감정과 달리 후궁들의 마음은 왜 알아주지 않는지, 그들도 과연 왕을 사랑했을지 의문을 품는다. 왕이 된 정조의 곁에서 수발을 들면서 정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덕임은 그의 곁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기로 한다. 그러나 절친한 벗이자 궁녀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이용하는 정조의 계산적인 면을 깨닫고 실망하고 일부러 정조에게 "사랑할 일 없을 것이다"라고 상처 주면서 정조에게 내쳐진다. 현록대부의 궁녀가 되었다가, 새 후궁 경수궁 화빈의 지밀나인 되지만 경수궁은 덕임을 포함한 지밀궁녀들을 멀리하고 본방나인들만 끼고 사는데다 왜인지 덕임을 괴롭히기까지 하다가, 경수궁은 덕임에게 외간 남자와 사통한다는 누명까지 씌우지만, 역으로 누명씌운 경수궁 본방나인을 쳐낸다. 그 날밤, 정조에게 승은을 받고 승은 상궁으로 책봉되었다가 금방 원자를 낳은 후, 후궁 책봉을 받는다.
그러나 "널 내 마음에 두었지만 그렇다고 궁첩을 편애할 수는 없다" 라는 정조의 말에, 덕임은 윗전들을 싹싹하게 모시고 중전에게도 공손한 저자세를 유지하는 등 눈치껏 행동하며, 옹주도 낳고 셋째까지 임신한다.
그러나 두 아이 모두 떠나보내고, 영희가 죽고, 곧이어 자신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앓는다. 덕임은 임종 전, 정조가 아닌 경희와 복연을 찾지만 정조만 자신을 찾아오자, 덕임은 정조에게 "전하는 제가 없어도 잘 사실 테니, 다음 생에서는 아는 체도 하지 마시라" 라고 정조의 마음을 후벼파고, "평범하게 나만 사랑하는 지아비를 만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어미라는 말을 가르치는 사소한 꿈이 있었는데, 전하 곁에는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저를 정말 사랑했다면 모른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시라" 라며 정조를 밀어내고 끝내 연모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조가 죽기 전의 덕임에게 "넌 내게 마음을 주지 않았냐" 라고 묻자 덕임은 "아직도 모르시겠냐, 정녕 원치 않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아났을 것이다. 제대로 갖지 못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낫다더니..." 라는 말을 끝으로 덕임은 눈을 감았다.
왕실의 법도와 후궁의 한계, 정조의 일방적인 희생 요구에 괴로워하고, 정조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고도 마냥 기뻐하지도 못하고, 그럼에도 현실과 타협하는 셈 치고 항상 정조에게 먼저 지고 들어갔으며, 왕을 사랑하냐는 정조와 영희의 질문에 늘 모르겠다고 말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냉담하게 눈을 감았지만, 이를 두고 평생의 벗이었던 경희는 제조상궁이 된 후 말년의 정조에게 "자가께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셨는지도 모릅니다"라고 고한다. [16]
본작의 제목인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녀를 상징하는 동시에[17], 누군가의 아내나 딸로 정의되기 보단 자유로운 궁녀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덕임을 상징한다.
- 정조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 소설에 대한 정보 없이 초반부를 읽다 보면 이거 정조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드는데 이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18]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등이 줄줄이 등장하며 결정적으로 작중 '세손 저하'로 불리는 시점에서 특정된다.
좋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사랑이 쉽지 않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주로 정조 하면 떠오르는 자상한 개혁군주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19] 실제 정조의 다혈질적이고 꼰대스러운 성격이 상당히 고증이 잘 되었다. 정치가답게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면모도 보인다. 때문에 덕임에게 자주 까인다(...).
비정상적인 가족과 왕실에 갇혀 자라서 감정 표현에 서툴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츤데레라 아닌 척 하면서도 덕임을 걱정하고 신경쓴다. 제 딴에는 잘 해줘 보려고 노력도 하지만 워낙 표현을 잘 못해서 뭘 해주고도 덕임에게 말하지 않고, 덕임만을 총애하면서도 공개적으로 잘 드러내지않고 중궁과 경수궁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철두철미한 성리학자로서의 한계를 넘을 만큼 덕임을 사랑한 점은 충분히 묘사된다. 그러나 본문에도 나오듯이 신분상 덕임을 사랑하는 한 남자이기보다는 왕이어야 했기에 마음껏 애정을 표시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본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조가 붕어하면서 죽음의 순간에 보는 환상 혹은 사후세계 묘사는, 분량은 짧지만 정조가 평생토록 원했던 것(사랑하는 사람과 짝을 맺고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만 이 장면에서 문효세자를 데리고 등장하는 의빈 성씨가 정조의 흐려져가는 의식 속의 존재인지 아니면 저승에서 지아비 마중나온 마누라와 아들인지는 불명이다.[20]
최근에서야 의빈 성씨 관련 사료가 많이 국역되면서 정조가 '로맨티스트'로 재조명 받고 있는데. 지고지순한 사랑은 본인이 인증도 했지만, 정사에 기록된 정조의 행동은 '세기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왕의 자식을 낳지 않은 궁녀는 절대 후궁에 봉하지 말라"고 일찍이 수교를 내린 점, 같은 후궁이라도 출신에 따라 차이를 둔 점, 의빈성씨가 아들을 낳자마자 친정오라비 성식을 파직시킨 점, 문효세자 사후 만삭이던 의빈 성씨를 두고도 '지체가 낮은 호산청을 일찍 설치하는 건 전례에도 없는 일'이라며 단칼에 자른 점 등등.[21] 의빈 성씨 사후 책봉한 수빈 박씨와 그 친정에 취했던 태도와도 대비되는 점이 많다.[22]
정조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원칙에 충실한 도학 군주였고, 유독 외척에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단적으로 즉위하자마자 혜경궁 홍씨 쪽 외척과 정순왕후 쪽 외척을 사이좋게 날렸고 그들은 이를 수용해야만 했다.[23] 작중에서 나왔듯 총신이자 권신이었던 홍국영도 선을 넘자 결국 내치는 등 외척에 엄격한 태도를 보여왔다. 정조의 이러한 엄격한 면은 화빈 윤씨의 친정과 관련된 유교 질서와 어긋나는 형사 사건에 대해 엄히 처리하라고 형조에 전교를 내린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정조의 가장 애매한 태도는 후계와 관련이 있다. 화빈 윤씨에겐 애초부터 중전을 위해 세우는 산실청을 설치해줬다. 문효세자가 탄생한 날에도 "앞으로 '종실'이 번창하고 경사가 이어지리라는 기대"라고 말했다. 신하들의 즉각적인 원자책봉 주청도 물리치다가 몇 달 후 서명선과 언쟁 끝에 윤허한다. 이는 궁인 성씨에게서 얻은 장남은 '종친'으로 생각하며, 당시 공식적으로 임신 상태였던 화빈 윤씨의 자식을 원자로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기도 한다.[24] 정조 본인은 "내가 만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경사를 보았으니, 보호하여 기르는 일에 있어서 복을 아끼려는 마음을 매양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유를 들었다.[25] 하지만 작중에도 서술된 것처럼 문효세자 탄생 후에도 여전히 화빈의 산실청은 유지된 점, 이에 대해 산실청을 몇 년 동안 세워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상소에 격분하여 대사간을 파직시킨 점, 이후 수빈의 소생인 순조는 탄생 당일 원자로 삼은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개운한 변론은 아니다.[26][27]
적어도 이 책은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정조의 행적을 모른 척 덮거나 '창작물'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정조와 그의 치세 전반부를 아울러 합리적인 해석을 찾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나치다 싶은 묘사도 있지만, 단지 작중의 로맨스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의 이런 면까지 폄하하는 건 다분히 지나친 감상이 아닐 수 없다.
4.2. 왕실 인물
4.2.1. 세자
- 문효세자
왕과 덕임의 첫째이자 아들. 보통 부모와 떨어져 유모에게서 자라는 왕실 법도와 달리, 정조는 생모인 덕임에게 아들을 직접 키우게 하면서 세자는 정조도, 덕임도 잘 따른다. 특히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실 어른들에겐 의젓한 태도를 보이지만, 오직 생모인 덕임에게만큼은 "어무마"(어마마마)" 라며 편하게 응석을 부린다. 태어났을 때부터 왕실에서 축복받으며 귀하게 자랐지만 눈치껏 윗전들에게 애교를 곧잘 떨면서도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오직 생모인 덕임에게만 편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양.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라는 덕임의 말에 울상을 짓기도 한다.[28] 왕이 세자에게 뱃속의 아이(셋째)가 남동생일 것이라 하자 어머니(덕임)는 여자아이를 좋아하니 남동생이 아닌 여동생을 바란다고 말하는 등 덕임을 굉장히 생각하고 잘 따른다. 덕임의 말로는 잔머리 굴리는 건 덕임을 닮았고, 교활한 건 정조를 닮았다고 한다. 홍역으로 투병 중일 때, 정조가 못 만나게 하려했지만 결국엔 세자의 부탁대로 마지막에 덕임을 만나지만, 결국 역사대로 일찍 병사한다.
- 순조
왕이 덕임 사후 가순궁에게서 얻은 아들. 문효세자와 달리 성실하지만 야무진 맛은 없다고 한다.
4.2.2. 군주
- 청연군주
일궁자가. 왕의 친여동생. 덕임에게 《곽장양문록》 필사를 의뢰한다. 왕과 달리 넉살이 좋고 장난을 잘 친다. 남편은 너무 목석같고 시부모는 며느리라도 왕손이니 눈치보인다고 비꼬고 아이들은 갓난아기라 힘들고 아녀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냐며 우울해하지만 덕임이 왕에게 청연의 편을 들자 덕분에 도움 많이 받았다며 덕임에게 고마워한다.
덕임이 승은을 입었다는 소식에, 생전의 영빈 이씨가 정조의 아침밥을 챙겨줬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덕임에게 정조를 부탁한다고 말한다.
- 청선군주
이궁자가. 왕의 친여동생. 기생집을 들락거리는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지만 덕임이 첫 회임했을 때쯤 아들을 낳았다. 왕과 비슷하게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
4.2.3. 선왕
- 영조
초반부 궐에서 길을 잃은 덕임과 의열궁 영빈 이씨 빈소에서 만나는 것으로 등장한다. 아직 생각시인 덕임을 무릎에 앉혀 놓고 일찍 시집 가 죽은 딸(화평옹주)을 닮았다며 친딸인 양 귀여워해주고 글씨를 잘 쓰는 궁녀가 되고 싶다는 덕임에게 영빈이 지은 책인 "여범"을 덕임에게 하사한다.[29] 영조는 당시에 덕임을 붙잡고 오히려 왕이기에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며 수십 년이나 같이 산 부인(의열궁)의 장례식에 마음대로 참석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러한 만남 덕분에 덕임은 이렇게 한낱 생각시인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인자한 할아버지같은 모습과 죽은 부인과 딸을 그리워하는 남편, 아버지로서의 영조를 더 기억한다. 그러나 다른 캐릭터의 시선이나 작중 직접 서술로는 영조의 실제 괴팍하고 편집증적인 면도 많이 묘사되고 있다. 일례로 덕임의 친구인 복연은 평균보다 살집이 좀 붙은 체형이었는데 영조는 유달리 마른 체형을 선호했기 때문에[30] 당시 대전 궁인 중 뚱뚱한 편이었던 복연을 보면 공연히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내서 복연은 선왕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떤다고 나온다.
4.2.4. 내명부 윗전
- 정순왕후
기존의 창작물에서 흔히 그려지던 이미지와 다소 다르다. 위엄 있는 여장부로 묘사된다[31] 속을 알 수 없고 야심도 있지만 정조와 사이가 좋은 편이다. 덕임의 조력자 포지션이기도 하다. 다만, 덕임과의 관계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고 단순한 고부 관계는 아니라는 암시가 짙다.
- 효강혜빈[32] 홍씨
자궁. 기억력이 비상하고 정이 많으면서도 철새같은 편이라고 묘사된다.
경수궁과 그녀의 본방나인들로 인해 위기에 처할 당시 덕임이 증인으로 지목한 서 상궁이 너무 옛 일(의열궁이 사망하던 해)이라 기억을 못해 곤경에 처해 있을때 효강혜빈이 덕임의 진술을 듣고 예전 선왕에게 덕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증언하여 덕임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숙창궁이 입궐했을 때는 같은 가문의 출신이라고 잘해줬다가, 후에 경수궁이 입궐하여 임신하였을 때는 숙창궁과 덕로 남매를 욕하는 모습을 보였다. 덕임이 승은을 입고 경수궁이 해산하지 못한 채 회임이 길어지자 무언가 잘못되었다 눈치채고 재빠르게 문효세자를 출산한 덕임을 잘해주게 된다. 그녀가 "덕임이 네게 기대를 걸 생각이니 왕자만 낳아다오" 라고 말하며 살뜰하게 덕임을 챙겨주지만, 오히려 덕임은 철새같은 그녀가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었는데, 덕임이 둘째로 낳은 옹주를 두 달 만에 잃고 실의에 잠기자 원래 아기는 약해서 잃기 쉬우니 또 가지면 된다고, 슬퍼하는 왕을 잘 모시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33][34]
문효세자가 죽고 셋째를 임신한 덕임이 만삭일 때 원인 모를 병으로 몸져 누워 사경을 헤매고 급기야 하혈까지 하자 초조해하며 달은 얼추 찼으니 용종이라도 보존해야 하지 않겠냐며 해산 유도를 하자는 냉정한 의견[35]을 내지만 정순왕후, 정조 모두 반대하여 현실에 옮기지는 못했다.[36]
- 효의왕후 김씨
맥아리가 없고 의기소침한 성격이나 숙창궁에게 대놓고 야박하게 구는 등 의외의 면모도 있다. 후궁들에게는 기선 제압하려고 세게 나가지만 숙창궁과 달리 경수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딱 한번의 합궁만에 경수궁이 회임까지 하자 기죽은듯이 지내다가, 경수궁의 오해가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면서 체면을 세웠다고 여기고, 반가 출신 후궁보단 차라리 궁녀 출신인 덕임이 낫다고 여긴다. 문효세자가 태어난 이후 담담하게 대처하고, 아들을 낳고 윗전의 총애를 받아도 덕임이 자신에게 공손하게 저자세를 유지하고, 눈치껏 행동하는 덕임을 그런대로 살갑게 대한다.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다고 외양 묘사를 하는데 어린 시절 입궁했을 때 천연두를 앓은 것은 실제 사실이다. 작중에 천연두를 앓았을 때 그 화기가 자궁에까지 미쳐 불임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덕임의 사후 가순궁이 간택되고 회임을 하지만 상상임신이었고, 가순궁은 1남 1녀를 낳는다.
4.2.5. 후궁
- 숙창궁 원빈 홍씨
13세의 어린 나이에 오라비의 뒷배로 무품빈이 되지만, 소심하고 마음이 여리며, 작고 마른 체구에 병약하다.
오라비와 중전 사이에 끼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참기만 하는 등, 답답한 궁궐 생활 속에서 마음고생하다가, 입궁한 지 채 1년이 못 되어 병우로 요절한다.
생전에 중전과 숙창궁에게 안부를 전하러 오는 덕임에게 마음을 주어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 경수궁 화빈 윤씨
숙창궁 사후 간택된 무품빈 후궁.
그렇잖아도 마르고 병약해보이는데다, 답답한 궁궐에서 늘 숨죽이며 조마조마하게 살다가 결국 요절한 숙창궁과 달리 제멋대로인 성격에 통통하며 낮은 목소리에 성숙해보이는 외모의 소유자.
윗전들을 모나지 않게 싹싹하게 굴며, 반대로 기센 제압하려드는 중궁을 대할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궁중 생활에 적응은 빨랐지만,
자신의 곁에 격이 높은 지밀궁녀들을 멀리하고, 본방나인들만 곁에 두고 감싸고만 돌면서, 기존궁녀들과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단 한번의 합궁 만에 회임하자, 중궁에게도 대놓고 오만하게 굴며 기세등등하게 행동하지만, 왜인지 1년이 넘어도 해산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답답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 역시 초조해한다.
그 와중에 예전부터 왕이 덕임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점과 본방나인들의 입방아로 덕임을 궁지에 내몰지만 오히려 역공을 맞게 된다.
게다가 상상임신인 것과 방중술을 썼다는 사실을 들키는 바람에 입지가 좁아지고, 덕임이 세자를 낳은 후로는 조용히 지낸다고 언급된다.
실제 역사기록에도 상상임신과 그녀의 고모부 등 외척들의 처벌 이후 등장하는 바가 없고 한중록에도 언급이 없다.
수빈 박씨가 입궁했을 당시에 화빈 윤씨는 23세였으므로 충분히 회임이 가능한 나이임에도 존재감이 없어졌는데 사실상 왕실에서 배제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작중에선 덕임 사후에 정조가 왕비와 간택후궁들 모두 사대부의 여성이란 이유로 공평하게 합방을 했다고 나온다. 또한 왕실 행사에서도 화빈 윤씨를 가끔 상석에 앉히는 식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견제했다고 한다.
- 가순궁 수빈 박씨
덕임 사후 간택된 무품빈 후궁.
후궁이 되기 전에는 평범한 시골 처녀였으나 덕임 사후에 간택후궁이 되어 입궁한다. 원래 정혼자가 있었으나 후궁이 되었고 얼마 후에 효의왕후가 임신하여 뒷방으로 물러날 신세에 놓였으나, 수빈 박씨에게는 다행히도 효의왕후의 임신은 상상임신임이 밝혀졌고 문효세자 사후 4년만에 수빈 박씨가 마침내 원자를 낳아 입지를 굳혔다.[37] 원자를 낳고 3년 뒤에 옹주를 하나 더 낳았다. 요리 솜씨가 좋아서 종종 정조에게 직접 만든 전복초, 만두국 등의 요리를 올린다고 나온다. 정작 정조는 그 맛있는 요리를 보면서, 오히려 요리 솜씨가 없어서 엉망인 요리를 해다 바친 덕임과 그런 덕임을 위해 맛없는 요리를 꾸역꾸역 다 먹던 자신을 떠올린다. 수빈 박씨를 들이고 자녀들을 새로이 얻었어도 덕임을 잊지는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의무는 다했으니 떳떳하게 눈을 감았다고 언급된다.
- 고서헌 숙의 문씨
선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선왕 사후 쫓겨나며 "반가의 딸로 태어났어야 했다" 라며 악다구니를 쓴다. 덕임은 그녀가 쫓겨나는 걸 확인하고 와야 했고, 얼마 뒤에 모처럼 휴가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고 돌아오는 군관들이 입궁하는 것도 보게 된다.
- 의열궁 이씨[38]
초반에 시신인 상태로 등장하고 그 후에는 간접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영조의 대사로 앞으로 덕임의 생을 암시하는 중요한 복선 역할을 한다.[39] 대전 소속으로 있다가 승은을 입어 효장세자 생전에 첫째 화평옹주를 낳은 역사와 달리 원래 인원왕후 처소의 궁인으로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구애를 거절했고 이에 인원왕후가 효장세자 사후 국본이 없다는 이유로 중매를 서서 영조와 영빈을 맺어주었다고 설정되었다.
4.2.6. 부마
- 광은부위 김기성
청연군주의 남편. 목석 같은 성격이라 청연군주가 대하기 힘들어 한다. 덕임의 충고를 받은 정조가 타이르자 부부관계가 좋아진다.
- 흥은부위 정재화
청선군주의 남편. 기방이 출입이 잦아 청선군주의 속을 썩였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그가 건드린 기생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난봉꾼이었다. 처남이자 엄연한 왕인 정조와 어울릴 땐 정조에게 자기가 데리고 놀았던 기생을 보여주는 짓까지 저질렀다. 소싯적에 뭣모르고 그와 어울렸던 정조도[40]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저때 일을 덕임에게 기껏 데려가 기생이나 소개시켜줬다며 분개했고, 흥은부위 때문에 청선군주의 표정이 자꾸만 나빠져서 신경이 쓰인다고 속상해했다. 그래도 나이가 들고 정신을 차렸는지 이후 사이가 원만해져서 청선군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
4.3. 궁녀들
4.3.1. 덕임의 친구들
아래에 서술된 궁녀들 중 손영희, 배경희, 김복연은 실제로 의빈 성씨와 함께 필사한 책에 이름이 등장하는 동료 궁녀들이다. 다만 캐릭터는 작가의 창작.- 손영희
여리고 순한 성격의 동궁(정조) 세수간 궁녀로 경희와 오촌지간이지만 경희는 유복한 상단의 딸인데 비해 영희는 한낱 가난한 평민 집안이라고 한다. 영조가 사망한 후 언문 소설 등을 태울 때 군주자가 및 친구들과 함께 필사한《곽장양문록》을 발견하고 덕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책들을 지킨다. 결국 홍덕로의 도움으로 책들을 경희네 사가로 빼돌리는데 성공한다. 어릴때부터 같이 자란 궁녀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없어 "쟤 이름이 뭐였더라, 영순이? 영숙이?" 라는 말을 많이 듣고 본인도 알고 있지만 내색하진 않았어도 속상해한듯하다. 후반부엔 덕임이 승은을 입기 전부터 몰래 만나온 별감과 사통하다 유산한 사실을 들켜 고문당한다. 영희 때문에 혹독한 취조를 받아야 했던 경희와 복연은, 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던 덕임에게 영희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려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덕임이 추궁한 끝에, 결국 사실을 알게 됐고 절친한 친구를 잃은 충격에, 덕임은 급기야 혼절하기에 이른다. 혼절한 와중에도 덕임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했고 그런 덕임의 꿈 속에서 ”그래도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다“고 하소연을 한다.
- 배경희
절세미인에 야심찬 빈궁전(효의왕후) 침방 궁녀. 부유한 상단의 딸이며 잘난척을 잘 해서 자기 소속인 침방에서 평판이 최악이지만, 덕임의 친구들 중 가장 의리있고 행동력 있는 능력자. 친구들중 유일하게 정조와 덕임의 관계를 알고있고, 정조에게 선을 지키려는 덕임에게 항상 정조는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거리고 늘 장담한다. 정조와 성격적으로 닮았다는 서술이 자주 등장하는데, 작품 말미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덕임이 소중하게 생각한 절친한 친구였고, 그래서 덕임이 임종 직전에 복연과 함께 경희를 찾았으나, 덕임을 모시던 궁녀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어 멋대로 정조를 대신 불러오는 바람에 결국 덕임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정조 말년엔 다른 노상궁들보다 젊지만 능력이 좋아 제조상궁이 되어, 당시 덕임의 흔적을 찾는 정조에게 《곽장양문록》을 건네주는데 그 과정에서 정조는 경희가 덕임이 임종 당시에 찾던 친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와 함께 덕임을 회상하는 시간을 잠시 갖는다. 비록 경희는 궁녀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나 친하게 지낸 영희, 덕임, 복연이 차례로 숨져 혼자 남았고, 이 때문에 덕임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정조는 경희에게 '너 역시 혼자 남았구나.'라면서 은연 중에 쓸쓸한 심경을 내비친다.
- 김복연
눈치가 없고 몸가짐이 서툴러 실수를 많이 하지만, 먹성 좋고 덩치 큰 체형의 대전(영조) 세답방 궁녀. 정식 나인이 되자마자 영조가 죽자, 어쩔 수 없이 사가로 출궁하여 집안일을 돕다 말년엔 늙은 궁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여생을 보낼 예정이었으나, 덕임이 정조와의 내기로 다시 궐로 돌아와 정조의 세답방 궁녀가 되었다. 훗날 제조상궁이 된 경희의 말에 의하면 정조 말년보다 2년 전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4.3.2. 대전
- 서옥금 상궁
덕임이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한방에서 지내며 훈육하는 스승이자 동궁(정조) 시녀상궁.
항상 정조의 기분을 살피며, 정조의 기분이 안 좋으면 달랠래고 애쓰지만, 덕임이 갑자기 현록대비 댁으로 내쳐지자, 정조에게 서운해하며 한동안 정조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고 못 본 척 한다.
경수궁 화빈이 간택 되자, 덕임에게 경수궁 지밀나인으로 결정되었으니 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덕임은 궁으로 가기 싫다고 말한다. 그녀는 덕임에게 무슨 철없는 소리냐며 덕임을 설득해서 궁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덕임이 절도 혐의를 받을때, 그녀는 덕임을 걱정하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자, 덕임을 위해 없는 기억을 가지고 기억 난다고 증언하지 않고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증언한다.
이후 덕임이 후궁이 되자 어색하게 존대를 한다.
덕임의 친정 엄마에 가까운 포지션. 정조 말년 2년 전에 정조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퇴궁했다.
- 강월혜
동궁(정조) 지밀나인. 덕임의 선배 궁녀이자 고향언니이기도 하다. 후에 정유역변(정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된다. 붙잡혀 고문당할 때 정유역변 당시 덕임과 함께 순찰을 하고 같은 방을 쓴다는 이유로 공범 의심을 살 수 있는 덕임을 무조건적으로 감싸주었다. 실존인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강월혜라는 나인이 반정에 가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작중에서는 반정에 가담한 하급무사인 아버지를 도와준 것으로 묘사했다. 아버지의 혐의가 드러나면서 월혜 본인도 수감됐는데 그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된 모양이다. 후에 정조가 결국 덕임에게 승은을 내린 뒤에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덕임이 월혜를 언급하며 풀어주시든 처벌하시든 해서 사실상 종신형을 사는 현재 처지만은 면하게 해달라 간청했기 때문.[41] 결국 흑산도의 노비가 된다.
4.3.3. 경수궁
- 구 상궁
본래 선왕(영조)을 모시던 궁녀였다가 경수궁의 지밀 상궁이 되었다. 당시 경수궁 처소의 궁녀들 중 자신과 덕임 외에는 제대로 된 녀석들이 없다며 불평을 한다. 실제로 구 상궁과 덕임을 제외한 궁녀들은 화빈이 친정에서 데려온 본방나인들 아니면 신입들이 너무 어리다보니, 경수궁 기강이 해이한 상태였기 때문에 덕임에게 대놓고 "우리만 죽어나게 생겼다" 라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대비의 특별한 청으로 은언군 사저로 쫓겨났던 덕임이 뒤늦게 경수궁에 합류하기 전까지 구 상궁 혼자서 경수궁을 보필하느라 고생했다고. 경수궁이 자신과 덕임을 멀리 하고 본방나인들을 감싸는 것이 늘 불만인데, 거기다 본방나인들이 경수궁을 각종 소문들을 알려주며 부추기고, 사가의 약들을 마시는데다, 경수궁이 자꾸 덕임을 괴롭히는데도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덕임에게 답답해하기도 한다. 후에 덕임이 궁지에 몰릴 때 옆에서 거들어주고 경수궁의 위태가 밝혀진 후, 총대를 매고 방중술을 쓴 사실을 모두 고해 바친다. 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입어 경수궁을 떠난 뒤에도 경수궁을 보필했으나 경수궁이 또 위태를 꾸미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출궁하게 되었다[42]. 그나마 선왕을 모신 공로를 인정받아 똑같이 출궁당한 미육과 달리 매를 맞지는 않았다고.
- 미육
경수궁의 친정에서 데려온 본방나인. 경수궁을 계속 아씨라고 부르며 경수궁 곁에서 촐싹거리며 지밀궁녀들을 부려먹는다. 자기 할아버지가 본래 양반이었는데 죄를 지어 노비가 된 후 노비라는 이유로 무시당한 일에 억울해하다가, 경수궁이 잘 되면 남들에게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수궁의 친정어머니가 네가 함께 입궁해 경수궁을 보필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다들 입궁하면 힘들다고 만류하는데도 같이 입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피해망상에 갇혀 경수궁을 부추기며 경수궁과 같이 덕임을 괴롭힌다. 급기야 친오빠와 잠깐 만나는 덕임을 보고 덕임이 사통죄를 저질렀다고 모함했으나 역으로 덕임에게 당해 경수궁의 방중술이 들통나는 바람에 경수궁 대신 곤장을 맞는다. 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입은 후에도 경수궁을 곁에서 보필했으나, 경수궁이 또 위태를 꾸미다 들통이 나서 또 곤장 맞고 이번에는 아예 출궁을 당해 경수궁의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4.4. 덕임의 가족
- 성윤우
덕임의 아버지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한직을 떠돌다 익위사로 배정된 후 가선대부까지 제수받고 마지막 관직이 첨철제사(종3품 무관직)이었다.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이자 별칭)의 측근으로 경모궁이 승하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고 한다. 덕임이 입궁한 임오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떡밥스럽게도 덕임은 부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한다.[43] 2022년에 출간된 개정판에서는 무관보다는 혜경궁 홍씨 집안의 청지기로 그려진다. 초반에 덕임을 낳은 전부인이 해산하다 숨지고 가세가 기울자 덕임을 혜경궁의 주선으로 궁녀로 입궁시키면서 덕임에게 미안해한다.
- 임씨
덕임의 어머니. 난산으로 해산방에서 죽었다. 그래서 덕임이 출산에 대해 더 더욱 두려워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듯하다. 덕임에게 "궁녀만은 되지 말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되 가늘고 길게 살라" 라고 유언을 남기지만, 결국 덕임은 궁녀가 되고 승은을 입어 당시 기준으로는 늦은 나이에 출산한다.[44]
- 성완
덕임의 첫째 오라비로 설정상 가상인물.[45] 수줍음을 많이 탄다.
- 성식
덕임의 둘째 오라비로 정확한 실존인물이라 그런지 가족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 간신히 과거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지만 덕임이 승은을 입으면서, 외척을 경계한 정조에 의해 무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과거에 급제해 무관이 되었을 때 궐에서 덕임과 자주 만났는데 남매인데도 불구하고 외모가 닮지 않았는지 이를 본 왕은 질투를 하고 경수궁의 본방나인들은 덕임이 외간남자와 만난다고 생각하여 모함을 꾸미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로 덕임이 승은을 입자 " 그래서 좋은 일이냐, 전하께서 잘 해주시냐" 라고 물어보며, 덕임에게 진지하게 전하가 총애해 주시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덕임은 이에 오라버니를 참 잘 두었다고 생각한다.[46][47]
- 성흡
덕임의 동생으로, 실제 의빈 성씨의 막냇동생에서 캐릭터를 따 온 인물. 조실부모하고 남자형제를 건사하기 위해 궁녀가 된 덕임은 유일한 동생에게도 각별히 신경을 썼기에 흡의 혼사가 결정되자 매우 기뻐서 그간 그리 절약하며 모아둔 급여의 상당한 부분을 흡의 혼례식에 아낌없이 썼다고 묘사된다. 이에 결국 흡이 누님이 미치신 거 아니냐며 덕임을 말릴 정도. 물론 덕임의 처지가 맘대로 출궁하기가 어렵다보니 저렇게 돈을 쓰고도 정작 흡의 혼례식에 직접 가진 못했다. 상사인 서옥금 상궁에게 덕임이 애원하긴 했으나 궁녀 역시 출가외인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 참고로 덕임과 흡은 어머니를 닮아 체구가 조막만하고,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다고 언급되지만 어찌어찌 무과에는 급제하여 금위영에서 근무한다. 마지막 장에서 덕임 사후 14년이 흘러 나이가 든 정조가 금위영을 살피러 갔을 때 덕임과 많이 닮은 흡의 얼굴을 보고 덕임을 떠올린다.
- 요절한 두 언니
덕임이 태어나기 전 사망한 언니들로 둘 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 출산을 하다 사망했다.[48]
4.5. 은언군 주변
- 현록대부
왕의 서제이자 이복동생. 욱하는 성격의 정조와 달리 의열궁을 닮아서 난초처럼 가녀린 외모의 소유자. 어릴때는 정조와 달리 자기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고, 객기도 꽤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정치적 상황 때문인지 손님 오는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나약하다고 한다.
- 상계군 이담
은언군의 장남. 또래 친구도 없이 혼자 지내다가 궁녀로 왔던 덕임을 잘 따랐는데, 덕임이 궁으로 돌아가게 되자, 덕임을 붙잡고 가지말라고 울고불고 난리칠 정도였다.
원치않게 원빈의 양자가 되자 부담스러워하며 홍덕로도 마주치기 싫어한다. 덕임이 후궁이 되었을때도 여전히 덕임을 그리워하지만, 원빈의 양자가 되었단 이유로 미움을 사 입궁할 수가 없어서 덕임과 만나지 못했다. 덕임이 문효세자를 낳은 후 군호를 완풍군에서 상계군으로 바꾸었으며, 덕임의 사후에 돌연사했다고 나온다. 상계군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역모에 휘말리기 싫었던 은언군이 아들을 독살시킨 거 아니냐는 의혹이 무성했으나 넘어간 듯하다.
- 연애
은언군의 궁비로 과거엔 의열궁을 모신 궁인이였다. 현록대부의 궁녀로 쫓겨난 덕임에게 살갑게 대하며 잘해준다.
그녀는 덕임에게 이상하게 덕임을 보면 자꾸 의열궁이 생각난다며 선왕 시절의 경모궁과 의열궁의 생전 얘기를 말해준다.
새해에 원자를 낳고 후궁이 된 덕임에게 절을 올리며, 상계군의 안부를 전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조실록》에 등장하는 실존인물. 정순왕후의 하교 때문에 은언군이 독살 의혹을 받았을 때 고초를 겪다 사망했다고 한다.
4.6. 기타 인물[49]
- 덕로 홍국영
서브 남주인 듯 아닌 듯하다. 겉은 밝고 장난스럽지만 속은 위험한 남자. 덕임과 주거니받거니 잘 놀다가도 그녀의 위선에 대해 일침을 날리기도 한다. 키는 좀 작지만 얼굴이 예쁘장하게 잘 생겨서 인기가 많다. 덕임 때문에 왕의 질투를 사기도 한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덕임은 크게 슬퍼했다.
실제 홍국영 관련 야사와 《한중록》 기록 등을 많이 참고하여 캐릭터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5.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
- 기축별감사건 (1769년)
- 정유역변 (1777년)
6. 탐구
시간선이 대단히 촘촘하고 세세하게 짜였다. 특히 덕임이 승은을 입은 3부 파트부터는 전개를 위한 사이사이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역사를 거의 옮겨다 놨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동일한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타 작품들과 달리 의빈 성씨가 궁녀로 나오고 본명인 덕임으로 등장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였다. 다만 작가는 2015년에 집필을 완료했는데, 2017년 출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 번역되어 공개된 사료를 접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겨 아쉽다고 밝히고 있다.
2010년대 초중반까진 《일성록》 등의 번역 및 전산화 공개가 상대적으로 미진했으며, 《이재난고》나 《어제의빈묘지명》 등 의빈 성씨에 대한 각종 사료가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았던 점을 고려해보면[51] 작가가 상당히 공들여 조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집필 완료 후에 새로 국역된 사료를 메인 스토리에 반영시키지 못했음을 추가하여 설명하는 작가 후기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6.1. 깨알 같은 역사적 디테일
인물들의 대사, 그냥 지나가는 서술 한 줄마다 소소한 역사적 디테일이 돋보인다. 특히 《일성록》 을 거의 옮겨놓다시피 했다 싶은 부분이 많다.- 덕임의 친구로 등장하는 영희, 경희, 복연은 의빈 성씨와 《곽장양문록》 필사를 함께한 실존 인물이다.
- 실제 정조는 "아낄수록 더 엄하게 대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작품 전반에 녹아있다.
- 실제 정조는 8세~9세가 되면서부터 내시들과 대화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했을 때에도 곁에 있던 이들은 대신과 각신·승지·사관들일 뿐 내시나 궁녀들은 한 사람도 가까이에 없었다고 한다.[52]
- 왕이 여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동궁에서의 시강 장면은 홍대용의 《계방일기》 기록을 각색한 것이다.
- 덕임과 정조의 첫 만남 계기가 되는 동궁전 익명서 투서 사건은 1775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53]
- 내시가 뭘 떨어뜨리면 왕이 "다친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일득록》을 참고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 정조가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대학연의보》를 꼽는데 이는 《홍재전서》에서도 언급이 된다.
- 정조가 직접 덕임의 빈호를 지은 것은 《일성록》에 기록된 실제 사실을 각색한 것이다.
- 정조가 덕임의 오라비 성식을 불러 외척을 경계한다며 훈계하는 장면은 《일성록》의 기록을 각색한 것이다.
- 덕임이 임신했을 때 혜경궁이 "본방나인 복례와 나의 유모를 시켜 돌봐주겠다"고 하는데, 이들은 《한중록》에 언급된 실존인물들이다.[54]
- 덕임이 머루술을 올릴 때 입을 속이는 법을 말하는데, 이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참고해 쓴 장면으로 보인다.
- 정조가 덕임에게 파초 그림을 그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정조가 그린 파초도가 전해진다.
- 정조가 허난설헌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관련되어 홍대용의 일화도 스쳐 지나간다.
- 작중 중요 소재로 등장하는 《여범》은 묘사된 대로 실제 영빈 이씨가 쓴 책이다.
- 문효세자와 계마수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 보초가 졸아 밤중에 궁궐에 불이 났는데 문효세자가 크게 울어 화재를 알렸다는 일화는 박지원의 《문효세자진향문》에 나온다.
- 후반부에 정조가 세자(순조)에게 자신이 같이 못 가게 되면 혼자서라도 문효세자의 묘에 다녀오라고 한다. 순조 7년, 효창묘와 의빈묘에 순조가 친히 작헌례를 행한 기록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 문효세자가 중국 황제로부터 선물 받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등장한다.
6.2. 역사와 다른 부분
앞서 언급된 것처럼 작가가 집필을 완료한 이후 새로 국역된 사료는 메인 스토리에 반영되지 못하고 대신 후기에 추가 설명되었다. 비교적 사실성이 높은 책이지만 일단 로맨스 장르소설이고, 전개상 타협이 불가피한 픽션이므로 스스로 판단할 것을 권한다.- 가족관계 및 전반적인 생애의 비교는 상세하게 정리된 의빈 성씨와 정조 등 인물별 항목 참조.
-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는 1773년 봄이었지만, 작중에서는 1775년 필사한 것으로 나온다.[55]
- 청선공주의 남편은 흥은부위이지만, 작중에서는 홍은부위로 나온다.[56]
- 작중에서는 정조의 침소인 영춘헌과 수빈 박씨가 사용했던 집복헌이 붙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정조가 살아있을 당시 영춘헌은 집복헌의 동남쪽에 있었으며 별개의 영역이었고. 정조는 침전 건물인 영춘헌에 거처하며 영춘헌을 서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정조 사후 순조 대인 1830년(순조 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할때 영춘헌과 집복헌이 이어져 연결하여 건립되었다.# # 다만 작중 문장은 건축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묘사라기보다는 단순히 영춘헌과 집복헌은 가까이 있었다는 표현으로 보여서 고증오류라고 단정 짓기는 애매하다. 당시 동궐도 링크참조
- 왕녀(공주, 옹주)와 왕세자녀(군주, 현주)의 호칭인 자가의 표기를 慈駕라 하였으나 이는 옛 연구에서 비롯된 오류로 왕실 존칭 자가의 표기는 自家이다. 자세한 고증 및 문헌 근거는 자가 항목 참고.[57]
- 왕세자의 서자인 은언군(현록대부)을 대감이라 칭했는데, 이는 왕세자子의 신분을 낮추어부르는 불경한 행위이므로 틀린 고증이다. 왕세자의 아들은 원손을 제외하고 모두 자가(自家)라 불러야 옳다. 자세한 근거와 문헌은 자가 항목 참고.[58]
6.3. 기타 탐구
- 작중에서 후궁인 화빈 윤씨와 의빈 성씨의 생일상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 정조의 여러 후궁들의 생일상 잔치에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없다는데 작중 묘사된 것처럼 정조는 스스로 성리학적 미덕을 앞세워 웃전의 생신은 성대하게 챙긴 반면 자신의 생일상 받기를 꺼렸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실제 성향에 착안한 창작이라 납득되는 면이 있다.
- 문효세자의 죽음 뒤 의빈 성씨가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는 양전과 효의왕후의 왕세자 상례 복색 및 절차는 정사에서 전하는 반면 의빈성씨는 기록되지 않은 것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59]
- 작중의 터진 만두소에 관련 에피소드와는 달리, 실제 의빈 성씨는 음식을 잘 만들었다고 《어제의빈묘지명》에 정조가 기록하였다. 다만 작중에서도 덕임이 음식 솜씨가 꽤 좋다는 묘사는 여러 번 되어 있다. 만두소 에피소드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현숙한 여성인 수빈 박씨에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매력의 덕임을 애틋하게 환기시키는 소재에 가깝다.
7. 미디어 믹스
7.1. 드라마
자세한 내용은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 문서 참고하십시오.2021년 11월 12일부터 2022년 1월 1일까지 방영한 MBC 금토 드라마로, 이준호, 이세영이 주연이다.
7.2. 웹툰
자세한 내용은 옷소매 붉은 끝동(웹툰) 문서 참고하십시오.2021년 10월 1일 카카오페이지 웹툰 연재가 확정되었다.
7.3. 오디오북
윌라에서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졌다. #성우진은 김봄, 송하림, 장민혁, 김인형, 박하진, 김채린, 황원종.
8. 기타
- 작가가 17살 때부터 8년 동안 조사하여 쓴 소설이라고 한다. 실제로 읽다 보면 소설 첫머리 부분과 끝 부분의 인상이 상당히 달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문장 구성력이나 호흡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필력 향상이 뒤로 갈수록 느껴진다.
- 작중에 나오는 왕이 정조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고 후궁들도 잘 알려진 빈호 대신 궁호로 나오며 홍국영은 이름 대신 덕로라는 자로 나온다. 그러나 작중 내용으로 누군지 알 수 있다. 작가는 워낙 유명하고 이런저런 해석이 많은 시대라 일부러 낯설게 접하게끔 유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 카카오페이지에서 외전이 독점 연재 됐다.
- 2022년 6월, 설정이 바뀌었지만 기존 줄거리는 그대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다만 개정판이 조금 더 읽기 쉽고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꼰대 기질과 덕임에게만 이기적으로 희생을 강요했던 왕이 개정판에서는 덜해지게 나오고, 덕임의 시선 중심이던 구판보다 왕의 입장도 풀이된다. 또한 기존 소설 속에 반영하지 못했던 실제 역사, 그리고 외전들이 수록되었다.
[1] ebook은 5권으로 출판되었다.[2] 사실 로맨스를 다룬 역사소설에 더 가깝다.[3] 2007년에 (한국 나이로) 17살이었다고 하니 1991년 출생인 것으로 보인다. 경영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첫 작품이라고 하니 27살의 젊은 나이에 데뷔한 셈이다.[4] 역사에서는 문효세자를 낳기 전, 유산을 2번 했지만 소설에서는 2번 유산했다는 소문이 났다고 언급된다[5] 부담감 때문에 원자를 가졌을 때에도 대놓고 태아가 아들이기를 바란 왕과는 달리 딸이기를 원했다.[6] 기본적으로 후궁 소생 왕자녀들은 생모보다 신분이 높았다. 본문에서도 왕의 자손은 있어도 후궁의 자손은 없다는 표현이 나오며, 심지어 예전에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가 공식 석상에서 자기 소생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 난리가 났다는 비화가 소개되기도 했다.[7] 중전은 남의 자식이 죽었는데도 자기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강요당해야 했고, 정작 생모인 덕임은 후궁이라는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고,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척 하는) 윗전들을 달래야 했다[8] 사실 덕임도 아들의 죽음에 진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닌 그저 미련이 남아서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9] 덕임이 원래 건강한 체질이긴 했으나 겨우 5년 동안 무려 2번의 출산을 하고, 당시 3번째 출산을 앞둔 데다가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요절하고 마음껏 슬퍼할 수마저 없으면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셋째를 가졌을 때에도 전에 없이 몸이 무겁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10] 덕임과 셋째 아이의 죽음 그 자체에도 슬퍼했고, 덕임이 자신을 한 남자로 사랑해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다만 결국은 덕임 또한 왕을 사랑했음을 그동안의 암시와 마지막 대화로 짐작할 수 있다.[11] 실제로 같은 소재(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를 다룬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조가 그림 솜씨가 뛰어난 송연(의빈 성씨)에게 "여자라서 안 되고, 신분이 낮아서 안 되는 낡은 관습은 내가 바꿔줄 것이니 화원의 꿈을 펼치라"는 말을 한다. 이는 신분 의식이 확고했던 정조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각색이다.[12] 출간은 2017년 4월[13] ebook에는 작가 후기가 실려있지 않다.[14] 의빈 성씨의 실제 본명으로 알려져 있다.[15] 언니들은 모두 요절했다.[16] 사실상 경희라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작가가 덕임의 캐릭터성을 규정하는 문구이다.[17] 궁녀들은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여 입어 홍수(紅袖)라고 불렸다.[18] 작중에서 직접적으로 정조라고 언급되지는 않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정조라는 시호는 왕이 붕어하고 나서 붙여지는 것인데다 심지어 초기 시호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정조가 아니라 '정종'이기도 했다.[19] 사실 정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정조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스타일의 개혁군주라고 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성리학과 유교의 전통 가치를 수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현대 기준에서는 꼰대 군주에 더 가깝다. 다만 임란 및 호란으로 감소했던 인구수가 재위 기간 동안 점차 회복되고, 이와 맞물려 이모작을 통해 구황작물 재배, 상공업 등이 발흥해 호황기에 접어들던 당시 조선의 경제 상황이나, 서구와의 접촉 등 격변하던 시대 변화 때문에 개혁의 이미지가 후대에 덧씌워진 면이 강하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국사 과목에서 흔히 가르치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군주라기보다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에 재위했던 군주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편이다.[20] 다만 마지막 장의 의빈 성씨 캐릭터 묘사를 보면 영혼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아니면 굳이 서술상 통곡하는 신료들의 소리를 집어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21] 정조나 황윤석의 주관적인 사료들보다 객관적으로 서술된 정사에 존재하는 기록들이다.[22] 수빈 박씨의 친정은 정조로부터 대접을 잘 받았고, 이후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서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지목 당할 정도의 권세가로 성장한다.[23] "자궁께서 이미 홍인한에게 은혜를 끊었으니 자전께서도 또한 어찌 김귀주에게 은혜를 끊지 않았겠는가?" # -[24] 이산 방영 당시 모 커뮤니티에서 제기된 의견이기도 하다. 이산 방영 당시 메인커플의 러브라인 전개에 대해 혹평이 많았고, 반대급부로 화빈 윤씨와 수빈 박씨에 대한 해석도 많이 나왔었다.[25] 본작은 이 발언에 근거한 해석을 내세우는 편.[26] 그러나 이건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화빈은 일개 궁녀 출신이었던 의빈과 달리 당시 영의정과 인척 관계에 있던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여러 자료들로 볼 때 화빈은 정조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음이 분명한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배경을 본다면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임신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나 그녀의 집안 배경을 생각해서라도 산실청을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그 배경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해주는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명선과의 언쟁 이후 문효세자의 원자 책봉을 윤허한 것에 있다. 화빈과 인척 관계에 있던 영의정이 바로 서명선이었기 때문. 사실상 문효세자의 원자 책봉을 가장 반대할 만한 진영은 누가 봐도 화빈과 그 주변인들이다. 애초에 원자 생산을 위해 간택되어 들어온 것이므로. 따라서 누가 봐도 무리수인 임신 30개월을 눈감아 주는 것으로 일부러 화빈 측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오게끔 유도하여 문효세자의 원자 책봉에 대한 반대의 싹을 잘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게 정조에게만 득이 된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서명선은 정조의 총애를 받는 의빈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기반을 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패를 두 개 가지게 된 셈.[27] 수빈의 경우, 정조에게 후계가 한 명도 없는 상태였고 정조 본인부터 30대에 이르러 노화가 많이 진행되었던 것을 체감했으므로 원자가 매우 절실한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원자 책봉은 문효세자보다 먼저 되었을지 몰라도 문효세자가 3살에 세자 책봉을 받은 것과 달리 순조는 11살에 세자 책봉을 받았다.[28] 작중에도 언급되지만 기본적으로 왕의 자식은 후궁이 낳았어도 중전의 양자가 되는데, 특히나 세자는 후궁의 친자식이라도 중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계승권을 가지게 된다. 후궁에게 모후 대접을 해주면 훗날 정실부인인 중전의 입지가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 즉, 후궁은 생모일 뿐 법적인 어머니는 왕의 본처인 중전이다.[29] 여담이지만 영조의 자상함을 상징한 이 책은 나중에 덕임을 도리어 곤경에 처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30] 사도세자가 비만에 가까웠는데 영조는 이걸로도 사도세자 생전에 사도세자를 비난했다는 역사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31] 오히려 이 편이 정사의 기록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32] 효강은 정조가 내린 존호. 혜빈은 정조 즉위 전 쓰이던 칭호. 작중에서는 즉위 후에도 혜경궁이 아닌 '효강혜빈 저하'로 불린다. 정조 대의 유명한 인물이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의도한 것으로 짐작된다.[33] 이 장면은 혜경궁의 실제 일화를 반영해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혜경궁 지문》에 따르면 혜경궁의 첫 아들, 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죽자 삼전(인원왕후, 영조, 정성왕후)이 매우 슬퍼하였고 혜경궁은 윗전들이 더욱 슬퍼할까 염려하여 윗전들을 뵐 때 슬픔을 감추고 얼굴빛과 말씀을 평상시처럼 했다고 한다.[34] 작중과 달리 《일성록》에 의하면 혜경궁은 손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35] 덕임은 첫째를 가졌을 때부터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왕실에선 나 같은 후궁은 얼마든 죽어도 상관 없을 거라고 다소 자조적인 얘기를 친구들에게 했는데 실제로 그 얘기가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36] 정순왕후는 "어미를 죽이며 자식을 얻는 건 천륜에 반한다. 그렇게 얻은 자식이 떳떳할 수 없다" 라고 반대했다. 곧이어 정조도 "지금 이 상태로는 산고를 견뎌내지 못할 것" 라고 편을 들었다. 설령 혜경궁의 뜻대로 유도 분만을 했더라도 작중 묘사된 정황을 감안하면 아이가 사산됐을 가능성이 크다. 덕임이 하혈할 때 태동이 있었는데 여느 때와 같은 태동이 아니라 아이가 괴로워서 몸부림치는 듯한 태동이었다고 했기 때문. 작중 급격히 악화된 덕임의 상태를 감안하면 정조의 소견대로 사산하기 전에 덕임은 산고로 숨졌을 가능성도 크다.[37] 참고로 문효세자의 사망 이후 순조가 태어날 때까지 4년의 공백기가 있었는데 이때 정조는 덕임처럼 자의로 다른 궁인을 취한 바 없다고 묘사된다.[38] 후에 선희궁으로 궁호를 새로 올리지만 작중 시점에서는 의열궁이 맞다.[39] 후에 정조의 회상으로 한 번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는 한다.[40] 청선군주도 저때 일을 두고 두고 담아뒀는지 덕임에게 오라버니도 기방에 다녔었다고 해서 덕임을 놀라게 했다.[41] 역변에 가담한 것과는 별개로, 월혜의 아버지도 덕임에게는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런 부탁을 했던 것. 작중 묘사에 따르면 그는 덕임을 볼 때마다 간식을 잔뜩 쥐어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42] 상전이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고 기어이 몰래 사고를 치더니 뒷수습을 책임 지고 출궁하게 되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43] 작가는 《승정원일기》를 조사해 유원 첨절제사를 지낸 무관 성윤우를 덕임의 부친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승정원일기》의 무관 성윤우와 《이재난고》의 청지기 성윤우는 동일인물이다. 《창녕성씨상곡공파보》, 《어제의빈묘지명》, 《무보》를 토대로 성윤우의 부친은 성수산, 조부는 성근립, 증조부는 성경. 아들은 성담, 성완, 성흡이라는 부분이 일치한다.[44] 실제 임씨는 35세에 출산 중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 덕임도 그와 비슷하게 34세에 임신중독증이 유력한 사인으로 추정되는 사망을 했다. 뿐만 아니라 임씨의 설명에 따르면 덕임과 터울이 한참 나서 덕임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집을 갔던 덕임의 두 언니조차 출산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임신과 출산이 특히 힘겨운 체질이 유전되었을 수도 있지만 터울도 별로 안 두고 잦은 출산을 해야 했던 그 시기 여성들의 열악한 삶을 감안하면 흔한 일일 수도 있다. 덕임은 요즘 기준으로도 다소 늦은 임신을 했는데 심지어 후궁으로 있던 기간의 대부분을 임신한 채 지내야 했다. 그러니 평소에 건강했어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45] 실제 의빈 성씨의 둘째 오빠이다. 성식에서 성완으로 개명했고 1743년에 태어나 1806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46] 당대의 이기적인 여느 남자라면 누이가 왕의 총애를 입었으면 자신도 그 덕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좋아했을 것이다. 실제로 정조 초기 세력가였던 홍국영조차 터울이 많이 나는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식은 도리어 왕이 한때의 충동적인 쾌락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농락한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것. 여동생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47] 실제 성식과 성완은 동일인물이다. 성식이 성완으로 개명했다.[48] 의빈 성씨의 큰 언니는 승평 강씨의 덕순, 둘째 언니는 파평 윤씨의 귀영과 결혼했다. 다만 둘 다 배우자의 본부인이 아닌 첩실로 들어갔다.[49] 전원 실존인물. 작품 내내 본명 대신 자(字)로 등장하거나, 정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안 나온다.[50] 어진화사 장면의 대사로 추정.[51] 2016년 이전에는 잘못된 정보가 넘쳤고 위키피디아 등의 의빈 성씨 항목도 불모지에 가까웠다.[52] # #[53] 홍인한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시각이 있다.[54] 혜경궁 홍씨의 친정 어머니가 혜경궁이 출산할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었다는 대사도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55] 1773년의 영조어용화사와 곽장양문록 필사를 1775년의 익명서 투척 사건과 계방일기 성학집요편으로 연결시켜 동궁과의 시작되는 인연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시간선을 조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책 말미의 곽장양문록 챕터에서는 영조49년(1773년)이라고 명시했다.[56] 이상하게도 각종 서적에서 보이는 부분. 심지어 일성록과 실록에서도 이와 같은 표기가 보인다.[57] 한국 사극로맨스 작가들이 바이블처럼 참고하는 김용숙 박사의 '조선조궁중풍속연구'에 적힌 오류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당 서적은 약 50년된 연구들의 모음으로 지금은 오류로 밝혀진 부분도 더러있으니 직접 문헌검색 등을 통해 검증해보는 것이 좋다.[58] 위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연구의 오류를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59] 명분론이 극에 달한 조선후기에 적법한 적모가 있는 상황에서 입장이 붕 뜬 첩실의 처지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작품의 주제의식과도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