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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9 20:19:49

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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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1. 개요

제후국 군주의 딸을 가리키는 칭호다.

2. 역사

조선에서는 적녀(嫡女), 즉 왕비가 낳은 딸에게 중국처럼 공주라는 봉작을 주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옹주를 임금후궁이 낳은 인 서녀(庶女)에게 주는 봉작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경칭은 성인식을 치르기 이전이면 아기시(아기씨), 성인식을 치른 이후이면 자가라고 칭했다고 알려져있었으나, 태어난지 돌이 되지 않아 옹주 봉작을 받지 않은 왕의 서녀를 '옹주 자가'라고 칭한 기록이 남아있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1]

고려 시대에는 임금의 후궁과 왕녀에게 주는 봉작이기도 했다. 고려 후기 충선왕공주와 후궁의 칭호인 궁주(宮主)를 옹주로 고치며 처음으로 등장했다.

본래 고려 시대 왕녀는 전주나 궁주(宮主)라는 봉작을 썼다. 왕녀에 한해서 궁주는 공주와 동일한 말로 여겨지도 했다. 고려 왕실은 후비와 왕녀가 칭호를 공유해서 궁주는 최소 양민 출신인 후궁들이 쓰기도 했다. 그러나 원 간섭기부터 몽골인 왕비(원나라 공주)[2]가 '공주'의 칭호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공주 = 궁주'라고 여기던 고려의 왕실 칭호에서 원나라 출신이 아닌 이상 공주나 궁주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공주 칭호는 원나라의 공주, 원나라 출신 후궁들과 그들의 딸들이 쓰게 되었다. 후비와 왕녀가 칭호를 공유하는 고려 왕실의 전통에 비추어, 어머니를 따라 왕녀는 궁주 칭호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이들은 충렬왕 때 궁주보다 한단계 낮은 원주(원비) 칭호를 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선왕 때에는 궁주를 대체하고자 궁주를 옹주로 고쳤다. 고려 시대에 이런 봉작은 최소한 양인 출신만이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충선왕 때부터 옹주 칭호는 궁주보다 낮은 원비(원주)보다 낮게 쓰여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다. 충선왕에게 의붓딸이 되는 순비 허씨의 딸들과 충선왕의 친딸 수춘옹주(壽春翁主)는 모두 옹주로 책봉되었다. 이들은 궁주가 족내혼을 하던 왕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충선왕 때 이르러 왕녀와 종실 간의 혼인을 금지했으므로, 옹주가 궁주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춘옹주의 출신에 주목해야 한다.

수춘옹주는 고려사 열전의 공주에서 누락되어있다. 왕자를 낳지 못해서 봉작을 못 받은 천민이나 궁인 소생의 왕자녀들은, 아예 고려사의 왕자나 공주 항목에서 기록이 누락되는 것이 빈번하다. 또한 수춘옹주의 어머니는 이복 형제 덕흥군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록에 없다. 천민이나 궁인이 낳은 왕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소군이라 불리며 출가하는 고려 왕실 전통을 따라서, 덕흥군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수춘옹주의 어머니도 덕흥군의 어머니와 비슷한 신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궁주를 대신해 옹주의 칭호를 받은 것은 희박해보인다.[3]

게다가 충선왕후궁 중 원비의 칭호를 받은 이가 보여, 수춘옹주가 원주(원비) 칭호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의 의붓딸들 역시 친부가 종실이었으나 친딸은 아니었기에 원주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더불어 충혜왕 때에 이르러 내명부의 관제가 무너져 천민 출신 궁인도 택주, 옹주 등의 칭호를 받았다고 나온다. 충혜왕 때 이후로 옹주는 기생, 노비 출신 후궁이나 왕족 여인, 왕자의 처, 후궁의 어머니 등 외명부 봉작에 궁주보다 칭호의 급이 낮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충혜왕의 후궁 은천옹주나 우왕의 후궁들 중 일부는 기생 출신이었다. 그리고 왕자의 처, 왕족 여인, 후궁의 어머니 등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으로 칭호가 남발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때 다시 궁주가 부활하면서 옹주는 세자를 제외한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혹은 원주가 후궁과 서녀의 칭호로 정착되고 옹주가 이를 대신했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그러나 고려 말기로 갈수록 옹주 칭호가 서왕녀와 후궁에 그치지 않고 남발된 것은 사실이다.

고려 시대의 호칭이 조선 전기까지 이어져 궁주와 옹주는 비빈, 왕실의 여인에게 쓰이고, 후궁의 딸에게 옹주가 쓰였다. 예를 들어 원경왕후 민씨가 태조 때 사가에 있었을 때에는 정녕옹주(靜寧翁主)라는 칭호를 받았다. 신빈 신씨는 신녕옹주(信寧翁主)였다가 신녕궁주(愼寧宮主)가 된 걸 보면 옹주가 궁주보다 낮게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원주의 칭호를 옹주가 대체했다고 보아야 한다[4]. 하지만 조선 전기 이후에 궁주는 사라지고 옹주만 남는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왕세자빈이 아닌 임금의 며느리를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중기부터는 완전히 임금의 서녀를 칭하는 말로 정착.

간혹 임금의 적녀인데도 옹주 작호를 받는 일도 있었다. 정명공주선조의 유일한 적녀였지만, 어머니 인목왕후가 폐위되면서 공주보다 한 단계 낮은 옹주로 낮춰졌다가[5] 인조반정 이후 공주로 복권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같은 옹주여도 모친의 혈통을 따졌다. 모계의 혈통 역시 부계 못지않게 중시하던 고려시대의 여파였다.[6]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여인의 소생과 나름 귀족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간택 후궁 소생의 신분 차이이다. 태종의 딸인 정신옹주몸종 출신 후궁의 딸이었던 탓에, 태종이 사위감을 찾고 있던 중에 구혼 상대였던 이속의 집안이 태종에게 노골적으로 퇴짜를 놓고 간택 규수 출신 후궁 의빈 권씨의 딸 정혜옹주를 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아빠 친구와 이복남동생 2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와 왕권 강화에 힘쓰던 태종이 신하가 왕의 딸을 간보는 짓을 그냥 둘리가 없었다. 당연히 이속의 집안은 패가망신 당했다. 자세한 건 간택부마, 이속(조선) 참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공식적으로 대우하는 예법 등은 공주와 차이가 났지만, 일반 사대부의 서녀들이 보통 적녀보다 훨씬 떨어지는 집안에 시집가거나 비슷한 집안의 서자와 혼인하거나 으로 들어갔던 것과는 달리, 옹주는 공주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명문가에 정실로 시집가곤 했다.

세간에는 궁녀가 승은을 입어 임금의 자식을 낳더라도, 딸만 낳으면 후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순조의 승은 상궁인 궁인 박씨는 1817년 영온옹주를 낳은 날 곧바로 종2품 숙의(淑儀)에 올라, 비교적 후한 대접을 받았고 숙종의 승은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귀인 김씨, 소의 유씨는 왕손을 낳지 않았는데도 정식 후궁이 되었다. 반면,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처럼 딸 숙녕옹주를 낳고 7년 후가 되어서야 겨우 종4품 숙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세종의 승은 궁녀 상침 송씨처럼 딸 정현옹주를 낳고도 끝내 후궁이 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반면,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후궁 봉작을 받는다고 알려져있는데 문종의 승은 궁녀였던 장씨는 일찍 사망하긴 했지만 왕자를 낳았는데도 후궁 봉작을 받지 못했고 고종의 후궁인 귀인 이씨완화군을 낳은지 12년이 지나서야 겨우 종4품 숙원이 되었고 귀인 장씨의화군을 낳고 10년 째 후궁 봉작을 못받고 결국 죽었는데 그로부터 13년 뒤에야 종4품 숙원 봉작을 받았다. 한마디로 왕의 총애, 정치적 상황 등에 따라 달랐다.

[1] 효장궁일기에서 어려서 요절한 영조의 어린 딸에게 '새로 태어난 옹주, 이옹주 자가' 라고 불렀다. #[2] 충렬왕제국대장공주, 충선왕계국대장공주, 충숙왕복국장공주조국장공주경화공주, 충혜왕덕녕공주, 공민왕노국대장공주.[3] 수춘옹주와 덕흥군의 차이점은, 덕흥군의 어머니의 출신은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춘옹주의 어머니가 궁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인인지 천민인지 알 수 없다.[4] 원주의 칭호에 관해서는 한국사의 후궁 제도이나 왕비의 항목을 참고.[5] 왕실 여인들이 친인척의 반역에 연루되면 아예 폐서인되고 공주고 옹주고 직첩 자체를 회수당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나마 선조의 딸이기 때문에 옹주의 예만은 갖춰 주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건 표면적인 대우에 불과했다. 자세한 건 정명공주 참고.[6] 애초에 고려 왕실은 서자인 왕자여도 어머니가 천민이거나 궁녀라는 미천한 신분이면 왕위계승권은커녕 출궁해 승려로 살아가야 했다. 어머니의 신분이 양반이든 천민이든 아들로 태어나기만 하면 왕위계승권을 갖고 온갖 특혜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조선 왕실의 서자 출신 왕자들과는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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