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7:30:19

이속(조선)


1. 개요2. 생애
2.1. 태종의 혼담을 거절하다2.2. 패가망신 당하다2.3. 후일담2.4. 여담
3. 기타
3.1. 성호사설의 기록
4.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아버지는 자헌대부 호조판서 이귀산이고, 어머니는 고령현부인 고령 김씨이다. 명문가 출신이긴 했지만 쟁쟁했던 당시 태종의 신하들과 비교하자면 능력면에서 딱히 튀는 구석은 없는 평범한 문관이었다. 하지만 태종이 제의한 혼담을 오만하게 거절했다가 패가망신 당하고, 이후 왕실의 혼인제도인 간택 제도가 생기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패가망신하기 직전엔 강원도 지춘천군사[1]을 지냈다.

2. 생애

2.1. 태종의 혼담을 거절하다

태종후궁 소생의 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기 위해, 지화라는 맹인 점쟁이를 시켜 "정해년(1407년) 이전에 태어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라고 명령했다. 이에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보다가 이속(李續)의 집에 찾아가서 아들의 사주팔자를 물으니 이속은 손님과 바둑을 두면서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이속 : 무슨 까닭으로 묻는가?
지화 : 이것은 왕명을 받은 것이다.
이속 : 길례(吉禮)가 이미 끝났는데, 또 궁주(宮主)가 있는가? 만일 권 궁주(權宮主)이 결혼한다면 나의 자식이 있지마는, 만일 궁인(宮人)이라면 내 자식은 죽었다. 나는 이렇게 연혼(連婚)하고 싶지는 않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정신옹주의 어머니인 신녕궁주 신씨(신빈 신씨)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를 모시던 몸종이었으므로 자기 아들을 몸종 출신인 후궁의 딸과 혼인시키느니 차라리 죽은 셈 치겠다는 것이다. 반면 정혜옹주는 정의궁주 권씨(의빈 권씨)의 소생이었는데, 의빈 권씨는 아버지 권홍이 성균관 악정(정4품)을 지냈으며, 친척에 개국공신인 권근 등이 있는 명문가 안동 권씨 가문의 규수 출신이니 괜찮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친족제도상으로는 이속의 이같은 논리는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양측적 친족관계라 불리는 부계와 모계 가문을 모두 중시하는 고려식 친족제도에선 부친만큼이나 모친의 가문도 중요하고 그래서 모친의 혈통이 쳐지는 서얼의 입지가 지독하게 낮았던 국가가 고려였다. 이는 왕실에도 예외가 아니라 고려 시대에 신씨처럼 천한 신분아래서 태어난 왕손들은 소군이라 분류되어 절간에 처박혔고, 급낮은 관리들한테도 멸시당했는데 왕이 이걸 제지하지도 못 했다. 나라 바뀌었다고 습속까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니 여말선초 과도기에 살았던 이속이 모계를 부계만큼 중시하는 원리를 왕실에까지 들이댄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속의 집안인 연안 이씨는 할아버지 이원발이 고려 대에 봉익대부 전공판서 등을 지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상신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청했지만 불사이군 충절을 지킨 명신으로 남아 의정부좌정승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이귀산은 호조판서와 관찰사를, 큰아버지 이귀령도 좌의정을 지내는 등 당대 최고 수준의 명문가였다. 외가, 즉 모친이 속한 고령 김씨도 외조부 김남득이 충혜왕 복위 즉위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문하평리, 예부상서, 판개성부사 등을 지내고 추충익대공신 고양부원군에 책봉될 정도의 명문가였다. 부계와 모계 가문 모두 명문인 당대 최고 수준의 가문이었다.

하지만 신흥 유신 출신인 태종은 노비종부법 시행원리에서 엿보이듯 부계를 한층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신흥유신이 주축이 된 대간이나 여타 중신들도 이걸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한편 개인적으로도 이속에게 태종은 껄끄러운 상사였다. 춘천의 수령으로 근무하던 도중 태종의 바로 위의 형인 이방간의 재혼에 얽혀서 귀양을 갔기 때문이다. 당시 이방간은 역률을 범한 죄인이지만 동복형제까지 죽일 수는 없었던 태종이 목숨은 살려놓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사위인 조신언[2]이 환관 한봉을 시켜 "전하(태종)께서 박인간의 조카딸[3]을 혼자된 방간의 아내로 데려가고자 한다."라는 말을 전해 방간이 혼인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사실 태종은 조신언의 청을 거절하였는데 조신언이 왕명을 사칭하여 일을 진행시킨 것이었다. 이에 조신언은 왕명을 사칭한 죄와 하필 어머니의 상중인 여자를 데려간 죄, 박인간은 조카딸이 형수의 상을 치르고 있는 걸 알면서 적극 응한 죄와 이방간 측의 접촉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죄, 이속은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왕명으로 반역자가 상중의 여인과 혼인한다는 중대한 정보를 보고받고도 조정에 알리지 않은 죄와 이후 사헌부에서 이 사건으로 죄상을 따져 묻는데도 제대로 답하지 않은 죄가 걸려 환관 한봉을 제외하고 몽땅 귀양을 가게 된다. 이속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으나 억하심정 정도는 품었으리란 예상은 해볼 수 있따.

여하간에 이속은 딱히 왕실과 혼맥을 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태종도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이속의 가문이 본래 바르지 못하다.[4] 나도 연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속의 말이 심히 불공하다.
즉 "나도 이속의 집안에 딸 시집보낼 생각 없다. 그런데 말하는 게 좀 그렇다?"라고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다.

사정이 어쨌든 진짜 문제는 왕실의 청혼을 감히 거절한 것을 둘째치더라도 거절을 해도 좋은 말로 정중하게 할 수도 있는 것[5]을 쓸데없이 모욕적인 언사로 거절해 왕실 권위 향상을 위해 진력하던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2.2. 패가망신 당하다

정신옹주의 생모 신빈 신씨는 당시 태종의 수많은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다.[6] 원경왕후 사후 간택 후궁들 대신 육궁(六宮)을 관리했다는 점[7]과 태종의 19명의 후궁들 중 가장 다산했다는 점[8]에서 태종의 총애를 알 만하다. 또 정신옹주도 태종이 아주 예뻐한 딸이었고, 그렇기에 혼담도 꽤나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속은 어미를 디스함과 동시에 그 어미를 취한 왕까지 무례한 언사로 깔아뭉갠 것이다. 당연히 분기탱천한 태종은 이속에게 곤장 100대를 때렸다. 곤장 100대 자체가 거의 집행 도중에 죽거나 집행을 마쳐도 장독으로 앓다 죽는 중형인데 살아남긴 한 모양.

그러자 사헌부사간원의 신하들이 죄에 비해 벌이 너무 가볍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심지어 도승지 조말생은 "이속의 죄가 대역에 관계되니, 아예 삼족을 멸하여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이에 태종이 "아이들 일에 어찌 사람을 벨 수 있겠냐"라며 다시 사리에 합당한 처벌을 찾도록 했다. 그러자 하연[9][10]이 "베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라고 하자 태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라고 했다. 이에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했으나 이것도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의 잇단 상소에 결국 태종은 이속의 가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정부육조에서 그렇게 물러서 어떡하냐며 반발하고 나섰다. "첫째로 왕의 명을 거역한 죄, 둘째로 왕명을 수행 중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죄, 셋째로 왕녀에게 천한 혈통 운운한 죄까지… 따져볼수록 대역죄니까 이속을 처형해야 합니다."라고 태종을 볶아댔고, 이번에도 태종은 그 등쌀을 못이겨서 이속을 관노로 만들었다. 덤으로 예비사위 후보였던 이속의 아들에겐 평생 금혼령, 쉽게 말해 죽을 때까지 솔로로 살라는 처벌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걸로도 성이 안 찼는지 중신들은 이속의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년 전 이속의 집안에 초상이 났을 때 사촌인 김사문과 술을 마신 일을 트집잡았다. 그 자리에는 이속의 조카인 하옥생[11]과 그 남편인 유복중이 같이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김사문과 하옥생이 이때 바람을 피웠다고 덮어씌운 것... 뿐이라면 무고가 되었을텐데, 유복중이 "전에도 황당한 일이 있었고, 윷놀이 날에도 내가 두 번이나 아내를 불러냈는데도 나오지 않다 밤중에나 와서 옷을 벗지도 않고 눕고, 이에 거짓으로 코를 골아보자 아내가 바깥 방으로 나가 김사문과 함께 누웠다."라며 구체적으로 고소를 한 데다 마침 그때 붙잡혀 온 이속한테 "집안에 불미한 일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딱히 다른 일은 없고 그 둘이 사통한 일 뿐이다."라는 진술까지 나오는 바람에 김사문과 하옥생은 국문을 당하게 된다.

김사문과 하옥생이 모두 불복하니 사헌부에서 고문하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서너 차례 고문하기 전에는 불복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형벌하여 진정을 알아내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며 고문까지 가지는 않고 김사문은 상중에 술을 마셔 불효하였다는 이유로 장 팔십을 때리고 하옥생은 남녀칠세부동석을 어겨 풍기문란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장 팔십을 속받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이후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들이 다시 "이속이 노비로 살아있는 것도 안 될 일이니 반드시 죽여 왕실의 위엄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상소를 올려 아주 그냥 끝장을 보려고 달려든다. 다만 이미 본보기는 확실히 보여줬고,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인데 굳이 목숨까지 빼앗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세종이 이를 물리치면서 이속은 노비로나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속의 7세손인 이성의 사보에 따르면 그의 유배지는 전라북도 임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언제 죽었는지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종 25년에 후술할 사건으로 이속의 손자 이인휴(李仁畦)가 논란이 있었으나 이 땐 이속을 같이 벌하자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 사건은 이속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 아니기에 처벌 대상에서 이속이 제외된 것일 수도 있기에 이조차 확실하지는 않다. 적어도 세종 4년에 이속을 다시 한 번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올 때까지는 살아있었을 것이다.

2.3. 후일담

이속의 집안은 문종 대에 의정부의 청으로 이속의 손자 이인문이 과거 시험에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집안의 금고가 풀렸다.# 또한 아들 이근수에게 가해진 금혼령도 나중에나마 풀렸다.[12] 또한 상술한 것처럼 이속의 손자 대부터 과거 시험이 허용되자 이속의 후손들 다시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속의 장손인 이인휴는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과 첨정 등을 지냈고, 이인문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등을 지내고 연안군에 추봉되었으며, 이인행은 현감을 지냈으며[13], 이인충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 등을 지내고 적개원종공신에 녹훈된 후 청백리에 뽑혔다. 이후 이속의 집안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이인문의 후손들 중 이곤은 중종 때 정국공신에 올라 연성군에 봉작되고, 이홍로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연원부원군 이광정은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 등을 지낸 후 호성공신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인현왕후의 진외조부(陳外祖父)[14]가 되었고, 그의 동생 이창정은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관징은 숙종의 신임을 받은 남인으로서 대사헌과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이옥은 경기도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이봉징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냈고, 그의 동생 이인징 역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종 때 공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이지억 역시 영조의 신임을 받아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인충의 후손들 중 장령을 지낸 이언침의 집안은 그로부터 6세에 걸쳐 총 13명[15]이 정려를 받았고, 인조는 친필로 효자삼세(孝子三世)라고 적은 현판을 하사했다. 또한 이언침의 손자인 장령 이기설과 이기설의 손자 병조참의 이후정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처럼 후손들이 다시 번성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들의 시대가 되면서 이속의 후손이라고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6]

결국 정신옹주의 남편감으로 뽑힌 사람은 윤계동이었는데, 윤계동의 아버지 윤향은 이속과 딱 정반대되는 사례였다. 윤향은 원래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한 나름 중신이었지만, 왕명을 거역한 죄로 직첩을 박탈당하고 귀양 가 있던 중에 이속이 태종의 혼담을 거절했다는 말을 듣자 지화를 통해 자신의 아들의 사주단자를 보냈는데, 그 덕택에 귀양에서 풀려나 형조판서로 복직되었고 아들 윤계동은 정신옹주의 남편이 되어 부마가 되기까지 했다. 그냥 비유가 아니라, 태종이 "윤향이 나와 진짜 사돈을 맺고 싶은가 본데 빨리 데려와라." 하고는 즉시 귀양을 끝냈다.# 심지어 "윤향은 왕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라며 칭찬까지 곁들였는데, 이미 왕명을 거역한 죄로 파직당하고 직첩을 몽땅 털린 사람한테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17] 물론 이속 때문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윤향이 세워준 걸 감안하면 귀양에서 풀릴 만하긴 하다. 더욱이 왕가의 사돈이 관직도 직첩도 없이 자택에 유폐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면 태종 본인도 좀 뻘쭘할 수밖에 없다.

태종은 이를 계기로 간택 제도를 만들어, 가능한 지원자 중에서 왕족의 혼사를 처리하도록해 우리가 아는 형태로 정착한다.

2.4. 여담

태종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이속을 정말로 곤장 100대를 때리는 선에서 처벌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신하들의 강권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더 강한 처벌들을 내렸을 리가 없다. 처벌을 내릴 때 일부러 약한 처벌을 내려서 자신이 관대한 왕인 것처럼 연기하고, 여기에 신하들이 낚여서 혹은 사전에 협의하거나 점수를 따기 위해 “더 큰 벌을 내리셔야 하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그때 못 이기는 척 자기 마음에 드는 형벌을 내리며 명분을 확보하고 신하들을 조종하는 건 태종의 특기이자 후대의 조선 국왕들도 즐겨 따라한 정치 기술이었다. 실제 태종처남인 민씨 4형제를 숙청할 때도 이 방식을 사용했다. 한 줄 요약하자면, "뭐.. 과인은 그렇게 큰 처벌을 내릴 생각은 없었지만..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야...^^"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당시의 법으로 보면, 국혼 제의를 받았는데 그냥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비하 발언을 하는 것은 왕실을 모독한 것이니 큰 죄는 맞다. 하지만 사형이나 노비로 신분강등까지 가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어우동처럼 이 없는 강상죄까지 붙여서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면 사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고, 반대로 연산군의 자식들처럼 신하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사형이 금지된 미성년자도 죽여야 한다고 악을 써서 사사시킨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법적 기준은 분명히 있었고 보통은 그 선에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속은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성격이 괴팍하고 오만해서 주변에 적이 많았다고 한다.[18] 이 인물평 자체야 눈치 없고 예의 없다고 박살난 사람에게 굳이 좋은 소리를 찾아서 써줬을 리가 없기는 하지만, 태종실록이 작성될 때의 분위기는 사관 민인생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웬만한 파파라치 이상으로 가감 없는 사실을 기록하는데 집착했다. 무엇보다 임금의 심부름꾼에게 하는 말이라면 임금의 귀에게도 들어갈 걸 뻔히 알 텐데 저런 식으로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우스갯소리로 이속이 저렇게 간덩이가 부은 거절을 한 건 원경왕후의 외척들[19]의 숙청을 보고서 자긴 안 죽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민무구민무질은 1410년 비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고 민무휼민무회는 1416년에 자결 명령을 받아 죽는데, 정신옹주가 결혼한 것은 1418년. 자신과 혼례를 맺은 사돈집안도 한 방에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후궁의 딸, 그것도 몸종 출신인 후궁의 딸과 결혼하면 승낙해도 파리목숨이었을 것이다. 실제 기록에서도 이속은 노비로 강등은 돼도 죽진 않았고 아들 역시 태종의 아들인 세종 때 독신령이 해제되어 후손을 봤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멸문지화는 피했다고 볼 수 있다. 단, 태종이 박살낸 집안은 모두 왕실 남자, 그것도 왕위계승권을 가진 세자와 맺어진 외가다.[20] 즉 공주나 옹주는 계승권이 없으니 외척들도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반면, 세자의 외척들은 세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할 것을 우려해 태종이 세자의 외척들만 광적으로 때려잡은 것이다.

3. 기타

3.1. 성호사설의 기록

이익성호사설 제9권에는 이속의 발언이 실록에 기록된 언사에 비하면 현격히 낮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바로는 태종(太宗)이 이속(李續)의 아들을 부마(駙馬)로 삼고자 하여 고매(瞽媒) 지화를 시켜 방문하게 했는데, 이속이 마침 손님과 바둑을 두면서 단지 하는 말이 “짚신을 삼는 데는 제날을 써야만 한다[業草履 合用草經].”고 하였다. 말하자면 서로 맞아야 좋다는 것이다. 주상은 크게 노하여 이속의 집을 적몰(籍沒)하고 그 아들에게는 장가를 못들도록 만들었다.
성호사설 제9권 인사문(人事門) 국혼간택(國昏揀擇)
300년이나 지나서, 그리고 서론에서 유추되듯 정사가 아니라 세간에서 전하는 말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성호사설에 따르면 이속은 정신옹주를 직접 입에 올린 것은 아니고 “서로 대응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정도로 말한 것이다. 물론 실록에서 점쟁이가 정신옹주의 혼사 문제로 이속을 찾아갔다고 명확히 적혀 있으므로 이속이 한 말 역시 정신옹주와의 혼사에 관한 내용일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니 이것도 결국은 처벌감이 되기는 하겠으나, 적어도 실록처럼 굳이 집안이 더 좋은 옹주와 비교질까지 해가면서 이중삼중으로 거듭 모욕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성호사설의 기록이 실록과 세세한 부분에서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 큰 틀에서는 실록과 똑같이 '태종이 혼사 문제로 점쟁이를 이속에게 보냈는데 이속이 뭔가 영 좋지 않은 말을 했고, 이후 이속이 처벌받았다'는 내용이다.

4. 관련 문서


[1] 현재의 춘천시장에 해당하는 직책.[2] 참고로 조신언의 누이이자 여흥부원군 민제의 외손녀인 평양 조씨는 단산부원군 이무의 아들인 집의 이공유에게 시집가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그중 차녀가 이속의 아들인 생원 이근건에게 시집갔다. 즉, 이속의 며느리가 조신언의 조카라는 것이다. 참고로 평양 조씨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원경왕후의 언니이기 때문에 평양 조씨의 이모는 원경왕후이고, 이모부는 태종이며, 외삼촌은 이속보다 먼저 태종에게 숙청된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이다.[3] 당시 어머니의 상을 치르는 중이었다.[4] 이속의 가문이 바르지 못하다고 말한 것은 이속의 조카인 하옥생이 당숙인 김사문과 상중에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5] 예를 들면 왕실과의 혼인을 차마 감당할 수 없다든지 혹은 본인의 아들에게 흠이 있다 꾸며내 은연중에 드러내든지 등[6] 태종은 후궁을 19명 두었는데, 이는 조선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수였다.[7] 간택 후궁은 매우 까다로운 간택 절차를 통과하고 후궁이 된 경우이기에 사대부 출신이 대부분이고, 승은 후궁은 왕과 잠자리를 가져 후궁이 된 경우이기에 기생 또는 궁녀 같은 미천한 출신이 많았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간택 후궁을 승은 후궁보다 더 높이 예우했다.[8] 신빈 신씨는 3남 7녀를 두었고, 이는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와 더불어 조선의 후궁들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둔 것이다.[9] 참고로 하연은 이속의 고모이자 우의정 류량의 부인인 이씨와 사돈 관계이다. 즉, 이속의 사촌인 판윤 류경생의 부인이 하연의 딸이므로 하연의 딸은 이속에게 사촌형수가 된다. 또한 하연의 형인 관찰사 하형의 부인은 이속의 누이이다. 즉, 하연은 이속이 자신의 인척임에도 앞장서서 이속을 베자고 한 것이다.[10] 참고로 하연은 후에 이귀산의 후처인 류씨(류씨가 이귀산의 후처인지 첩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그 이유는 족보에 이귀산의 본처인 고령 김씨가 1438년 2월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부인 김씨는 이귀산보다 무려 14년이나 더 산 것이므로 류씨는 이귀산의 첩이 된다. 그러나 본 문서에선 실록의 기록을 존중하여 처라고 표기하였다.)가 개국공신 조반의 아들이자 류씨의 먼 친척인 지신사 조서로와 간통했을 때도 류씨의 목을 베어 일벌백계로 삼자고 했다.[11] 하옥생은 하연의 조카이기도 하다.[12] 이근수는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중 수재공파의 파조가 되고, 이근수의 아들 이인수는 안산 이씨 경기계의 시조가 된다. 단,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족보에서는 이근수의 아들 중 이인수의 기록을 찾을 수 없기에 연안 이씨 일부 종원은 안산 이씨 경기계가 정말 연안 이씨에서 분관된 가문인지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13] 이인행은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즉, 봉사할 자손이 없어서인지 족보에서도 현감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배위나 묘소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참고로 장녀는 밀산부원군 박건의 장남인 박승환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충정공 류빈에게 출가했다.[14] 아버지의 외가를 진외가라고 지칭한다. 즉, 진외조부는 아버지의 외조부를 뜻하는 말로 이광정의 외손자의 딸이 인현왕후이다.[15] 충신 2명, 효자 6명, 효녀 1명, 절부 3명, 열녀 1명[16] 다만 세종조까진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속의 장남인 이근강과 사돈 관계인 변효문이 1443년 첨지중추원사로 재직시 조선통신사일본에 다녀왔는데, 이근강의 아들 이인휴를 통신사 수행시 함께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다.[17] 윤향이 귀양을 간 이유는 위화도 회군은 오로지 태조의 덕업인데, 여기에 끼어서 한 몫 챙긴 자들은 항우 진영의 배신자 정공이나 다를 바 없으니 공신 대우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세력의 시초가 결국 전주 이씨 관련 회군공신들인 걸 생각하면 좋게 말해 대담하고 강직한 거고 까놓고 보면 그야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소리다.[18] 실제로 그의 오만한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그가 노비로 전락한 세종 때까지 그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왔다.[19] 참고로 이들은 상술했듯 이속의 며느리 단양 이씨의 외외종조부들이다.[20] 앙녕대군의 장인이었던 김한로는 양녕이 만약 왕이 되었으면 숙청 1순위가 되었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면서 화를 피했다. 허나 양녕이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기 때문에 왕후 일가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를 우려해서인지 원경왕후 일가는 그야말로 박살을 내버렸다. 거기에 애초에 왕위계승권이 없던 사위가 갑자기 세자~왕 테크를 탄 충녕대군(세종)의 장인 심온 역시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숙청 1순위가 되어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사당하고 왕후인 소헌왕후를 제외한 가족들은 전부 노비가 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반면 왕위계승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효령, 성녕대군과 다른 후궁 소생 왕자들의 처가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