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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군(大君)은 군(君) 작호(爵號)의 일종이다. 본래 작호는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대군'은 그 약칭으로 쓰였던 것이다. 고려 초기에 태조의 왕자 중 한명이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 원 간섭기에 봉군제(封君制)가 도입되면서 정식 작호로 제정되었다. 1401년 기존에 공(公)으로 책봉되어 있던 왕자들을 부원대군으로 고치면서 재도입되었는데, 이 시점부터 본래 약칭이었던 '대군'만 쓰이게 되었기에 사실상 대군으로 공식화되었다.일본국대군이라 하여 일본의 쇼군이 대외적으로 사용한 칭호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외교 체제에서 일본은 명목상 군주인 천황을 내세우면 배척되는 경우가 잦았기에,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인 쇼군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거나 일본국대군 칭호를 자칭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원군'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중 및 언론 등에서 비유적 표현으로 간혹 사용되는데,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거나 대통령의 혈연으로써 정계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들이나 남자 형제를 종종 이에 빗대어 부르기도 한다.(...) 봉하대군, 영일대군 등.
2. 조선 이전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대군(大君)이 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의 신라로, 경명왕의 아들 8명 밀성대군 박언침,[1] 고양대군 박언성,[2] 속함대군 박언신,[3] 죽성대군 박언립,[4] 사벌대군 박언창,[5] 완산대군 박언화,[6] 강남대군 박언지,[7] 월성대군 박언의[8]가 있다. 또한 경애왕의 아들 2명 금성대군 박교순[9], 계림대군 박순현은 신라 마지막 대군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정식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선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가필이 가능한 족보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더 많은 신라의 왕들을 배출한 김씨 족보에는 대군이라는 작호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문이다. 심지어 경명왕의 아들들은 항렬자로 보이는 한자가 이름에 있지만, 경애왕의 아들들은 해당되는 바가 없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들도 작호가 대군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군을 칭한 경명왕과 경애왕의 아들들은 어디까지나 "자칭" 한국사 최초의 대군들로 볼 수 있다.이 신라 가문을 포함하여 여러 본관에서 시조가 고려 초기 공신에 책봉되어 무슨 부원군에 책봉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정작 공신까지 책봉되었다면서 정사 역사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충선왕 이후에야 등장하는 부원군으로 기록되는 등 시대와 맞지 않는 칭호가 나타나고 있기에 숭조사업에 따른 왜곡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정식 사서와 교차검증되지 않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서를 기준으로, 군(君) 계통의 칭호를 사용한 사례는 최초로는 고조선 혹은 전한에 의해 예군(穢君)으로 임명된 군장 남려가 있고 더 확실히 한국계 국가에서 최초로 임명된 건 고구려의 양국군(讓國君) 고추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때는 사용이 좀 들쭉날쭉하였고 본격적으로 제도로서 자리잡은 건 고려시대부터이다. 특히 고려 초기에는 왕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수 칭호였으며, 일반 신하가 봉군되기 시작한 것은 원 간섭기에 봉군제(封君制)를 도입하여 원 간섭기에 부원대군·부원군·군 3종류가 정해진 때였다.
3. 조선
조선 초기에는 기존의 봉군제에 더해 공(公)·후(侯)·백(伯)을 책봉해왔으나, 1401년에 공·후·백 작위 칭호를 폐지하면서 공으로 책봉되어 있던 왕자들을 모두 '부원대군'으로 변경했다.[10] 이 시점부터 '부원대군'은 그 약칭인 '대군'으로만 쓰였기에, 사실상 '대군'으로 공식화되었다.태종 때부터 '대군'은 세자가 아닌 왕의 적자에게 내리는 정1품 작위로 정해졌다. 적비 소생이 아닌 왕자들은 처음 품작을 받는 때를 의미하는 초수(初授) 품작에 차등을 두었는데, 정식으로 내명부 봉작을 받은 후궁인 빈잉(嬪媵) 소생이면 종1품 군(君), 양인 신분이지만 정식 후궁은 아닌 궁인(宮人) 소생이면 종3품 정윤(正尹), 천인 신분인 궁인 소생이면 정4품 부정윤(副正尹)으로 출발하여, 궁인 소생의 왕자들은 승진을 통해야 봉군(封君)될 수 있었다.[11] 또한 적비 소생이 아닌 종친은 정1품으로 승진하더라도 대군이 될 수 없었다.[12]
건국 초에는 추상적인 미칭으로 왕자의 존호를 정했다. 1418년에 성녕대군이 죽자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으로 증시(贈諡)한 것으로 시작으로, 진안대군은 '진한정효공(辰韓定孝公)'으로, 익안대군은 '마한안양공(馬韓安襄公)'으로 시호를 내리는 등, 종친의 시호를 부를 경우에는 삼한의 국명을 더했다. 이로 인해 봉호와 시호의 구분이 어려워졌고, 결국 1437년에 세종이 이러한 관례를 폐기했다. 1428년 이후 세종의 왕자들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지명이나 그 별칭을 봉호로 정했다. 가령 수양대군의 '수양'은 해주의 별칭, 금성대군의 '금성'은 나주의 별칭, 창녕대군의 '창녕'은 말 그대로 창녕이다.
1443년에 세종이 종친의 산계를 정하고 모두 종친부에 소속시키면서, 왕자는 적서의 구분 없이 모두 정1품이지만 자급도 수여하지 않는, 백관 위의 최고 서열 품계로 격상시켰다. 경국대전에선 아예 정1품의 상위로 표기하기 시작했고, 근래에는 이러한 지위를 '무품(無品)'으로 통칭하고 있다.[13] 이에 따라 왕의 서자들은 비록 대군이 될 수는 없었으나, 그 지위가 특별했던 만큼 속칭 '왕자군(王子君)'이라 하여 다른 일반 군들과는 구별되는 신분이었다.
대군으로 봉해진 왕자들은 세자 신분은 아니었기에 왕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왕이 폐위 혹은 급사하거나 정변이 일어나는 등의 이유로 왕위를 물려받기도 한다. 인조 대 이후로는 대군에 봉해진 왕족이 없는데, 왕의 적자가 한 사람 뿐이거나 아예 없었거나, 일찍 대군 책봉을 받기전에 요절해서 씨가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國俗稱王子大君王孫爲自家 或呼資階者非也 國初亦呼進賜 今則通稱百官
나라의 풍속에 일컫기를, 왕자와 대군, 왕손을 자가(自家)라 불렀다. 벼슬의 직품과 관계를 받은 자는 그리 부르지 않기도 했다. 나라 초기엔 나리(進賜)라 부르기도 했으나 이는 오늘날 백관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재난고 14권#
나라의 풍속에 일컫기를, 왕자와 대군, 왕손을 자가(自家)라 불렀다. 벼슬의 직품과 관계를 받은 자는 그리 부르지 않기도 했다. 나라 초기엔 나리(進賜)라 부르기도 했으나 이는 오늘날 백관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재난고 14권#
조선 건국 초기에는 대군과 왕자군은 입말 경칭으로 '나리'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 뒤에 '자가' 호칭이 등장하면서 '대군 자가' 또는 '왕자 자가' 및 '왕자군 자가'로 불렸다. 왕자들을 대감이라고 호칭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 주장이다. 왕의 아들인 대군과 군을 대감이라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신분을 낮춰서 부르는 불경한 행위이다.
서간문 등에 사용하는 문어체 경칭인 저하(邸下)는 조선시대에는 왕세자 부부에게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문어체 경칭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한 것은 아니었기에, 비록 예법에는 어긋나는 경우이긴 하지만 간혹 왕세손이나 왕자 등을 상대로 저하로 호칭한 사례가 있다.
또한 대군과 군을 '자가'라 부르는 것은 민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我朝義原君。麟坪大君之孫也。嘗遊海西。有一人來見曰。小人祖母以自家(東人稱宗室貴者曰自家。)婢子。犯過逃亡。今已許多年。而子孫甚繁矣。隱漏不見。罪莫大焉。故敢此進告。願有以處之。
아조(我朝)의 의원군(義原君)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손자이다. 일찍이 해서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소인의 조모는 자갸(自家)(저자주:우리 나라 사람이 종실의 귀한 자를 ‘자갸’라고 부른다.)의 계집종이었습니다. 잘못을 범하고 도망하였는데,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자손이 매우 많습니다. 숨어 살면서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죄가 더없이 큽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나아와 고하는 것이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하였다.
- 순암집#이미지
여기서 저 사람이 말한 '자갸'(자가)'는 '인평대군'이다. 이 사람의 할머니가 인평대군의 여종이었으며, 그 손자가 인평대군의 손자인 의원군에게 찾아와 할머니의 죄를 대신 고하고 벌을 내려달라 청한 것이다.아조(我朝)의 의원군(義原君)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손자이다. 일찍이 해서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소인의 조모는 자갸(自家)(저자주:우리 나라 사람이 종실의 귀한 자를 ‘자갸’라고 부른다.)의 계집종이었습니다. 잘못을 범하고 도망하였는데,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자손이 매우 많습니다. 숨어 살면서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죄가 더없이 큽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나아와 고하는 것이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하였다.
- 순암집#이미지
조선 국왕 중에서 생전에 '대군'이라고 불린 왕으로는 세종(충녕대군), 세조(진평대군, 함평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 예종(해양대군), 중종(진성대군), 명종(경원대군), 효종(봉림대군)이 있다. 생전에 '대군'이라고 불리지 않은 왕으로는 정종(영안대군), 태종(정안대군), 단종(노산대군), 성종(잘산대군), 인조(능양대군)가 있다. 이들은 생전에 대군이라고 불린 것이 아니라 나중에 대군으로 소급 적용된 것이다.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일반적으로는 왕자를 뜻하는 프린스(Prince)로 쓰지만 가끔 서양의 대공에 대응되는 Grand Prince로 쓰기도 한다.[14] 조선의 경우 서얼 왕자인 군에게도 왕위를 계승한 이력이 있고, 방계왕족에게도 군의 작위를 내린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기 위한 것. 왕의 적자인 대군과 구별하려고 할 때 다른 군은 Prince로 번역한다.
4. 목록
4.1. 고려의 부원대군
-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15]: 태조와 의성부원부인의 아들, 홍유의 외손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충선왕의 아들 왕도(王燾), 충선왕의 양위로 즉위.- 제안부원대군(齊安府院大君): 충선왕의 매부 제안대군|왕숙(王淑).
- 강양부원대군(江陽府院大君): 충선왕의 사촌형제 왕용(王鏞).
- 함녕부원대군(咸寧府院大君): 충선왕 책봉, 정간왕의 7세손 왕유(王維).
- 예성부원대군(蘂城府院大君): 정간왕의 10세손 왕온(王昷).
- 정안부원대군(定安府院大君): 충선왕의 딸 수춘옹주의 남편 허종(許琮).
- 단양부원대군(丹陽府院大君): 충숙왕의 사촌형제 왕후(王珛).
- 연덕부원대군(延德府院大君): 충숙왕의 사촌형제 왕훈(王塤).
-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 충숙왕 책봉, 본명 권재(權載), 충선왕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후(王煦)로 개명.
- 창원부원대군(昌原府院大君): 예성부원대군의 아들 왕우(王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충목왕의 숙부 왕기(王祺). 충정왕이 폐위되자 즉위.- 경산부원대군(京山府院大君): 충목왕 책봉, 충선왕의 의붓딸 경녕옹주[16]의 남편 노책(盧頙).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공민왕의 아들 왕우(王禑). 공민왕 사후 즉위.- 면양부원대군(沔陽府院大君): 공민왕 추봉, 궁인 한씨[17]의 증조부 한통(韓通)·조부 한평(韓平)·부친 한준(韓俊) 3인.
- 면성부원대군(沔城府院大君): 공민왕 추봉, 궁인 한씨의 외조부 한량(韓良).
- 순정부원대군(順正府院大君): 제안부원대군의 아들 왕숙(王璹).
- 순인부원대군(順仁府院大君): 순정부원대군의 조카 왕상(王瑺).
- 회안부원대군(淮安府院大君): 대방공의 손자 왕순(王珣).
- 화의부원대군(和義府院大君): 영녕공의 손자 왕거(王琚).
- 경창부원대군(慶昌府院大君): 양양공의 증손 왕유(王瑜).
- 경창부원대군(慶昌府院大君): 양양공의 현손 왕희(王熙).
-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심왕 왕고의 아들 왕덕수(王德壽).
4.2. 조선의 대군
조선 대군 | |||||
봉호 | 시호 | 이름 | 부왕 | 모후 | 비고 |
안천대군 安川大君 | 어선 於仙 | 목조 | 효공왕후 | 1872년 12월 3일 추증(이하 "※") | |
안원대군 安原大君 | 충장 忠壯 | 진 珍 | ※ | ||
안풍대군 安豐大君 | 정 精 | ※ | |||
안창대군 安昌大君 | 매불 梅拂 | ※ | |||
안흥대군 安興大君 | 구수 球壽 | ※ | |||
함녕대군 咸寧大君 | 안 安 | 익조 | 정숙왕후 | ※ 익조의 조취부인 손씨(孫氏) 태생 장남 규수(嬀水)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 |
함창대군 咸昌大君 | 장 長 | ※ 익조의 조취부인 손씨 태생 차남 복(福)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 |||
함원대군 咸原大君 | 충간 忠簡 | 송 松 | ※ | ||
함천대군 咸昌大君 | 원 源 | ※ | |||
함릉대군 咸陵大君 | 고태 古泰 | ※ | |||
함양대군 咸陽大君 | 전 腆 | ※ | |||
함성대군 咸城大君 | 응거 應巨 | ※ | |||
완창대군 完昌大君 | 정간 貞簡 | 자흥 子興 | 도조 | 경순왕후 | ※ |
완원대군 完原大君 | 정효 貞孝 | 자선 子宣 | ※ | ||
완천대군 完川大君 | 평 平 | ※ | |||
완성대군 完城大君 | 종 宗 | ※ | |||
완풍대군 完豐大君 | 양평 襄平 | 원계 元桂 | 환조 | 이씨 | 고려 척산군(陟山君), 완산군(完山君) 추봉→완산백(完山伯) 1872년 12월 3일 완풍대군 추증 |
永城大君 | 효민 孝愍 | 천계 天桂 | 완성군(完城君) 추봉, 1872년 12월 3일 영성대군 추증→1900년 영성군[18] | ||
의안대군 義安大君 | 양소 襄昭 | 화 和 | 정빈 | 1392년 의안백(義安伯)→1398년 의안공(義安公)→1401년 대군 | |
진안대군 鎭安大君 | 정의 靖懿 | 방우 芳雨 | 태조 | 신의왕후 | 진안군[19] |
영안대군 永安大君 | 방과 芳果 | 영안군→1398년 영안공→1398년 즉위→1400년 상왕→1418년 노상왕[20] 즉위 후 '경(曔)'으로 개명 | |||
익안대군 益安大君 | 안양 安襄 | 방의 芳毅 | 익안군→1398년 익안공→1401년 익안대군[21] | ||
회안대군 懷安大君 | 양희 良僖 | 방간 芳幹 | 회안군→1398년 회안공→1401년 회안대군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유배되었으나, 왕자 신분은 유지되었다. | ||
정안대군 靖安大君 | 방원 芳遠 | 정안군→1398년 정안공→1400년 즉위→1418년 상왕→1421년 태상왕[22] | |||
덕안대군 德安大君 | 방연 芳衍 | 원윤(元尹) 추봉→1409년 문안군(文安君),[23] 1872년 덕안대군 추증 | |||
무안대군 撫安大君 | 장혜 章惠 | | 신덕왕후 | 무안군→1398년 피살(무인정사), 1680년 무안대군 추증(복권) 1406년 '공순(恭順)' 추시→1452년 개정(장혜) | |
의안대군 宜安大君 | 소도 昭悼 | 방석 芳碩 | 세자→1398년 피살(무인정사), 1680년 의안대군 추증[24] | ||
양녕대군 讓寧大君 | 강정 剛靖 | 제 禔 | 태종 | 원경왕후 | 1404년 세자→1418년 양녕대군(폐세자) |
효령대군 孝寧大君 | 정효 靖孝 | 보 𥙷 | 1407년 봉작 호(祜)에서 개명(1414년) | ||
충녕대군 忠寧大君 | 도 裪 | 1408년 충녕대군→1418년 세자→1418년 즉위 | |||
성녕대군 誠寧大君 | 소경 昭頃 | 종 ⿰示重 | 1414년 봉작[25] | ||
수양대군 首陽大君 | 유 瑈 | 세종 | 소헌왕후 | 1428년 진평대군(晉平大君)→1433년 함평대군(咸平大君)→1433년 진양대군(晉陽大君)→1445년 수양대군→1455년 즉위→1468년 상왕[26] | |
안평대군 安平大君 | 장소 章昭 | 용 瑢 | 1428년 봉작(봉호는 홍주의 별칭) | ||
임영대군 臨瀛大君 | 정간 貞簡 | 구 璆 | 1428년 봉작(봉호는 강릉의 별칭) | ||
광평대군 廣平大君 | 장의 章懿 | 여 璵 | 1432년 봉작(봉호는 광주의 별칭) | ||
금성대군 錦城大君 | 정민 貞愍 | 유 瑜 | 1433년 봉작(봉호는 나주의 별칭) | ||
평원대군 平原大君 | 정헌 定憲 | 림 琳 | 1434년 봉작(봉호는 원주의 별칭) 1445년 '정덕(靖德)' 추시→1871년 개정(정헌) | ||
영응대군 永膺大君 | 경효 敬孝 | 염 琰 | 1441년 영흥대군(永興大君)→1447년 역양대군(歷陽大君)→1447년 영응대군(봉호는 연안의 별칭) | ||
노산대군 魯山大君 | 홍위 弘暐 | 문종 | 현덕왕후 | 1448년 세손→1450년 세자→1452년 즉위→1455년 상왕→1457년 폐위(노산군)→1681년 노산대군→1698년 추존[27] | |
해양대군 海陽大君 | 황 晄 | 세조 | 정희왕후 | 1455년 해양대군(봉호는 남해의 별칭)→1458년 세자→1468년 즉위[28] | |
월산대군 月山大君 | 효문 孝文 | 정 婷 | 덕종 | 소혜왕후 | 1460년 월산군→1470년 월산대군(봉호는 경주의 별칭)[29] |
잘산대군 乽山大君 | 혈 娎 | 1461년 잘산군→1470년 즉위[30] | |||
인성대군 仁城大君 | 효소 孝昭 | 분 糞 | 예종 | 장순왕후 | 원손(만 23개월 조졸)→1463년 인성군 추봉→1472년 인성대군 |
제안대군 齊安大君 | 영효 靈孝 | 현 琄 | 안순왕후 | 원자→1470년 제안대군(봉호는 황주의 별칭) | |
진성대군 晉城大君 | 역 懌 | 성종 | 정현왕후 | 1494년 진성대군(봉호는 진주의 별칭)→1506년 즉위 《연산군일기》에서 '진산대군(晉山大君)'으로 오기(誤記)한 사례가 있다. | |
창녕대군 昌寧大君 | 성 誠 | 연산군 | 폐비 | 1502년 이전 봉작(봉호는 창녕군 유래)[31] | |
경원대군 慶源大君 | 환 峘 | 중종 | 문정왕후 | 1539년 경원대군(봉호는 인천의 별칭)→1545년 즉위 | |
영창대군 永昌大君 | 의 㼁 | 선조 | 인목왕후 | 1611년 봉작(봉호는 이천의 별칭)[32] | |
능양대군 綾陽大君 | 종 倧 | 원종 | 인헌왕후 | 1601년 능양정→1607년 능양도정→1607년 능양군(봉호는 능주의 별칭)→1623년 즉위[33] | |
능원대군 綾原大君 | 정효 貞孝 | 보 俌 | 1601년 능원정→1608년 능원군(의안군에 출계)→1632년 능원대군(봉호는 능주의 별칭) | ||
능창대군 綾昌大君 | 효민 孝愍 | 전 佺 | 1601년 능창정→1612년 능창군(신성군에 출계)→1632년 능창대군 추봉(봉호는 능주의 별칭)[34] | ||
봉림대군 鳳林大君 | 호 淏 | 인조 | 인열왕후 | 1626년 봉림대군(봉호는 봉산의 별칭)→1645년 세자→1649년 즉위 | |
인평대군 麟坪大君 | 충경 忠敬 | 요 㴭 | 1630년 봉작(봉호는 인제의 별칭) 충민(忠敏) 추시→개정(충경) | ||
용성대군 龍城大君 | 장의 章懿 | 곤 滾 | 1630년 추증(봉호는 남원의 별칭) |
이외에도 조졸(早卒)하여 정식으로 대군으로 봉해지지 않은 왕자가 다수 있다. 기록에서는 이들도 '대군'으로 칭하는 경우가 있다.
- 태종과 원경왕후: 장남 양녕대군 이전 출생 왕손 3명, 1412년생 왕자
-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1494년생 원손(만 1개월), 1501년생 왕자(만 29개월) 이인수(李仁壽), 1502년생 왕자
-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1596년생 원손, 1601년생 왕손
- 인조와 인열왕후: 1626년생 왕자, 1629년생 왕자, 1635년생 왕자
- 효종과 인선왕후: 1638년생 왕손(만 3세), 1645년생 왕손
- 숙종과 희빈 장씨: 1690년생 왕자(만 1개월) 이성수(李盛壽)
- 순조와 순원왕후: 1820년생 왕자(만 3개월)
- 철종과 철인왕후: 1858년생 원자(만 6개월) 이융준(李隆俊)
- 고종과 명성황후: 1871년생 원자(4일), 1875년생 왕자(13일), 1878년생 왕자(만 3개월)
5. 관련 문서
[1] 밀양 박씨 시조[2] 고령 박씨 시조[3] 함양 박씨 시조.[4] 죽산 박씨, 고성 박씨, 음성 박씨 시조.[5] 상주 박씨 시조.[6] 전주 박씨, 무안 박씨 시조[7] 순천 박씨 시조[8] 월성 박씨 시조.[9] 울산 박씨의 시조 박윤웅의 조상.[10] 다만 이후 성녕대군이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으로 추증된 사례가 있다.[11] 1414년에 궁인 소생의 왕자는 생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원윤으로 초수되도록 고쳤으며, 1417년부터는 궁인 소생의 왕자도 무조건 봉군했다.[12]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은 1401년에 대군으로 개정되었기에 예외 사례가 된다. 태조의 다른 이복형제인 완풍대군과 영성대군의 추증 봉작은 1872년에 의안대군의 예에 따른 사례이다. 1417~1429년 동안에는 대군이 아닌 봉군된 종친이 정1품으로 오르면 부원군으로 격상되었으나, 왕자가 부원군이 된 사례는 없다.[13] 중원 왕조들에서도 품계를 초월하여 '백관 위의 최고 서열'이라는 개념의 봉작은 종종 있었고, 고려에서도 상보(尙父)나 정승(政承)처럼 동일한 개념이 분명 존재했으나, 이러한 개념의 신분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용어가 등장한 전례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무품'으로 통칭하고 있으나, 사실 '관직에 관품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경우'나 '관품 자체가 없는 일반 서민(庶民)' 등과 혼동될 여지가 있는 조어법이라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선 쓰이진 않는다. 근래 중국에서는 이를 '초품(超品)'으로 쓰는 경우가 흔한데, 초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유한 산계보다 높은 관직에 임명된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14] 동유럽계의 대공, 주로 러시아, 슬라브계 국가들의 대공이 Grand Prince이나 대공이라는 작위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영미권, 불어권의 경우엔 일괄적으로 Grand Duke라고 표기한다.[15] 본명과 정식 작호(爵號)가 실전되어 별칭인 궁호만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16] 원래는 제안부원대군의 아들 왕현(王眩)의 딸이지만, 어머니인 허씨가 왕현이 죽은 뒤에 충선왕의 후궁이 되었다.[17] 공민왕이 우왕(모니노)의 친모로 공인한 인물로, 이후 자신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한 신돈의 시녀 반야가 등장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반야를 생모로 공인하였으나, 반야가 실제 우왕의 생모가 맞는지는 논란이 있다.[18] 당초에는 도조의 적장남 완창대군의 양자로 출계한 것으로 파악했으나, 이후 완창대군의 아들인 이교주(李咬住)와 동일인물이라는 의견에 따라 영성군으로 개정했다.[19] 태조의 적장자였으나 후계에서 탈락했다. 고려 멸망 1년 뒤인 1393년에 죽었다. 1401년에 대군으로 정식 추증되지 않았으나, 1412년 이후 대군으로 불렀다. 시호 또한 원래 1393년에 '경효(敬孝)'로 추시되었으나 이후 몇 차례 개정되었다. 1418년에 '진한정효공(辰韓定孝公)'으로 바뀌었으나, 1437년에 시호에 국호를 덧붙이는 관례를 폐기하면서 '정효'만 남았다. 1758년에 '정의'로 최종 개정되었다.[20] 대군은 태종 때 등장한 작위이므로 실제 대군인 적은 없었고, 단지 후대에 영안군을 영안대군으로 높인 것일 뿐이다. 후궁 소생 자녀는 많았으나, 정비 소생의 자녀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방원이 왕위를 잠깐 맡겼다는 견해도 있다. 만약 적자가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주장하면, 계유정난 프리퀄이 발생할 수도(...).[21] 1393년에 '공정(恭靖)'로 추시되었으나, 정종의 시호와 겹치게 되면서 개정되었다. 이에 1418년에 '마한안양공(馬韓安襄公)'으로 바뀌었으나, 1437년에 시호에 국호를 덧붙이는 관례를 폐기하면서 '안양'만 남았다.[22] 대군은 1401년에 등장한 작위이므로 실제 대군인 적은 없었고, 단지 후대에 정안군을 정안대군으로 높인 것일 뿐이다.[23] 태종 재위 기간동안에 '대군'을 명기하지 않고 '군'으로 줄여서 부른 경우가 많아서 대군으로 추봉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24]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되어 이복형들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이후 태종이 '소도'로 추시했기에 '소도군(昭悼君)'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식으로 폐위된 적이 없음에도 숙종이 복권했을 때 세자로 복구시키지 않고 끝내 대군으로 추봉했다.[25] 전산환경에서 이름을 '褈'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1418년에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으로 추시하였으나, 1437년에 시호에 국호를 덧붙이는 관례를 폐기하면서 '소경'만 남았다.[26] 마지막 봉호인 수양대군이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오래 불렸던 봉호는 진양대군이다. 봉호 '수양'은 해주의 별칭이다. 집권하는 과정에서 조카와 친동생 둘(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였다. 생전에 양위했으나 하루 뒤에 죽었다.[27] 문종의 (장성한) 유일한 아들이므로 당연히 처음부터 세손(할아버지 세종 재위 시)→세자(아버지 문종 재위 시)였다.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상왕에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그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노산'은 평창의 별칭이다. 훗날 숙종 때 '노산대군'으로 격상되었다가, 마침내 '단종'으로 추존되었다.[28] 형 의경세자의 급사로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다.[29] 시인으로 명성을 떨친 대군이며 이름은 정,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이다. 세조의 장손이자 추존왕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 사실상 왕위를 아우에게 양보한 월산대군은 평생을 조심하면서 풍류객으로 지냈는데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30] 숙부 예종의 급사로 왕위에 올랐다. 생전에 세자였던 적도 없고 대군이었던 적도 없다. '乽'을 파자하여 '자을(者乙)'로도 표기된다.[31] 아버지가 폐위되면서 불과 만 6세에 형 폐세자 이고와 함께 사사되었다.[32] 선조가 늘그막에 본 늦둥이로 유일한 적자 태생이었으나, 이복형 광해군에 의해 불과 8살에 죽었다.[33] 백부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생전에 대군이었던 적은 없다.[34] 형이 왕이 되기 전인 1615년에 광해군에게 역모를 의심받아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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