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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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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공 | 永寧公
왕준 | 王綧
작위 영녕공(永寧公)
본관 개성 왕씨
준(綧)
부모 부친 청화후 왕경
모친 미상
형제자매
4남 중 3남 [ 펼치기 · 접기 ]
승화후 왕온(王溫)
단양백(丹陽伯) 왕서(王楈)
영녕공 왕준(王綧)
수사공(守司空) 왕정(王珽)
배우자 몽골 황족[1]
자녀 6남
장남 - 신안후(信安侯) 왕옹(王雍)
차남 - 광화후(光化侯) 왕희(王熙)
3남 - 영인후(寧仁侯) 왕함(王諴)
4남 - 수사도(守司徒) 왕시(王諟)
5남 - 사도(司徒) 왕화(王和)
6남 - 화의군(和義君) 왕림(王琳)
생몰연도 1223년(고종 10년) ~ 1283년(충렬왕 9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기타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고려왕족으로 이름은 왕준(王綧), 작위는 영녕공(永寧公)이다.

직계 조상은 고려의 8대 왕인 현종의 넷째 아들인 정간왕 왕기이다. 아버지는 정간왕 왕기의 6세손인 청화후 왕경으로 삼별초에 의해 강제로 왕으로 옹립된 승화후 왕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승화후 왕온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형이다.

2. 생애

제3차 여몽전쟁 때 고려가 항복하면서 몽골 제국에서 태자의 입조를 요구했는데 고려는 영녕공 왕준을 당시 국왕인 고종의 아들로 속여 볼모로 보낸다.[2] 1253년 제5차 여몽전쟁 직전 영녕공 왕준은 몽골의 재침공 계획을 눈치채고, 고려 사신에게 몽골의 사신이 오면 왕이나 태자 또는 왕자 안경공 왕창이 직접 맞아 호의를 베풀라는 계책을 알려준다. 그러나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항이 이를 듣지 않아 몽골의 재침이 벌어진다. 이에 고려는 안경공 왕창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몽골은 완전히 철병하게 된다. 안경공 왕창은 1254년 8월 귀국한다.

이때 몽골의 황제 몽케 칸(원 헌종)이 안경공 왕창을 만났는데, 안경공 왕창이 몽골에 몰모로 있던 영녕공 왕준의 동생이라고 여겨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데 황려현(黃驪縣)[3] 사람 민칭(閔偁)[4]이 영녕공 왕준이 고종의 친자(親子)가 아님을 알린다. 영녕공 왕준은 자신은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라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며 지금 같이 온 고려의 사신 최린(崔璘)이 자신을 볼모로 보낸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이에 참지정사(叅知政事) 최린은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지 왕의 친자(親子)는 아니며, 사랑하는 자식(愛子)은 남의 아들을 길러서 자기 아들로 삼은 것입니다.'라며 위기를 모면한다. 이어 전에 올린 표문(表文)[5]에도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라고 되어 있다며 확인해 보라고 하자 몽케 칸이 전에 고려에서 보낸 표문을 확인해 보니 표문에 정말로 '친자(親子)'가 아닌 '사랑하는 자식(愛子)'라고 쓰여져 있었다. 결국 누구도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몽케 칸도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넘어가야 했다.[6]

하지만 몽케 칸은 그동안 원만한 성격으로 원에서 잘 어울렸던 영녕공 왕준이 고종의 친자가 아님을 알고서도 "네가 비록 왕자는 아니지만 본디 왕족이고, 우리 땅에 오래 살았으므로 곧 우리의 무리이기도 하다."라고 하며 오히려 신임하게 된다. 1263년[7] 원나라에 의해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의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의 읍루의 땅이었다가 훗날 발해 때는 정리부(定理府)라 불렸고, 거란 때는 흥료군(興遼軍), 금나라 때는 소덕군(昭德軍)으로 불리다 현덕군(顯德軍)으로 개명되었다. 원나라 때 심양로(瀋陽路)로 개명되었고, 영녕공 왕준이 총관으로 임명되기 2년 전에 안무고려인민총관부로 개명되었다.

삼별초의 난 당시 영녕공 왕준의 아들인 신안후(信安侯) 왕옹(王雍)과 광화후(光化侯) 왕희(王熙)가 삼별초 진압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영녕공 왕준은 삼별초에 의해 강제로 왕으로 추대되었던 형인 승화후 왕온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들에게 백부를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녕공 왕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 승화후 왕온은 역적 홍다구에게 살해당한다. 영녕공 왕준은 홍다구 집안과 원래 악연이 있었는데, 몽골에서의 볼모 시절의 영녕공 왕준은 홍다구의 아버지인 홍복원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후 요동의 고려인들을 통치하는 문제를 두고 세력 다툼도 벌였던 것이다. 홍복원은 영녕공 왕준과 다투다 못해 인형에 못을 박아 땅에 묻는 저주를 하고,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무는 격이라며 영녕공 왕준에게 막말을 하기도 했다. 듣다 못한 영녕공 왕준의 몽골 황실 출신 아내가 몽케 칸에게 이를 고발했고 몽케 칸이 사람을 보내서 홍복원을 죽인다.[8] 이에 홍다구는 원한을 품었고 이후 영녕공 왕준을 모함[9]해 몽골에서 실각시킨 뒤 삼별초 진압 때 선수를 쳐 그의 형인 승화후 왕온을 죽인 것이다.

1280년 8월 14일 '이 창의현(昌義縣)[10]에서 유숙하자 영녕공(永寧公)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알현하였다.'[11]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몽전쟁 이후 고려에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3. 가족 관계

4. 기타

5. 대중매체



[1] 《고려사》 반역열전 홍복원 편에 왕준의 처(妻)는 몽골 여자로 황족(皇族)이라고 적혀있다.정확히는 대칸의 부마인 고당왕(高唐王, 몽골 옹구트 부의 족장으로서 황금씨족의 부마인 사람이 갖는 왕호) 부야우트카(孛要合, buyawtqa, 시호는 무의(武毅).)와 조국대장공주(趙國大長公主) 아라카이 베키(阿剌海別吉, 칭기즈칸의 셋째 딸) 사이에 태어난 고명딸, 그러니까 방계 황금씨족[2] 1241년 4월[3] 현재 경기도 여주시[4] 고려 후기의 폐신(嬖臣). 1257년 최항의 아들 최희에게 몽골이 다시 고려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 말해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나 1259년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몽골의 사자 야속달(也速達)의 강권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원나라로 갔다.[5] 예전에 사용하던 외교 문서[6] 출처: 고려사 제신열전 12권 최유청 편 중 최린 부분[7] 원사 권59에는 1263년, 원사 권166에는 126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8] 몽케 칸이 수십 명의 장사(壯士)들을 보내 홍복원을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9] 진금태자(眞金太子)는 중서령(中書令)이고, 영녕공(永寧公)은 고려(高麗)의 상서령(尙書令)인 까닭에 품계가 황태자와 비슷하다 말하고 다닌다며 모함하였다.[10]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11] 《고려사》 세가 충렬왕 편[12] 여말선초의 '교서감 왕미(동양군파)'는 동명이인이다. 여담으로 현재 개성 왕씨의 절대다수는 교서감 왕미의 후손인데, 동명이인이라는 점 때문에 한때 개성 왕씨 족보에서는 교서감 왕미의 후손이 이 사공 왕미의 후손으로 잘못 수록되는 오류가 있었다. 이 사공 왕미는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13] 당시 조선 국왕은 선조[14] 계보는 안경공 왕창 - 한양후 왕태 - 계양후 왕광 - 익양군 왕청(왕정에서 이름을 바꿔 기록했다) - 왕길 - 왕기 - 왕양선 - 왕규 - 왕종우 - 왕귀손 - 왕희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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