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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09:33:59

제안대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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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의 왕자
제안대군
齊安大君
봉호 제안대군(齊安大君)
시호 영효(靈孝)
본관 전주 이씨
이름 현(琄)
국보(國寶)
부왕 조선 예종
모후 안순왕후 한씨
부인 상산부부인 상산 김씨
(象山府夫人 尙山 金氏)
승평부부인 순천 박씨
(昇平府夫人 順天 朴氏)
자녀 양자 낙풍군 이파
(洛豐君 李葩)
묘소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
생몰
기간
양력 1466년 3월 8일 ~ 1526년 1월 6일 (향년 59세)
1. 개요2. 생애
2.1. 밀려난 왕위 계승2.2. 성품2.3. 연기?2.4. 저택과 수진궁2.5. 제안대군 신도비명
3. 가족 관계4.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예종의 적삼남이지만, 친형들인 적장남 이하원과 적차남 인성대군이 모두 요절했으므로 제안대군이 실질적인 적장남이었다. 어머니는 안순왕후 한씨. 조선 왕조에서 어엿한 임금의 적장자이면서 특수한 상황 없이[1] 왕위는커녕 왕세자 자리 근처에도 못 가 본 유일한 인물이다.[2][3]

2. 생애

1466년 2월 13일, 창덕궁 수강전에서 왕세자소훈 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면서 원자에 책봉되었지만 그 다음 해에 1469년 11월, 부왕이 승하하였다. 당시 왕위 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가 4세에 불과하여 조모인 자성왕대비는 백부인 의경세자(덕종)의 차남이자 사촌 형인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즉위시켰다.

1470년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예우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다. 1474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2.1. 밀려난 왕위 계승

예종이 12살에 장순왕후 한씨에게 본 이복형 인성대군은 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더군다나 예종은 후궁들에게서도 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할 금지옥엽이었다.

하지만 당시 4살이라 왕위를 잇기에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할머니 자성대비가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지목하여 왕위에 올리며 제안대군은 완전히 물 먹었다. 사촌 형 월산대군이 제안대군의 아버지(예종)에게 밀려 원손에서 종친으로 전락해 물 먹었던 상황이 그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흔히 사촌 형 자을산군이 한명회의 사위라는 이유로 왕위를 빼앗겼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우선 제안대군이 왕의 적장자로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것은 맞지만, 문제는 아직 원자일 뿐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완전히 후계자로 선포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4][5] 즉 제도적으로도 원손의 왕위계승권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고, 이 상황에서 정치적 고려가 더해진 결과 의경세자의 적장자로 출계가 불가능한 월산대군 대신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종이 조선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 중 하나로 인정받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인 평원대군[6] 이림(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한때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원자였지만 대군의 봉사손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에 수렴청정을 하던 할머니 자성대비가 본인의 뜻과는 상관 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로 인해 제안대군은 제2의 단종이 되는 일은 면했다.

2.2. 성품

제안대군은 멍청하기로 유명해서 당대에 여러 가지 일화들을 남겼다. 명종 때 어숙권이 지은 야사 <패관잡기>에 제안대군의 일화가 몇 가지가 있다.
제안대군 이현은 예종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라고 한 말과 같다.

심지어 남녀 간의 일을 알지 못해서 자손을 낳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패관잡기>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
성종께서 예종의 후사가 없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관계를 알게 해주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시니, 한 궁녀가 나섰다. 궁녀는 밤에 그 집에 가서 제안이 잠든 사이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제대로 일어서고 빳빳했다.몸을 굴리어 서로 맞추어 보았더니, 잠에서 깬 제안은 깜짝 놀라 큰 소리를 지르면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더럽다,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즉, '성관계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조차도 몰랐다'는 의미다. 오줌 누는 중이던 한 하녀의 음부를 보고는 '오리 둥지'라 했다는 이야기 또한 같이 전하고 있다. 패관잡기의 저자 어숙권은 이를 두고 "원래 남녀관계의 일이란 인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거늘 이것을 죽을 때까지 더럽다 여기고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실로 바보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즉 식욕과 마찬가지로 모든 동물(인간 포함)이 가진 원초적 욕구가 성욕이건만 그걸 '더럽다'고 평생 멀리한 걸 보면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 바보가 맞다는 평이다.

그런데 남녀 관계의 일도 전혀 모르는 사람 치고는 남녀 관계 스캔들을 좀 거하게 터뜨린 사람이기도 하다. 흔하디 흔한 이나 기생도 아니고 정실부인 문제로, 그것도 불과 10대의 나이에 큰일 하나 터뜨렸다. 14세 때 본인 아내가 싫다고 어머니 인혜왕대비(안순왕후)한테 졸라 이혼한 후 멀쩡히 재혼까지 했는데, 3년 후 재혼처와 또 이혼하고 전처와 재결합한 것.[7]

실제로 첫번째 부인 김씨가 절름발이에 가례 당시 간질을 앓아서 건강이 나쁘기는 했다. 제안대군과 인혜대비는 김씨가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하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처외조부 유수(柳洙)가 어려서부터 발을 절고 간질을 앓은 것은 사실이나 외조부인 본인이 간병하여 병세가 나아졌고 정신이 혼미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아픈 손가락인[8] 사촌동생 제안대군의 청이라 마지못해 들어주었고, 제안과 김씨는 공식적으로 이혼하였다.

두번째 부인[9]과 이혼하는 과정은 더 가관이었다. 제안대군은 전처와 다시 가까워지면서 이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다짜고짜 이혼할 수는 없었기에 여종 금음물과 내은금 등을 시켜서 독수공방하는 아내를 유혹하게 했다. 그러나 아내가 유혹에 전혀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여종들을 혼내주고 내치자 아예 아내가 잠을 잘 때 몰래 여종들을 동침하게 해서 레즈비언이라고 모함했다. 하지만 아내가 완강히 자신이 모함당했음을 주장하자 여종들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알고 보니 여종들이 제안대군의 명을 받아서 자작극을 벌였음이 드러났다. 여종들 전원은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고,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어머니 인혜대비를 찾아가서 징징대며 빨리 이혼 시켜달라고 애걸복걸했고, 인혜대비는 성종을 찾아가서 "둘째며느리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이혼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처음엔 죄도 없는데 어찌 이혼시키냐고 난색을 보이던 성종도 마지못해서 이혼을 허락해 줬다.

이후 성종은 2번째 부인과도 이혼한 제안대군에게 3번째 부인을 들여주려고 했으나,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와 재결합을 허락해 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겠다!"라고 고집을 부렸다. 이에 성종도 결국 혀를 차면서 3년 만에 전처와의 재결합을 허락해 주었다. 이때 제안대군이 "전처와의 재결합 허락 안 해주면 나 평생 혼자 살 거다!"라고 협박하자 성종이 "네가 네 처를 미워해서 내치지 않았느냐? 왜 미친년 널 뛰듯 하냐?"라고 반문하는데, 이에 제안대군은 "난 그딴 거 모르겠고 암튼 허락 안 해주면 평생 혼자 살 거야!"라고 막가파식으로 응수하면서 결국 꿈에 그리던 재결합 허락을 간신히 받아낸다. #, # 실록을 읽는 후대 사람도 웃기는데 당대에는 어떠했겠나 싶은 대목이다. 이 모든 게 10대 중반에 일어난 일이니 어찌 보면 숙종보다 더 대단한 남자다.[10] 이때 사촌형 성종에게 올린 상소도 언문(한글)으로 올린 탓에 승정원에서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여야 했다. 왕에게 올라갈 공문서는 모두 한문으로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고, 한글을 공문서에 쓰는 경우는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등 여성이 쓸 때뿐이었기 때문이엇다.[11]

성종이 억지에 가까운 제안대군의 청을 들어준 이유는 바로 성종 본인이 예종의 원자였던 제안대군을 밀어내고 국왕에 오른 처지라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12] 위 이혼 소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록에서도 성종이 숙모 인혜대비, 사촌누이 현숙공주[13], 사촌동생 제안대군의 일이라고 하면 일단 한 수 접어주고 최대한 들어주려는 경향이 자주 보였다.[14]

어찌 되었든 제안대군의 이런 모습 때문에 죽고 난 뒤 받은 시호가 영효(靈孝)인데, '영(靈)'은 시법해에 의하면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이라 한다(靈亂而不損曰靈)'는 말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한나라 영제를 생각하면 되는데, 전임자 환제와 함께 '환령(桓靈)'이라는 영이란 단어 자체가 암군의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다. 한 마디로 멍청했다는 것. 그렇긴 해도 청상과부 모친 인혜대비에게는 더없는 효자여서 '효(孝)'자도 붙었다.

2.3. 연기?

이런 행동을 두고 멍청이인 것처럼 연기를 하여 목숨을 보전하려 한 계책이었다는 설도 많이 있다. 제안대군은 혈통만 보자면 광해군영창대군이나 효종이석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종의 정통성에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대개 이런 위치면 가끔 면식도 없는 놈들이 이름을 팔아 밀풍군처럼 역모에 써먹는 경우까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이 모든 사건들은 적절한 바보짓으로 의심을 피하고 역모 주동자들이 한번 걸어볼 만한 최소한의 역량도 보이지 않기 위한 연극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평소에는 멍청해 보였지만 유교 예법을 따라야 할 때만큼은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고...[15] 그 때문에 제안대군이 진짜 바보인지 아니면 연극이었는지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꽤나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로, 당장 중종실록의 〈제안대군 졸기〉에서 사관도 당시 이런 소문을 실어가며 佯愚, 거짓으로 어리석은 척 했다고 기록했다. 100여 년 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제안대군은 역모에 휘말리는 걸 두려워해 바보짓을 하고 자손도 두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오촌당숙 구성군 이준이 유배를 가 죽었을 때 제안대군은 13살 소년이었는데, 구성군은 "너무 완벽해서 모함 받은 왕족"의 대표인사였다. 비슷하게 구성군의 사촌동생이자 제안대군의 또 다른 오촌당숙인 영순군 이부는 몇 번이나 목이 달아날 뻔했고 스트레스 때문에 요절했다. 그런데 상기했듯 제안대군은 '군'인 당숙들에 비해 '대군'이었기에 정통성은 월등히 높았고, 심지어 본래의 왕위계승서열만 따지자면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보다도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안대군이 조금만 똘똘한 걸 티내도 위험했을 가능성은 지대했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제안대군은 전임자(?) 양녕대군과 달리 재혼 스캔들을 제외하면 딱히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고, 조선 최악의 피바람이 불었던 시기들인 연산군중종 시절에도 '멍청해서(?) 왕위를 위협하지 않는 왕실 어른'으로 잘 대접받으며 환갑까지 장수했다. 거기에 불화의 씨가 될 자손도 낳지 않았기에 후손이 없는 게 도리어 신의 한 수가 돼서 후대까지 역모에 휩싸이는 사태도 면했다. 다만 친자손은 없었지만 봉사손을 둬서 전주 이씨에 평원대군파가 있다. 왜 제안대군파가 아니냐면 상술한 대로 제안대군이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입적하여 평원대군파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연기였다면 월산대군보다도 무서운 자기관리가 된다.[16]

오촌 조카 연산군을 홀린 여자로 이름이 높은 장녹수는 본래 그의 노비였다. 그의 가노와 결혼해서 그 집 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안대군이 직접 넘겨주었다고... 연산군이 여자를 하사하기도 하였지만 대군저에 있는 미모의 노비들을 자꾸 데려가는 바람에 연산군에게 삐쳤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는 연산 11년에는 집까지 연산군에게 징발 당했고, 연산군은 제안대군의 집에 뇌영원(蕾英院)이라는 이름의 가흥청(假興淸)을 설치하였다. 일국의 왕족의 집이 기생들의 거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 값을 잘 쳐줘서 징발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제안대군에게 제일 잘해준 사람 중 하나가 연산이다. 연산군은 친할머니 인수대왕대비(소혜왕후) 한씨, 양모 자순왕대비(정현왕후) 윤씨, 이복동생 진성대군(중종)에게조차 형식적으로만 잘 대해줬을 뿐 정을 주거나 친하지 않았지만, 제안대군에게만은 패륜은커녕 오히려 각종 특혜들을 주며 예우해줬다고 한다.[17]

2.4. 저택과 수진궁

제안대군이 살던 집은 이후 수진궁이라는 이름의 왕실 사당으로 바뀌어, 작위를 받기 전에 죽은 왕자녀, 그리고 출가 전에 죽은 공주, 옹주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수진궁은 이후 구한말 때 흥사단 사무실, 수진측량학교 건물 등으로 사용하다가 1909년 공식 폐궁되었다. 현대의 서울 종로구 구청사 인근이다.

2.5. 제안대군 신도비명

공(公)의 휘(諱)는 현(琄), 자(字)는 국보(國寶)이다. 예종 양도 대왕(睿宗襄悼大王)의 아들로, 어머니 안순왕후(安順王后)는 추충 정난 익대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청천 부원군(淸川府院君) 증시(贈諡) 양혜공(襄惠公)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공은 성화(成化)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 2월 13일에 창덕궁(昌德宮) 수강전(壽康殿)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나이 4세 때 예종이 승하(昇遐)하였다. 예종에게는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 공이 어려서 총명(聰明)하지 못하자 정희 왕후(貞熹王后, 세조비)가 성종 대왕(成宗大王)을 받들어 예종의 후사(後嗣)로 삼았다. 공을 제안 대군(齊安大君)에 봉하고는 평원 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의 뒤를 잇는 후사로 삼으니, 평원 대군은 바로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일곱째 아들이다.

공의 나이 12세 때 상주 김씨(尙州金氏)에게 장가들어 배필로 삼으니, 사도시 정(司寺正) 김수말(金守末)의 딸로 상산 부부인(商山府夫人)에 봉해졌는데, 얼마 후 안순 왕후의 뜻을 따라 버렸다. 다시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박중선(朴仲善)의 딸에게 장가드니, 이때 공의 나이 14세였다. 공은 후에 상산 부인을 잊지 못하여 21세에 이르러 또 왕후의 명으로 다시 합하여 지금까지 무양(無恙)하다. 공은 안순 왕후의 상(喪)을 당하여 홀로 별채에서 거상(居喪)하여 상기(喪期)를 마치고도 오히려 애모(哀慕)함이 쇠퇴하지 않았으니, 그 성효(誠孝)는 하늘로부터 품부(稟賦) 받은 것이다.

성종(成宗)이 내린 수찰(手札)은 아무리 짧은 것이라도 꾸며서 족자나 병풍을 만들어 놓고 항상 보배를 구경하듯 재삼 펴 보았으니, 그 공근(恭謹)함이 이와 같았다. 평생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성악(聲樂)을 일삼아 몸소 악기를 연주하였는데, 모두 절주(節奏)가 맞아 비록 스스로 음률(音律)에 정통하다고 하는 자도 모두 굴복하였다. 집안의 여종들도 모두 감화되어 음악을 해득하게 되었는데 연산주(燕山主)가 전후하여 그 여종 넷을 궁중으로 들이고도 계속하여 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이 따르지 않자, 연산주가 노하여 겁을 주어 위협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이때부터 악기를 물리치고 쓸쓸하게 거처하자 연산주 역시 벌을 주지 못하였는데, 성상(聖上)이 즉위하는 날 다시 전처럼 곡을 연주하니, 사람들이 공이 처변(處變)을 잘한다고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공이 일찍이 병을 앓자, 임금이 친히 그의 집에 거둥하여 갖추 위로하였으니, 아! 공의 성대한 영총(榮寵)과 성상의 지극한 돈목(敦睦)은 근고(近古)에 없던 바였다. 이때 이르러 발에 종기가 나니, 임금이 의약(醫藥)을 내려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과가 없이 위태롭게 되었다.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신(臣)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때가 가정(嘉靖)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 12월 14일로, 수(壽) 60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보지 않았으며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도승지(都承旨) 유여림(兪汝霖)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공은 자식이 없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대군(大君)의 후사가 되었으니, 나도 반드시 대군으로 후사를 삼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이천정(伊川正) 이수례(李守禮)에게 상사(喪事)를 주관하라 명하고 또 중사(中使) 박승은(朴承恩)과 서원군(西原君) 한순(韓恂)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계빈(啓殯)하자 제사(諸司)로 하여금 한 사람이 문밖에서 조전(祖奠)하게 하고, 또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俸祿)을 지급하라 명하였으니, 모두 특이한 은수(恩數)였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 3월 초2일, 광주(廣州) 중도음촌(中道陰村)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서원군은 공의 외숙(外叔)이 되는데 부인(夫人)의 명으로 이행(李荇)에게 묘도 문자(墓道文字)를 청하기에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서(序)하고 이어서 명(銘)을 쓰니,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예종(睿宗)의 적자(嫡子)요 세조(世祖)의 손자이시네
왕위(王位)는 돌아가는 곳이 있어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후사가 되었네
대군(大君)의 호 내리시니 지위가 아주 존귀했네
성종(成宗)께서 우애하사 총사(寵賜)가 빈번했네
성악(聲樂)을 잘하시어 금슬(琴瑟)과 훈지(壎篪)를 연주했네
세상 운수 항상 태평하지 않아서 어려운 때를 만났었네
죄 또한 미치지 않아서 스스로 악기를 끊어버렸고, 성인(聖人)이 즉위하자 전처럼 다시 연주하였네
공은 임금의 백숙(伯叔)이 되어 특별한 은혜로 대하였네
전에 병환이 나서 궁궐에 알려지자, 임금이 몸소 임어(臨御)하여 거가(車駕)가 문 앞에 머물렀네
의약을 내려 치료하라는 임금의 말씀 따뜻하여, 영총(榮寵)이 융숭함이 예전에 없던 바이네
부귀(富貴)는 항상 하기 어렵고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네
사지(四肢)의 질환으로 돌아가니 명(命)인데 무슨 말을 하랴? 화복(禍福)의 즈음에는 혼암(昏暗)함으로 보호하였으니, 60세 나이 장수하였고 원통할 것 없네
공이 후사(後嗣)를 두지 못했으니, 어찌 뜻한 바 없으랴? 감산(坎山)의 언덕에 이런 정혼(精魂)이 묻히었네
비석에 이 글을 새기니 후일 속이지 않으리라

3. 가족 관계

상술한 바와 같이 자녀는 없고, 두 부인이 있었다. 전주 이씨 평원대군파 족보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두 부인의 생일이 같다. 참고로 두 번째 부인 박 씨의 몰년에 대한 기록이 실록과 다른데, 실록에는 1485년(성종 16년)에 박 씨가 이미 죽었다는 언급이 있다.

4. 대중 매체

연산군장녹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라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연기했는데, 작가의 시각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묘사된다.

신영균이 연산군으로 나온 신상옥 감독의 2부작 영화 <연산군> & <폭군 연산>(1962)에서는 허장강이 연기했다. 억울하게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나 세월아 네월아 눈물 짓고 사는 허탈한 모습으로 잠깐 나온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설중매에서 젊은 시절은 맹상훈, 중년 이후는 정욱이 연기했다.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MBC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변태' 미술교사로 개그 캐릭터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백윤식이 연기했다. 장녹수의 캐릭터들이 역대 연산군의 극화 중 최고라는 평판에 일조했다. 극중 제안대군은 권력에 뜻을 버리고 풍류에 맞춰 사는 은일지사의 모습을 보여주며, 장녹수의 연모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폭정을 간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어렸을 때부터 제안대군을 따랐으나 제안대군이 하도 잔소리하자 나중에는 장녹수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선물로 제안대군을 죽여주겠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행히도(?) 장녹수는 딸을 낳아 제안대군은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는 유자광이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하자 화를 내며 쫓아낸다. 참고로 둘째 부인의 레즈비언 사건은 제안대군의 자작극이 아니라 진짜로 둘째 부인이 여종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왕과 비[18]에서는 박찬환이 연기했다. 연산군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일생을 망친 인수대비를 저주하면서 연산군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야누스 같은 인물로 나온다. 장녹수와 같은 작가임에도 이 점에서는 묘사가 서로 다르다. 주로 자신의 여종이었던 장녹수와 함께 인수대비에 대한 복수심을 부채질하는 편.[19] 연산군이 처음에는 생모의 묘를 방문하는 거에 대해 다소 회의적으로 여기고 있을 때 장녹수와 함께 "그래도 명색이 어머니이신데 가셔야죠!"라고 성묘하는 걸 부추기는가 하면[20], 183화에서 "어쩌자고 일을 지경으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대군께서는 왕손이 아니십니까? 종묘사직을 먼저 생각을 하셔야지요."라고 말하는 신수근에게 냉혹한 말투로 "그러자면 먼저 대궐 안팎에서 인수대비의 그림자를 말끔히 씻어내야 할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래도 정이 들기는 들었는지 인수대비의 환영 때문에 미쳐버린 연산군에게 진심 어린 충언을 한 몇 안 되는 인물. 뭐 그전까지 실컷 부추겨 놓고서 마지막에 와서 그런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욕망의 불꽃에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딱 맞는 편.

왕과 나에서는 임성표가 연기했다. 차분하고 단아한 순정파로서 누구와도 잘 지내는 호인으로 묘사되지만, 장녹수를 소개해주는 바람에 결과적으론 악역으로 꼽히기도 한다.

JTBC의 사극 인수대비에서는 고윤후가 연기했다. 어리숙하고 바보스러운 인물로 나온 것 같았으나 연산군, 임숭재와 가깝게 지내면서 다소 영악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회에서 연산군과 같이 술을 마시던 도중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가고, 연산군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본래 저 자리는 제 자리였습니다, 대왕대비마마."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걸 봐서는 바보스런 모습은 연기였다는 설을 따른 모양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울지를 않아 친할머니 자성대비가 허겁지겁 달려와 얼러서 겨우 울음을 터뜨리게 할 정도로 힘들게 태어났으며, 이때 (훗날 성종의 아내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송이는 아기가 울자 절망한다.[2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예종, 성종 편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고치고 다니던 청소년기의 일화들을 다루었다. 부왕이 훙서한 후 어머니 인혜대비가 어린 제안대군을 품에 안고, '대행왕께서 오래 사셨다면 네가 왕이었을 텐데'라며 안쓰러워하였다. 청소년기부터는 시종일관 원 역사대로 어수룩하고 개그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여기선 첫 부인 김씨가 남편 못잖은 바보라는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여서, 제안대군도 아내의 혼미함을 두고 '뭐 저런 바보가 다 있느냐'고 한탄하고[22] 시어머니 인혜대비도 '손자를 봐야 하는데 며느리가 저 모양이어서야'라고 걱정하여 성종에게 아들 부부를 이혼시킬 것을 청하게 된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연산군에 빙의한 주인공이 제안대군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다. 여기에서 제안대군은 종친으로서의 위엄도 없고 야심도 없이 그저 유흥이나 즐기면서 사는 한량으로 등장한다. 연회 도중 가무가 뛰어난 여종이 있어서 보여준다며 소개해줬는데, 이를 본 연산군은 '앳된 외모에다 가무도 참 훌륭하다'라고 칭찬한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벌써 서른이 넘은 아이입니다. 이름은 장녹수라고 하죠. 원하신다면 궁으로 보내드릴까요?'라고 말한다. 이에 퍼뜩 정신이 든 주인공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이후엔 궁중 연회 때 따로 제안대군에게 부탁해서 초대 가수 형태로 부르기만 한다.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 바보를 연기하지만 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장녹수가 이를 알고 강제로 제안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본인은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징징거리면서 버티고, 결국 반정 진압 후 아주 아작이 난 다른 반정 인사들과 달리 연산군에게 용서받아 목숨을 건져 유배되는 선에 그치고, 그마저도 연산군이 편의를 봐주어 편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실제 역사상의 생존왕(?)스러운 면모를 어느 정도 반영한 듯. 다만 바보 연기는 웹툰판 설정으로 원작 웹소설에선 연기가 아닌 진짜 바보라는 설정이다.

[1] 물론 당시 4살로 왕위에 앉기에는 너무 어렸다.[2] 그 밖에 임금의 적장자이면서도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경우는 태조의 적장남 진안대군선조의 적장남 영창대군이 있다. 진안군은 본인이 조선 건국에 반대해 세자 자리를 거부했다는 야사가 있긴 한데, 실상은 그가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창왕이 보위에 오르게 한 일등 공신인 데다 공양왕과 사돈간이라는 점이 걸림돌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 점은 차치하더라도 조선 개국 이듬해에 죽었으니 어차피 왕이 되지는 못했겠지만.(사실 후에 정립된 원칙대로라면 그의 장자 이복근이 세손이 되어야 했겠지만, 아직 원칙이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건국 초기와 어떤 이유로든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았던 진안군의 상황, 야심만만했던 태조의 다른 아들들 등 이 세 가지가 맞물려 결국 잊히고 말았다.) 또 한편 영창대군은 워낙 늦둥이이다 보니 태어났을 때 이미 이복형 광해군이 15년째 세자로 재위 중이었고, 광해군은 이미 한참 전인 임진왜란때 나름 훌륭한 국정의 업적도 있어서 부왕보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더 많아서 자르기가 매우 힘들었다.(광해군의 전성기를 임진왜란 초기 부친이 정주로 도망간 상황에서의 세자 역할로 보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 그러나 제안대군은 그러한 특수한 요소가 없었음에도 왕은커녕 왕세자에도 책봉되지 못한 것이다.[3] 그리고 사실 광해군은 이미 세자로 책봉된 상태였고 이는 다시 말하면 왕비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기 때문에 영창대군과 비교해도 정통성에서 꿇린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4] 세자라는 지위, 그리고 세자의 책봉식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 '이 아이는 이제 국왕의 유고와 동시에 왕위를 대행/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단순히 생물학적 연령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세종이 괜히 적장손 이홍위(단종)를 왕세자(문종)가 생존한 상태에서 왕세손으로 책봉하고 남은 생애 내내 왕세손의 지위와 제도 확립에 애쓴 것이 아니었다. 연산군이 조선은 왜 8~9세가 되어야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지 묻자, 예조에서 반드시 성립(成立)하여 행례(行禮)를 감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참작하고서 책봉한다는 것인 듯하다고 답한 일도 있었다. 즉 적어도 글은 읽고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5] 마찬가지로 제안대군의 이복형인 인성대군도 원손이었을 뿐 세자 혹은 세손 상태에서 사망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세손이 아닌 일개 왕족 자격만 인정되어 인성군으로 추봉되었다.[6]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7] 성종실록에서도 제안대군의 이혼 관련 내용만 10번도 넘게 언급된다. 비단 이것 말고도 제안대군이 이혼한 전처와 합했다는 둥 온갖 해괴한 묘사들이 다 튀어나온다. 이에 대해 전처가 몸이 안 좋아 아이를 못 낳을 것 같으니 후대까지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던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8]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이 뼈가 있는 게 예종의 적장자로써 원칙상 예종 사후에 즉위하는 것은 성종이 아니라 제안대군이어야 했다.[9] 평양군 박중선의 7번째 딸로,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의 누이이자 월산대군의 정실 승평부대부인여동생이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에게는 이모가 된다.[10] 다만 바로 재결합한 건 아니고 재혼처의 사후(死後)에야 재결합이 공식적으로 허가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해는 성종 10년(1479년), 재혼처와 이혼한 해는 성종 13년(1482년), 재결합한 해는 성종 16년(1485년). 출처는 조선왕조실록.[11] 사실 조선 시대 종친들은 오히려 공부를 소홀히 했다. 구성군 사건을 계기로 어차피 백날천날 공부해 봤자 벼슬길에 나설 수도 없고, 똑똑하다고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자칫하면 엄한 역모 사건에 자신도 모르게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12] 다만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가 요절하지 않아 그대로 왕위에 올랐다면 성종 또한 삼촌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는 과정도 없이 곧장 왕위를 이었을 것이니(다만 이 경우도 형 월산대군에게 서열이 밀린다) 어떻게 보면 원래대로 컴백한 꼴이다. 물론 예종이 왕이 된 순간부터 원래 과정이 어쨌든 순번은 일찌감치 몽땅 날아가버린 것이긴 하지만...[13] 제안대군의 누나.[14] 물론 자신의 정통성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계승 서열 3위였다는 것은 성종에게 있어 평생의 콤플렉스였는데, 제안대군이 알아서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멍청한 행동들을 해 주면 성종 자신의 정통성이 더욱 굳건해지기 때문이다.[15] 조선의 유교 예법이 지극히 복잡했다는 것은 오해지만, 현재의 예법이 조선 시절보다 간소화된 건 사실이고 일반 양반 가문의 예법보다 왕실의 예법이 훨씬 복잡했다. 평소에 실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일반인에게도 힘든 규정을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따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이 때문에 제안대군이 실없이 행동한 것과 대비되게 예법을 지킨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서번트 증후군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16] 그래도 편하기는 제안대군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월산대군은 이미 어릴 적부터 호평을 들어서 이제 와 바보 연기 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자질을 감추며 어떻게든 실수를 하지 않으면서 처신을 똑바로 해야 했기에 제안대군은 바보처럼 살더라도 제맘대로 하다 살다 갔는데, 월산대군은 그러지도 못했다. 만일 제안대군이 진짜로 바보 연기를 했다면 그것도 가능했던 게 아버지가 죽을 때 겨우 4살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때 15세였던 월산대군과의 차이점으로, 15세라면 친정까지도 가능한 나이였다. 그러니 이미 재능을 보여준 월산대군은 바보 연기를 하고 싶어도 못하지만 제안대군은 바보연기를 하고 싶다면 맘껏 할 수 있는 것.[17] 한편으로는 제안대군의 어머니인 인혜대비가 성종 즉위 당시 왕실 어른 중에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가장 지지해서인 것도 있다. 참고로 인혜대비는 연산군 즉위 4년 만에 사망해서 법적 손자 연산군이 본인 아들의 노비 장녹수와 놀아나는 것까진 못 봤다. 재위 4년 차쯤의 연산군은 경연을 자주 빠지는 뺀질거리는 기질은 있어도 최소한 학정은 하지 않아 아직 정상인 축에 속하던 시절이었다.[18] 장녹수의 작가 정하연이 대본을 집필했다.[19] 공교롭게도 배우 박찬환은 몇 년 뒤 2003년 MBC 대장금에서는 갑자사화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는 서장금의 아버지 서천수를 연기하게 된다.[20] 결국 연산군은 모친 폐비 윤씨의 묘소를 들렸다가 묘 상태가 말이 아닌 걸 보고 본격적으로 할머니에 대한 복수심이 한층 더 강화되어 버린다.[21] 이 작품에선 송이는 처음부터 승은을 목적으로 단종 시절부터 입궁해 있었다. 단종을 보고 첫눈에 반해 승은을 꿈꾸었으나 이미 단종에게는 왕비가 있었고, 훗날 쫓겨났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으며, 세조는 나이가 많고 조강지처만 바라보는 애처가에(실제 역사도 세조의 승은 후궁은 없었으며 마지못해 간택후궁 2명을 들였다.) 정희왕후의 치맛바람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포기. 자을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냈고 왕위계승 서열이 예종 바로 다음이었기에, 예종이 후사를 낳으면 성종의 계승권이 밀려남과 동시에 자신도 신분상승의 꿈을 좌절당하니 송이 입장에선 태어나면 안 되는 아기였다.[22] 근데 집안 종들은 아내를 보고 바보라 한탄하는 제안대군의 모습을 보고 '자기는...'이라고 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