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한국 | 중국 | 일본 | 유럽 | 창작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2em; word-break:keep-all" {{{#!folding 【 작위 목록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한자문화권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王 왕 | 公 공 | 侯 후 | 伯 백 | 子 자 | 男 남 | 君 군 | }}} | ||||||
<colbgcolor=#989898> 체계 | 이성왕 | 오등작(개국작) · 이십등작 | 외명부 | 봉호 · 존호 · 궁호 | |||||||||||||
왕작 | 친왕(親王) · 사왕(嗣王) | 국왕(國王) · 군왕(郡王) · 현왕(縣王) | 국공(國公) | |||||||||||||
군작 | 대원군(大院君) · 대군(大君) · 부원군(府院君) | 경(卿) · 윤(尹) · 정(正) · 수(守) · 령(令) · 감(監) · 장(長) | 위(尉) | |||||||||||||
유럽 | ||||||||||||||
제후층 | 대공 · 프린스 · 공작 · 후작 · 백작 | |||||||||||||
성주층 | 자작 · 남작 | 영주 · 준남작 · 기사 · 에스콰이어 | |||||||||||||
동유럽 | 크냐지 · 보이보드 · 보야르 | 드루지나 | |||||||||||||
동로마 제국 | | 카이사르 · 포르피로게니투스 · 데스포티스 | |||||||||||||
신성 로마 제국 | 선제후 | 퓌르스트 · 주교후 · 제국백 · 궁정백 · 변경백 · 방백 | 성백 · 제국기사 | |||||||||||||
중양 | ||||||||||||||
군주·제후 | | 라자 · 말리크 · 샤 · 술탄 · 칸 | |||||||||||||
봉신·관료 | | 파샤 · 아미르 · 셰이크 · 베이 · 랄라 · 아가 · 나와브 · 샤리프 · 사이이드 · 마르즈반 · 노얀 · 콩타이지 · 조논 | |||||||||||||
기타 | ||||||||||||||
| 태자(세자·도팽) · 공왕 · 소군(小君) · | }}}}}}}}} |
1. 개요
한국사의 작위 제도 변천을 서술한 문서이다.고대(古代)에는 여러 군장이 사용하던 고유 칭호가 작위의 개념처럼 사용되기도 했고, 유교의 영향을 받아 오등작 개념이 도입된 사례도 보인다. 고려에서는 송나라에서 시행한 개국작을 도입하면서 봉작제(封爵制)를 정립했으나, 원 간섭기에 제후국의 작위 제도 개념으로 봉군제(封君制)를 제정했다. 조선에서는 대체로 봉군제를 시행했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엔 기존의 봉군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황족을 대상으로 왕작(王爵)을 수여하고 신하에게 공작(公爵)을 수여한 사례가 있다. 대한민국은 작위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상훈 체계로 훈장(勳章)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작위와 관직의 세습이 부정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작위만큼은 세습을 보장했던 중원 왕조와는 대비되는 특징이다. 대신 고위 관료가 죽으면 자손에게 관품이나 지위를 일부 더해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승습(承襲)'으로 불렀다. 승습이 이뤄지는 경우에는 선대의 지위나 관품을 그대로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봉작의 경우에는 승습이 이뤄질 때마다 새로운 책봉이 이뤄지는 개념이었기에 세대마다 봉호가 다른 경우도 많다. 조선에서는 대원군과 공신의 사손(嗣孫)에 한정하여 승습이 인정되었다.
2. 고대
자세한 내용은 군주의 칭호 문서 참고하십시오.원삼국시대까지 한민족 계통 국가의 임금들은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그 칭호들은 한자식 표기가 정착되자 보통 왕(王)으로 번역되어 기록되었고, 신라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고유 칭호를 버리고 왕을 정식 칭호로 채용하기도 했다. 다만 연맹왕국 단계일 때 연맹체 구성원이었던 군장들이 사용한 고유 칭호가 기록으로 남아있고, 그 당시에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고유 칭호가 삼국시대 이후에는 관등제(官等制) 계급 명칭으로 활용되는 것도 발견된다. 중국의 관제가 도입되면서 그 영향으로 오등작을 사용한 사례도 보이는데, 특히 기록이 부족한 고조선·백제·발해 등의 경우엔 고유 칭호를 발견할 수 없고 오등작이나 중국의 관직명에서 유래된 칭호가 사용되는 것만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의 임금은 후(侯) 칭호를 사용해오다가 왕(王)을 칭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있으며 칭왕 이후로 '비왕(裨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신하가 보인다. 또 예군(穢君·濊君)처럼 예속 집단 중에 '군(君)'을 칭호로 사용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상(相)'을 칭호를 쓰는 인물이 백성을 사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고, 조선상(朝鮮相)이나 니계상(尼谿相)처럼 지명과 결합된 형태도 등장하고 있어, 상(相)을 관직이 아닌 고조선에서 사용된 작위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한(韓)은 연맹체를 대표하는 진왕 아래로 각 소국의 임금들이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순서의 고유 칭호를 사용했다.[1] 《삼국지》에는 마한의 진왕에게 신속된 진한과 변진(弁辰)은 24개국 가운데 12곳이고 진한과 변진 중에 왕이 있는 나라가 12곳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진왕이 주도하는 연맹체에 소속되지 않은 나라는 그냥 왕으로 통칭된 것으로 보인다.[2] 또한 《삼국지》에는 신지에게 덧붙이는 특별히 우대하는 칭호인 '우호(優呼)'가 주어지기도 했다고 하는데, 해석 방법에 따라 진왕에게 붙는 신지 칭호로 보기도 하고 목지국과 함께 연맹체를 이끄는 4명의 신지에게 주어진 칭호로 보기도 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삼한/군장 문서 참조.
부여는 임금 휘하에 연맹체 구성원 격으로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제가(諸加)'로 통칭하는 유력자가 있었다. 고구려에도 왕족이나 합병된 소국의 군장 등이 대가(大加)·고추가(古雛加)·고추대가(古鄒大加)처럼 같은 종류의 칭호를 사용한 사례가 발견된다.[3] 따라서 부여와 고구려에 '가(加)'로 불리는 고유 작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4] 또한 고구려에는 부용국의 임금 및 왕족을 왕(王)이나 후(侯), 국군(國君) 등으로 책봉한 사례도 있다.
백제는 부여곤지와 목간나처럼 왕족이나 신하를 왕(王)·후(侯)로 책봉하고, 그 사실을 남조 측에 국서로 알려 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 발견된다. 그러나 기록이 부족하여 다른 작위나 고유 칭호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신라의 연맹체 구성원은 '간지(干支)' 또는 '간(干)'이라는 고유 칭호를 사용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는 그러한 간지들도 지증왕과 함께 7왕(七王)으로 통칭되고 있어, 당시 신라 연맹체에서 왕(王) 칭호가 연맹체의 대표인 임금이 전용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또한 부용 세력의 수장으로 보이는 '촌주(村主)'가 비록 왕으로 칭해지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간지 칭호를 사용하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 후일 신라의 임금은 보덕국 왕을 책봉하거나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했고, 부용국으로 거느리던 우산국이나 탐라국의 군주를 그대로 왕으로 호칭하는 등, 사실상 황제국 행세를 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7왕'의 사례처럼 왕 칭호를 임금이 전용한다는 개념이 강하지 않았고, 격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종속 세력과 완전히 차별화된 칭호를 사용한다는 개념도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지증왕이나 후일 신라 왕족의 칭호인 갈문왕 또한 그와 같은 개념일 것이다.
가야의 경우 사비회의 참석자 명칭이 열거된 《일본서기》 기록을 통해 고유 칭호를 찾아볼 수 있다. 가야에서 가장 강한 반파국과 안라국 두 나라의 임금만이 왕(王)으로 호칭되며, 다른 작은 나라의 임금들은 '한기(旱岐)'로 불렸는데 이는 신라의 간지(干支)와 같은 계열의 칭호로 여겨진다. 이외에 한기 아래의 작위로 보이는 하한기(下旱岐)나 차한기(次旱岐), 그리고 귀족 계급으로 추측되는 상수위(上首位)·이수위(二首位) 등이 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주변 나라들을 병합하고 점차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여러 한민족 계통 국가는 결국 이 세 나라로 정립되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기존의 연맹체 구성원이 관료적인 성격을 갖는 중앙 귀족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거쳤고, 종래의 부용 세력이 지방으로 편제되어 그 군장은 지방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귀족 간의 신분 서열을 규정하고 그 서열에 따라 관직을 배분하는 체계가 등장했는데, 이를 관등제(官等制)라고 한다.[5] 관등제는 출생 당시의 신분을 엄격한 수준으로 규율하여 신분 등급의 이동을 제한하는 제도였으나, 고구려의 대막리지나 신라의 태대각간·대각간 같이 비상설 관등을 두거나, 신라의 중아찬(重阿飡) 같은 특진 제도인 중위제(重位制)를 통해, 관제 운용의 융통성을 확보하고 신분 간의 갈등을 완화하기도 했다.
발해는 특정한 성(姓)을 가진 유력 가문만 관직을 맡은 것으로 보이므로 귀족 신분이 존재한 것으로 여겨지고, 대조영이 외교 의전상 신라로부터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받기도 했지만, 따로 관등제를 제정해 운영한 것은 확인되지 않으며, 발해의 작위 체계에서 고유 칭호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나라의 관제를 도입한 영향으로 관등제 대신 개국작과 관품제(官品制)의 산계 개념이 함께 쓰인 것이 확인된다. 또한 "허왕부(許王府)"라고 적힌 금석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등작 위에 왕작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에는 각 나라에서 신라의 관등 체계를 따온 독자적인 관등제가 시행되고 있었으나 이미 신분 질서가 무너진 상황이었기에, 골품제처럼 귀족 신분과 그 서열을 규정하기 위해 쓰이지 않고 관품(官品) 개념으로만 쓰였다. 당시 군벌은 왕봉규의 사례처럼 절도사 같은 중국식 관직을 자칭하거나 스스로 한남군개국공 같은 작위 형태의 칭호를 사용하며 외국과 교류하기도 했다. 후삼국이 정립되면서 각 군벌은 왕을 자칭했다. 태봉의 경우엔 신라를 멸도(滅都)로 부르며 적대시하긴 했지만, 후백제나 고려는 신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는데, 대표적으로 견훤과 왕건은 서로 주고받는 서신에서 허울만 남은 신라 왕실을 황옥(黃屋)[6]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도 서로를 신라의 역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다.
3. 고려
고려는 초창기에 왕자들을 대상으로 태자(太子)나 군 계통의 칭호를 수여해왔으나, 980년에 최지몽을 동래군후(東萊郡侯)로 책봉한 것을 시작으로 개국작 계통의 작위를 사용했다. 신라와 태봉에서 유래된 고유 관제가 중국식 관제로 개편됨에 따라 종실 왕족도 오등작에서 기원한 칭호만 사용하는 작위 제도가 정립되었는데, 이를 봉작제(封爵制)라고 한다. 고려의 공식적인 지위가 제후국으로 격하된 원 간섭기에 봉작제를 폐지하고 봉군제(封君制)를 도입하게 되었다.고려의 작위는 세습되지 않았으나, 선친의 산계나 작위의 일부를 잇는 승습(承襲)은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왕족은 최소한 삼공 산직(散職)이 주어졌고, 고위 관료의 자손도 사실상 신분을 세습하는 문벌귀족이나 권문세족이었기에, 결과적으론 모두에게 작위가 책봉되어 대를 이어 나가는 형태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작위를 책봉할 때는 대상자의 보통 본관 지명이나 그 별칭을 따와 봉호를 정했다. 식읍은 실제로는 수여하지 않고 관련 규정에 따라 추가적인 녹봉으로 대신 지급했다. 왕족의 경우에 초기에는 외척의 본관 지명을 따오거나 단순히 추상적인 미칭을 존호로 지정하여 수여하기도 했지만, 봉작제가 정립된 이후로는 국내·외의 지명이나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지정했다.
3.1. 초기 종실 칭호
아래는 건국 초기에 고려 왕실에서 쓰인 특별한 칭호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성(異姓) 신하는 이 시기부터 개국작 계통의 작위를 수여했다.- 태자(太子) · 정윤(正胤)
고려 초기에는 왕의 후계자가 아님에도 태자 칭호를 받은 다수의 왕자가 있었다. 정식 후계자는 따로 정윤으로 지명했다. 태조는 여러 호족과 정략결혼을 맺었는데 호족의 딸이 후궁 신분이더라도 그 소생 왕자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짐을 표현하고자 다수의 왕자에게 태자 칭호를 수여한 것이라 판단된다. 정식 후계자가 아닌 태자가 책봉되는 사례는 광종의 차남인 효화태자(孝和太子)와 대종의 아들인 효덕태자(孝德太子)·경장태자(敬章太子)가 마지막이며, 성종 이후 별도로 정윤으로 지명하는 일도 없어졌다.
- 군(君) · 공주(公主), 국사(國師)
태자 칭호가 없는 왕자들은 군 칭호가 수여되었으며, 왕녀에겐 공주 칭호가 주어졌다. 출가하여 승려가 된 왕자는 고승(高僧)이 받을 수 있던 국사 칭호를 받았다. 군과 공주의 봉호는 보통 두 글자로 쓰였는데, 외척의 본관 지명을 활용한 경우도 보이고, 거주하고 있는 궁원(宮院)의 이름에서 따온 궁호도 보이며, 추상적인 미칭인 존호나 시호의 성격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7] 당시에 쓰인 금석문에는 성명을 직접 봉호처럼 쓴 사례도 있다. 1031년 현종이 자신의 4남 왕기를 개성국공(開城國公)으로 책봉한 것을 시작으로 왕족에게 오등작 계통의 작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원 간섭기에 봉군제가 정식으로 제정되기 이전까지의 마지막 봉군(封君) 사례는 정종(靖宗)의 왕자인 애상군(哀殤君)이다. 그 무렵부터 왕녀의 공식 칭호 또한 공주(公主)로 단일화된다.
- ○비(妃) · 원비(院妃), 부인(夫人) · 원부인(院夫人) · 궁대부인(宮大夫人) · 궁부인(宮夫人)
중국식 후궁 제도가 정식으로 도입되기 이전까지 왕의 후궁 또한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비(妃) 계열의 칭호를 사용하는 후궁은 1자 존호를 사용하는 ○비와 원비가 있었고, 그 외에는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부인 계열의 칭호를 사용했다. 원비·원부인·궁대부인·궁부인은 자신의 관저 이름을 칭호로 삼은 경우이고, 그 밖의 부인 칭호는 추상적인 미칭을 존호로 삼거나 시호인 경우로 보인다. 부인 계열의 칭호는 후궁 외에도 왕족이나 고위 관료의 배우자에게도 수여한 사례가 있다. 관저 이름으로 칭호를 삼는 관례는 정식으로 내명부와 외명부가 제정된 뒤에도 계속되어 왕후(王后)와 후궁이나 공주는 자신의 존호나 관저의 이름을 따와 '궁주(宮主)'로 호칭되는 일이 많았다. 원 간섭기에 왕의 후궁은 ○비와 원주(院主) 칭호만을 사용하게 되었고 왕녀의 칭호 또한 옹주(翁主)로 바뀌었는데 이 때 궁주 별칭 또한 사라져서 간혹 택주(宅主)로 격을 낮춰서 쓰기도 했다가 공양왕 때 다시 궁주를 사용했다.
- 대왕(大王) · 군왕(郡王)
신라왕이었던 정승공(正承公) 김부(경순왕)는 975년에 경종이 상보(尙父)로 책봉했을 당시 이미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작되어 있었다. 사서에 기록으로 남진 않았으나 김부의 손자인 실직군왕 김위옹(金渭翁)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대를 이어 왕작이 책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태조의 아들인 왕정(王貞)이 문원대왕으로 봉증(封贈)된 사례가 기록으로 남았다.[8] 왕작을 책봉한 사례는 작위 제도가 정립된 문종 이후에도 일부 발견된다.
- 소군(小君) · 택주(宅主)
고려에서 정식 후궁이 아닌 궁녀나 천민 출신 폐첩(嬖妾)은 왕의 자녀를 낳더라도 후궁으로 승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고, 폐첩 소생은 왕의 자녀라 할지라도 서얼조차 아닌 사생아로 여겼다. 조선에서 궁녀가 왕의 자녀를 낳으면 비록 차별은 있을지언정 후궁으로 승격했고, 왕족의 서얼도 공식적으로 종친으로 예우했던 것과 대비된다. 왕이나 다른 왕족의 사생아인 남자는 승려로 출가시켜 출가한 절의 이름을 따와 ○○소군으로 칭했고, 여자는 장애가 있어 공주로 책봉되지 못하는 왕녀처럼 궁궐 밖의 집을 주어 그 집의 이름을 따온 ○○택주로 불렀다. 바로 유년기의 현종이 소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종의 경우 정식 혼인 관계에 따라 출생하지 않았기에 사생아로 취급되었을 뿐 부모가 모두 왕족이므로 그 신분이 유지되었고 왕가가 단절되어 가는 상황까지 겹쳐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소군과 택주는 왕족 신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소군과 택주는 작위 성격을 갖는 칭호가 아니며, 봉작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 되었다.
3.2. 봉작제
종실 | 이성(異姓) | ||||
관품 | 작위 | 식읍 호(戶) | 관품 | 작위 | 식읍 호 |
<colbgcolor=white,#505050> - | 왕(王) | (추봉?) | <colbgcolor=white,#505050> 종2품 | 개국공(開國公) | 2,000 |
정2품 | 국공(國公) | 3,000 | 정5품 | 개국후(開國侯) | 1,000 |
공(公) | 개국백(開國伯) | 700 | |||
후(侯) | 개국자(開國子) | 500 | |||
정3품 | 백(伯) | ? | 종5품 | 개국남(開國男) | 300 |
《고려사》 백관지에서 작위는 공(公)·후(侯)·국공(國公)-군공(郡公)-현후(縣侯)-현백(縣伯)-개국자-현남(縣男)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확인되는 종실 작위는 '○○공'·'○○후'·'○○백' 형태였으며,[9] 이성 작위는 위의 표와 같이 모두 본관의 지명과 연칭되는 개국작 형식이었다. 또한 위의 표와 같이 작위에 책봉되면 초수(初授)되는 식읍 규모가 기록되어 있으나, 해당 규정은 현종 때의 책봉 사례에서만 유효한 기준이며 그 이후로는 일정한 규칙성을 확인할 수 없다.[10] 작위와 별도로 중국에서 유래한 훈직(勳職)인 정2품 상주국(上柱國)이나 종2품 주국(柱國)을 겸하기도 했다.
종실 왕족은 '제왕(諸王)'으로 통칭되었으며,[11] 작위에 책봉된 왕족을 상대로 전하라는 경칭을 사용하고 그 적실 배우자는 '비(妃)'로 칭해졌다. 공(公)은 승작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고, 왕자와 국구가 된 방계 왕족은 후(侯)로 초봉(初封)되며, 부마가 된 방계 왕족이 백(伯)으로 초봉된다. 고려 왕족은 보통 족내혼을 통해 왕족 간에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던 점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혼인을 통해 작위가 세습되는 형태가 된다. 또한 혼인을 통한 책봉 과정이 없는 방계 왕족도 작위가 있는 사례가 드물게 있어서, 선친의 작위를 낮춰 계승하는 승습이 이뤄지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봉된 종실의 아들이나 사위는 작위를 받지 못하더라도 정1품 산직(散職)인 삼공 가운데 사도(司徒)나 사공(司空)을 초수했다. 작위가 있는 종실도 대개 산직인 삼사나 삼공을 함께 받았으며, 일부는 명예직인 상서령(尙書令) 또는 중서령(中書令)을 겸하기도 했다. 당시 고려에는 정1품 산계가 없었기에 산직을 겸할 경우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수(守)'자를 덧붙였고, 명예직 앞에는 '겸(兼)'을 붙여서 구분했다.
국공 작위는 현종 때부터 등장했다. 고려의 왕태자는 외교 의전상 요나라에서 고려국공(高麗國公)이나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책봉되었고, 이자겸이 국공이었을 때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다는 점 등을 살펴보면, 국공은 고려 초기 여러 왕자에게 수여했던 태자 칭호를 대체했으며 왕태자와 같은 격의 작위로 추측된다. 또한 생전에 국공이었던 정간왕과 양헌왕의 사례에 비춰보면 사후 왕작에 추봉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 신하가 국공이 된 적은 이자겸이 인종을 협박하여 자기 작위를 한양공(漢陽公)에서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셀프승격한 사례 하나 뿐으로, 이후 숙청당하면서 삭탈되었고 죽은 뒤엔 원래의 한양공으로 추증되었다. 임금을 2번이나 폐위시킬 정도로 가장 막강한 권세를 가졌던 최충헌조차 국공에 책봉되지 않은 점에 비춰보면, 원래 종실 전용 작위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고려 당시부터 봉호에 국공을 명기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국공과 일반 공(公)이 쉽게 구분되지 않아서 실제 국공에 책봉된 사례를 파악하기 어렵다. 인종이 녹봉 규정을 개정했을 때 종실 항목에서 국공이 언급되는 점에서 당시까지는 시행된 작위로 확인된다.[12]
이성 작위인 개국작의 봉호는 본관 지명이나 그 별호를 따온 '○○군(郡)'·'○○현(縣)' 형식으로 쓰였는데, 개국작 형식을 생략하여 단순히 봉호와 작호(爵號)만 표기하는 사례도 많다. 또한 본관의 실제 행정구역이 부(府)·목(牧)일 경우에는 군 등급으로 격을 낮춘 별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본래 중국의 개국작은 작호가 군 등급인지 현 등급인지에 따라 격이 구별되는 별개의 작위이나, 고려에서는 그러한 차등이 없던 것으로 파악된다.[13] 참고로 작위를 받은 이성 신하에게는 저하(邸下)라는 경칭을 사용했다.
3.3. 봉군제
원 간섭기에 고려의 지위가 제후국으로 격하되고, 원나라에서 고려의 관제가 천자국의 제도에 맞춰 시행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제후국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여,[14] 1298년 충선왕이 봉작제를 폐지하고 봉군제(封君制)를 제정했다.- 부원대군(府院大君)
- 부원군(府院君): 정1품
- 군(君): 종1품
- 원윤(元尹): 정2품(종실제군), 종2품(이성제군)
- 정윤(正尹): 종2품(종실제군), 정3품(이성제군)
《고려사》 백관지에선 대군(大君)-원군(院君)-제군(諸君)-원윤-정윤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군과 원군은 각각 부원대군과 부원군의 약칭에 해당되고, 제군(諸君)은 봉군된 왕족 전체를 아우르는 통칭으로 앞서의 제왕(諸王)을 대체한 용어로 판단된다. 원윤과 정윤은 현종 때부터 종실에게 수여했다가 이후 산직인 삼공으로 변경되었고 충선왕이 재도입한 것처럼 전하지만, 고려 전기에 태조의 직계 왕족이 원윤이나 정윤을 받은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15]
공민왕 때인 1356년에 정1품 작위로 오등작을 도입했으나 1362년에 오등작을 폐지했고, 1369년에 오등작을 복구했지만 1372년에 다시 폐지했다. 오등작이 시행된 동안에도 봉군제는 여전히 병행되어 운영되었다.[16]
봉군제는 종실과 이성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단일한 작위를 시행했다. 하지만 원윤과 정윤의 품계는 종실과 이성이 달랐으며, 의전상의 서열 또한 종2품 원윤인 종실은 정1품인 정승(政丞)보다도 높은 예우를 받았다. 또한 원윤과 정윤에는 봉호가 수여되지 않았다.
봉군제는 기본적으로 봉작[爵] 개념으로 시행되었으나, 산관(散官) 성격의 직위[職]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성 신하는 현직을 맡는 동안에는 작위가 회수되었으며,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 다시 봉작되어 해당 품계의 재추가 받는 녹봉을 받는 특전이 주어졌다. 공민왕 때 오등작을 최종 폐지하면서 다시 현직과 봉작을 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군(작위) 문서 참조.
공양왕 즉위 직후인 1390년에 특이한 사례가 있다. 공양왕은 자신의 4대조를 공(公)으로 추존하고 특히 자신의 부친은 삼한국인효대공(三韓國仁孝大公)으로 칭호를 정했는데, 이는 동아시아에서 대공을 공식 칭호로 사용한 유일한 사례이다. 또한 '폐가입진'이란 명분을 내세워 자신을 옹립한 흥국사 9공신에게 이전 개국작 형식과 유사한 이례적인 작위를 책봉했다. 이 9개 작위는 세습을 인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망하면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 개국충의백(開國忠義伯)
- 이성계: 화령군개국충의백(和寧郡開國忠義伯)
- 충의백(忠義伯)
- 충의군(忠義君)
정몽주를 충의군에서 충의백으로 승작한 것 이외엔 공양왕 대의 봉군 사례가 기존 봉군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변칙적인 즉위로 인한 특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지용기·설장수·박위·정도전의 봉호가 언급되지 않는데, 4명 모두 고려 말에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의 정쟁에 휘말려 삭훈된 적이 있기 때문에 봉호가 생략된 것으로 판단된다. 《삼봉집》에 따르면 당초 정도전은 봉화현충의군으로 봉해졌으나 이후 봉화군충의군이 되었는데, 정도전의 본관인 봉화군이 그전까지는 속현이었다가 1390년에 주현으로 승격하면서 봉화군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3명은 달리 확인되는 기록이 없다.[17]
4. 조선
자세한 내용은 군(작위) 문서 참고하십시오.조선 개국 초기에는 부원군·군이 시행되는 가운데 백(伯)이 책봉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봉군되지 않은 종친은 원윤·정윤으로 봉해졌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왕자는 공(公)으로, 그 외 종친·부마는 후(侯)로 책봉했는데, 종실 친인척의 위상을 백(伯)의 위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子)와 남(男)은 도입되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한 뒤인 1401년에 공·후·백을 폐지하여 왕자는 대군, 정1품은 부원군, 그 외는 군으로 고쳤다.
고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조선도 신하를 봉작할 때에는 봉호를 본관의 지명에서 따왔다. 건국 초에 왕자는 추상적인 미칭을 존호로 사용했으나 세종의 왕자부터는 국내의 지명으로 봉호를 정했고 왕손 이하는 대체로 어머니의 본관에서 따온 읍호를 사용하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세종 이후 관제 정립 과정을 거치며 《경국대전》에서 완성된 조선의 봉군제는 아래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관품 | 종친부(宗親府) | <colbgcolor=white,#505050> 충훈부(忠勳府) | <colbgcolor=white,#505050> 의빈부(儀賓府) | |||
<colbgcolor=white,#505050> 대상 | 세자의 자손 | 대군의 자손 | 왕자군의 자손 | 공신·국구 | 부마 | |
<colbgcolor=white,#505050> 무품 (無品) | 대군(大君) | 왕의 중자(衆子) | 대원군(大院君) | [18] | [19] | |
군(君) | 왕의 서자로 일명 왕자군(王子君) | |||||
정1품 | [20] | 부원군(府院君) 군(君) | 위(尉) | |||
종1품 | 승습자(承襲子) | |||||
정2품 | 중자 | 승습손(承襲孫) | 승습자 | |||
종2품 | 중손(衆孫) | 중자·승습증손 | 승습손 | |||
정3품 | 도정(都正) | [21] | 부위(副尉) | |||
정(正) | 중증손(衆曾孫) | 중손 | 중자·승습증손 | 첨위(僉尉) | ||
종3품 | 부정(副正) | [22] | 중증손 | 중손 | ||
정4품 | 수(守) | 서자 | 중증손 | <외척의 초수(初授) 품작> 국구(國舅): 정1품 ○○부원군공주(公主) 부마: 종1품 ○○위 옹주(翁主) 부마: 종2품 ○○위 군주(郡主) 부마: 정3품 ○○부위 현주(縣主) 부마: 종3품 ○○첨위 | ||
종4품 | 부수(副守) | 얼자 | 서자 | |||
정5품 | 령(令) | 얼자 | ||||
종5품 | 부령(副令) | 종친의 서얼[23] | ||||
정6품 | 감(監) |
대군과 왕자군은 1443년 이래 자급을 수여하지 않는 백관 위의 최고 서열이었다. 이러한 지위를 조선 당대에는 무자(無資)나 무계(無階)로 불렀고, 오늘날에는 편의상 무품(無品)으로 통칭하고 있다.[24] 종친부 관제가 정립되면서 종친은 정1품이라도 부원군으로 격상되지 않았다. 1869년에 세자의 적자와 서자는 정1품을 초수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부정 이하의 봉작은 폐지되어 해당 품계만 수여했다.
조선에서는 종친의 혼외자도 서얼로 여기고 종친 신분을 부여하여 고려처럼 사생아로 취급해 소군(小君)이나 택주(宅主)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얼 계통의 자녀는 대군·왕자군의 손자 항렬까지만 종친으로 인정되었고 그 외에는 다른 종친의 양자로 입적하여 신분이 바뀌지 않은 이상 종친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또한 서얼이 입적을 통해 적자(嫡子) 신분이 되었어도 그 생모가 양인일 경우에는 일반적인 초수 규정보다 한 품계를 낮추고, 천인일 경우에는 규정보다 두 품계를 낮추는 차별이 법으로 규정되었으며 그 자손 또한 선대에 적용된 불이익이 그대로 이어졌다.
제도화되지는 않았으나 방계 왕족이 선왕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하면 왕의 생부는 대원군으로 추봉하여 대군과 같은 격으로 예우했다. 철종이 대원군의 적처(嫡妻)와 왕의 생모를 부대부인으로 격상시켰다. 대체로 대원군들은 친아들이 즉위한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예외였고 결국 살아생전 대원군으로 격상되어 대군으로 예우 받은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원래 왕자군 신분이었던 덕흥대원군의 경우 증손자까지는 통상적인 왕자군 후손의 초수 품작을 받았고, 적통 후손인 사손은 최종적으로는 봉군되었으며 의전상으로는 품계에 관계없이 대군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현손 항렬 이후는 원칙적으로 종친 신분이 될 수 없었는데, 1626년에 인조가 대원군의 사손은 돈령부(敦寧府)의 정3품 당상 도정(都正)을 승습(承襲)하도록 조치했다. 1819년에 순조가 덕흥대원군의 사손인 진안군을 봉군하면서 대원군 사손을 봉군하는 문제를 검토할 것을 지시하여, 1822년에 선대를 승습할 때 종친부 도정을 초수하고 승진하면 봉군하도록 규정되었다. 이후 최종적으로 정1품까지 승진하거나 추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건국 초에 백(伯)으로 봉해진 일부를 제외하면 고위직을 역임한 이들을 부원군이나 군으로 봉했다. 1400년대 전반에 봉군(封君)은 공신과 왕비의 아버지인 국구(國舅)를 한정으로 시행되었다. 본인의 공적으로 친히 책록된 친공신(親功臣)은 사후에 정2품 이상으로 추증되는 것이 보장되었기에 생전에 봉군되지 못했더라도 삭훈되지 않은 이상 반드시 추봉되었다. 원종공신은 봉군 대상이 아니었다. 봉군된 사람이 정1품 산계에 이를 경우에 부원군으로 칭하게 되는데, 이러한 제도는 1466년에 폐지되어 군으로 통합되었다가 1470년 복구되었다.
성종이 1470년에 공신의 적통 후손인 사손은 선대가 죽은 뒤에 공신 특례를 승습하게 하여 그 자신의 관품이 종2품 이상에 이르면 봉군될 수 있도록 개정했다. 이와 같이 승습을 통해서 봉군된 경우를 승습군(承襲君)이라고 통칭했다. 또한 친공신의 부친을 사후에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추증하여 봉군하는 특례도 두었다. 한편 성종 이후에 국구가 돈녕부의 수장인 정1품 영돈녕부사를 맡는 관례가 정착되어 국구는 무조건 정1품인 신분이 되었다.
이처럼 공신 봉군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부원군은 정1품인 국구와 친공신만 생전에 봉작되었고, 부원군으로 추봉되는 경우는 국구를 포함하여 친공신과 보조공신으로 사후 추증된 친공신의 부친이 생전 품계와 증직된 품계를 합쳐 정1품에 이를 때로 한정되었다. 승습군은 아버지가 부원군이더라도 그 자신은 친공신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정1품 품계가 되었더라도 국구가 되지 않는 이상은 부원군으로 격상되지 않았다. 또한 외척 자격으로 얻은 품작은 자손에게 승습되지 않아서 국구가 봉해지는 부원군도 마찬가지였다.
부마도 처음에는 봉군되었으나 1444년에 부마부(駙馬府)를 설치하면서 봉군을 중단하고 전용 산계를 주게 되었다. 1450년 ○○위(尉)로 봉작했으나 1466년에 부마부를 의빈부(儀賓府)로 개편하면서 봉작을 철폐했다. 이때 1품은 의빈(儀賓), 2품은 승빈(承賓), 정3품 당상은 부빈(副賓), 3품 당하는 첨빈(僉賓)이란 명예직으로 개정했다. 또한 공주의 부마는 의빈을, 옹주의 부마는 승빈을,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부마는 부빈을,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부마는 첨빈을 초수했다. 1484년부터 다시 봉작으로 개편하여 의빈과 승빈은 ○○위, 부빈은 ○○부위, 첨빈은 ○○첨위로 봉했다. 부마가 공신으로 책록될 경우 군(君)으로 봉작이 개정되며, 정1품에 이르면 부원군으로 격상되었다. 1869년에 위는 모두 정1품, 부위와 첨위는 모두 종1품 봉작으로 승격했다.
조선의 봉군제는 고려의 봉군제와 마찬가지로 봉작[爵]과 직위[職]의 성격을 함께 가졌다. 실제로 업무를 관장하는 실직(實職)과 작위를 겸할 수 있었으나, 실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작위가 실직으로 전환되어 쓰였다.[25]
4.1. 대한제국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아닌 황자는 적서에 관계없이 친왕으로 책봉했다. 그 외에는 1906년에 심순택이 청녕공(靑寧公)으로 책봉된 것과 1907년에 순종이 흥선대원군을 대원왕(大院王)으로 고쳐 추봉하고 1910년에 대원왕의 사손인 이재면이 친왕으로 책봉된 사례가 있을 뿐, 대한제국이 기존의 봉군제를 폐기하거나 황제국 체제에 맞춘 새로운 작위 제도를 마련하지는 못했다.대한제국이 불법 합병된 뒤에 구 황실은 왕공족으로 격하되었고 주로 친일파들이 일본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5. 관련 문서
[1] 마한은 신지와 읍차 두 칭호만 사용했다.[2] 3세기 당시 사로국(신라)이 이사금 칭호를 썼던 것으로 볼 때 《삼국지》에서 독자 세력이 자칭하는 칭호를 왕으로 통칭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3] 대표적으로 장수왕의 아들 조다가 고추대가로 불렸다.[4] '가(加)'와 관련하여, 후일 고구려의 관등으로 사용된 '형(兄)'과 같은 계열의 명칭으로 보면서, 이를 고조선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연구가 있다.(박대재, 2015, 「고조선의 정치체제」, 『동북아역사논총』 제47호, 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에서 사용된 고유 군장의 칭호를 음역으로 옮긴 표기가 '加'이고 뜻으로 옮긴 것이 '兄'이라는 추정이며, 선비의 가한(可汗) 칭호의 기원으로 여긴다. 이 의견을 따를 경우 신라의 간(干) 칭호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兄'과 '加'가 같은 개념이란 가설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5] 각 나라에서 사용된 관등의 등급 명칭은 기존에 사용되던 고유 칭호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고구려의 경우 문헌마다 세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대체로 12~14개 등급의 관등이 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백제는 16개 등급의 관등제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17개 등급의 관등과 골품제(骨品制)를 시행했는데, 다른 두 나라의 제도에 비해 제도의 구성과 운영 방식 등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6] 천자만이 자신의 거주지를 누렇게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황제나 황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7] 특히 궁호로 보이는 칭호 중에는 궁대군(宮大君)·궁군(宮君)·전군(殿君)·부원대군(府院大君)·원군(院君)·전주(殿主)·원주(院主) 등이 있다. 하지만 동일 인물에게서 여러 칭호가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된 사례에 이런 계열의 칭호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보통 별칭으로 여겨지며, '○○군' 또는 '○○공주' 형식의 칭호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는 정식 칭호가 실전(失傳)되어 기록되지 못한 사례로 추측되고 있다. 이런 별칭 가운데 원군은 후대에 등장한 부원군의 기원이 되었기에 《고려사》에서도 정식 작호 중 하나처럼 기록했으나, 원(院)은 당시 보통 후궁의 거처로 주어진 궁전 건물의 종류로 후궁의 출신 본관의 지명을 따와 불렸던 것이기에 궁호의 일종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낭군(郎君)이란 칭호도 보이는데, 이는 정식 칭호를 받기 전인 어린 시절에 사용한 궁호로 여겨진다.[8]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서 ▨▨대왕과 필영대왕(弼榮大王)도 확인되는데, 모두 태조의 아들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大王'이 원래는 '대광(大匡)'이었으며 '匚'획이 마모된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왕실 문서 참조.[9] 종실 백(伯)의 지위에 관해서 《고려사》에는 기록된 바가 없다. 왕원의 묘지명에는 산계를 기준으로 정3품인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서 출발하여 정1품 수태부(守大傅)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고, 작위는 광평백(廣平伯)에서 출발하여 광평공(廣平公)까지 승작했다고 전한다. 이 사례를 통해 보면 백으로 초봉되는 왕족은 정3품을 초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10] 해당 대목에는 해석 논란이 있어, "문종이 공·후를 정했고, 국공은~"으로 해석하는 방식과 "(봉작제는) 문종 때 정해졌다. 공·후·국공은~"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근래에는 후자의 견해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후자의 해석을 따르는 입장 중에는 현종 당시에 군(君)·국공이 시행되었으나 군이 공·후로 변경되어, 국공이 공·후보다 낮은 작위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황향주, 2023, 「고려 전·중기 왕실 봉작제의 도입과 변용」, 『역사와현실』 제127호, 한국역사연구회.) 하지만 국공이 공·후보다 낮은 작위였다는 가설은 후술할 이자겸의 사례나 인종 때의 녹봉 규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식읍 규정 외에도 관품 규정에도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공·후·국공을 모두 정2품으로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개국후·개국백·개국자가 모두 정5품 작위라는 설명 역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11] 이제현의 《익재난고》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종실을 제이(諸李)로 통칭한 것과 같은 용례라고 한다. 이 '제왕' 용어를 두고 이를 외왕내제에 따른 내부적 왕작(王爵)으로 보는 의견(김기덕, 1997, 「高麗의 諸王制와 皇帝國體制」, 『國史館論叢』 第78輯, 국사편찬위원회, 161~164쪽.)이 있으나, 책봉된 왕족을 개별적으로 호칭하는 용례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해당 주장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한 문제가 있다.[12] 문헌 기록에서 국공에 책봉된 왕족으로 확인되는 사례는 정간왕과 양헌왕뿐이다. 정간왕의 경우, 현손 왕재녀 왕씨의 묘지명(1183년)에서는 '정간왕'으로 지칭되나, 10세손 예성부원대군(蘂城府院大君)의 부인인 김씨의 묘지명(1335년)에서는 생전의 작위인 '평양공'으로 지칭된다. 또한 양헌왕의 경우, 아들 광평공의 묘지명(1171년)에서는 '조선국양헌왕'으로 지칭되나, 손자 공화후의 묘지명(1187년)에서는 생전의 작위인 '조선공'으로 지칭된다. 이러한 변화는 명종 때인 1183~1187년 사이에 국공 작위 또는 추봉 왕작이 폐지된 영향으로 추측된다.[13] 이는 고려와 중국의 지방 행정체계가 달랐던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현상으로 중국의 경우에는 현이 군 아래에 위치하는 하위 행정구역 개념이지만, 고려와 조선에서는 군과 현 사이에 등급의 격차는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군과 현은 도(道)·계(界)에 소속되는 같은 단계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이다. 백관지 또한 군후(郡侯)-현후(縣侯) 등에 실질적인 차등이 있다고 여기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여, 단지 개국작 형식을 생략하다보니 군·현을 구분하지 않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14] 다른 중국 왕조들은 황제 칭호나 독자 연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외국에서 내부적으로 어떤 제도를 시행하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국의 국왕이 번왕을 책봉하는 것 또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외왕내제에 따라 내부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것 역시 보통은 묵인했다. 몽골 제국의 원나라는 유독 서열과 그 서열에 따른 격식 등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는데, 이처럼 관제의 격을 고치라는 요구를 한 것도 그 일례다. 고려와 조선의 '제후국' 정체성은 이러한 원나라의 영향이 크다.[15] 원윤은 원래 태조의 측근 신하들에게 수여한 관직이었으나, 후삼국시대부터 점차 호족에게 대상이 확대되었다. 그 이후 점차 산계처럼 성격이 바뀌었다가, 문종 이후로는 향직(鄕職)으로 존속하여 여진족 추장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정윤은 수여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16] 《고려사》 등 문헌 기록에서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정리해 두지 않아서 정확한 운영 방식을 파악하기 어렵다. 오등작 또한 실제로는 공(公)·후(侯)·백(伯) 3종만 시행되었고 자(子)·남(男)은 시행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최정환, 2003, 「高麗時代 封爵制의 成立過程과 整備」, 『한국중세사연구』 14, 한국중세사학회.) 《고려사》에도 공민왕 때 자·남이 책봉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으며, 백관지의 종실 제군 및 이성 제군 항목에서도 각각 공·후 및 공·후·백을 책봉했다고 쓰여있다. 하지만 백관지의 작위 항목에서는 공·후·백·자·남을 모두 표기하고 있으며, 생략된 사례가 있을 가능성도 남아있는 문제가 있다.[17] 지용기와 박위는 충의군으로 정식 봉작되기 전에 이미 탄핵을 당하여 삭훈된 것으로 보인다. 각각 충주 지씨와 밀양 박씨임을 감안하면 충원군(忠原郡)과 밀성군(密城郡)이 본래 예정되었던 봉호였음을 추측해 볼 순 있다. 설장수는 귀화인 가문 출신이라 본관이 없었으나, 원래 봉작이 완성군(完城君)이었고 조선 초에는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이 되었던 점으로 보아, 완성군(完城郡)이나 연산현(燕山縣)이 봉호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설장수의 본관은 조선 건국 이후인 1396년에 계림(경주)으로 지정되었다.[18] 정1품인 친공신·보조공신과 국구만 부원군으로 격상된다. 공신을 승습하는 경우에는 정1품이 되어도 부원군이 될 수 없다.[19] 1869년에 위는 정1품, 부위와 첨위는 종1품 봉작으로 승격했다.[20] 1869년부터 세자의 적자와 서자는 정1품 산계를 초수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21] 종친부 도정은 승진으로 봉작되었다. 덕흥대원군의 사손(嗣孫) 가운데 종친 항렬에 해당하는 증손자까지는 왕자군의 자손이 받는 통상적인 봉작 원칙을 따랐으나 의전상 대군과 같은 예우를 받는 특례가 주어졌다. 왕의 내손(5대손) 이후인 덕흥대원군 사손은 돈령부의 정3품 당상 도정직을 승습했다. 1819년부터 대원군을 승습한 사손은 항렬에 관계없이 봉군되었고, 1822년에 선대를 승습할 때 종친부 도정을 초수하여 승진하면 봉군하도록 규정했다. 그 이후 대원군의 사손은 최종적으로 정1품까지 승진하거나 추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종 때부터 왕의 내손 이후인 대원군의 적통 후손도 종친부에 소속되었는데, 본래는 승습할 때 종친 신분을 얻는 것이 원칙이지만 과거나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면 종친부에 소속되는 특례가 규정되었기 때문이며, 정3품 당상 품계에 오르면 돈령도정을 거친 뒤에 종친부 도정 봉작을 받게 되었다.[22] 순조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은신군·은전군을 왕자군에 준하는 예우를 하도록 하면서, 그 적통 후손은 초수 원칙을 뛰어넘어 선대가 생존하고 있음에도 종2품 소의대부에 초수되거나 정3품 당상 명선대부로 초수되었다가 곧바로 승진하여 모두 봉군되었다.[23] 왕의 증손 또는 현손 항렬인 서얼에 해당된다. 서얼이 적모(嫡母)의 양자로 입적하여 적자(嫡子) 신분이 되었더라도 왕자를 승습하는 봉사손이 되는 것이 아닌 이상 같은 항렬의 중손보다 품계를 내리는 차별은 여전히 남았는데 태생이 서자였다면 1품계를, 얼자였다면 2품계를 내렸으며, 그 소생의 자손에게도 같은 불이익을 그대로 적용했다. 입적되지 않은 경우, 서자는 같은 항렬의 중손보다 3품계를, 얼자는 4품계를 내렸다. 입적되지 않은 서얼 소생 자녀는 왕의 증손 항렬까지만 종친으로 인정했는데, 이 경우 서얼의 적자는 아버지의 초수 품작보다 1품계를, 서자는 2품계를, 얼자는 3품계를 내려 초수한다. 다만 서얼 계통 후손에게 강등이 적용되더라도 정6품 미만으로 내려가지는 않는다.[24] 중원 왕조들에서도 품계를 초월한 백관 위의 최고 서열 개념의 봉작은 종종 있었고, 고려에서도 상보(尙父) 견훤이나 정승(政承) 경순왕처럼 동일한 지위가 분명 존재했으나, 이러한 개념의 신분을 지칭하는 용어가 명확하게 정의된 전례가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무품으로 통칭하고 있으나, 다른 한자문화권에선 쓰이진 않는 표현이다. 관직에 관품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경우나, 관품 자체가 없는 일반 서민(庶民) 등과 혼동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근래 중국에서는 이를 초품(超品)으로 쓰는 경우가 흔한데, 한국사에서 초품은 보유한 산계보다 높은 관직에 임명된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25] 세조실록의 기사 가운데 관함을 모두 풀어쓴 사례가 있는데, 여기서 왕족인 구성군은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현록대부(顯祿大夫) 구성군(龜城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준(李浚)"으로, 이성 신하인 남이는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오위도총부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로 표기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겸직인 오위도총부도총관은 실직의 뒤에 붙여 쓰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서 구성군은 작위에 겸직이 붙었으나, 남이는 작위인 의산군이 아니라 실직인 공조판서에 겸직이 붙은 점이 서로 대비된다. 따라서 구성군의 봉작이 실직으로 전환된 상태임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