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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6:52

삼사(관직)



1. 三師
1.1. 고려
1.1.1. 태자부
1.2. 중국사
2. 三司3. 三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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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師

전근대 중국사, 한국사, 월남사 등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근대 이전에 3개의 최고위 대신의 직위를 나타내던 말이다.

1.1. 고려

고려의 삼사삼공
삼사(三師)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
삼공(三公)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
태자부(太子府)
태자태사
(太子太師)
태자태부
(太子太傅)
태자태보
(太子太保)
태자소사
(太子少師)
태자소부
(太子少傅)
태자소보
(太子少保)

직렬은 태사(太師) > 태부(太傅) > 태보(太保)로 정했다. 모두 정1품이었으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중국 왕조의 사례와 똑같이 원로 대신으로써 삼공과 더불어 천자의 스승 역을 맡아 신하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위였다.

고려 초엔 향직 품계를 적용해 태사, 태부, 태보를 그대로 봉했지만 성종 ~ 문종 대 문산계 품계가 제정되면서 정1품은 공석이 된다.[1] 그래서 성종 이후부턴 삼사는 수(守) 자를 붙여 행수법(行守法)[2]에 따라 수여됐다.[3] 검교직[4]으로도 수여되어 검교태사, 검교태부, 검교태보도 있었다. 이는 진짜 삼사가 아닌 이름만 걸친 명예 삼사다.

삼사 밑은 삼공[5]이라 하여 한 단계 낮은 취급을 받은 직위들도 있다. 고려는 이 6직위를 합쳐 '삼사삼공(三師三公)'이라 통칭했다.

고려시대에 활발하게 사용됐지만 원 간섭기천자국 제도를 모두 철폐하면서 같이 삭제됐다.[6] 조선은 삼사 직위를 부활시키지 않았다.

1.1.1. 태자부

북송의 관제엔 태자삼공(太子三公), 삼소(三少)라 하여 태자의 스승 및 자문객들을 배치했다. 고려는 삼사삼소 제도를 수용했지만 독자성이 매우 강했는데, 태자삼공이나 삼소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고 태자부(太子府), 동궁관(東宮官)[7]로 통칭했다.

태자부에 속한 직위 중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태보(太子太保)[8]태자소사(太子少師),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소보(太子少保)[9]는 특별 취급 받았다. 태자태 시리즈는 종 1품으로 삼사삼공보다 1품 낮았다. 태자소 시리즈는 종 2품으로 삼사삼공보다 3품 낮았다.

이 태자의 삼사, 삼소 직은 충렬왕 때 태자가 세자로 격하되어 태자부가 세자부(世子府)로 격하되면서 철폐된다.

1.2. 중국사

삼사제의 원적으로써 중국의 상고국가인 주나라 관제에서 비롯되었다. 삼사의 시초인 주나라 시대에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두고 삼사라 불렀으며, 이들은 천자의 스승 역할을 했다. 실권은 없지만 천자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모든 신하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부가 얼마나 명예로운 자리인지는 중국 관리, 문인들에게는 생진태부(生晋太傅), 사시문정(死諡文正)"(살아서는 태부에 임명되고, 죽어서는 문정 시호를 받는다.) 이라는 고사를 통해 알 수있다.

태사, 태보, 태부 외에도 중국 주나라 때부터 소사, 소보, 소부가 있었다. 이를 3소 또는 3고(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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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三司

삼공을 달리 이르는 말로 사도, 사마, 사공을 가리킨다. 산계에 해당하는 개부의동삼사의 삼사가 이를 가리킨다.

3. 三使

· 시대의 지방관으로 명나라 홍무제원나라의 제도였던 행중서성을 폐지하고 민정, 사법, 군사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를 두었다. 이 의 최상위 관직들을 합쳐 삼사라 하기도 하였다.

명 중기 이래 청나라에선 삼사의 상급직으로 제독, 도독, 순무, 총독이 설치되었다.


[1] 즉 신하가 오를 수 있는 품계는 종1품까지인 것.[2] 자신의 품계보다 더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수(守)를, 더 낮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행(行)을 붙인다.[3] 향직 품계를 따른 유금필은 그냥 태사지만, 문산계 품계를 따른 강감찬은 수태사다. 두사람은 모두 같은 태사지만 다른 품계를 썼기에 수(守)자가 안붙고 붙은 것이다.[4] 특정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의미로 명예직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서희가 받은 '검교병부상서'는 '명예 국방부장관'이란 의미다.[5] 태위(太尉) > 사도(司徒) > 사공(司空).[6] 충렬왕 때 철폐되었고, 공민왕이 재위 5년부터 ~ 11년까지 부활시켰다가 재철폐한다.[7] 태자부와 동궁관은 같은 말로 태자궁에 배치된 관료들을 통칭하는 단어다.[8] 당제에선 태자삼공이라 불렸다.[9] 당제에선 삼소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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