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외왕내제(外王內帝)는 대외적으로는 자국의 군주를 왕으로 칭하지만 속내는 황제로 내세우는 체제이다. 뒤집어서 내제외왕(內帝外王)이라고도 한다.대외적으로는 중국과 같은 화이론이 강한 국가의 체제를 따르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거나 황제에 준하는 칭호나 체제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 이런 특이한 체제가 등장한 이유는 중원의 국가와 다투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주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서이다. 본래 황제라는 호칭이 중국에서 먼저 쓰던 호칭이었고, 중국은 주나라때부터 제후국이 있었을 당시 자신만이 천자국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교역할 때엔 다른 국가들이 자신의 군주를 제후왕으로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나라나 건국 초의 청나라를 제외한다면 조공 무역은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쪽이 꽤나 짭짤한 거래였다. 중원 국가에서는 제국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조공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선물로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공국은 조공을 더 하려고 하고 이를 중국이 되려 막으려 하기도 했다.《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공횟수를 두고 조선은 1년에 최소 세 번, 명나라는 3년에 한 번을 주장해서 의견 충돌이 심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가 유지되는 동안 조선은 온갖 명분을 내세워서 한번이라도 더 하겠다고 수선을 피웠다.
중국 대륙을 장악한 왕조는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을 명목상의 제후국으로 책봉하여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명분을 챙기고, 조공국은 중국을 치켜세워주면서 중국 왕조가 내리는 막대한 하사품으로 실리를 챙기는 미묘한 계약관계였다. 송나라 때처럼 중국보다 주변 국가들이 더 강성한 경우에는 중국이 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어거지로 제후국으로 책봉하는 적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송나라가 거란에 대해서 자신을 형의 나라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되 막대한 양의 답례품을 거란으로 보내야 했다. 또한 송나라는 오늘날 강족의 조상격인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에게도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지만 답례로 군주의 나라답지 않게 서하의 조공에 비해 막대한 양의 답례품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송나라의 막대한 세금은 거란과 서하로 빠져나갔다.
사실 외왕내제라는 것이 어떤 확고한 시스템 같은 것은 아니고, 극복 불가능한 덩치를 가진 중국의 명분적 우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중국 못지 않다는 자존심을 은근히 내세운 것이다. 심지어 중국에 큰소리를 쳐도 중국이 별 수 없던 시기에는 내부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놓고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692년,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에 대해 시비를 걸고, 묘호(廟號)를 쓰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당시 신문왕은 답사를 보내 정중하게 이를 거절했다. 답사의 요지는 무열왕 역시 덕이 있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묘호는 원래 폐하 같은 용어처럼 천자국 전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모든 왕에게 태조, 문종, 고종 등의 묘호를 올렸지만 전부 일단은 중국 몰래 올린 것이고, 중국이 보고 지적을 하든 말든 대놓고 묘호를 쓴 것은 무열왕 당시 신라와 원 간섭기 이전 고려, 19세기의 대한제국, 통일 후 신라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시기 신라는 나당전쟁으로 당군과 싸워서 격퇴한 후 자신감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에 대해서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유지했고 자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에는 묘호를 피휘하는 것을 신라 측에서 거부하였지만 당나라와 거의 단교 상태에 가깝던 관계가 회복된 성덕왕때에는 성덕왕의 이름 융기가 당 황제 현종과 같아서 이름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국교 회복을 위해 들어주게 된다.
외왕내제라는 개념이 고정적인 원칙이나 시스템 따위가 아니었다는 특징적 근거로써 당시 용어의 사용이 일관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당나라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이 그러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은 군호(君號)가 '황제'였다가 '천왕(天王)'이었다가 '왕'이었다가 했고, 황제가 아니라 왕이라면서도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식 용어를 사용하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한국의 경우 발해가 자국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칭하면서도 자국만의 연호를 사용하고 신하가 왕을 부를 때 '황상(皇上)'이라는 황제에게만 쓰는 존칭을 사용했는데, 외왕내제 체제를 고수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북방 유목민 국가의 경우와 같이 유교식 예법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 등 삼국시대 한국 문명권의 나라에서 칭한 것으로 여겨지는 왕은 본래의 뜻대로, 즉 중국 주나라 때의 용례와 마찬가지로 "천자"를 의미했던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천자를 '왕'이라고 했다. 제후는 '공'(公)이라고 했고. 진시황이 자신은 여태까지의 왕과는 차원이 다른 임금이므로 왕을 대신하여 자신을 칭할 새로운 이름을 만들라고 하기 전까진 본래 왕의 의미가 천자였다. 제(帝)는 현대 중국어의 상제(上帝, 기독교의 하나님)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 본래 신(神)을 뜻하던 말이었는데 진시황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로 황(皇)이라는 글자와 합쳐 사용하면서 의미가 변질된 것이다.게다가 왜냐하면 '왕'이라는 칭호 외에 '태왕' 등 한국말로 임금을 뜻하는 한자어가 여러 가지로 중복되어 사용되고, 또한 연호를 같이 사용했기 때문이다.[1]
사실 외왕내제의 가장 큰 의의는 당시 강대국이던 중국 중심의 질서에 편입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져 자주의식을 지켜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립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긴 했지만 사신을 아주 뜸하게 보냈던 일본[2]과 근대에 와서 독립한 몽골[3]을 제외한다면, 현재 중국 주변국 중에서 존속하는 독립국은 한국과 베트남 뿐이다. 한때 중화 천하를 위협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칭제건원을 하며 황제국의 지위를 누렸던 여러 이민족들이 지금은 소수민족이 되어 중국에 편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 의의 및 구체적 탐구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의 천하 제국들이 단일한 천하라는 관념을 창출해냈으나, 위진남북조에 이르러 남조와 북조가 황위나 황송을 자칭하며 서로를 '도이' 혹은 '삭로'로 멸시하며 통호를 거부하거나, 피차 관계를 정립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서쪽의 토욕혼과 동쪽의 한반도와 왜 등이, 중국의 제도 등 정치문화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단계에 이르렀느냐 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그 제도를 변용하여 스스로 소세계를 상정하였다.[4]우선 신라의 경우 536년(법흥왕 23년)에 처음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지정한 이래 650년(진덕왕 4년) 당 연호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7차례 연호가 사용되었음이 문헌을 통해 남아있다.[5] 또한 전륜성왕으로 묘사된 진흥왕이 격의불교적으로 제왕(帝王), 짐(朕)으로 표현된 이래, 선덕여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 존숭하거나 문무왕과 신문왕을 '폐하'라고 불렀으며, 문성왕은 원성왕을 '선황(先皇)'이라고 하였다. 〈월광사원랑선사탑비(890)〉에는 경문왕을 '황왕(皇王)'으로, 〈보림사보조선사탑비(884)〉와 〈사림사홍각선사비(886)〉, 최치원의 〈상제국위대신등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886)〉은 헌강왕을 '성상(聖上)'으로, 〈태자사낭공대사비(954)〉에서는 신덕왕을 '성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 군주는 후대의 개작이든 당대이든 간에 "만승의 지위에 있는" '천자', '황', '성제(聖帝)' 등으로도 여겨졌으며, 그들이 거처하는 금성(오늘날의 경주시)은 "황거(皇居)인 왕궁(王宮)"이나 '제궐(帝闕)', '제향(帝鄕)' 등으로 불리었다. 〈갈항사석탑기(758)〉에서는 '황태후(皇太后)', 〈개선사석등기(858)〉 및 《삼국유사》에는 황후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처럼 신라에서는 대외적으로 당의 외신(外臣)이지만, 화이관에 입각한 계서적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세계의 통합대상으로 ‘9한(九韓)’을 설정한 소세계를 상정했다.[6]
6세기 이래 신라는 중국의 계서적인 천하관(天下觀)에 입조하면서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방(四方)의 세계와 인국(隣國)들과의 공존을 상정했던 복합적 천하관을 싹 틔웠다. 대표적으로 신문왕이 김춘추의 존호 문제를 두고 당의 압력을 받자, 당 태종의 천하일통과 김춘추의 '일통삼국(一統三國)'을 대등하게 거론하여 '받을 자격이 있다'며 개정 요구를 거부한 사례가 있다. 또한 삼한에 상응하는 공간적 범주로 해동(海東)을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와 한편으로는 중국과 구별되는 별도의 소세계로 설정했다.[7]
신라의 통치 체제 이념으로 자리잡힌 삼한일통 의식은 후삼국 시대에 이르러 다시 이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역사적·정치적 당위성을 제공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당시 "해내(海內)의 겸병"을 역설했으며, 그가 "주인을 죽이는" 후백제로부터 신라를 구원한 것은 "옛 주인임을 늘 생각하며 잊지 않은 것"이라고 최승로에게 칭송받았다. 이처럼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 신라에서 연원했기 때문에 후삼국 통일 후 체제 이념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는 통일을 실질적인 '건국'으로 의식하였고, 왕건은 삼한일통을 이룩한 군주로 평가됐다.[8]
다음으로 고려의 경우를 살펴보면, 비록 일부 용어 사용에 있어 신라 당대와 공통성 내지 연장성을 띠는 부분도 있지만 통합되어야 하는 지역에 대한 지배의 정당성 및 관련된 공간의 영역적인 논리 측면에서 신라의 천하관과 고려의 그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9] 고려 시대의 국가단위 집단의식은 근대의 민족에 토대를 둔 국가의식과는 크게 달랐다. 특히 고려 초에는 중요한 지역집단의식들이 공존하여, 국가단위의 집단의식은 역동성과 유동성을 가졌다. 고려국가의 세력권에는 12세기 초까지 만주의 동남부 여진부족들, 발해유민집단들, 탐라국 등이 포괄되었다. 동맹관계를 주축으로 한 그 세력권은 독자적 천하로 관념되었고, 그 천하의 맹주인 해동천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들이 성립되어 있었다. 국가단위에 가장 근접한 집단의식인 삼한일통의식은 13세기 초까지 삼국유민의식의 분립성과 공존하였다.[10]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자체 역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그런 점에서 후삼국의 통일과정은 여러 측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과 배경에 대한 연구가 태조 왕건의 통일정책 중심으로 먼저 제기되었고 이어 전쟁 과정에 대한 연구가 상세히 진행되었으며 역사계승의식, 삼한일통의식, 삼국유민의식 등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후삼국통일의 구체적인 과정과 정책 및 집단의식 등을 상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후삼국통일을 삼국통일 의 연장선상에서 연구하면서 당시 ‘삼한’, 즉 고려, 신라, 후백제가 통일의 대상 범주로 먼저 설정되어 연구된 측면이 있다. ‘후삼국통일’이란 개념 자체가 ‘삼국통일’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사계승의식 이란 시간축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당시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필요했던 것은 통합되어야 하는 지역에 대한 지배의 정당성과 관련된 공간의 영역적인 논리였다. 그렇기에 고려, 신라, 후백제 등 국가 단위를 넘어선 공간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필요하였다. 태조 왕건 등 당시 집권층은 이를 ‘천하(天下)’로 사고하면서 그 천하의 최대 공간적인 범위로 ‘해동(海東)’ 개념을 활용하였고 이는 해동천하로 연구되었다. 이후 해동천하는 집단의식 또는 인식의 측면에서 삼한일통 의식, 용손의식 등과 관련해 연구되었다. 이를 통해 삼한일통의식과 해동천하가 그 관념과 이념의 존재 형태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유기적인 관련성이 후삼국통일 시점을 전후로 하여 신라와 고려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정치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고 동시에 양자의 격차 문제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추명엽: 고려 태조 중·후반기 삼한통일과 해동천하의 형성, 2023』
『추명엽: 고려 태조 중·후반기 삼한통일과 해동천하의 형성, 2023』
고려의 국가단위 집단의식에 해당하는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이 적어도 크게 두 가지 계열이 병존하며, 경쟁하고 있었던 것 역시 종래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민족형성사의 이해에 중요한 역사상이다. 고구려유민계열과 신라유민계열의 삼한일통 의식은 그 안에 만주의 발해유민과 남쪽의 탐라국(제주도)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큰 차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료들을 통해 검토되고 있다. 그리고 두 계열의 삼한일통의식이 현실의 정책에서나 역사의식에서 방향을 달리하며 경쟁하고 있었던 사실과 그 변천과정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다.
『노명호: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자위공동체, 삼국유민, 삼한일통, 해동천자의 천하, 2009』
『노명호: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자위공동체, 삼국유민, 삼한일통, 해동천자의 천하, 2009』
고려가 고구려 유민 계열 (패서 호족) 이 주축이 되어 삼한은 물론 발해와 여진 및 탐라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것과 달리, 신라는 다시금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채 멸망하였다. 신라의 통일은 삼한의 지리적 통합은 성공했을지라도 민족적 융화에 실패했으니, 이는 곧 양국이 운용한 천하 인식의 차이에서 엿볼 수 있다.
고려의 다원적 외교관계는 몽골[元]이 등장하여 송과 금을 멸망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고려 또한 ‘해동천자(海東天子)’라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바탕으로, 주위 국가들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남당이나 오월과 동등한 외교 형식을 취하였으며, 고려의 군주인 대왕 또한 ‘왕중의 왕’으로 동등한 여러 천자(天子) 가운데 한 명으로 자처했다. 건국 초 고려의 위상과 관련해서는 왕건이 이웃 나라를 병탄하면서 자못 강대해졌다거나, 고려가 936년에 신라와 백제를 패배시키자 왜(倭)·탐부(眈浮·탐라)·환어라(歡於羅)·철륵(鐵勒)의 동이제국(東夷諸國)이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는 서술이 도움을 준다. 당시 고려 군주의 위상이 단순히 한 나라의 범위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허인욱, 『동도성립기』의 구한과 고려 초 대외 인식, 전북사학 68
허인욱, 『동도성립기』의 구한과 고려 초 대외 인식, 전북사학 68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에 부속되었다."
《남당서 권18, 고려》
《남당서 권18, 고려》
다시 말해 고려의 천하관은 발해 지배 계층과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여진·탐라 등 다양한 종족을 흡수한 뒤 이들을 교화하여 독자적이고도 개방적인 세계관을 지향했다는 점에 보다 특별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해동천하의식은 해동천자가 다스리는 천하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이방인과 내투인에 대한 국왕의 혜화惠和와 위威 덕德을 통한 초유招諭 노력도 있었다. 해동천하를 다스리는 국왕은 천명天命을 받은 수명군주로서 신성한 용손龍孫 혈통의식을 토대로 부처와 천령天靈의 가호 를 받으며 성덕聖德을 베풀어 교화를 이루어나갔다. 해동천하는 중국과 짝하는 정삭正朔 유학儒學 악률樂律 도량度量의 동문同文 4절목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예의지국禮義之國’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일컬을 만큼 예악문물이 정비된 사회였다. 이에 송이나 거란의 사신이 칭송하고 예를 갖추었으며, 송의 진사 등이 찾아와 벼슬을 구하고 흑수말갈, 여진, 탐라, 일본이 내투하여 정착하고자 하였다. 이어 내방한 상인과 내투인에 대해서는 군신동락의 자리인 팔관회를 통해 상징적이나마 통합의 자리를 마련했고 국왕은 지방 등에 큰 잔치[大酺] 를 열어 위로하였다. 결국 고려는 해동천하의 틀 속에서 이방인에게 혜화-위덕-내투정착-다원-통합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 동문同文의 예악문물 등을 갖춰 부처와 천령 및 용신, 천명의 가호를 받는 천자가 다스린다는 자긍심을 형성해 나갔다 생각된다.
『한정수: 고려전기 異邦人‧歸化人의 입국과 해동천하, 2017』
『한정수: 고려전기 異邦人‧歸化人의 입국과 해동천하, 2017』
또한 10~12세기 당시의 실체적인 외교 의전을 통해, 후당, 후진, 요, 송, 금나라 등 강대세력들이 대외적으로도 그러한 고려의 위상과 천하관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고려도 대체로 외왕내제였으나, 달라진 면도 있었다. 강대세력들인 요, 송, 금 나라 등은 고려의 자체 내 칭제稱帝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여 쌍방의 외교 의전儀典 내용에서 그것이 절충적으로 일부 받아들인 면이 있었다. 그리고 요나 송의 고려 사신에 대한 의전의 격은 베트남보다 높았고, 때로는 서하보다도 높았다. 금나라 황제는 1117년에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 형제의 예를 요구하며 고려 군주를 '황제'라 한 바 있었다. 이 국서를 보고 기록을 남긴 것은 고려시대 이승휴도 있고, 조선시대 양성지도 있다. 물론 제한적 직서에 의해 「고려사」 등에는 이 경우도 '고려황제'가 '고려왕'으로 개서되어 있다. 고려 임금은 황제, 천자와 함께 (대)왕이라는 위호를 상황에 따라 강대세력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노명호(2017), "고려전기 천하관과 황제국체제", 《고려 역사상의 탐색》.
노명호(2017), "고려전기 천하관과 황제국체제", 《고려 역사상의 탐색》.
정화(政和) 연간에 고려의 사신을 올려 국신사(國信使)로 삼고 예우(禮遇)를 서하(西夏) 보다 위에 두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서 영접하게 했으며, 이를 맡은 인반관(引伴官)과 압반관(押伴官)도 고쳐서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宋史, 卷487 列傳246』
『宋史, 卷487 列傳246』
특히 11세기 초 동아시아 최대의 강자였던 거란족契丹族의 요遼와의 전쟁에서 고려가 요遼의 대군을 괴멸시킨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전쟁을 끝맺은 후, 양국간의 타협이 이루어져, 요遼와는 형식적인 사대로서 평화관계를 수립하였지만, 고려의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상승하였다. 이 무렵 여진계 여러 부족들로 고려에 조공朝貢하고 추장들이 고려의 관작官爵을 받아간 범위는 크게 확대되었으며, 그 중 ‘국國’을 칭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리부鐵利部의 지배자도 고려의 군주에게 천자天子에게 올리는 서장書狀을 의미하는 ‘표表’를 올려 구원을 요청한 바 있다. 윤관尹灌은 여진 장수에게 고려 조정을 ‘천정天庭’ 즉, 천자의 조정이라고 지칭하였다. 여진 사회에서 고려의 군주를 천자·황제로 지칭하는 관례는 깊이 뿌리를 내렸던 것으로 보이니, 금金나라가 초기에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국황제高麗國皇帝’를 칭한 것도 그러한 오랜 관행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한국사연구 105』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한국사연구 105』
금나라 시조는 우리를 일컬어 부모의 나라(父母鄕)라고 하였으니, 대개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형제관계를 맺어 사신을 통하였다. 신(이제현)이 일찍이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都監)의 문서를 열람하였는데, 우연히 금국의 조서 2통을 얻었다. 그 서두에 모두 이르기를, ‘대금국황제(大金國皇帝)가 고려국황제(高麗國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운운.’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형제관계를 맺은 증거이다.
《제왕운기, 상권》
이처럼 대외적인 인식과 의전의 격을 놓고 보더라도 소위 고구려 유민 계열이 주축이 되었던 고려의 해동천하 의식과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제왕운기, 상권》
한편, 아래와 같이 황제국 체제와 제후국 체제를 혼용하였다는 점과 내부적으로 황제국이라는 확고한 목적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아예 외왕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도 학계내에는 존재하고 있다.신라 하대에 유교정치이념이 상대적으로 확산되고, 광종 이래 송에 사대하면서 광종 때 10성 4부, 성종 때 3성 6부를 거쳐서 고려에 걸맞은 중앙관제로 확립하는 등 중국의 중앙 관제를 수용했다.[11] 때문에 화이사상 또한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태조 이래로 우회적으로 천자를 자칭했던 데 반해, 광종은 보다 직접적으로 일시적이나마 독자 연호를 사용했으며, 개경을 황도(皇都)로 부르게 하였다.[12] 그러나 황제나 천자 등의 칭호는 대왕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별칭일 뿐, 고려 군주의 공식 직함은 '왕'이었으며,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도 사실상 태조와 광종에 국한된다. 더 나아가 송에 사신을 보내 왕위 계승을 알리고 책봉을 받은 성종은 제후의 명분을 의식하여 조서를 교서로 개칭하는 조치가 단행되고 ‘짐’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동시에 짐이라는 자칭과 본래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인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이 전대와 같이 빈번히 작성됐다.[13]
이에 필자는 전근대 베트남에서 운영된 외왕내제와의 비교를 통해 고려전기 이중체제의 실상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본문에서 규명되겠지만, 고려전기의 이중체제는 대내 방면에서 황제국 체제가 운영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외 방면에서조차 베트남과 상이하였다.
중략...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정작 고려 군주의 공식적 位號는 ‘王’이었다. 고려 군주를 주체로 한 기사에서 그 존재는 예외없이 ‘王’으로 기록되었다. 고려 군주를 ‘(皇)帝’ 혹은 ‘天子’로 기록한 사례는 『고려사』 악지 風入松에서 확인되는 것을 예외로 하고는[14] 보이지 않는다.
존호 사례들을 보더라도 고려 군주의 공식적 위호는 ‘왕’이었다. 베트남에서의 ‘明乾應運神武昇平至仁廣孝皇帝’ 식의, 존호와 해당 군주의 공식 칭호가 결합된 사례는 없으나, 목종 즉위 후 그 모후에게 존호를 올린 사례가 있어 참고가 된다. ‘應天啓聖靜德王太后’가 바로 그것이다.[15] 존호와 결합된 공식 칭호인 ‘王太后’로 보아, ‘왕’이 공식 칭호였음은 분명하다. ‘先王’을 대상으로 하여 존호를 올리는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16] 시호 또한 베트남에서와 달리 ‘大王’과 결합되었다. 가령 “上諡曰 神聖大王”이라고 하여, 왕건은 사후에 ‘神聖大王’이라 불렸다.[17]
‘先帝’, ‘先皇’ 용례는 단 한건도 보이지 않은 대신 ‘先王’ 사례는 부지기수로 확인된다. 군주 자리는 ‘(皇)帝位’가 아닌 ‘王位’였고, 군주 자리에 등극하는 것은 ‘卽(皇)帝位’가 아닌 ‘卽王位’였다. 또한 皇子가 아닌 王子, 皇女가 아닌 王女, 皇太子가 아닌 王太子, 皇弟가 아닌 王弟, 皇后가 아닌 王后, 皇太后가 아닌 王太后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고려 군주가 ‘왕’임을 전제로 한 용어였다. 皇家가 아닌 王家, 帝師가 아닌 王師 등의 사례 또한 고려 군주의 위호가 왕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18] 다만 군주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일컫는 용어에서는 皇考와 王考의 혼용이 있었다.[19]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는 ‘왕’이었고, 고려 군주의 위상이 ‘왕’임을 전제로 한 각종 용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실록을 비롯한 고려 당대의 자료에 의거하여 작성되었을 것이지만,[20] 조선초기에 해당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인 ‘개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를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금석문 자료는 고려실록에 비해 공식적인 성격이 약하였을 것이기에, 그곳에는 비공식적 것들을 포함한 용례상의 변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한다.
금석문 자료들 가운데 드물기는 하나 고려 군주를 ‘皇帝’로 칭한 사례들이 있어 주목된다.[21] 그런데 이들 사례의 의미를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한 것이 금석문 자료들에서 또한 고려 군주를 ‘왕’으로 칭한 사례들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에서이다. 박재우가 논증하였듯이, 고려 군주는 태조 이래로 天子로, 광종 이래로 皇帝로 호칭되곤 하였지만, 천자와 황제 모두 고려 군주의 공식 직함이 아니라 王이 이에 해당하였다.[22] 그의 견해를 활용하자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공식 위호인 ‘왕’만이(‘대왕’ 포함) 기록된 데 비해, 금석문 자료에는 ‘왕’ 사례가 일반적이고 압도적이면서도 ‘황제’ 용어가 드물게 기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석문 자료들에서의 시호 사례 또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결과와 일치한다. 곧 ‘神聖大王’(태조),[23] ‘義恭大王’(혜종),[24] ‘文明大王’(정종),[25] ‘大成大王’(광종),[26] ‘獻和大王’(경종),[27] ‘成宗文懿大王’,[28] ‘穆宗宣讓大王’,[29] ‘恭孝大王’(인종)[30] 사례에서 보듯, 시호와 ‘大王’이 결합되었다. 무엇보다 仁宗諡冊 의 ‘尊諡曰恭孝大王廟號’라는 구절은 시호 제도가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를 ‘왕’으로 전제하여 운영되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금석문 자료들에서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와 달리 ‘先帝’,[31] ‘先皇’[32] 사례가 확인된다. 다만 각각 1건과 2건에 그쳤다. ‘先王’ 사례가 보다 빈출하였음은 물론이다. 고려 군주의 자리를 ‘帝位’라고 보아 해당 자리에 등극하는 것을 ‘卽帝位’[33]로 기록한 사례가 있으나, 단 한 건에 불과하였다. 군주 자리를 ‘王位’로 기록한 사례들 가운데 그것에 등극하는 것을 ‘卽王位’로 한 경우는[34] 드물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는 많았다. 금석문 자료들에서는 皇子,[35] 皇太子,[36] 皇后[37] 사례 또한 보이나, 공교롭게도 각각 1건씩에 국한되었다.[38] 王子, 王太子,[39] 王后 사례도 있음은 물론이다. 왕태자 사례는 2건에 불과하나, 왕자와 왕후 사례는 다수였다. 게다가 皇弟와 皇太后는 해당 사례가 발견되지 않음에 비해, 王弟[40]와 王太后[41]는 사용례가 드물기는 하나 확인된다. 또한 皇家와 帝師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데 비해, 王家[42]와 王師 사례는 각각 드물지 않거나 다수였다.
금석문 자료들을 보더라도, 王太子, 王后 식의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는 공식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금석문 자료들에서는 황제국에 온전히 부합하는 皇太子, 皇后 사례가 보이고는 있으나, 이들은 각각 1건에 불과한 정도로 비공식적이었다. 흥미롭게도 제후국에 걸맞은 世子,[43] 王妃[44] 사례 또한 각각 1건과 2건이 확인된다.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를 둘러싼 비공식적 변주는 황제 제도의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은 셈이다.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는 ‘왕’이어서인지, 황제 제도가 광범위하게 실행되는 속에서도 (제후)왕의 위상에 걸맞은 제도 운영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략...
지금까지 일부 황제 제도들에 대한 탐색을 위주로 하여 고려전기 황제 제도 운영의 일단을 파악해 보고자 했다. 검토 결과에 따르면, 이들 황제 제도는 각자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황제국 버전(version)에 국한된 채 일관적으로 운용되지 않았다. 즉 중간 중간 제후국 버전의 용례들이 혼용되었다. 아울러 ‘敎書’ 내의 ‘朕’, ‘宣旨’ 내의 ‘寡 人’, 한 문서 내에서 ‘짐’과 ‘과인’의 혼용, 奏文 내의 ‘殿下’ 식의, 다른 시기에서였다면 매우 ‘어색하였을’ 조합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중략...
그렇다면 과연 원 간섭 이전의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운영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베트남에서와 같은 ‘온전한’ 황제국 체제의 운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는 ‘왕’이었고, 황제 제도와 제후 제도의 혼용이 있었으며, 王太子 식의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도 드물지 않게 사용되었다. 아울러 적어도 일부 황제 제도들은 일관되게 운영되지 못하여, 해당 제후국 버전 용례들이 섞여들기도 하였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면, ‘외왕’ 방면에서는 기왕의 이해와 다른 바가 없다. 즉 고려전기에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서 국왕(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은 시종일관 제후(국)였다. 정확히는 外臣제후(국)였다. 당시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의 대외 관계는 책봉조공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관계 속에서 고려의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황제의 신하(제후)로 규정되었다. 후술하듯 베트남 역시 책봉조공 관계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 속에서 줄곧 외신 제후국의 위상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중략...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정작 고려 군주의 공식적 位號는 ‘王’이었다. 고려 군주를 주체로 한 기사에서 그 존재는 예외없이 ‘王’으로 기록되었다. 고려 군주를 ‘(皇)帝’ 혹은 ‘天子’로 기록한 사례는 『고려사』 악지 風入松에서 확인되는 것을 예외로 하고는[14] 보이지 않는다.
존호 사례들을 보더라도 고려 군주의 공식적 위호는 ‘왕’이었다. 베트남에서의 ‘明乾應運神武昇平至仁廣孝皇帝’ 식의, 존호와 해당 군주의 공식 칭호가 결합된 사례는 없으나, 목종 즉위 후 그 모후에게 존호를 올린 사례가 있어 참고가 된다. ‘應天啓聖靜德王太后’가 바로 그것이다.[15] 존호와 결합된 공식 칭호인 ‘王太后’로 보아, ‘왕’이 공식 칭호였음은 분명하다. ‘先王’을 대상으로 하여 존호를 올리는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16] 시호 또한 베트남에서와 달리 ‘大王’과 결합되었다. 가령 “上諡曰 神聖大王”이라고 하여, 왕건은 사후에 ‘神聖大王’이라 불렸다.[17]
‘先帝’, ‘先皇’ 용례는 단 한건도 보이지 않은 대신 ‘先王’ 사례는 부지기수로 확인된다. 군주 자리는 ‘(皇)帝位’가 아닌 ‘王位’였고, 군주 자리에 등극하는 것은 ‘卽(皇)帝位’가 아닌 ‘卽王位’였다. 또한 皇子가 아닌 王子, 皇女가 아닌 王女, 皇太子가 아닌 王太子, 皇弟가 아닌 王弟, 皇后가 아닌 王后, 皇太后가 아닌 王太后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고려 군주가 ‘왕’임을 전제로 한 용어였다. 皇家가 아닌 王家, 帝師가 아닌 王師 등의 사례 또한 고려 군주의 위호가 왕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18] 다만 군주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일컫는 용어에서는 皇考와 王考의 혼용이 있었다.[19]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는 ‘왕’이었고, 고려 군주의 위상이 ‘왕’임을 전제로 한 각종 용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실록을 비롯한 고려 당대의 자료에 의거하여 작성되었을 것이지만,[20] 조선초기에 해당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인 ‘개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를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금석문 자료는 고려실록에 비해 공식적인 성격이 약하였을 것이기에, 그곳에는 비공식적 것들을 포함한 용례상의 변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한다.
금석문 자료들 가운데 드물기는 하나 고려 군주를 ‘皇帝’로 칭한 사례들이 있어 주목된다.[21] 그런데 이들 사례의 의미를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한 것이 금석문 자료들에서 또한 고려 군주를 ‘왕’으로 칭한 사례들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에서이다. 박재우가 논증하였듯이, 고려 군주는 태조 이래로 天子로, 광종 이래로 皇帝로 호칭되곤 하였지만, 천자와 황제 모두 고려 군주의 공식 직함이 아니라 王이 이에 해당하였다.[22] 그의 견해를 활용하자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공식 위호인 ‘왕’만이(‘대왕’ 포함) 기록된 데 비해, 금석문 자료에는 ‘왕’ 사례가 일반적이고 압도적이면서도 ‘황제’ 용어가 드물게 기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석문 자료들에서의 시호 사례 또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결과와 일치한다. 곧 ‘神聖大王’(태조),[23] ‘義恭大王’(혜종),[24] ‘文明大王’(정종),[25] ‘大成大王’(광종),[26] ‘獻和大王’(경종),[27] ‘成宗文懿大王’,[28] ‘穆宗宣讓大王’,[29] ‘恭孝大王’(인종)[30] 사례에서 보듯, 시호와 ‘大王’이 결합되었다. 무엇보다 仁宗諡冊 의 ‘尊諡曰恭孝大王廟號’라는 구절은 시호 제도가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를 ‘왕’으로 전제하여 운영되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금석문 자료들에서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와 달리 ‘先帝’,[31] ‘先皇’[32] 사례가 확인된다. 다만 각각 1건과 2건에 그쳤다. ‘先王’ 사례가 보다 빈출하였음은 물론이다. 고려 군주의 자리를 ‘帝位’라고 보아 해당 자리에 등극하는 것을 ‘卽帝位’[33]로 기록한 사례가 있으나, 단 한 건에 불과하였다. 군주 자리를 ‘王位’로 기록한 사례들 가운데 그것에 등극하는 것을 ‘卽王位’로 한 경우는[34] 드물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는 많았다. 금석문 자료들에서는 皇子,[35] 皇太子,[36] 皇后[37] 사례 또한 보이나, 공교롭게도 각각 1건씩에 국한되었다.[38] 王子, 王太子,[39] 王后 사례도 있음은 물론이다. 왕태자 사례는 2건에 불과하나, 왕자와 왕후 사례는 다수였다. 게다가 皇弟와 皇太后는 해당 사례가 발견되지 않음에 비해, 王弟[40]와 王太后[41]는 사용례가 드물기는 하나 확인된다. 또한 皇家와 帝師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데 비해, 王家[42]와 王師 사례는 각각 드물지 않거나 다수였다.
금석문 자료들을 보더라도, 王太子, 王后 식의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는 공식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금석문 자료들에서는 황제국에 온전히 부합하는 皇太子, 皇后 사례가 보이고는 있으나, 이들은 각각 1건에 불과한 정도로 비공식적이었다. 흥미롭게도 제후국에 걸맞은 世子,[43] 王妃[44] 사례 또한 각각 1건과 2건이 확인된다.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를 둘러싼 비공식적 변주는 황제 제도의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은 셈이다.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는 ‘왕’이어서인지, 황제 제도가 광범위하게 실행되는 속에서도 (제후)왕의 위상에 걸맞은 제도 운영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략...
지금까지 일부 황제 제도들에 대한 탐색을 위주로 하여 고려전기 황제 제도 운영의 일단을 파악해 보고자 했다. 검토 결과에 따르면, 이들 황제 제도는 각자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황제국 버전(version)에 국한된 채 일관적으로 운용되지 않았다. 즉 중간 중간 제후국 버전의 용례들이 혼용되었다. 아울러 ‘敎書’ 내의 ‘朕’, ‘宣旨’ 내의 ‘寡 人’, 한 문서 내에서 ‘짐’과 ‘과인’의 혼용, 奏文 내의 ‘殿下’ 식의, 다른 시기에서였다면 매우 ‘어색하였을’ 조합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중략...
그렇다면 과연 원 간섭 이전의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운영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베트남에서와 같은 ‘온전한’ 황제국 체제의 운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 군주의 공식 위호는 ‘왕’이었고, 황제 제도와 제후 제도의 혼용이 있었으며, 王太子 식의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도 드물지 않게 사용되었다. 아울러 적어도 일부 황제 제도들은 일관되게 운영되지 못하여, 해당 제후국 버전 용례들이 섞여들기도 하였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면, ‘외왕’ 방면에서는 기왕의 이해와 다른 바가 없다. 즉 고려전기에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서 국왕(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은 시종일관 제후(국)였다. 정확히는 外臣제후(국)였다. 당시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의 대외 관계는 책봉조공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관계 속에서 고려의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황제의 신하(제후)로 규정되었다. 후술하듯 베트남 역시 책봉조공 관계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 속에서 줄곧 외신 제후국의 위상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이러한 복합성은 공적 성격이 약한 금석문 사료에서도 드러나는데, ‘왕’과 '선왕'의 용례가 일반적이고 압도적이면서도 ‘황제', '선제(先帝)', ‘선황(先皇)'가 드물게 사용됐으며, 왕위의 경우에도 왕위가 1건에 불과한 ‘제위(帝位)’보다 상대적으로 빈출하다. 황자(皇子), 황태자(皇太子), 황후(皇后)의 용례도 있으나 왕자와 왕후 빈도가 압도적이며, 왕태자라는 용어도 사용됐다. 한편으로는 세자(世子) 및 왕비(王妃) 또한 각각 1건과 2건에 그친다. 전기 고려 군주의 대내 위상을 엿볼 수 있는 금석문에서 '내제', '제후' 명분의 견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45] 즉, 고려 전기에 베트남의 황제국 체제나 조선의 제후국 체제는 온전히 운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왕과 황제의 위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용어를 둘러싼 비공식적 변주는 황제 제도의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에서 (제후)왕의 위상에 걸맞은 제도 운영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46]
필자는 몇 해 전에 베트남의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고려전기 이중체제의 실제 양상을 규명한 바 있다.[47] 이때 황제국 체제가 운영되는 사회에서라면 나타나기 어려운 수많은 현상을 목도하면서, 고려전기 國制를 황제국 체제로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략...
한편,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는 우리 시대의 언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⑴그 당시에 고려는 거의 대부분의 제도를 놓고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황제 제도를 선택·운용하였다. 조선이 제후 제도를 선택·운용한 것과 반대로 말이다. ⑵일반적으로 제도 전반에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구비되어 있었고, 고려는 각종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을 명확히 알았으며 두 제도의 차이를 의식하였다. ⑶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 가운데 황제 제도의 선택은 임의로가 아니라 자주적 자세에서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48]
그런데 후술하듯, 고려전기 國制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고 보이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곧 고려전기에는 황제 제도를 위주로 국제를 운영하지 않았고 또한 그렇게 운영하였다고 하는 식의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와 맞물려 앞서 열거한 전제들은 성립·기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본 작업은 고려전기의 국제를 황제국 체제도 아니요, 미흡한 황제국제도 아닌, 황제국 체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는 시도인 셈이다.
중략...
현재 우리의 감각 속에서 고려전기의 황제 제도로 간주되는 것들은 동질적으로 비친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들은 당대인의 눈에는 동질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제도는 고려전기에도 당대인이 이를 황제 제도로 알고는 있지만 당시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인지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한 것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이러한 제도를 황제 제도라 의식하면서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내지 회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원 복속기와 그 이후를 거치면서 황제 제도로 의식되고 황제 제도라고 하여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회피되었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제도는 현재의 감각 속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황제 제도로 간주되나, 첫 번째 것과는 달리 원 복속기 이후에야 황제 제도로 인지된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황제 제도로 인지되는 것과 동시에 의식적으로 회피되었을 것이다.
중략...
후술할 다른 사례들은 당시에 황제 제도를 자주(대등)의식 등의 목적의식 속에서 운용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의식 없이 운영하였음을 말해 준다. 고려전기 원구제 거행에 관한 필자의 판단과 부합하게도 말이다.
중략...
그런데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무엇보다 고려전기에 宣旨, 朕, 赦, 奏등이 황제 제도로 명확히 의식된 채 사용되었을지가 의문이다. 원(몽골) 관원이 이들 용어의 사용을 ‘참람한 일’이라 호명했다고 해서, 고려전기에도 그러한 의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전기에 자주·대등 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宣旨, 朕, 赦, 奏 등을 선택하여 사용하였는지는 논증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필자가 아는 한, 관련 논증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더군다나 이들 용어 사용의 실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49] 이들 용어가 과연 황제 제도로 의식되고 있었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중략...
이들 용어 사용의 실제로 보아, 宣旨, 朕, 赦, 奏 등의 사용은 자주·대등 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히 분수에 넘는 짓을 하려는것이 아니라 다만 선대 왕들 때부터 전해오는 관례에 따랐을 뿐이라고’ 한 고려측의 해명에 잘 부합한다. 고려전기에 당대인은 宣旨, 朕, 赦, 奏 등을 황제 제도로 알고는 있었을 것이나 황제 제도라고 의식하면서 이를 활용한 게 아니라, 원구제 사례에서와 같이 ‘참람한 일’, ‘분수에 넘는 짓’ 등을 의식하지 못한 채―대등의식·자주의식과 무관한 채― 운용하였을 것이다. 宣旨, 朕, 赦, 奏 등을 ‘참람한일’, ‘분수에 넘는 짓’으로 의식한 것은 원 복속기 들어서 원(몽골) 측의 지적을 계기로 해서였을 것이다. 이때 고려는 이들 제도를 황제 제도로 의식하면서 회피하였다.
중략...
이처럼 곳곳에서 확인되는, 황제 제도로 알고는 있으나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보는[50] 황제 제도의 운용에 관한 현재의 감각과는 전혀 부합하지는 않지만, 현재와 이질적이었을 고려전기의 에피스테메(시대 감각)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감각을 고려전기에 투사할 게 아니라, 당시의 감각을 ‘발굴’하여 현재 우리에게 황제 제도로 간주되는 것들이 고려전기 당시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중략...
한편,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는 우리 시대의 언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⑴그 당시에 고려는 거의 대부분의 제도를 놓고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황제 제도를 선택·운용하였다. 조선이 제후 제도를 선택·운용한 것과 반대로 말이다. ⑵일반적으로 제도 전반에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구비되어 있었고, 고려는 각종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을 명확히 알았으며 두 제도의 차이를 의식하였다. ⑶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 가운데 황제 제도의 선택은 임의로가 아니라 자주적 자세에서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48]
그런데 후술하듯, 고려전기 國制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고 보이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곧 고려전기에는 황제 제도를 위주로 국제를 운영하지 않았고 또한 그렇게 운영하였다고 하는 식의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와 맞물려 앞서 열거한 전제들은 성립·기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본 작업은 고려전기의 국제를 황제국 체제도 아니요, 미흡한 황제국제도 아닌, 황제국 체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는 시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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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의 감각 속에서 고려전기의 황제 제도로 간주되는 것들은 동질적으로 비친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들은 당대인의 눈에는 동질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제도는 고려전기에도 당대인이 이를 황제 제도로 알고는 있지만 당시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인지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한 것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이러한 제도를 황제 제도라 의식하면서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내지 회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원 복속기와 그 이후를 거치면서 황제 제도로 의식되고 황제 제도라고 하여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회피되었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제도는 현재의 감각 속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황제 제도로 간주되나, 첫 번째 것과는 달리 원 복속기 이후에야 황제 제도로 인지된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황제 제도로 인지되는 것과 동시에 의식적으로 회피되었을 것이다.
중략...
후술할 다른 사례들은 당시에 황제 제도를 자주(대등)의식 등의 목적의식 속에서 운용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의식 없이 운영하였음을 말해 준다. 고려전기 원구제 거행에 관한 필자의 판단과 부합하게도 말이다.
중략...
그런데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무엇보다 고려전기에 宣旨, 朕, 赦, 奏등이 황제 제도로 명확히 의식된 채 사용되었을지가 의문이다. 원(몽골) 관원이 이들 용어의 사용을 ‘참람한 일’이라 호명했다고 해서, 고려전기에도 그러한 의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전기에 자주·대등 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宣旨, 朕, 赦, 奏 등을 선택하여 사용하였는지는 논증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필자가 아는 한, 관련 논증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더군다나 이들 용어 사용의 실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49] 이들 용어가 과연 황제 제도로 의식되고 있었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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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용어 사용의 실제로 보아, 宣旨, 朕, 赦, 奏 등의 사용은 자주·대등 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히 분수에 넘는 짓을 하려는것이 아니라 다만 선대 왕들 때부터 전해오는 관례에 따랐을 뿐이라고’ 한 고려측의 해명에 잘 부합한다. 고려전기에 당대인은 宣旨, 朕, 赦, 奏 등을 황제 제도로 알고는 있었을 것이나 황제 제도라고 의식하면서 이를 활용한 게 아니라, 원구제 사례에서와 같이 ‘참람한 일’, ‘분수에 넘는 짓’ 등을 의식하지 못한 채―대등의식·자주의식과 무관한 채― 운용하였을 것이다. 宣旨, 朕, 赦, 奏 등을 ‘참람한일’, ‘분수에 넘는 짓’으로 의식한 것은 원 복속기 들어서 원(몽골) 측의 지적을 계기로 해서였을 것이다. 이때 고려는 이들 제도를 황제 제도로 의식하면서 회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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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곳곳에서 확인되는, 황제 제도로 알고는 있으나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보는[50] 황제 제도의 운용에 관한 현재의 감각과는 전혀 부합하지는 않지만, 현재와 이질적이었을 고려전기의 에피스테메(시대 감각)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감각을 고려전기에 투사할 게 아니라, 당시의 감각을 ‘발굴’하여 현재 우리에게 황제 제도로 간주되는 것들이 고려전기 당시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이렇듯 황제국 체제와 제후국 체제의 혼용은 화풍(華風) 중심의 관념이 비교적 강화되고, 당의 해체[51], 거란의 흥기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신라 중후기와 큰 차이는 없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가 전제하듯, 고려전기의 국제가 각각의 제도를 놓고 황제 제도↔ 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의식적으로 황제 제도를 선택·운용한 소산이었다고 하면, 그리고 이와 맞물려 원 복속기에 들어서는 상황이 뒤바뀌어 그러한 이항대 립들에서 제후 제도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면, 제후국 체제는 손쉽게 성립되었 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고려전기의 제도 중에는 조서, 폐하 類와 달리 현재의 감각에서는 황제 제도로 호명되나 고려전기 당시에는 그것의 제후(국) 제도에 해당하는 것이―조서와 폐하로 치자면 각각 교서와 전하 ― 事前에 ‘명확히’ 구비되어 있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와 관련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은 부재하였고, 이와 맞물려 이러한 제도는 황제 제도로 인지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황제 제도에 상응하는 제후 제도의 미비는 기본적으로 秦·漢 이래로 ‘중국’의 왕조가 황제국 체제로 운영되어 온 데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秦·漢 이래 각종 새 로운 제도가 신설되기도, 종래의 제도가 변형, 폐기되기도 하는 과정을 경과하면서, 황제국의 각종 제도와 의례는 唐代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는 제후(국) 명분에 부합하는 제도는 구비되고 있지 못하였다. 정확히는 그러할 필요가 없었기에 손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기에 제후국의 제도와 예제는 황제국의 그것과 달리 미비하거나 애매모호한 것들이 적지 않아서, 제후국 체제를 구현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후 명분에 ‘온전히’ 걸맞은 제도를 철저하게 운영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난점이 있었을 것이다. 즉 ① 황제국에서 쓰이는 혹은 사용되 었던 제도로, 그것의 제후(국) 버전이 부재하거나 불분명한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해당 제도를 운용해야 하는지의 문제, ② 기존에 사용해온 제도가 황제에 국 한되는 것이 비교적 분명하건만 그 제후국 버전이 존재하지 않거나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지 아니면 새로운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지, 또 대체한다고 할 때 새로운 ‘무엇’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의 문제, ③ 사용되어온 혹은 도입될 황제 제도를 제후국의 명분에 부합되도록 격하한다 고 할 때 어느 정도까지 강격해야 하는지가 명료하지 않은 문제 등은 상당한 고심거리가 되었을 수 있다.[52]
제후국 체제는 전례마저 없었고, 제후(국) 명분에 ‘온전히’ 걸맞은 제도의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온전 한 제후국 체제는 지향만 가지면, 그리고 제후 명분을 의식하면 자동으로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제후국 체제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旣 知의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제후 제도를 선택하는 것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未知의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을 창출하면서 여기서 제 후 제도를 선택·운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후라는 위상을 주체적, 자기 신념적으로 수용하고 제후(국) 명분에 온전히 걸맞 은 체제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53]가 무르익어야 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야 제후국 체제 구현에 부수된 수많은 난제와 씨름하면서 기어코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후술할 조선초기에서의 모습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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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검토 내용에 따르면, 고려전기의 당대인들은 황제 제도를 위주로 국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해, 고려전기의 국제 운영은 대부분의 제도를 놓고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황제 제도를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운용하는 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 제도는 고려전기에도 황제 제도로 인지는 되었긴 하나 당시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황제 제도로 의식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선택 내지 회피되지 않았고, 다른 일부는 아예 황제 제도로 인지되지도 못하거나 황제 제도 여부가 모호하였다.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황제 제도에 상응하는 제후 제도의 미비는 기본적으로 秦·漢 이래로 ‘중국’의 왕조가 황제국 체제로 운영되어 온 데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秦·漢 이래 각종 새 로운 제도가 신설되기도, 종래의 제도가 변형, 폐기되기도 하는 과정을 경과하면서, 황제국의 각종 제도와 의례는 唐代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는 제후(국) 명분에 부합하는 제도는 구비되고 있지 못하였다. 정확히는 그러할 필요가 없었기에 손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기에 제후국의 제도와 예제는 황제국의 그것과 달리 미비하거나 애매모호한 것들이 적지 않아서, 제후국 체제를 구현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후 명분에 ‘온전히’ 걸맞은 제도를 철저하게 운영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난점이 있었을 것이다. 즉 ① 황제국에서 쓰이는 혹은 사용되 었던 제도로, 그것의 제후(국) 버전이 부재하거나 불분명한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해당 제도를 운용해야 하는지의 문제, ② 기존에 사용해온 제도가 황제에 국 한되는 것이 비교적 분명하건만 그 제후국 버전이 존재하지 않거나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지 아니면 새로운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지, 또 대체한다고 할 때 새로운 ‘무엇’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의 문제, ③ 사용되어온 혹은 도입될 황제 제도를 제후국의 명분에 부합되도록 격하한다 고 할 때 어느 정도까지 강격해야 하는지가 명료하지 않은 문제 등은 상당한 고심거리가 되었을 수 있다.[52]
제후국 체제는 전례마저 없었고, 제후(국) 명분에 ‘온전히’ 걸맞은 제도의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온전 한 제후국 체제는 지향만 가지면, 그리고 제후 명분을 의식하면 자동으로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제후국 체제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旣 知의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제후 제도를 선택하는 것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未知의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을 창출하면서 여기서 제 후 제도를 선택·운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후라는 위상을 주체적, 자기 신념적으로 수용하고 제후(국) 명분에 온전히 걸맞 은 체제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53]가 무르익어야 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야 제후국 체제 구현에 부수된 수많은 난제와 씨름하면서 기어코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후술할 조선초기에서의 모습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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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검토 내용에 따르면, 고려전기의 당대인들은 황제 제도를 위주로 국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해, 고려전기의 국제 운영은 대부분의 제도를 놓고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황제 제도를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운용하는 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 제도는 고려전기에도 황제 제도로 인지는 되었긴 하나 당시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황제 제도로 의식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선택 내지 회피되지 않았고, 다른 일부는 아예 황제 제도로 인지되지도 못하거나 황제 제도 여부가 모호하였다.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즉, 현재의 우리는 황제 제도로 알고 있으나 당대 고려인들은 황제 제도로 의식조차 하지 못했거나 황제 제도라고 알고는 있었어도 특정한 목적의식 없이 운영하였으며 아예 고려전기의 당대인들은 황제 제도 위주로 국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54]
조선에서 노정되는 ‘자신을 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은 원 복속기 들어서 제후국 체제의 국내에서 조차의 구현과 맞물려 출현한 이래로의 것이었다. 원 복속기 들어서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인, 중국 밖 외국에서의 제후국 체제의 구현이 고려에서 이루어졌는데, 외국의 속성이 있기는 하면서도 전대와 달리 속국으로서 국내에서 조차 제후의 위상이 관철되는 등의 중국과의 ‘混一’의 환경을, 고려의 유자 관료들은 동이(동인)가 주체가 되어 동이 세계(동국)에서 중국에서와 다를 바 없이 중화 문명(문화)을 추구·구현하는 식으로 해석·轉有하였고, 이렇게 되면서 원 복속기 고려에서는 화이의식을 원안대로 수용·통용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최초로 등장하였을 것이다. 다만 원 복속기 화이의식은 이후 시기에서와 달리 현실추수적 성격을 노정하였다.
고려후기 ‘자신을 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 (민족문화연구, 2017, vol., no.74, pp. 161-220 (60 pages), 최종석)
고려후기 ‘자신을 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 (민족문화연구, 2017, vol., no.74, pp. 161-220 (60 pages), 최종석)
그리고 이러한 역사상은 비교사적 지평에서 보아도 이는 특수하다기 보다는 보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에서 대내적으로도 군주에게 '종주국 군주의 신하' 위상이 관철되는 최초의 사례는 원 복속기의 고려였다.[55]
고려전기 당시에는 國制가 황제국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황제국 체제로 비치게 된 것은, 근대적 전유의 과정을 통해 창출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에 관한 근대인의 지식과 감각이 고려전기에 소급 적용된 데서였다. 근대인은 온전한 제후국 체제를 구현하겠다는 심산에서 조선시대에 창출․완비된, 제도 전반을 대상으로 한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에 관한 각종 지식을 물려받아,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실제와는 달리 애초부터 구비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면서 자주 의식을 견지하면 황제 제도를 선택하고, 몰주체적 의식을 지니면 제후 제도를 선택한다고 자기 식대로 상상하였다. 고려전기 당대인들은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했고 어떤 것들은 황제 제도로 인지조차 되지 못했지만, 근대인은 자신의 지식을 소급 적용하여 고려전기에서 수많은 황제 제도를 찾아내고, 이들 황제 제도가 고려전기 당시에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선택된 결과이며 자주적 견지에서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된 결과라고 가정하였다. 황제 제도에 관한 근대 인식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가 탄생한 셈이다.
최종석,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국문초록.
최종석,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국문초록.
실제로 고려가 엄격한 외왕내제 국가가 아니었음은 동시대 베트남과의 비교로도 확인이 된다. 동시대 베트남에서 운용된 황제국 체제는 일관적이고 철저한 면모를 노정하였는데 반해서 이와 달리 원 간섭기 이전 고려 전기의 그것은 일관적이고 철저하지 못하였으며, 베트남의 경우 대외적으로 ‘칭신(稱臣)’을 하는 것으로 인해 국내에서 황제로 칭해지는 군주의 권위가 손상되는 점을 우려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시행하였지만 이와 달리 전기 고려는 대외적으로 '칭신'을 하는 것으로 인해 군주의 권위가 손상되는 점을 우려하여 이를 막고자 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가 없는 편이다.[56]
동시대 베트남과 고려의 이러한 차이는 베트남의 경우 10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직접 지배의 경험이 있는데다가, 독립된 이후로도 중국으로부터 빈번한 무력 침략을 받거나 그러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하였고 ‘중국’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측면이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서 베트남은 국내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철저하게 지향․운영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왕조에 ‘칭신’을 하면서도 군주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고심하였을 것이다. 반면 그러한 경험이 없었던 고려에서의 ‘외왕내제’의 체제는 베트남에서와 같은 중국에 대한 저항 및 대등 의식과 같은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지향되거나 운영되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57]
끝으로, 고려전기 당시에 國制는 황제국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현재를 살아 가는 우리의 눈에는 황제국 체제로 비치는 경위를 간략히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시대에는 제도 전반을 대상으로 하여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정립되어 있었고(황제국과 제후국에서 공히 통용될 수 있는 제도도 정해짐), 제후 명분을 견지하고자 그러한 이항대립에서 의도적으로 제후 제도를 선택·운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자신의 시각과 지식을 토대로 고려전기의 각종 제도를 황제 제도로 보았으며 그러한 제도가 참월한 생각을 갖고 행한일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 어떤 제도를 황제 제도로 혹은 제후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판정하느냐에 따라 고려시대의 해당 제도는 황제 제도로 참월한 것이 되기도, 그렇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전기의 제도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가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선택·판단과 이념에 따라 결정된 셈이다.
조선시대에 완비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 관한 각종 지식은 근대에 들어서도 계승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계승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은 근대의 역사의식, 그중에서도 민족을 역사 주체로 한 자율(긍정)과 타율(부정)의 도식 하에서 자주-황제 제도↔타율-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으로 재탄생하였다. 조선시대의 非禮-황제 제도↔禮-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근대적으로 전유된 것이다. 근대인은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실제와는 달리 애초부터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채, 자주 의식을 견지하고 있으면 그 가운데 황제 제도를 선택하고, 몰주체적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제후 제도를 선택한다고 하는 도식을 창출·공유하였다.
조선초기를 경과하면서 제후국 체제가 성립하고 이와 맞물려 제도 전반을 대상으로 각각의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완비된 덕택에, 근대인은 제 도 전반에서 무엇이 황제 제도고, 무엇이 제후 제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인은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의 역사성을 몰각한 채 그러한 이항대 립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인들의 지식이 특정 역사 시대의 산물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명확하면서 事前에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는 이를 어느 시대에나 대입하곤 했다. 그 결과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근대인과 다름없이 무엇이 황제 제도고, 무엇이 제후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근대인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황제, 제후 제도에 관한 지식을 소급 적용하여 포착된 ‘황제 제도’ 내지 ‘제후 제 도’가 해당 사회 내에서 어떻게 인지·의식되고 있었는지를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자신의 ‘상식’대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소산이라고 전제하였다. 물론 선택의 과정에서는 자주 의식을 견지하면 이 항대립 가운데 의식적으로 황제 제도를 선택하고, 몰주체적 의식을 지니면 의식 적으로 제후 제도를 선택하였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는 우리 시대의 언설에 등장하는 황제 제도는 바로 근대적으로 전유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에서의 황제 제도일 것이다. 고려전기 당대인들은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했고 어떤 것들은 황제 제도로 인지조차 되지 못하였지만, 근대인은 자신의 지식을 소급 적용하여 고려전기에서 수많은 황제 제도를 찾아내고, 이들 황제 제도가 고려전기 당시에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선택된 결과이며 자주적 견지에서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된 결과라고 가정하였다. 결국, 고려전 기의 황제 제도라 지목되고 있는 것들은 황제 제도에 관한 근대 인식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것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감각에 오염되지 않았을 고려전기 국제의 실상과 이를 초래한 에피스테메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시대에는 제도 전반을 대상으로 하여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정립되어 있었고(황제국과 제후국에서 공히 통용될 수 있는 제도도 정해짐), 제후 명분을 견지하고자 그러한 이항대립에서 의도적으로 제후 제도를 선택·운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자신의 시각과 지식을 토대로 고려전기의 각종 제도를 황제 제도로 보았으며 그러한 제도가 참월한 생각을 갖고 행한일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 어떤 제도를 황제 제도로 혹은 제후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판정하느냐에 따라 고려시대의 해당 제도는 황제 제도로 참월한 것이 되기도, 그렇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전기의 제도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가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선택·판단과 이념에 따라 결정된 셈이다.
조선시대에 완비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 관한 각종 지식은 근대에 들어서도 계승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계승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은 근대의 역사의식, 그중에서도 민족을 역사 주체로 한 자율(긍정)과 타율(부정)의 도식 하에서 자주-황제 제도↔타율-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으로 재탄생하였다. 조선시대의 非禮-황제 제도↔禮-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근대적으로 전유된 것이다. 근대인은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실제와는 달리 애초부터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채, 자주 의식을 견지하고 있으면 그 가운데 황제 제도를 선택하고, 몰주체적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제후 제도를 선택한다고 하는 도식을 창출·공유하였다.
조선초기를 경과하면서 제후국 체제가 성립하고 이와 맞물려 제도 전반을 대상으로 각각의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완비된 덕택에, 근대인은 제 도 전반에서 무엇이 황제 제도고, 무엇이 제후 제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인은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의 역사성을 몰각한 채 그러한 이항대 립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인들의 지식이 특정 역사 시대의 산물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이 명확하면서 事前에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는 이를 어느 시대에나 대입하곤 했다. 그 결과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근대인과 다름없이 무엇이 황제 제도고, 무엇이 제후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근대인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황제, 제후 제도에 관한 지식을 소급 적용하여 포착된 ‘황제 제도’ 내지 ‘제후 제 도’가 해당 사회 내에서 어떻게 인지·의식되고 있었는지를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자신의 ‘상식’대로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소산이라고 전제하였다. 물론 선택의 과정에서는 자주 의식을 견지하면 이 항대립 가운데 의식적으로 황제 제도를 선택하고, 몰주체적 의식을 지니면 의식 적으로 제후 제도를 선택하였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는 우리 시대의 언설에 등장하는 황제 제도는 바로 근대적으로 전유된,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에서의 황제 제도일 것이다. 고려전기 당대인들은 황제 제도로 의식하지 못했고 어떤 것들은 황제 제도로 인지조차 되지 못하였지만, 근대인은 자신의 지식을 소급 적용하여 고려전기에서 수많은 황제 제도를 찾아내고, 이들 황제 제도가 고려전기 당시에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에서 선택된 결과이며 자주적 견지에서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된 결과라고 가정하였다. 결국, 고려전 기의 황제 제도라 지목되고 있는 것들은 황제 제도에 관한 근대 인식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것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감각에 오염되지 않았을 고려전기 국제의 실상과 이를 초래한 에피스테메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심지어 조선에서 어떤 제도를 황제 제도로 혹은 제후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판정하느냐에 따라 고려시대의 해당 제도는 황제 제도로 참월한 것이 되기도, 그렇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고려전기의 제도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가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선택·판단과 이념에 따라 결정된 셈이었던 것이다. 즉, 고려전기 당시에 國制는 황제국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눈에 황제국 체제로 비치게된 경위란 고려시대 사람들 스스로의 인식이 아닌 후대의 조선초기 특정 시대의 판단과 이념을 근대인들이 이를 어느 시대에나 대입하면서 벌어진 일종의 오해라고 볼 수 있겠다.[58]
결국 고려 전기를 황제국 체제로 해석하는 것은, 몽골 주도의 세계질서와 양국(원나라-고려)의 종속관계가 자리잡힌 이래[59] 고려에서 종속적인 제후국 체제가 성립[60]되고, 이후의 명청 - 조선 관계의 종속적[61] 내지는 비대칭적[62] 관계 속에서 제후국 체제가 강화, 지속[63]됨에 따라 자리잡힌 관념을 근현대인이 특정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한 채, 애초부터 구비되어 있다는 초역사적인 무엇으로 전제하여, 의도적, 일관적으로 채택한 것이라 가정한 것일 뿐이다.[64]
결국 외왕내제를 자주국으로서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국체(國體)라고 보는 시각은 굉장히 단편적인 시각으로서, 베트남이 역설적으로 중국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받고 침략을 받아온 트라우마에 의해 외왕내제에 집착한데 반해, 그러한 경험이 없었던 한반도 국가들은 당연하지만 외왕내제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별개로 자주성을 지켜온 점을 본다면 오직 외왕내제의 시행 여부 하나만으로 자주성을 논한다는 것은 잘못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3. 중원의 반응
제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황제국에서 쓰는 체제를 그대로 갖다 쓴다는 사실에 대해서 중원의 왕조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거나, 안다고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사실상 그냥 넘어갔다. 어쨌건 우방국인데 이런 쓸 데 없는 명분 문제 하나로 조공국들을 잃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리도 멀어서 태클 걸기도 뭣했고 겨우 그 문제 하나만으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부담스러웠고 말이다.나당전쟁 직후 당나라나 19세기 말 동네북으로 전락한 청나라 때는 중원의 왕조들이 껄끄럽든가 말든가 한국에 태클을 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시기 신라와 대한제국은 아예 드러내고 쓰기도 했다.
4. 사례
4.1. 한국
4.1.1. 고조선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삼국지》와 《위략》에 따르면 전국시대인 기원전 323년에 연나라의 희퇴(姬脮)가 왕을 자칭하자 조선후도 왕을 자칭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진시황이 황제라는 단어를 만들기 전이었으므로 황제라는 단어가 없었다. 상·주 역성혁명부터 춘추시대까지는 주나라만이 천자·천왕·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제후들은 공·후·백·자·남의 5등작을 사용했다. 예외로 다른 제후국들로부터 오랑캐라고 불릴 정도로 다소 이질적이었던 초나라 정도만 왕을 칭했다. 즉 당시 고조선은 스스로를 천자의 국가로 칭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주나라 왕실을 받들려 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전국시대 당시 여느 중국 제후국처럼 패자를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단군조선 이후의 위만조선에서는 국왕의 후계자를 황제의 후계자를 칭하는 용어인 태자라고 불렀고[65] '비왕(裨王)'이라는 제후왕 혹은 왕작(王爵)이 존재했다.
4.1.2. 고구려
중국 측의 기록을 제외하고 봐도 내부적으로 중국의 연호를 빌려쓰거나 사대한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다른 시대와 달리 고구려는 철저하게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겼고, 외부적으로도 대국임을 자처했으며 도량형과 연호 등 여러 면에서 그러한 흔적이 남아있다. 중국 중심의 천하관은 중원을 정점으로 각 지방과 세계가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있는 일원적 세계관이지만, 고구려는 중원의 천하와 만주 및 한반도의 천하가 분리된 다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사 관련 주요 학자들은 고구려를 제국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삼국사기》도 인용한 북위의 사서 《위서》는 자국 중심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 고구려인이 작성한 〈광개토대왕릉비(414)〉를 보면 고구려는 외부적으로도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쓰여있듯이 천자를 칭하였고, 독자적인 연호와 천하관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왕(太王)' 등의 높은 칭호와 '영락(永樂)'을 비롯한 연호를 쓰고, 신하를 왕이나 제후로 봉하는 등 황제국의 모습을 표방하였다. 건국 초에는 군주호로 부족장을 통칭하는 몇 가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군주의 칭호 문서
의 대한민국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그렇지만 중국과의 교류에서는 조공 무역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중국 왕조들은 자국 외부의 다른 국가들을 동일한 천자국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왕내제적인 면모도 보이는데, 실제 외교관계에서는 거의 대등한, 최소한 별개 권역을 관장하는 패권국 대우를 받았다.
4.1.2.1. 봉작
초대 임금 동명성왕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다물국 왕'으로 봉했으며, 제3대 임금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략해 임금 대소왕을 죽이고, 그의 사촌 동생에게 '낙(絡)'씨 성을 주어 왕으로 봉하였다.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安置椽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선왕이 돌아가시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기댈 데가 없는데, 왕의 아우는 달아나 갈사수에 도읍했다. 나 또한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가 없다." 이에 1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두었다.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다고 하여 낙씨(絡氏)라는 성(姓)을 내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7월
시간이 흘러 제 19대 임금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아신왕을 '노객(奴客)'[66]으로 삼아 신하로 두며 고구려의 관할 하에 두었다는 자료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남아있다.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진(鎭)의 무덤,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에도 '자손들의 관직이 후왕(侯王)에 이르게 하라'는 문구가 등장한다.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선왕이 돌아가시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기댈 데가 없는데, 왕의 아우는 달아나 갈사수에 도읍했다. 나 또한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가 없다." 이에 1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두었다.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다고 하여 낙씨(絡氏)라는 성(姓)을 내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7월
뒤를 이은 장수왕 또한 〈충주 고구려비〉에서 태자 공(共)과 함께 신라의 매금(寐錦)에게 옷을 내려주고 신하로 봉해 고구려의 관할 하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수왕은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을 '용성왕 풍군'으로 낮춰 부르기도 했다. 이후 풍홍은 유송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것을 눈치챈 장수왕이 군사를 보내 죽여버렸다.
初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처음 연나라 왕 풍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홍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꾸짖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26년(438년) 3월
7세기의 〈고성문 묘지명〉에서도 가문의 중시조가 모용선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왕에 책봉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처음 연나라 왕 풍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홍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꾸짖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26년(438년) 3월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작성된 《신찬성씨록》은 고구려에 제후왕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 고려국 원라군 저왕(元羅郡 杵王)의 9세손 연노왕(延孥王)
- 고려국 안류왕(安劉王)
- 고려국 능기왕(能祁王)
- 고려 안악상왕(安岳上王)
- 고려국 장왕 주(長王 周)(장왕의 이름)
- 고려국 구사기왕(久斯祁王)
- 고려국주 추모왕의 20세손 여안기왕(汝安祁王)
- 고려국 복귀왕 일사(福貴王 溢士 (복귀왕의 이름)
- 고려 대방국주 지한법사(高麗 帶方國主 氏韓法史(대방국주의 이름)
- 고려국 보륜왕(寶輪王)
- 고려국 수모기왕(須牟祁王)
등이 《신찬성씨록》에 적혀져 있는데, 고구려의 제후국이나 왕족의 이름이 나타난다.
4.1.2.2. 다른 나라의 대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를 '대국(大國)'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보통 천자국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었다.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軼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김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년) 겨울
또한 늦어도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의 치세를 전후해서는 중국 왕조들도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보유하고 있고 자신의 독자적인 천조질서를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인정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김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년) 겨울
昔方貢之愆, 責在連率, 卿宜校勘宣朕志於卿主, 務盡威懷之略, 揃披害群, 輯寧東裔, 使二邑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지난 공물의 잘못은 연솔의 책임이니, 경은 마땅히 경의 임금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67]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68]으로 하여금 옛 터를 수복하도록 하여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69][7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4년) 4월
지난 공물의 잘못은 연솔의 책임이니, 경은 마땅히 경의 임금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67]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68]으로 하여금 옛 터를 수복하도록 하여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69][7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4년) 4월
4.1.2.3. 왕실 예법
임금의 정처를 후(后)라 불렀고 어머니를 태후(太后)라고 불렀다.[71] 그 대표적인 예로 동천왕의 사례가 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의 친모인 후녀는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고, 동천왕은 산상왕의 첫째 왕후 우씨를 왕태후로 책봉했다.그 밖에 '성상' 등 제국의 황실에서 사용하는 예법 용어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기록에 고구려 사람들이 왕을 일컬어 '성상'이라 칭했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357년경 축조된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대행렬도에 그려진 깃발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음을 통해 당시 고구려인들이 왕을 성상이라고도 불렀을 것이라 추측하는 의견이 존재한다. #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왕을 높여 부르며 성상이라 부른 사례를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본래 성상이란 용어는 제후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칭호이다.
고구려는 또한 동맹, 교제(郊祭)[72] 등 하늘에 여러 제사를 지냈는데, 이러한 천제(天祭)는 황제국만 할 수 있던 것이었다.
4.1.2.4. 천손 사상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고서나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등 당대의 금석문에서는 고구려의 동명성왕을 '황천지자(皇天之子)'나 '일월지자(日月之子)', '하백지손(河泊之孫)'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각각 하늘의 아들, 해와 달의 아들, 물의 신 하백의 손자라는 뜻으로 모두 고구려의 시조가 하늘의 화신(化神)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미칭들로 고구려가 하늘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나 이색의 〈부벽루〉를 통해 후대 왕조 고려에서도 고구려 임금에 대한 찬양을 엿볼 수 있다.중국 왕조의 천자라는 개념과 비교해 보자면, 중국의 천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권위를 받은 대리자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천손 사상은 말 그대로 하늘이라는 절대적 존재와 혈연적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옛적 시조 추모왕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 …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터에서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을 띄워라."
〈광개토대왕릉비〉 제1면 비문 中
옛적 시조 추모왕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 …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터에서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을 띄워라."
〈광개토대왕릉비〉 제1면 비문 中
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 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
하백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북부여에서 태어나셨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모두루 묘지명〉 中
하백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북부여에서 태어나셨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모두루 묘지명〉 中
4.1.2.5. 기타
고구려가 나당동맹에 패한 후 당나라에 자발적으로 간 몇몇이 있는 반면 고을덕처럼 고구려의 존재를 잊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고을덕 묘지명〉을 해석해 보면 고구려의 관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를 서조(西朝)라고 부르는 문구에서 고구려의 자주성을 볼 수 있다. 당나라를 서조라고 부른 것은 당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셈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쌍분된 왕조 계통을 '남조와 북조'라고 하는 것처럼, '서조'라는 것은 두 개의 왕조 가운데 서쪽에 있는 왕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동조'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수서》 〈고려전〉에는 고국원왕이 '소열제'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은 《위서》의 내용을 오독하여 잘못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므로 외왕내제의 예로 인정되지는 않는다.[73] 소열제라는 칭호는 유명한 그 삼국지의 '한소열제' 유비를 뜻하는 것이다.
4.1.3. 백제
4.1.3.1. 봉작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처럼 왕족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제후인 왕과 후로 봉하기도 했다. 한국 측 사서에는 기록된 것이 없지만 중국 이십사사인 《송서》, 《위서》, 《남제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왕이나 후로 봉작받은 자들 중 백제의 국성인 부여씨 성이 많다. 사서 원문에는 여(餘)씨라고만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인들이 중원 왕조에 국서를 보낼 때 성씨를 1글자로 축약해서 쓰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경우 이름까지 한 글자로 축약하기도 했다. 이는 백제 왕이 왕족들을 통해 귀족을 누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관군장군(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 정로장군(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
이상 《송서》 〈이만열전〉 백제조에 나오는 제후왕들이다.
-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 >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도한왕(都漢王)
-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 > 영삭장군(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
-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 >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
-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 > 건위장군(建威將軍) 불사후(弗斯侯)
- 사법명(沙法名) >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
- 찬수류(贊首流) >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辟中王)
- 해례곤(解禮昆) >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
- 목간나(木干那) >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
이상 《남제서》 〈만동남이열전〉 백제국조에 나오는 진작된 제후왕들이다. 또한 왜왕을 후왕이라고 한다.
4.1.3.2. 왕실 예법
〈무령왕릉 지석(523)〉에서는 무령왕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을 비유하는 단어인 "붕(崩)"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미륵사 사리함기(639)〉에는 백제 무왕이 신하들로부터 '대왕 폐하(大王 陛下)'라고 불려진 것과 국왕의 정실을 '왕후(王后)'라고 불렀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열병식 때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과 개로왕 등 여러 임금을 대왕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어라하', '건길지' 등 백제 고유의 왕칭도 같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백제인 〈예군묘지명(678)〉을 보면 백제 의자왕이 "참제(僭帝)"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는 '황제를 사사로이 칭했다'는 뜻이다. 또한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우치 가문의 족보에는 백제 국왕을 '백제국 마한 황제 제왕(百濟國 馬韓 皇帝 齊王)'이라 부르고 있다. 예군묘지명의 경우는 백제 정벌의 명분을 부여하기 위해서, 오우치 가문의 족보의 경우는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이같은 기록이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슷하게 천자국만이 할 수 있었던 천제(天祭)를 지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매년마다 5제와 시조신 동명왕 및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4.1.3.3. 기타
《한원》에서 "백제는 연호 대신 육십갑자를 사용한다"라고 한 기록 및 고구려[74]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등에서 누락 되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백제 또한 자체적인 연호를 갖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육십갑자를, 대내적으로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학설들은 백제가 외왕내제를 칭했다는 학설에 힘을 실어준다. 이 경우 4~5세기 대외교류의 상징인 칠지도 명문의 '태▨(泰▨)'가 독자적 연호였을 것이라는 학설은 한성백제 이후에 연호를 폐기하고 육십갑자를 사용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한 것이다.4.1.4. 신라
법흥왕 대부터 진덕여왕 대까지 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7개의 연호를 사용했고 이 시기 신라는 皇(황) 또는 帝(제)의 글자를 자주 사용했다. 그 예시로는 진흥왕 순수비에서 확인된 제왕(帝王)이란 표현, 진흥왕이 세운 절 황룡사(皇龍寺), 삼국유사의 비형랑 설화에서 나오는 사(詞)에서 진지왕을 '성제(聖帝)'라고 칭한 것, 진평왕의 옥대 성제대(聖帝帶), 선덕여왕의 칭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선덕여왕이 세운 절 분황사(芬皇寺) 등이 있다. 또한 고려와 같이 왕의 후계자에게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진덕여왕 시기 당나라와 나당동맹을 맺을 때 당나라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여 연호를 폐지하게 된다.태종 무열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황제 묘호를 올렸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묘호는 시조를 태조로 추숭한 사례 외에는 태종 무열왕과 열조 원성왕[75]밖에 없는데, 이는 태종 무열왕의 묘호가 당나라와의 외교 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692년 당나라 중종은 신라 신문왕에게 태종 무열왕에게 올린 태종이라는 황제 묘호를 고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태종 무열왕의 덕과 업적이 크기 때문에 태종의 묘호가 합당하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했고, 당나라는 이후 더 이상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나라 측이 신라가 황제 묘호를 사용하지 말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라 태종이라는 묘호가 당나라에서도 정관의 치로 추앙받는 당태종 이세민의 묘호와 같았기 때문에 다른 묘호로 고치라고 요구한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신라가 못 고치겠다고 하자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이 사건 때문에 무열왕의 태종 묘호는 《삼국사기》에 기록되게 되었다.
4.1.4.1. 봉작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에서는 지증왕 대에 화백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귀족들을 왕이라고 불러서 신라 국왕 아래에 제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국왕 아래에는 갈문왕이라는 특수한 작위가 있었는데, 주로 국왕과 일정한 관계하에 있는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에게 수여되었다.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안승이 검모잠과 손잡고 당에 대항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할 때 신라에 의해 고구려 왕에 봉해졌으며, 신라로 도망쳤을 때는 괴뢰국 "보덕국"을 만들어 그 나라의 왕으로 책봉하였고, 원성왕이 김주원을 "명주군국"의 "명주군왕"으로 책봉하는 등 자국 휘하에 제후국을 둔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76] 탐라국과 우산국도 제후국으로서 신라에 입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1.4.2. 왕실 예법
"대왕"이나 "태왕" 같은 호칭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군주들이 대왕이라고 불렸고, 법흥왕과 진흥왕이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당시 자국만의 천하관을 지녔던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였다.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539)〉에서는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을 모즉지태왕비(另卽知太王妃) 부걸지비(夫乞支妃)라고 하였으며,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568)〉에서는 진흥왕을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혁거세왕 조'에서 시조인 박혁거세를 가리켜 '천자'라는 표현이 있고, '삼국유사 남해왕 조'에서 '삼황(三皇)'이라는 표현이 있다.백제와 같이 왕을 폐하라고 불렀으며 임금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제2대 남해 차차웅 때부터 '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이후의 왕들도 모두 '짐'이라는 자칭을 쓴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과 신문왕이 각각 동생과 신하로부터 폐하라는 존칭을 받는다. 문무왕은 《삼국유사》에서 무령왕과 같이 "붕(崩)"이라는 존칭으로 죽음이 묘사된다.
《삼국사기》에 있는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의 선황(先皇)은 원성왕으로 추정된다. 〈갈항사석탑기(758)〉에는 원성왕의 어머니를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기록하고 있고, 원성왕 본인을 "경신태왕(敬信太王)"으로 칭하고 있다.
〈개선사석등기(858)〉에는 경문왕의 왕비 문의왕후를 '문의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문명왕후가 문명황후로 기록되어 있는 등 왕비를 왕후가 아니라 '황후'로 기록한 경우가 종종 보인다. 사실 신라의 왕비들은 대부분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드물게 왕후나 황후로 기록된 경우가 발견되긴 하지만. 〈월광사원랑선사탑비(890)〉를 보면 경문왕이 재위 시절에 황제와 왕의 복합어인 황왕(皇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4.3. 묘호 사용
신라는 유교를 수입하면서 오악을 정하고 유교식 제사인 종묘를 세웠는데, 종묘의 제도는 비록 제후가 사용하는 5묘제를 썼지만 모순되게도 태조, 태종, 열조와 같은 황제의 묘호를 사용했다.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쓰는 것이다. 종묘의 제도에 있어 고려는 황제국이 사용하는 7묘제를 사용했고, 조선은 세종대왕 시기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을 만들었으며, 대한제국의 7묘제가 섞여 들어갔다. 이것이 현재도 존재하는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이다.致祭曰, "王某稽首再拜, 謹言大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大宗大王·文武大王之靈."
제사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전에 아룁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687년) 4월
이 제문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라 태조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흥덕왕릉비(836)〉 등 금석문에서도 신라의 '태조 성한'이 등장한다. 자세한 사항은 성한왕 문서로. 신라에서 일부 왕에게 내제의 상징인 묘호를 올렸고, 실체가 모호한 태조의 존재 기록을 볼 때 태조와 태종, 열조 이외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묘호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제사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전에 아룁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687년) 4월
고려나 조선에서는 폐위된 왕을 제외한 모든 왕에게 묘호를 올렸지만, 원래 중국에서도 수·당시대 이전까지는 업적이 많은 주요 군주에게만 묘호를 올리는 게 보통이었다. 예를 들면 전한의 역대 황제 목록을 봐도 묘호가 있는 인물은 초대, 5대, 7대, 10대, 11대, 12대, 14대 뿐이다. 신라가 묘호를 사용했더라도 고려나 조선과 달리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은 있다.
4.1.4.4. 대외적 표현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나라와의 사대적 외교 때문에 소극적으로 바뀌지만 외왕내제 체제를 계속 유지했고, 나당전쟁 승리 이후 발해나 일본을 자신의 번국 취급하기도 했다. 대조영을 신라의 관직인 대아찬으로 봉하였고, 일본에 보내는 사신은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칭했다. 《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세계관에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었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 측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다.당나라는 신라의 묘호 사용을 모르지 않아서 당 중종 때 신문왕에게 구두로 묘호를 쓰지 말라고 조칙을 내렸었지만, 신문왕은 조칙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에서 신문왕은 태종 무열왕이 흥무대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뤘으므로 그 공이 너무 커 묘호를 썼으니 당나라가 양보해달라고 전했고, 신라를 무시할 수 없었던 당은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4.1.4.5. 기타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왕이라고 자칭했음에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 같은 관직을 사용해 신라 왕실의 신하를 자처한 것은 이러한 신라의 외왕내제 체제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4.1.5. 발해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3성 6부제를 실시했다. 한국 역대 왕조 중 가장 큰 영토를 가졌으며, 당의 문화를 수용했지만 고구려의 문화 역시 보존하여 발해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만든 국가이다.4.1.5.1. 연호
시기가 명확히 확인되는 연호 사용례가 가장 많이 발견된다. 고구려도 사용례 자체는 많으나, 사용 시기가 명확히 확인된 연호는 영락 하나뿐이다. 대외적으로는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건국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 제2대 임금 무왕부터 제11대 왕 대이진이 사용한 연호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초대 임금 고왕(高王) 대조영의 연호는 '천통(天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는 없고 《태씨 족보》에만 남아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4.1.5.2. 왕실 예법
정혜공주 묘비와 정효공주 묘비에서 당시 국왕이었던 문왕을 '황상(皇上)'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신하들과 황족들이 황제를 부를 때 쓰던 용어이다. 또한 2005년에 중국 길림성에서 발견된 유적에서는 발해 국왕의 정실 아내가 황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3대 임금 문왕의 정처 '효의황후(孝懿皇后)', 제9대 임금 간왕의 정처 '순목황후(順穆皇后)'이다. 발해의 부흥국들이 부흥운동 때 한결같이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한 것을 보아 발해의 국왕은 내부적으로 '성왕(聖王)', '가독부(可毒夫)', '기하(基下)'[77] 외에 '황제 폐하'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가독부, 기하, 성왕 등 단어들은 《신당서》 및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4.1.5.3. 봉작
대이진 임금이 일본에 보낸 〈함화[78]11년중대성첩사본(841)〉에서는 '문리현의개국남(聞理縣擬開國男) 하수겸(賀守謙)', '안풍현개국공(安豊縣開國公) 대건황(大虔晃)'이라는 이름과 작위가 발견되어 백제와 고려처럼 5등작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함화 4년명 불상'에는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 왕이 황제처럼 '허왕'이라는 제후왕을 봉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유민 세력 중 말갈을 이끌던 걸사비우가 당나라에게 받은 작위가 허국공이었다. 기록 미비로 연관성은 알 수 없다,4.1.6. 후삼국
- 태봉 - 임금 궁예가 황제처럼 연호를 사용했다.
- 후백제 - 국왕 견훤이 연호를 사용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 자료에는 기록이 없고 전북 남원 실상사 인근의 조계암 터에 있는 편운 화상 부도에 '정개(正開)'라는 연호가 적혀 있다. 당시 그 어떤 나라도 이 연호를 쓰지 않았기에 견훤의 연호라는 것이 확실하다.
4.1.7. 고려
자세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 참고하십시오.4.1.7.1. 관련 기록들
자세한 내용은 외왕내제/고려 관련 기록들 문서 참고하십시오.4.1.7.2. 왕실 예법
기본적으로 신하의 국왕에 대한 정식 호칭은 "성상 폐하(聖上陛下)"였다. 성상이라는 표현은 본래라면 제후국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는 호칭이다. 또한 왕자를 태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황제의 아들이 쓰는 표현이다. 고려시대 금석문에는 "황상", "황후" 등의 호칭이 매우 많이 나온다. 《동문선》의 고려시대 작품 속에서도 "황상 폐하", "황태자 전하", "황자(皇子)", "천자(天子)", "영공 전하"[79], "영공 저하"[80], "영공 각하"[81] 등의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를 당시 본인이 "구오통림(九五統臨)의 극에 달했다"고 표현한 것 역시 스스로가 천자의 자리에 올랐음을 나타내는 발언이다.〈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에서는 태조의 죽음을 "천붕(天崩)"으로 표현하고 광종을 "우리 황제 폐하(我皇帝陛下)"라고 서술했다.[82]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1025년)〉에서는 광종의 등극을 "입황극(立皇極)"이라 표현했고, 현종의 명령은 "조(詔)", 자칭을 짐(朕)이라 했다. 현종의 별칭을 "만승(萬乘)"이라 했고, 의지는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 했다. 숙종의 딸인 〈복령궁주 묘지명(1133)〉에는 궁주를 "천자지녀(天子之女)"라고 서술하고 그녀의 고향 개경을 "제향(帝鄕)"으로 표현했다.
왕을 종(宗)이라 칭했으며 폐하(陛下), 태후(太后), 태자(太子), 절일(節日) 등의 황실 예법을 사용했다. 또한 고려 국왕의 절일에 요나라와 금나라에서 생신사를 파견하여 고려 국왕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이는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고려가 황제의 생일을 뜻하는 절일을 사용하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이다.
또한 천자국의 사신이 북쪽에 서고, 제후국이 남쪽에 서는 것이 사신의 의례였으며, 양국이 대등한 입장이라면 사신이 손님의 위치인 동쪽에, 해당 국가의 왕은 서쪽에 서는 것이 의례였다. 고려를 방문한 요와 금의 사신은 북쪽에 섰지만, 고려 국왕은 제후국의 신하 입장에서 남쪽에 서는 것이 아닌 주인 입장에서 손님을 대하는 서쪽에 섰다.
국왕은 신하에게 조칙(詔勅)[83]이나 제(制)[84]를 내렸고, 신하들은 왕에게 표문(表文)[85]을 올렸으며, 왕태자에게 전문(箋文)[86]을 올렸다. 또한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은 1122년 2월 26일에 자신에게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칭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고려의 임금이 그 전까지 "신성제왕"이라고도 불려왔다는 이야기이다.
고려는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 '황기(皇畿)', '제도(帝都)', '제향(帝鄕)'이라고 불렀다. 대표적으로 〈인종시책(1146)〉에서는 개경을 '제향(帝鄕)'이라고 기록했으며, 고려의 왕족이자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자신이 지은 시에 '황기(皇畿)'[87], '제성(帝城)'[88]과 같은 단어를 집어 넣었다. 아울러 궁성인 만월대 내에 있는 만월대 내 별궁들에는 고려 이전 한반도 국가들의 이름인 계림(鷄林), 낙랑(樂浪), 조선(朝鮮), 부여(夫餘) 등의 이름을 붙여 고려 국왕이 이 나라들을 거느린 황제급 군주임을 표현했다.
황제국의 제도인 봉작제를 시행했고 궁궐의 대문을 5개로 만든 것도 황제국의 예법이다. 다만 고려는 중국의 봉작제와는 다르게 5등작을 수여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생전에 왕작을 내리지는 않았다. 단, 경순왕 김부의 경우 고려 황제의 제후로서 생전에 낙랑왕의 작위가 수여되었으며, 그 외에는 문원대왕·정간왕·양헌왕 등과 같이 주로 사후에 왕작이 수여된 사례가 많았다. 이는 진시황제가 황제의 작위를 만들기 이전 대왕이 최고 작위인 은, 주의 작위체계와 같다. 또한 공(公)·후(侯)·백(伯)·사도(司徒)·사공(司空)에 봉작된 왕족들을 아울러서 "제왕(諸王)"이라고 불렀다.
이를 두고 《임하필기》와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고려에서 칭한 제왕은 여러 왕씨를 의미하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국가의 제도에서 종실을 제왕(諸王)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의 여러 유씨(劉氏)나 당나라의 여러 이씨(李氏)들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서, 다만 동성(同姓)임을 말하는 것일 뿐이요 이것이 관작은 아닌 것이다." — 《임하필기》 제1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익재난고》 제9권 〈종실전서(宗室傳序)〉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 하지만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상 왕작을 내린 것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려에서는 이들 왕족王族에게 수여한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과 그들의 다음 대代에 해당하는 자들에게 수여한 사도司徒․사공司空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고 했다. 제왕諸王을 단순히 ‘여러 왕씨王氏’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왕족들은 전부 왕씨王氏이기 때문이다. 고려후기에 활동한 이제현은 그의 종실전서宗室傳序 에서 “종실宗室을 제왕諸王으로 칭한 것은 한漢의 제유諸劉나 당唐의 제이諸李처럼 동성同姓을 뜻하는 것이지 작爵이 아니다”라고 하여, 제왕諸王을 단순히 ‘여러 왕씨王氏’로 이해하고 있다. 그럼 과연 제왕諸王이 작爵인지 아닌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 위와 같은 제왕諸王이라는 명칭이『고려사高麗史』에서 다수 산견되고 있는 바, 이제현은 그것이 당唐의 경우처럼 친왕親王․사왕嗣王․군왕郡王을 일컫는 작爵이 아니라, ‘여러 왕씨王氏’를 뜻하는 동성同姓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원元과의 관계에서 제반제도가 일등급 하락한 상태에 살던 이제현의 이러한 설명은 일단의 의심이 간다고 하겠다. 앞에서 당唐의 경우 친왕親王․사왕嗣王․군왕郡王을 제왕諸王이라고 하였는데, 고려기高麗期에도 제왕諸王 외에 친왕親王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즉 왕족을 지칭할 때에 제왕諸王 대신 친왕親王으로도 표현하였고, 혹은 제왕諸王 중에서 상위에 위치한 자를 친왕親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후작侯爵을 받은 왕족을 후왕侯王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들은 제왕諸王이 단순히 동성同姓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김기덕, 高麗의 諸王制와 皇帝國體制, 1997』
『김기덕, 高麗의 諸王制와 皇帝國體制, 1997』
대신 고려는 임금이 죽은 뒤 왕에게 올리는 시호에는 '황제(皇帝)'가 아니라 '대왕(大王)'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왕내제의 모습은 원 간섭기 이후 고려가 원나라의 심각한 간섭을 받게됨에 따라 묘호 사용 금지와 충(忠)자 돌림의 사용, 기타 왕실 용어의 격하에 따라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아래 내용은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가 고려에 외왕내제마저도 완전히 금지한다고 통보한 글이다.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稱朕·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갑신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왕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고려사》 제28권 충렬왕 2년(1276년) 3월 19일 #
또한 원은 고려에 대하여 묘호 사용도 완전히 금지하고, 반원개혁을 단행한 공민왕 이전까지 계속 충(忠)자 돌림만을 시호로 내려주기도 하였다.갑신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왕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고려사》 제28권 충렬왕 2년(1276년) 3월 19일 #
忠宣王二年, 元賜謚忠烈, 恭愍王六年, 加景孝.
충선왕 2년(1310년)에 원(元)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민왕 6년(1357년)에는 경효(景孝)를 덧붙였다.
《고려사》 제32권 충렬왕 34년(1308년) 7월 13일 #
이 탓에 고려는 충렬왕 이후 공양왕 때 나라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약 120여 년 동안 외왕내제 천자국으로서의 핵심이었던 묘호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충선왕 2년(1310년)에 원(元)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민왕 6년(1357년)에는 경효(景孝)를 덧붙였다.
《고려사》 제32권 충렬왕 34년(1308년) 7월 13일 #
4.1.7.3. 제사
종묘의 제도로는 천자의 7묘제와 제후의 5묘제가 있는데,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고려 성종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5묘제를 택했지만 종묘에 안치된 임금들에게 묘호를 올렸고, 이후 의종 때 7묘제로 바꾸면서 완전한 천자의 종묘를 세웠다.고려는 성종 때 유교의 진흥을 위해 왕실에서 유교적 제사를 장려했는데, 이 중 황제국에서만 지내던 제사인 원구단을 설치하고 토지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방택(方澤)을 실행하였다. 이 중 원구단은 고려 국왕이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5방제(五方帝)[89], 건국군주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에게 제사 지내는 것으로 그 격이 아주 높은 제사다. 이외에도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불교식 행사를 통해 하늘, 별, 용, 오악, 산천의 신에게 제사지냈고, 국왕을 황제와 동일시하였다.
그 뒤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고려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르기 위해 팔관회를 고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기존 고려의 외왕내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고려사》 〈예지〉에 따르면 충렬왕이 1275년 11월 14일 본궐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는데, 궁전 마당에 설치한 편액에 쓰인 "성수만년(聖壽萬年)"를 "경력천추(慶曆千秋)"라고 고치고 "만세(萬歲)"라 외치던 것을 "천세(千歲)"로 고쳐 외치게 하고 임금이 타는 가마가 가는 길을 황토(黃土)로 포장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또한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팔표가 내정하며 천하가 태평하다"와 같은 글자를 바꿨다고 한다.
신하들이 사사로이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90]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 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91]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
《동인지문사륙》 〈서문〉 中
고려 말 우왕 치세인 1388년에 간행된 서적 《동인지문사륙》에는 고려가 충렬왕 대에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의 모습이 나온다.《동인지문사륙》 〈서문〉 中
4.1.7.4. 의복
고려 국왕은 노랑색 단령을 입음으로써 고려 왕조의 대왕이 중국 왕조처럼 천하의 중심에 서 있다는 뜻을 표출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건국 초기에는 자황포(柘黃袍)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문종 대에는 문종이 임금에 걸맞은 색깔의 의복을 묻자 신하는 "지금 입는 홍색과 황색 의복 말고는 없다"며 답하기도 했다.4.1.7.5. 기타
해동의 천자이신 지금의 황제께서는 부처님과 하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펴러 오셨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으시니,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라네.
외국에서 친히 달려와서 모두 귀의(歸依)하여
사방의 변경이 편안하고 깨끗해져 창과 깃발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성덕(聖德)은 요와 탕 임금에게도 견주기 어려우리.
또 태평시절을 즐기나니, 생황(笙簧)과 소(簫)의 소리 떠들썩하게 들끓는구나.
아울러 음악소리 가득하니 집집마다 기쁘게 기도하며, 아름다운 이삭 뽑아 향을 피우네.
오직 우리 임금님의 수명이 만세토록 영원히 산같이 높고, 하늘같이 끝없기를 바랄뿐이네.
사해(四海)가 승평(昇平)[92]하고 덕(德)이 있음이 모두 요 임금 시절보다도 낫구나.
변경과 조정에 아무런 사고도 없으니 장군은 보검을 휘두를 일 다시는 없겠구나.
남만과 북적이 스스로 내조(來朝)하여
온갖 보물을 우리 천지(天墀)[93]에 바치는구나.
금으로 만든 섬돌과 옥으로 지은 전각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우리 임금님께서 오래도록 보위(寶位)에 계시기를 바라네.
이러한 태평시절을 마주하니
악기소리, 노래 소리가 아름다워라.
임금님은 거룩하고 신하는 현명하니
강이 맑아지고 바다의 파고도 잔잔하구나.
이원(梨園)의 제자들이 우리 황제 앞에서
백옥(白玉)의 퉁소로 예상곡(霓裳曲)을 연주하네.
뜰을 가득 메운 신선의 음악이 모두 음률에 맞으니
태평스런 술자리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취하는구나.
황제의 마음(帝意)이 매우 흡족하니
물시계(銀漏)야, 오늘은 자주 알려 재촉하지 말라.
문무 관료들이 절하면서 축하를 올리며,
모두 황제의 장수(皇齡)를 비네.
천자께서 옥련(玉輦)을 타고 돌아가시니
금빛 궁궐과 푸른 누각에 상서로운 기운이 도네.
꽃같이 흐드러진 미녀들이 줄을 맞춰 기다리니
음악은 맑고 밝아 모두 신선과 같구나.
환궁악사(還宮樂詞)[94]를 다투어 노래함은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알리기 위함일세.
《고려사》 제71권 〈악지〉 풍입송 #
고려는 해동천자를 자처하기도 했는데, 《고려사》 〈악지〉 풍입송조에서 그 예가 등장한다. 원래 송나라의 노래였던 '풍입송'은 고려에 수입된 이후 가락은 바뀌지 않되 가사는 고려인이 개사한 노래였다. 그래서 풍입송은 당악(중국 왕조의 노래)이 아닌 속악(우리 왕조의 노래)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노래는 고려 국왕을 과장되게 찬양하고 있으며,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으시니,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라네.
외국에서 친히 달려와서 모두 귀의(歸依)하여
사방의 변경이 편안하고 깨끗해져 창과 깃발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성덕(聖德)은 요와 탕 임금에게도 견주기 어려우리.
또 태평시절을 즐기나니, 생황(笙簧)과 소(簫)의 소리 떠들썩하게 들끓는구나.
아울러 음악소리 가득하니 집집마다 기쁘게 기도하며, 아름다운 이삭 뽑아 향을 피우네.
오직 우리 임금님의 수명이 만세토록 영원히 산같이 높고, 하늘같이 끝없기를 바랄뿐이네.
사해(四海)가 승평(昇平)[92]하고 덕(德)이 있음이 모두 요 임금 시절보다도 낫구나.
변경과 조정에 아무런 사고도 없으니 장군은 보검을 휘두를 일 다시는 없겠구나.
남만과 북적이 스스로 내조(來朝)하여
온갖 보물을 우리 천지(天墀)[93]에 바치는구나.
금으로 만든 섬돌과 옥으로 지은 전각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우리 임금님께서 오래도록 보위(寶位)에 계시기를 바라네.
이러한 태평시절을 마주하니
악기소리, 노래 소리가 아름다워라.
임금님은 거룩하고 신하는 현명하니
강이 맑아지고 바다의 파고도 잔잔하구나.
이원(梨園)의 제자들이 우리 황제 앞에서
백옥(白玉)의 퉁소로 예상곡(霓裳曲)을 연주하네.
뜰을 가득 메운 신선의 음악이 모두 음률에 맞으니
태평스런 술자리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취하는구나.
황제의 마음(帝意)이 매우 흡족하니
물시계(銀漏)야, 오늘은 자주 알려 재촉하지 말라.
문무 관료들이 절하면서 축하를 올리며,
모두 황제의 장수(皇齡)를 비네.
천자께서 옥련(玉輦)을 타고 돌아가시니
금빛 궁궐과 푸른 누각에 상서로운 기운이 도네.
꽃같이 흐드러진 미녀들이 줄을 맞춰 기다리니
음악은 맑고 밝아 모두 신선과 같구나.
환궁악사(還宮樂詞)[94]를 다투어 노래함은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알리기 위함일세.
《고려사》 제71권 〈악지〉 풍입송 #
고려 개창 초기인 후삼국시대 태조 왕건 시절에는 신라의 왕으로부터 대왕으로 인정받아 신라를 아래로 두었으며, 다른 외왕내제 국가인 발해는 형제로 칭했다.
〈윤언이 묘지명(1149)〉에는 금나라가 고려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라고 요구해오자 "본디 여진은 우리 조정 사람의 자손이었다. 그 자손이 옛부터 신복으로서 계속 천자를 조회하여 왔으며, 국경 근처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왕조의 호적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라며 분노했다는 구절이 있다.《고려사》에는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오직 척준경과 이자겸만이 찬성했다고 한다. 강해진 여진을 본 고려인들이 원래 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1992년 북한의 현릉에서 발굴된 고려 태조 왕건 동상의 모자는 황제만이 착용한다는 "통천관(統天冠)"이다. 《제왕운기》에 '대금황제가 고려황제에게...'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에게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한 초기에는 고려 왕을 황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현재 남아있는 태조 왕건의 초상화들을 고려 황제국 체제의 증거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초상화들은 고려 당대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황제국을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초중기에는 여진 부족과 탐라국에서 조공 사절이 오기도 하는 등 한반도 내에서는 천자국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때 칭제건원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대외적으로도 황제라 하고 연호를 정하자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고려 초기에 이렇게 황제국 체제를 표방한 것은 단순한 자존심 이상의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거란과 적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거란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표방하여 한반도 북부의 여진 부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아직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호족들 위에서 군림하는 권위 확보를 위해 황제를 자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 내부적으로는 거란 황제나 금 황제를 국주(國主)라고 하였다. 국주는 오대십국 시기에 10국의 군주가 5대 왕조에 항복했을 때 스스로를 낮춰 자칭했던 표현으로, 고려가 북방 왕조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자신들의 위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는 중국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초중기에는 송나라-거란-서하 3국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던 데다가, 현종 때에는 고려가 송나라도 쩔쩔매는 거란을 상대로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사례가 있기에 동아시아 외교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높은 편이었다. 때문에 송나라와 거란은 이를 알고도 그냥 못 본 척하고 넘어갔다. 송 휘종, 고려 인종 때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기행문 《고려도경》에 고려의 절에 걸린 기원문에서 '황상 폐하'라는 글을 보고 고려 임금이 아닌 송 휘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 기록은 있다.
금나라는 고려와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는 존중해주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참람한 칭호를 쓸 수 없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충렬왕 2년(1275년)에 모든 칭호가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되어 없어졌다. 이후 충선왕이 문종 대의 제도를 복구하려 했지만 이것을 빌미로 폐위당하였다. 그리고 이후 복위하였을 때 제후국의 5묘제를 실시했으나, 교묘하게 작은 제실 2개를 만들어 사실상 천자의 7묘제를 하는 등 구제 복원을 위한 이런저런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충숙왕 이후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구제 복원에 관심을 둘 수 없었다.
이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할 당시 외왕내제 체제를 살리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문종의 5등봉작제와 황제국식 관제 부활, 12장 면류복 제정, 신하들이 공민왕을 "주상 폐하(主上 陛下)"라고 부르는 등의 조치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긴 했어도 필요 이상으로 원나라나 명나라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취소했다. 이상 위 두 단락은 《고려사》에 나온다.
황태자가 아닌 왕태자 칭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1인칭을 짐과 과인으로 혼용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가 완전히 황제국 체제를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같은 외왕내제 국가였던 베트남은 고려처럼 황제국과 제후국의 용어를 함께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내부에서 황제국의 용어만을 사용하며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
고려가 금나라로부터 고려 황제라 불렸던 점을 보면 당시 국제질서 속에서도 일정 부분 황제국의 지위를 인정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베트남이 오랜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아 국왕이 아닌 군왕으로 책봉되고 사실상 중국의 내지로 취급받았다는 부분과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고려는 북쪽의 여진과 발해 유민 및 발해 부흥 세력, 남쪽의 탐라,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 서해도의 관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이에 반해 베트남은 "외왕" 정책이 "내제" 정책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베트남 황제가 중국 사신에게 절하는 것을 피하고, 베트남 황제 자신이 아닌 황자를 중국의 관직인 정해절도사에 임명해 황제 대신 대(對)중국 외교를 시행했다. 결과적으로 외왕과 내제를 철저히 구분했던 베트남에 비해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황제와 제후 체제를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95]
4.1.8. 조선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명에 대한 사대외교를 당시 외교의 국시로 삼아 외왕내제를 완전히 행하지는 않았으나, 황제가 쓰는 묘호를 사용하는 등 황제국의 예법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시절에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칭제건원을 함에 따라 공식적인 황제국이 되었다.4.1.8.1. 국왕
유교 예법상 제후국은 천자의 칭호인 묘호를 올릴 수 없으며, 시호 또한 스스로 올리지 못하고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에게 하사받아야 했다. 때문에 당나라는 발해의 연호와 시호를 기록할 때 "사사로이 바꿨다(私改)", "사사로이 시호를 올렸다(私諡)"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제후국인 발해가 천자의 연호를 쓰고, 시호를 천자에게 받는 대신 독자적으로 올리는 행위를 정식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원 간섭기의 고려가 독자적 묘호와 시호를 소유하지 못했던 것 역시 이러한 유교 예법의 영향이었다. 묘호는 고려 말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경효대왕 때 회복한다.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 모두를 무시했다. 태조 포함 태조의 4대조에게도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인 시호를 올렸다. 다만 중국에서 내린 두 글자 시호를 대표 시호로 삼기는 했다. 이후 광해군과 연산군처럼 반정으로 폐위된 군주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군주들은 묘호를 관행적으로 모두 다 받았다. 이것 때문에 묘호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정유재란 때 정응태가 이걸 빌미로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무고를 한 적이 있어서 외교 문제로 번질 뻔한 일도 있었다. # 자세한 건 정응태 무고사건 참조.
주상(主上) - 조선에서 신하들이 조선 왕에게 주상 전하라고 호칭해서 주상이란 용어를 왕한테만 사용하는 용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주상 또한 금상, 성상처럼 황제에게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 예로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主上)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워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지》 <촉지> -법정전-
소정방이 정지절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도적을 토벌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마침내 스스로 지키면서 앉아서 스스로 곤혹스럽게 지치고 있으니 만약에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나약하고 겁을 먹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공로를 세웁니까? 또한 주상(당 고종)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금 군부를 파견하여서 그 호령을 오로지할 수가 있겠으며...
《자치통감》 <당기> 16 고종 현경 원년(656)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한탁주)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 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여진주(女眞主아골타)가 무리를 모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하는 말이 비로소 너희들과 기병(起兵)하니 글단(契丹/거란,계단)이 잔인함이 오래 되어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지금 주상(主上/요 천조제)이 친정하니, 어찌 하겠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싸우지 않는다면, 능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만약 나의 일족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항복하고 영접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하라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국역
《삼국지》 <촉지> -법정전-
소정방이 정지절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도적을 토벌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마침내 스스로 지키면서 앉아서 스스로 곤혹스럽게 지치고 있으니 만약에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나약하고 겁을 먹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공로를 세웁니까? 또한 주상(당 고종)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금 군부를 파견하여서 그 호령을 오로지할 수가 있겠으며...
《자치통감》 <당기> 16 고종 현경 원년(656)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한탁주)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 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여진주(女眞主아골타)가 무리를 모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하는 말이 비로소 너희들과 기병(起兵)하니 글단(契丹/거란,계단)이 잔인함이 오래 되어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지금 주상(主上/요 천조제)이 친정하니, 어찌 하겠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싸우지 않는다면, 능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만약 나의 일족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항복하고 영접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하라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국역
지금 주상(主上/ 금 애종)이 채주(蔡州)에서 수위(受圍/포위를 받음)하니, 공창(鞏昌)으로 천도(遷都)를 의(擬/헤아림)하는 것이다.
《금사》 <곽하마(郭蝦蟆) 열전> 국역
《금사》 <곽하마(郭蝦蟆) 열전> 국역
왕년에 우리 주상(主上고종)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에 복을 입을 때에, 은혜와 의리를 작량하여 재단해서 단연코 이를 기년복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요, 그 주장은 이천(伊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실천은 우리 주상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니, 참으로 만세의 바꿀 수 없는 전범(典範)인 것이다
《수당집》 제4권 <왕석천(王錫闡)과 혜사기(惠士奇)의 절기설(絶朞說)을 논박함>
《수당집》 제4권 <왕석천(王錫闡)과 혜사기(惠士奇)의 절기설(絶朞說)을 논박함>
세상에 만약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 같은 임금이 있다면 이와 같은 것들을 어찌 그냥 놓아두고 섬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상(主上)의 위(位)가 아직 바뀌지 않았으며 인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각국 공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조약을 맺은 문서가 다행히 폐하의 윤허와 참정의 인가(認可)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믿는 것은 다만 역신들이 강제로 조인한 헛조약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서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외부 장관(外部長官)을 갈아 세워 일본 공관(公館)에 조회(照會)하여 거짓 맹약의 문서를 없애 버리도록 하고, 또 각국 공관에도 급히 공문을 통해 모두 회합한 다음, 일본이 강국임을 믿고 약소국을 겁박한 죄를 성명(聲名)할 것입니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를 금상황제(今上皇帝)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다 21세기 일본에서도 천황을 지칭할 때는 금상(今上)을 쓴다.
성상(聖上) - 집권 중인 황제나 왕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조선을 모함할 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과 왕에게 성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또 태조·세조·열조(列祖)의 성상(聖上)을 참칭(僭稱)하여 감히 천조의 칭조(稱祖)·존상(尊上)과 같이하였으니, 저들이 2백년 간 공순(恭順)한 의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9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해당기사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9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해당기사
군상(君上) - 조선에서 임금을 부르는 호칭 중 하나로 승정원 일기의 기록을 보면 고종을 군상으로 호칭하고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순종을 가리켜 군상이라 한 예가 있다.
상감(上監) - 상감마마 할때의 그 상감이다 1906년 황태자였던 순종이 가례를 올릴 때 고종을 위해 마련한 의대발기에 고종을 가리켜 상감마마라 호칭하였다 칭제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도 황제에게 상감이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
이렇게 조선에서도 황제와 동격의 의미를 지닌 용어를 사용했다.
묘호 - 조종제를 통해 황제국을 미약하게나마 표방했다.
제왕(帝王) -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제왕을 황제[96]와 국왕[97]을 아우르는 의미인 제왕#이라 지칭했다.
능(陵) - 게다가 왕의 무덤을 묘(墓)나 원(園)이 아니라 능(陵)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였는데 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했다.
붕(崩) - 왕의 죽음에 훙(薨)과 붕(崩),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붕(崩)과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는 천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훙을 써야 맞지만 훙이 주로 쓰이긴 하나 붕과 안가, 빈천, 승하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지(聖旨) - 조선에서 왕의 명령서를 성지(聖旨)라고도 했는데,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리키는 말인데도 조선에서 성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실제로 《고려사》 충렬왕 원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 황제가 내린 조서에 고려는 이제 왕위 후계자는 태자가 아니라 세자라 하고 국왕의 명령을 예전에는 성지(聖旨)라 하였으나 이제는 선지(宣旨)라 하니 관직의 명칭도 우리 조정(원나라)과 같은 것은 고쳐야 한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해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만을 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당 기사
허적이 아뢰기를 ‘전후의 성지(聖旨)가 간절하신데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 6월 21일 경오 3번째기사 해당기사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 6월 21일 경오 3번째기사 해당기사
또 연호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썼지만, 의외로 '우리 전하 즉위 XX년', '금상전하 즉위 XX년' '상(上)[98]의 XX년' 식의 변칙 연호도 꽤 많이 보인다. 사실 이건 중국에서 한 무제 때 처음 연호를 제정하기 전에는 천자의 재위년 수를 적어서 연도를 표기했는데 조선의 관행은 이것과 유사하다.
4.1.8.2. 왕실
중궁(中宮) - 왕비의 경우, 황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인 중궁(中宮)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후(后) - 시호에는 생전에 쓰던 비(妃)가 아닌, 제후국에서 쓸 수 없는 후(后)를 붙여 왕후라는 시호를 사용했다. 보통 황제국에선 황후를, 제후국에선 왕비를, 자주국에선 왕후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후궁 - 조선에선 왕과 왕세자의 첩을 후궁이라고 하였는데 후궁이란 원래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도록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었을 때, 청나라에서 왕비 책봉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가 제후국에서 후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하지만 제후국이 후궁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근거가 있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천자의 후(后)는 육궁(六宮)을, 제후의 부인(夫人)은 삼궁(三宮)을 세운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후궁이라는 용어는 육궁처럼 후비(后妃)가 거주하는 공간을 일컫었다. 그리고 나중에 후궁에 거주하는 임금의 첩을 일컫는 말로 함께 쓰이기도 했다.
청나라 사람이 주문(奏文) 가운데서 ‘후궁(後宮)’ 두 글자는 제후(諸侯)는 쓰지 못한다고 하며, 또 ‘현(玄)’ 자(字)가 있는데 그것은 휘(諱)하는 바를 범하였다고[99] 매우 꾸짖으면서 속금(贖金)의 벌(罰)까지 있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12월 19일 신사 2번째기사 해당기사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12월 19일 신사 2번째기사 해당기사
동궁(東宮) - 조선에서는 왕세자에게 동궁(東宮) 춘궁(春宮), 춘저 (春邸), 이극(貳極), 원량 (元良) 저궁(儲宮), 저군(儲君), 저사(儲嗣) 저부(儲副) 저위(儲位)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중국 왕조에서도 황태자에게 동궁 이하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라'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중국에서는 황태자에게만 동궁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세자에게는 동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약로는 말하기를, ‘삼가 《주례》를 상고하건대 공(公)은 환규(桓圭) 9촌(寸)이요, 후(候)는 신규(信圭), 백(伯)은 궁규(躬圭)인데 모두 7촌이며, 자남(子男)의 곡벽·포벽은 모두 경(經)이 5촌이며 명(明)나라의 규제(圭制)는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 황태자(皇太子)에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9촌의 규를 사용하였으나 특별히 분수(分數)의 구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26년 12월 19일 무자 1번째 기사해당기사
《영조실록》 영조 26년 12월 19일 무자 1번째 기사해당기사
공주(公主) - 또 왕의 적녀를 공주로 봉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만을 공주로 봉하지, 친왕(親王)의 딸은 군주(郡主)로, 군왕(郡王)의 딸은 현주(縣主)로 봉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등체강의 원칙에 따라 친왕대우(황제-태자-친왕 순)인 조선 국왕의 적녀는 친왕(親王)의 딸인 군주(郡主)로 봉하는 것이 맞다.
부마(駙馬) - 조선에선 왕의 사위에게 의빈과 부마(駙馬)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사실 부마의 칭호는 황제의 사위를 뜻하는 용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맹사성이 "부마의 명칭은 제후국에서는 쓸 것이 아니온데, 단지 전조(前朝)의 구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치지 않은 것이오니, 의당 그 칭호는 고쳐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2일 정축 3번째기사해당기사
4.1.8.3. 봉작
신하들도 생전에는 군(君)이라는 제후국의 작위를 주었지만 죽고나서 시호를 내릴 때는 일괄적으로 공(公)의 작위를 내려 봉작제도 일부 시행했다. 애초에 태조 때 5등작 중 공(公), 후(侯), 백(伯)을 썼다가 태종 때 폐지하고 군호로 바꾼 것이다.세종때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를 일컫는 영공(令公)이라는 말을 재상으로 변경했는데, 의례 영공이라고 칭하였다.
4.1.8.4. 의복
왕의 곤룡포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인 5조룡(五爪龍)을 사용하였다. 당장 중국의 제후왕 곤룡포에는 4조룡을 사용하였다.황제의 곤룡포에 7조룡을 사용하고 왕의 곤룡포에 5조룡을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천장의 장식만 그러한 것이고, 대한제국 황제의 황룡포를 보면 명나라의 황제와 같은 5조룡이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 초상화나 채용신의 고종 어진의 용보를 보면 5조룡의 용보를 사용하였다 .
4.1.8.5. 제사
조선 초기엔 제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태조 이성계는 환구단의 명칭을 원단으로 고치고, 명나라 몰래 천제(天祭)를 지내다가 세조 대에 이르러 다시 환구단으로 고치고 제사를 지내며 소격서를 설치해 도교식 천제도 지내다가 중종 시기에 전부 없어졌다. 하지만 제도만 없앴고 환구단(원구단)의 명칭을 남단으로 개칭하여 고종때 정식으로 환구단을 다시 세우기 전까지 계속 천제를 지냈다. 이 때문에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천자의 나라에서만 가능한 천제를 지낼수는 없다는 사대부의 공격을 계속 받았다. 용산에 원조 환구단 있었다? 아시아경제4.1.8.6. 기타
그리고 조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조선에 조공을 바칠 때 조선의 임금을 가리켜 황제 폐하라 부르기도 했다. 사실 사대 논리에서 책봉을 받은 국가는 원칙상 제후국이므로 스스로 다른 세력들에게 황제국처럼 조공을 받고, 그들로부터 황제 폐하라고 불리며 독단적으로 책봉을 해주면 안된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과 막부의 쇼군들에게도 비롯 형식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상국(上國), 금상황제(今上皇帝), 폐하(陛下)라고 불렸다. 실록1 실록2 실록3 실록4 실록5 그렇게 조선 초중기에 일본에서 남북조시대나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쌩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몇몇 다이묘들이 이렇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의 쇼군이나, 조정의 천황도 씹고선 중국의 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명분상의 이유로 외왕내제를 하지 못하던 터라서 한동안은 주변국들이 이렇게해도 모른 체하거나, 주의를 주는 척만 했다. 어차피 실무적 측면에서는 '나는 천자요'라고만 안 했을 뿐, 할 건 다했지만.성호사설의 기록에 따르면 17~18세기 요동과 심양 지역에서는 조선 국왕을 가리켜 조선황제라고 호칭하였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는데 이익의 의견에 따르면 만력제 말년 부터 명나라 정부에서 조선 국왕을 조선 황제로 불렀다고 한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일을 중조(中朝 중국을 이름)에서 따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요심(遼瀋) 지방에서 조선 황제(朝鮮皇帝)라고 일컬은 말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우리 종조(從祖) 두봉공(斗峯公이지완의 호)이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말기에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에 간바, 주청에 대하여 특지(特旨)로 비준(批準)을 받았으며, 후에 집으로 보내 온 편지 가운데 모두 “조선 황제라 칭한다.” 하였으니, 대개 상국(上國)의 은혜는 우리나라에 대해 그와 같이 후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임진(壬辰, 1592)년 동정(東征) 때 중토(中土 중국을 가리킨 말)의 피폐(疲弊)를 불고하고 후원해 주었겠으며, 또 어찌 인력(人力)으로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성호사설 제23권 / 경사문(經史門)
성호사설 제23권 / 경사문(經史門)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에 주위의 민족을 외부로, 조선을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자 영조 때 황제 칭호를 쓰자는 상소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100]
고종 시기에 있던 갑오개혁, 을미개혁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후국 용어인 '전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국 용어인 '폐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101] 다만 이 때는 아직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한 건 아니라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는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면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개국기원(開國紀元)' 연호를 도입, 1894년을 개국 503년이라 칭했다.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도입하여 '건양(建陽)'[102]이라는 연호를 선포하였고, 이듬해(1897)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이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다시 개원하였다. 가끔 고종이나 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 황제'나 '융희 황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외의 사례들로는 아래와 같은 사례들이 있다.
- 초기 조선은 명과의 충돌이 심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제3차 요동정벌과 태종 시절의 여진족들의 지배권을 둘러싼 명과의 충돌까지, 이러한 모습은 조선이 사대와 국익이 충돌할 경우 국익의 관점을 더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103][104]
-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은 총 7개인데 당시 한자 문화권의 질서에서 왕세자의 용은 발가락이 3개, 왕(제후)과 황태자는 4개, 황제(천자)는 5개로 규정했다. 따라서 발톱이 7개인 용은 황제보다 높음을 뜻한다.
-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은 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공식 변경한 뒤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스스로 황제국임을 공표한 것이며 대한(大韓)이라는 국명 자체도 황제국들의 국명인 대명(大明), 대청(大淸) 같은 의미의 국명이었다. 일반적으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국명이 고려, 조선 처럼 두 글자인 나라보다 명, 청 처럼 한 글자인 나라가 더 상위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4.2. 외국
4.2.1. 일본
외부에서는 일본국왕이라는 호칭으로 교역을 했고, 내부에서는 천황이라는 황제의 호칭이 있었다. 단, 명-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사용된 '일본국왕'은 천황이 아니라 막부의 쇼군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천황을 따로 왜황(倭皇)이나 위황(僞皇)[105] 등으로 호칭하였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도 역대 천황과 그들의 연호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대상은 결국 실권자인 쇼군(조선 측에선 '일본국 대군'[106] 혹은 '일본국왕')인지라 이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쇼군이 타도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상황을 예견하여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라며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 직전에 일본은 조선에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국서를 보내서 문제가 된 바 있다.또한 중국의 상황을 일본에 적용하여 중국대륙의 의미인 일본국이라는 천하 아래에 중국의 대규모 지역구분인 구주와 비슷한 고키시치도를 설정하고 제후국의 의미인 율령국을 설치하면서 율령국의 왕인 다이묘와 다이묘들의 지배자인 천황이 중국의 천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중국과는 독립된 일본만의 천하를 구성하려 하였다.
삼국통일전쟁 말기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부여씨 왕실 인사에게 '백제왕'이라는 성씨(작위나 신분이 아니라 이름 맞다. 백제왕철수, 백제왕영희 등)를 주어 일본을 '왕'이 섬기는 국가(즉 왕보다 높은 국가)로 만들기도 했다.
한편 외왕내제 비슷하게 대마도주들도 대마도 정벌 이래로 조선에 신하를 칭하여 명목상 조선의 고위 관직(예조참의 급)을 제수받기도 했다. 일본 막부 휘하의 다이묘이면서 조선 왕의 신하라는 투잡을 뛴 것. 에도 막부까지는 조선과의 외교를 위해 이것을 용인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로 대마도주가 조선에 칭신하는 것을 금지하여 이 관행은 사라진다.
4.2.2. 류큐
류큐는 국력의 약세 탓인지 외왕내제에 해당하는 행위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명나라가 망한 뒤 왕관을 명나라 황제보다 더 격이 높게 바꾸었다(관련 글). 본래 류큐국 중산왕(삼산시대 이래 류큐 국왕의 칭호)은 명나라의 군왕(郡王)급으로 취급돼 명나라로부터 군왕의 복식을 받아 왔다. 국왕이 머리에 쓰던 피변관(皮弁冠)에 달던 옥은 본래 명나라 군왕급인 일곱 줄이었으나 황제와 같은 열두 줄로 늘리고, 옥 자체의 개수는 명나라 황제가 쓰던 것보다 더 많이 달았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그랬듯이 제후국의 복식에 일일이 간섭을 안 했으므로 류큐에서는 그 틈에 국왕에게 슬그머니 황제보다 더한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4.2.3. 베트남
외부에서는 안남왕, 내부에서는 대월국 황제로 전형적인 외왕내제를 갖추었다. 대월 같은 大+한 글자 국호는 중국에서 황제국만 쓸 수 있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해도 국호를 한 글자로 줄이진 않았는데 베트남은 아예 대내적으로 한 글자 국호를 써서 완벽하게 황제국의 격식을 갖춘 것이다. 참고로 조선이 제국이 될 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것도 大+한 글자 국호라는 황제국 형식을 완벽히 갖추려는 의도도 있었다. 단 응우옌 왕조는 청나라와의 교섭 끝에 현재와 같은 월남(越南)을 대외 국호로 채택하고 대내적으로는 대남(大南)이라는 국호를 썼다.베트남은 외부적으로는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황제국을 칭했다. 대월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쓰면 안되기 때문에 중국 왕조를 부를 이름을 따로 만들고, 중국과의 외교도 대월황제로 외교문서를 중국에게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아들들을 안남태수로 삼아 안남태수 명의로 외교문서를 보내는 등 철저한 외왕내제를 하였다.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황제 칭호를 쓰는 데 조심스러웠지만,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자 외국인들은 이민족시하고 베트남은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면서 대내적으로 공공연하게 쓰게 되었다.또한, 중세 이후 베트남이란 국가 형성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중국에서 철저한 독립을 추구하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오히려 중화 사상의 내재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국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베트남은 한반도의 왕조들보다 더 철저한 중화 사상을 내세워 국내용 칭호나 문서에서는 아예 대놓고 베트남 조정을 베이징을 비롯한 명나라의 수도와 대비되는 남조라 칭했고, 참파와 크메르 같은 인근 나라들을 정벌하며 유교를 비롯한 베트남 식의 중화 문화(베트남이 중화이고 외부는 이민족)를 명분으로 삼았다. 과거 제도와 종묘사직에 지내는 제사 또한 일찍부터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자신들이 복속시킨 참파나 크메르 쪽에 대충 끼워 맞춘(...) 중국식 작위를 내리며 외왕내제식 통치를 했다.
고려시대부터 활동 범위가 한반도로 제한되고, 조선 초기 사군 육진 개척 이후 국경이 고정되었던 한반도와 달리 이쪽은 근대까지 베트남이 다른 민족을 몰아내며 남진을 계속 했으니 이들을 흡수하고 지배할 중화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할 근거와 여건이 마련되었던 셈이다.
사실 동시대 베트남과 고려&조선의 이러한 차이는 베트남의 경우 10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직접 지배의 경험이 있는데다가, 독립된 이후로도 중국으로부터 빈번한 무력 침략을 받거나 그러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하였고 ‘중국’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측면이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서 베트남은 국내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철저하게 지향․운영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왕조에 ‘칭신’을 하면서도 군주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고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없었던 고려와 조선에서의 ‘외왕내제’의 체제는 베트남에서와 같은 중국에 대한 저항․대등 의식과 같은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지향․운영되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07]
4.2.4. 동오
손권이 초기에는 조위에 명목상 칭신하고 오왕으로 책봉되었지만, 내부적으로 자체 연호인 황무(黃武, 222년 ~ 229년)를 쓰고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조위의 요구를 거절하며 군사적으로 대치했다. 연호를 쓰는 것은 천자만이 쓰는 것이니 외왕내제의 범주를 넓게 잡으면 이것도 외왕내제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아래에 적은 오월의 사례와 더불어 한족 국가들 중 외왕내제를 한 희귀 사례로 볼 수 있다. 손권은 229년 황제로 즉위하여 완전한 천자국으로 이행한다.4.2.5. 오월
왕을 칭하고 오대(五代)의 황제에게 칭신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와 같은 묘호, 연호, 능호가 사용되었다. 황제를 칭한 건 아니지만 거의 외왕내제라고 볼 수 있다. 한족 국가들 중 외왕내제를 한 희귀한 사례로 볼 수 있다.4.2.6. 서하
서하의 왕은 원래 요, 금에 의해 하국왕으로 봉해졌다. 송과 서하간의 전쟁이후 송에게도 칭신하고 하국왕으로 봉해지는 대신 공물4.2.7. 대리국
베트남과 같이 개봉에서 원정거리가 멀었던 대리국 역시 송태종때 [운남팔국도왕]으로 봉해졌고, 송휘종때는 [금자광록대부검교사공운남절도사상주국대리국왕]으로 봉해졌지만, 임금을 황제로 칭하고 묘호 및 독자적 연호를 쓰는가 하면 좡족의 토호들에게 작위를 내려주는 등 여전히 내부에서는 칭제건원을 계속 하고 있었다.5. 유사 사례
5.1. 한자문화권
5호16국 시대 천왕이라는 칭호가 애용되었으나 이건 외왕내제라 보기 어렵다. 굳이 남에게 숙이기 위해 황제 칭호 대신 천왕 칭호를 쓴 건 아니었기 때문.자세한 내용은 천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반적인 외왕내제와는 차이가 있으나, 송나라(조송)는 국력의 약세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자국의 황제가 천하의 지존으로 군림할 수가 없었다. 북송 황제는 전연의 맹에 따라 요나라 황제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 남송 때는 상황이 더 심각해져 소흥화의(紹興和議)에 따라 남송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표문(表文)[108]을 올리고 칭신(稱臣)[109]하게 되었고 금나라 황제는 남송 황제를 책봉해주게 된다. 즉 금나라는 황제가 제후황제를 책봉하는 전무후무한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전한이 흉노에게 동생의 예를 맺은 이후 두번째로 중원의 통일왕조가 이민족 국가의 군주보다 아래의 관계가 된 사건이었다. 이런 대우는 금나라 기준으로 금세종, 송나라 기준으로는 송효종때 개선되는데 해릉왕의 폭정으로 금나라 사정이 급박해지자 송나라와 타협하여 군신관계를 숙질관계로 바꾸고, 세공이라는 명칭을 세폐로 바꾸며, 바치는 양도 줄였다.
춘추시대에는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자국에서는 왕호를 칭하면서 중원에서는 자, 백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당시 황제라는 말이 없었고 왕은 주나라 천자에게만 허락된 호칭이었다.
5.2. 유럽
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곧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자칭해도 일단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었다. 대신 동로마의 황제가 바실레프스 칭호를 허락하는 등 좀 더 유연했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황제를 여러명 두는 경우가 있었다. 사두정치 시기엔 4명의 황제를 두었으며 국정 효율을 위해 로마를 동·서로 나누고, 한쪽의 제위가 비어있을 경우 반대쪽에서 황제를 임명하기도 했으며, 종종 공동 황제란 제도를 통해 황제를 2명 두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실레우스 칭호 허락은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이다.동로마 제국은 대체로 유럽 국가들에게 대접을 받아왔으며 주변국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황제 칭호를 수여받기를 열망했다. 800년 프랑크 제국의 성립과 800년대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변에서의 동로마-프랑크 전쟁,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96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의 사신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와 동로마 제국 황제 니키포로스 2세 간의 동로마-신성 로마 간의 관계 및 호칭 설정에 대한 기싸움, 1, 2, 3차 십자군 내내 일어났던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귀족, 기사들의 밀땅, 12세기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결정적으로 1204년 4차 십자군 등 예외가 많은데? 라고 할 수 있지만, 일단은 이렇다.
중세에도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로마 제국만이 유일한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여기에 열등감을 느낀 서유럽 군주들이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라고 깐 적도 있긴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도 동로마 제국 황제가 바실레우스[110] 호칭을 허락한 다음에야 자신있게 제국을 칭할 수 있었던 경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공국이라는 체제는 사실상 독립국이면서도 왕의 호칭을 쓰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국가 형태이다.
프로이센 같은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 공작이었다가 1701년부터 국왕을 칭했다. 물론, 선제후의 권위와 특권은 국왕들에 준하는 수준이었지만, 유럽 내에서의 공식적인 왕국들과 비교하기엔 급이 낮았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König in Preußen(King in Prussia)의 호칭을 사용했는데 <위트레흐트 조약문> 등을 참고할 것. 대충 해석하면 '프로이센에서의 왕'(안에서는 왕, 밖에서는 제후).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선제후의 호칭을 사용했고,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König von Preußen(King of Prussia)의 호칭을 사용했다. 사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동군연합 상태인 프로이센 공국을 흡수합병한 것인데 일단은 프로이센 국왕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고,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에는 프로이센 국왕만 사용했다. 기업으로 따지면 역합병이나 우회상장과 유사하다. 이는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원래의 프로이센이 신성 로마 제국 밖에 있어서 왕을 칭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가 후술할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 사보이아 공국-사르데냐 왕국이다.
신성 로마 제국 초창기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등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하여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라틴어 Rex imperator in regno suo!)라는 식의 왕권신수설적 이론을 펼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는 부정하지는 않되, 자기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았다. 특히 프랑스 왕국은 황권이 자기 영지에서만 먹히는 신성 로마 제국보다 실질적인 국력이 더 강했고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꿀리지 않았다. 관련 링크
카스티야-레온의 알폰소 6세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칭제했지만 당연히 스페인 밖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러시아의 경우,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스 차르국으로 바뀌면서 차르의 호칭을 사용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 차르의 호칭을 인정받지 못했다.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을 꺾어 대북방전쟁의 승자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야 유럽 국가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시기 카이사르를 어원으로 하는 차르는 러시아 황제의 비공식 칭호로 계속 쓰이긴 했으나 공식 칭호는 라틴어 imperator를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등극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고려한 외왕내제는 사라져서 유럽에서 좀 힘 센 나라의 왕이다 싶으면 너도나도 황제를 칭했다.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나폴레옹 1세가 프랑크 왕국 시절을 구실로 황제로 등극했고,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도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를 칭했으며, 영국과 포르투갈은 각각 식민지인 인도와 브라질을 이용해 인도 황제, 브라질 황제라는 자리를 만들어 황제 호칭을 얻었다.
근대 불가리아 왕국 국왕은 불가리아 제국이 사용하던 '차르', 그리스 왕국 국왕은 동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바실레우스'(Βασιλεὺς) 칭호를 사용했으나, 이들 모두 영어로는 King이라 번역된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도 로마 황제를 칭했으나 유럽에선 받아주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오스만 제국 황제를 황제 취급해주긴 했지만, 이슬람 국가이므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나 서양 기독교 수호자로서의 황제로 인정한 건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중동 이슬람 문화권을 제패한 강대국의 파디샤로 인정했을 뿐이다.
청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서양 국가들도 억지로 청나라 황제한테 숙여야 했다.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시절 건륭제에게 파견된 조지 매카트니가 건륭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할 것을 강요받았다. 매카트니는 영국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여 논쟁이 났다가, 결국 건륭제 뒤에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한쪽 무릎만을 굽히고 손에 입맞춤하는 영국식 의례를 취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왜냐면 청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황국이고, 영국은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이기 때문에 황국>왕국이라는 법칙이 성립되어 결국 청나라>영국이 이 법칙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황제의 존엄에 대한 경외심에 압도돼 결국 고두를 했다"고 정신승리를 하였고, 영국은 굴욕으로 여기게 된다. 이 고두에서 탄생한 영단어가 kowtow인데 '굽실거리다'라는 뜻. 결국 영국은 어거지로 중국식 조공 책봉 체제에 편입된 꼴이 되었다. 물론 아편전쟁 이후로는 그런 거 없었다.
5.3. 남아시아
남아시아의 네팔을 다스린 군주들은 굽타 제국 황제의 칭호였던 마하라자디라자 (마하라자의 왕중왕 버전)를 사용했으나, 대외적으론 네팔 왕국이라 칭했다.6. 내왕외제
외왕내제와는 정반대로 국내에서는 왕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꼼수도 있었다. 대영제국은 무굴 제국을 정복하고, 인도 제국을 만든 뒤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게 해서 영국 국내에서는 왕이지만 영국 바깥에서는 인도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이런 영국의 꼼수에 필받은 이탈리아 왕국도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한 뒤 이탈리아 왕이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해서 역시 이탈리아 안에서는 왕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의 경우 황제[111]가 존재했기 때문에 외왕내제는 있을 수 있었어도 내왕외제는 없었다. 프랑스는 중세 이래 계속 왕국을 칭했으나, 혁명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이 군사력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을 제압하고 황제를 칭했고, 그의 조카 역시 황제를 칭했다. 한편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래 여러 왕국, 공국, 자유도시 등이 난립했지만, 통일 이후 신성 로마 제국 계승을 표방하며 황제를 칭했다.사실 이런 내왕외제의 원조는 원래 공작이 왕을 칭하는 방식이었다. 노르망디 공국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국왕을 겸해서 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지만 프랑스 바깥에서는 잉글랜드 국왕을 칭할 수 있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왕을 칭할수 없었지만 브란덴부르크와 동군연합으로 맺어진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 아니었다. 때문에 프로이센 공국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시킨 후,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황제의 봉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지만 제국 바깥에서는 프로이센 국왕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112]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라 왕을 칭할수 없었던 사보이아 공국도 사르데냐 왕국을 할양받은 후 사보이아 공작이 사르데냐 국왕을 겸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공작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을 칭할 수 있었다.
이런 희한한 모습을 보인 것은 로마 제국과 연관이 있다. 서로 대응하여 번역되긴 하지만 한자문화권의 황제와 달리 유럽의 황제는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를 의미했다. 유럽 문화권에서는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제국과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연관이 있음을 밝혀야 했는데 영국이나 이탈리아는 그런 게 없어서 황제로 번역되는 다른 문화권의 왕중왕, 파디샤 칭호를 이용한 것이다. 이탈리아가 의외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애초부터 황제(Imperatore d'italia)가 아닌 왕(Re d'Italia)의 칭호를 사용했다. 1861년 토리노에서 개최된 이탈리아 왕국의 첫 의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입헌군주정이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왕국의 왕실인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는 사부아 지방에서 기원하여 오도네 백작이 결혼으로 피에몬테를 상속받은 이래 한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인으로 정체성을 완전히 굳힌 것은 16세기 중후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를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천도한 이후였다.
물론 로마와 연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교황에게 로마의 후예로 인정받으면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교황과의 관계가 험악했기 때문에, 교황 비오 9세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국왕과 왕실 뿐만 아니라 주요 관료들이 죄다 파문당해버렸다. 여기서 교황을 협박해서 파문을 취소시키고 대관식을 치를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다른 가톨릭 국가들의 압박을 받아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여파로 다른 가톨릭 국가들이 통혼을 꺼렸기 때문에 맏아들을 조카인 마르게리타(동생인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의 딸)와 결혼시킬 수 밖에 없었다. 또 이탈리아에겐 카롤루스 대제, 오토 1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그러한 압박을 떨쳐버릴만큼 막강한 군사력이 없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한 후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그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지 않는 대신 식민지인 에티오피아의 황제를 겸하게 했다.
7. 대중매체
- 소설 《묵향》에서는 크라레스가 원래는 제국이었지만 동맹국인 코린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쪼그라들어 외부적으로는 왕국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제국이라 자처하며 왕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하지만 다크 등 인재들을 영입하며 절치부심하다 기회를 잡아 과거의 위상을 어느정도 되찾는 것에 성공하였다.
8. 같이보기
[1] 도올 김용옥의 《중국일기》 발췌.[2] 중국이 선진문물을 수입할 창구 중 하나였고, 사신을 보낼때 외왕내제를 내세웠다. 에도 시대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는 국수주의의 대두로 인해 이를 치욕으로 취급했다.[3] 실상 소련이 독립을 만들어준 것과 다름없다. 북원의 몰락 이후 현재의 몽골 지역은 청나라의 일부였고, 이는 청을 계승한 중화민국의 과거 명목상의 영토에도 나타난다(단 현재는 헌법 해석을 바꾸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영토에서 몽골은 제외되었다). 특히 내몽골은 청나라 시절부터 꽤 동화가 되었기에, 티베트나 위구르처럼 격렬한 분리독립운동을 벌이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튼 현재도 중국 내에 내몽골 자치구가 있고 이 곳을 비롯한 중국 내 몽골족 인구도 독립국인 몽골의 인구보다 많다.[4] 박한제(2019), 《중국중세의 호한체제의 정치적 전개》, p. 75~79, 117.[5] 이승호(2020), "고구려의 稱元法과 年號 운용", 《사학연구》 138, p. 130.[6] 윤선태(2020), "「昌寧拓境碑」의 ‘四方軍主’와 新羅의 天下觀", 《한국고대사와 창녕》(2020년 한국고대사학회 가야사 기획 학술회의).[7] 윤선태(2020), "「昌寧拓境碑」의 ‘四方軍主’와 新羅의 天下觀", 《한국고대사와 창녕》(2020년 한국고대사학회 가야사 기획 학술회의), p. 13~14; 윤경진(2018), "고려의 ‘일통삼한’과 ‘해동천자’의 형성", 《동아시아 속의 고려 왕조, 국가인식의 토대 ‘천하관’》(동북아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학술회의), p. 50.[8] 윤경진(2017), "고려초기 三韓一統意識과 ‘高麗三京’ -東京 연혁의 역사적 함의-", 《한국중세사연구》 51; (2019),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의식", 《역사비평》 126.[9] 추명엽(2023), "고려 태조 중·후반기 삼한통일과 해동천하의 형성", 《한국사연구휘보 제203호 2023년 제4호》[10] 노명호(2009),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자위공동체, 삼국유민, 삼한일통, 해동천자의 천하", 《한국사연구휘보 제147호 2009년 겨울호》[11] 김대식(2007), 《고려전기 중앙관제의 성립》, 한정수(2007),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12] 윤경진(2018), "고려의 ‘일통삼한’과 ‘해동천자’의 형성", 《동아시아 속의 고려 왕조, 국가인식의 토대 ‘천하관’》(동북아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학술회의), p. 47.[13] 최종석(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14] 『고려사』 권71, 악지2 俗樂 風入松. 풍입송에 나오는 ‘海東天子’와 ‘今帝’가 고려의 군주를 가리켰음은 노명호, 東明王篇과 李査報의 多元的 天下觀 , 『진단학보』 83, 1997, pp.306∼307 참조.[15]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 경종 후비 獻哀王太后皇甫氏[16] 『고려사』 권5, 세가 현종 18년 4월 임오 “謁大廟 加上先王先后號” ; 『고려사』 권10, 세가 선종 3년 4월 경술 “親禘太廟 加上太祖以下先王先后尊號”[17] 『고려사절요』 권1, 혜종 즉위년 5월 경오. 묘호인 태조로도 불렸음은 물론이다.[18] 다만 최승로의 상서문 가운데 ‘皇家’ 사례가 존재하기는 한다. 『고려사절요』 권2, 성종 원년 6월 참조.[19] 皇考 사례의 전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사』 권3, 세가 목종 원년 5월 무오 ; 『고려사절요』 권2, 목종 12년 4월 ; 『고려사』 권5, 세가 덕종 원년 5월 정유 ; 『고려사』 권64, 예지6 흉례 국휼 덕종 원년 5월 기축 ; 『고려사절요』 권4, 문종 6년 5월 ;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6년 11월. 다음은 王考 사례의 전거들이다.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8년 12월 병인 ; 『고려사』 권61, 예지3 길례대사 제릉 顯宗末年 6월 계사 ; 『고려사절요』 권15, 고종 5년 11월.[20] 변태섭, 『『高麗史』의 硏究』, 삼영사, 1982 참조.[21] 退火郡大寺鐘 (광종 7) ; 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 (광종 26) ; 太平二年銘磨崖藥師佛座像銘(경종 2) ; 普賢寺石塔 (靖宗 10). 이들 금석문 자료의 전거는 허흥식 편저, 『韓國金石全文』(中世 上․下篇), 아세아문화사, 1984이다. 전거를 표시하지 않은 이하의 금석문 자료들 또한 『韓國金石全文』(中世 上․下篇)을 전거로 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22] 박재우, 고려 君主의 국제적 위상 , 『한국사학보』 20, 2005, pp.50~53. 박재우는 고려 군주의 공식 직함이 ‘王’ 또는 ‘大王’이라고 하였는데, 공식 위호는 ‘왕’이었고 ‘대왕’은 주로 사후의 美稱이었다고 판단된다. 베트남에서와 같이 ‘대왕’이 ‘왕’보다 상위의 작위임을 보여주는 기록은 고려에서 발견되지 않음에서, ‘대왕’ 위호는 ‘왕’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왕’의 미칭이었을 것이다.[23] 五龍寺法鏡大師碑 (혜종 1) ; 大安寺廣慈大師碑 (광종 1) ; 玉龍寺洞眞大師碑 (광종 9) ; 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 (광종 26) ; 寧國寺慧炬國師碑 (10세기 무렵)[24] 玉龍寺洞眞大師碑 (광종 9)[25] 玉龍寺洞眞大師碑 (광종 9)[26]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경종 3)[27] 柳邦憲墓誌銘 (문종 5). 전거는 김용선 편, 『高麗墓誌銘集成』(第五版),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2이다. 전거를 표시하지 않은 이하의 묘지명 자료들 또한 『高麗墓誌銘集成』을 전거로 한다.[28] 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 (현종 8)[29] 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 (현종 8)[30] 仁宗諡冊 (인종 24) ; 玉龍寺先覺國師碑 (명종 3)[31] 王侾墓誌銘 (의종 15)[32] 奉先弘慶寺事蹟碣碑 (현종 17) ; 王冲墓誌銘 (의종 13)[33] 張忠義墓誌銘 (명종 10)[34] 崔惟淸墓誌銘 (명종 5) ; 金鳳毛墓誌銘 (희종 5)[35] 李軾墓誌銘 (의종 10)[36] 李公壽墓誌銘 (인종 16)[37] 崔繼芳墓誌銘 (예종 12)[38] 皇弟, 皇女, 皇太后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39] 文章弼墓誌銘 (명종 20) ; 崔孝思墓誌銘 (고종 5)[40] 雲門寺圓應國師碑 (의종 1년 무렵)[41] 玄化寺碑 (현종 12) ; 靈通寺大覺國師碑 (인종 3)[42] 李子淵墓誌銘 (문종 15) ; 金義元墓誌銘 (의종 7) 등등.[43] 斷俗寺大鑑國師碑 (명종 2)[44] 李子淵墓誌銘 (문종 15) ; 『동문선』 권64, 記 三角山重修僧伽崛記 (예종 1)[45] 최종석(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 p. 10~12.[46] 최종석(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 p. 20, 23.[47] 최종석,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서울, 진단학회, 2015).[48] 이러한 내포된 의미는 고려전기의 국제를 황제국 체제로 보는 연구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었을 따름이어서, 이러한 전제가 성립·기능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연구 성과는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49] 최종석, 앞 논문(2015). 고려전기 宣旨 등의 용어 사용의 실제 양상에 관한 이하의 서술은 이 논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50]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몇몇 사례만을 소개했지만, 이와 동일·유사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51] 신라에서는 당을 '상국(上國)'으로 칭했으나, 당의 해체 이후 고려는 칭신했던 북송과 거란을 각각 자기중심적으로 서조(西朝)와 북조(北朝)로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52] 제후국 체제 구현의 어려움에 관한 이상의 서술은 최종석, 「중화 보편, 딜레마, 창의의 메커니즘―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 성격의 재검토―」 『조선시대 예교 담론과 예제 질 서』(서울, 소명출판, 2016)을 토대로 작성되었다.[53] 이러한 지적 분위기는 천하 속에서 자신을 종족과 공간 면에서 이적으로 간주하긴 하나 여타 이적과 달리 문명 중화를 보편가치로 간주하여 자기 신념적으로 이를 추구·구현하 는 일환에서였을 것이다. 최종석, 「고려후기 ‘자신을 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민족문화연구』 74(서울, 고려대 민족 문화연구원, 2017b); 최종석, 앞 논문(2017a) 참조.[54] 최종석(2021),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歷史學報》 250, p.10.[55]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p. 13.[56] 최종석(2015), 베트남과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外王內帝’ 체제의 실상과 인식론적 맥락,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57] 최종석(2015), 베트남과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外王內帝’ 체제의 실상과 인식론적 맥락,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58]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59] 고명수(2015), "몽골-고려 형제맹약 재검토", 《역사학보》 255; David O. Morgan(2007), 《The Mongols》;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 154~155; 森平雅彦(2008), "事元期高麗における在來王朝體制の保全問題", 《東北アジア硏究》 1;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4.[60]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 최종석 고려후기 ‘전형적’ 제후국 외교의례의 창출과 몽골 임팩트 2019, vol., no.85, pp. 153-189 (37 pages); 최종석 원 복속기 遙賀禮(望闕禮)의 거행과 예식 변화상 ―원종·충렬왕대를 중심으로― 2020, vol., no.59, pp. 373-416 (44 pages); 이명미,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의 한 측면 -忠烈~忠宣王代 重祚를 중심으로-2013, vol., no.54, pp. 125-171 (47 pages); 이명미(2012), "고려-몽골 관계와 고려국왕 위상의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p. 114; 노명호, 「통념과 이념에 가리운 고려사회의 체제적 특징」, 『한국사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 한국사 연구방법론과 방향[61] Zhang Shiming(2006), "A Historical and Jurisprudential Analysis of Suzerain–Vassal State Relationships in the Qing Dynasty", 《Frontiers of History in China》 1;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영진(2020), "임진왜란 이후 명군철수 협상에 대한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42(1).[62] 계승범(2012), "임진왜란 중 조명관계의 실상과 조공책봉관계의 본질", 《한국사학사학보》 26; "김선민(2019), "1812년 洪景來의 亂으로 본 朝淸관계", 《學報》 90, p. 236.[63] 정동훈(2012), "명대 예제질서에서 조선국왕의 위상", 《역사와 현실》 84;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64] 최종석(2021),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歷史學報》250.[65] 단 당시는 아직 천자의 후계자=태자, 제후의 후계자=세자라고 명확히 구분되기 전이다.[66]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고구려의 지방관 모두루의 묘지명에서도 노객(奴客)이라는 단어가 '신하'의 의미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즉 '노객'은 당시 고구려에서 신하를 지칭하던 한국식 한자어였다는 것이다.[67] 백제의 무령왕과 신라의 지증 마립간을 일컫는다.[68] 백제와 신라를 일컫는다.[69] 해석하자면, 문자명왕 치세에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무령왕과 지증 마립간으로 인해 고구려가 장수왕 때부터 이어져 온 백제와 신라에 대한 절대적인 우세권을 잃어버렸고, 이로 인해 고구려와 중국 간 조공무역 물품에서 백제와 신라의 땅에서 나는 특산물이 갈수록 줄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중국은 백제와 신라를 두 읍(이전 기록에서는 "부여와 섭라"라고 쓰고 있음)이라고 쓰면서 이들은 고구려의 강역에 포함되는 제후국 내지 반란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70] 학자에 따라 "부여와 섭라"의 "부여"는 백제가 아닌 진짜 부여로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적어도 이때 북위의 황제가 그것을 고구려의 종속국이자 제후국이라고 보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71] 제후국 국왕의 정실은 '비(妃)'라고 불러야 한다. 제후국의 국왕의 어머니는 왕대비(王大妃).[72] 국도의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동천왕의 탄생 일화에서 '교제를 하기 위해 잡아놓았던 돼지가 탈출했다'는 묘사가 등장하며, 실제로 동천왕의 아명인 교체(郊彘)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 전한다.[73] 문제의 구절은 "위궁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고 하는데 모용씨에게 격파당했다(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 爲慕容氏所破)"이다. 《위서》의 내용인 "그(위궁)의 현손은 을불리요 을불리의 아들은 쇠인데, 열제 때 모용씨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다(其玄孫乙弗利, 利子釗,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를 옮겨적는 과정에서 '釗烈帝' 부분을 유비의 시호인 소열제와 혼동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74] 특히 고구려는 최소한 4세기 말 광개토대왕 시기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지녔기 때문에 4세기 중엽부터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 또한 자체적인 연호를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75] 이 경우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고 최치원의 〈숭복사 비문〉에서만 발견되기에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덜한 편이다.[76] 《삼국사기》, 《동국통감》 발췌.[77] '폐하(陛下)'나 '전하(殿下)'처럼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 쓰던 용어로 추정한다.[78] 대이진 임금의 연호이다.[79] 공작, 후작, 백작의 작위를 받은 왕족에 대한 경칭.[80] 공·후작의 작위를 받은 신하에 대한 경칭.[81] 백작의 작위를 받은 신하에 대한 경칭.[82] 광종 대에는 노골적으로 칭제건원을 했다.[83] 조서(詔書)와 같은 말. 황제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84] 황제의 명령.[85] 표(表)와 같은 말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어서 황제에게 올리는 글.[86] 제후, 태자에게 올리던 글.[87] 제국의 수도를 의미한다.[88] '황제가 계시는 성'이라는 의미이다.[89] 5방신장(五方神將), 5제(五帝)라고도 하며, 동방의 천신으로 봄을 맡은 청제(靑帝), 남방의 천신으로 여름을 맡은 적제(赤帝), 중앙의 천신으로 땅을 맡은 황제(黃帝), 서방의 천신으로 가을을 담당하는 백제(白帝), 북방의 천신으로 겨울을 맡은 흑제(黑帝)를 말한다.[90] 주문왕의 자칭.[91] 이 '대사천하'라는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렸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92] 높이 올라간다는 뜻. 고려 만월대 궁성의 정문 이름도 승평문이다.[93] 천자의 궁궐을 의미함.[94] 고려국왕이 정궁으로 돌아올 때 부르는 노래.[95]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p. 13.[96]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황제[97] 중국에서 국왕[98] 임금을 뜻한다.[99]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말한 것이다.[100] 이상 모든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발췌.[101] 《고종실록》 1894년 12월 17일(기미) 1번째 기사[102]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103]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征伐)>, 《만주연구》17(2014)[104]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76-2(2020)[105] 가짜 황제라는 뜻.[106]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大君(타이쿤)이 군주의 칭호로 쓰였기 때문에 쇼군이 이것을 대외 칭호로 쓰기도 하였다. 서구에도 이 칭호가 알려져서 영어 단어 Tycoon의 어원이 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대군이 왕자의 칭호이므로 일본 쇼군이 조선 왕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로 의도적으로 곡해하기도 하였다.[107] <베트남과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外王內帝’ 체제의 실상과 인식론적 맥락>, 최종석[108] 제후 등 신하가 천자에게 올리는 글.[109]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함.[110] 본래 그리스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지만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동)로마 황제를 뜻하는 말로 쓰였고 외국의 왕들은 라틴어에서 따온 렉스(rex)나 이걸 그리스어화한 레가스(regas)라고 불렀다.[111] 프랑스 제국 - 프랑스인의 황제, 독일 제국 - 독일 황제, 러시아 제국 - 전러시아의 황제.[112] 원래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대홍수로 약해지자 1656년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과 1660년 올리바 조약을 거쳐 종주관계를 청산했다. 그것도 모자라 훗날 프로이센은 한때 자신의 상전이었던 폴란드를 갈라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