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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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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1. 개요2. 관련 역사기록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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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제를 부를적에 사용하는 경칭으로써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특유의 피휘 관습의 일환이다. 뒤에 ''이 붙는 표현은 원래 황제에게만 사용 가능한 표현이었는데, 고려태조 대부터 '주상' 또는 '성상'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으며, 이중 '주상'은 원 간섭기 동안에도 사용하였으나 '성상'은 공민왕 대부터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1] 조선제후국의 예법에 충실한 나라였으나 묘호처럼 관습적으로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나 뒤에 폐하가 아닌 제후왕에게 쓰는 표현인 전하를 붙여서 '주상 전하'(主上殿下)로 쓰였다.[2][3][4]

단 보통은 주상과 폐하나 전하를 따로 떼어 쓰는 편이었다. 신하들은 2인칭으로 전하를 썼지만 3인칭으로는 주상이라고 했으며, 대비와 같이 의 윗사람이 되는[5] 왕족들은 2인칭으로 주상을 썼다. 전하는 본인을 낮추는 말인데, 윗사람이 자신을 낮추는 것은 영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왕 중에서 금왕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6]도 주로 주상, 또는 상왕인 본인과 구별하고자 금상이라고도 칭했다.

사극에서 임금이 등장할 때 주위에서 "주상 전하 납시오!" 대신 "선전색 빛나리!"라고 외쳤다는 낭설이 퍼져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조선시대 내시부에 그런 관직명은 없었다. 늘 웃전의 곁을 따라다니며 명을 전하는 역할을 하던 내시인 승전색(承傳色)을 착각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승전색을 실제로 우리말 뜻대로 '승전빛(色)', '승전빗', '승뎐빗' 등으로 부른데서 비롯된 낭설이다. 애초에 위 주장은 90년대 목수 출신 건축사학자의 의견으로, 중세국어론적으로 전혀 기록도 근거도 없다.

주상전하라는 표현 대신 승전색 또는 승전빛으로 행차를 알리고자 했다면 "승전빗이 상감마마 듭실까 여쭈오" 내지는 "승전빗이 상감마노라 행차하심을 아뢰오" 정도로 말했을 것이다. "빛나리~!"는 그야말로 관직명 속 한자의 뜻을 몰라 퍼진 낭설이다.

2. 관련 역사기록

2.1. 중국사

지금 주상(主上 = 한나라 헌제)께서는 어리고 심약하여 간신들이 조정을 주물러 중원이 두려워 떨고 있으니, 영웅호걸이 재능을 떨칠 시기입니다.
출처 : 위서 상림전
선주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한실(漢室)이 무너지고 간신이 천명을 훔쳐 주상(主上)께서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소. 나는 스스로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대의를 펴고자 했으나 지술(智術-지모)이 얕고 부족해 창궐(猖蹶-실패, 좌절)하다 오늘에 이르렀소. 그러나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으니, 장차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겠소?”
출처 : 촉서 제갈량전

2.2. 한국사

주상(主上 = 고려 목종)께서 병이 위독하셔서 그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습니다. 태후(太后)께서 김치양과 더불어 사직을 찬탈하고자 모의를 하였는데, 공(公)이 외방에서 많은 군사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왕명을 꾸며 불러들인 것입니다.
출처 : 고려사절요 제2권 목종이 훙서하다
왕년에 우리 주상(主上 = 조선 고종)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에 복을 입을 때에, 은혜와 의리를 작량하여 재단해서 단연코 이를 기년복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요, 그 주장은 이천(伊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실천은 우리 주상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니, 참으로 만세의 바꿀 수 없는 전범(典範)인 것이다.
출처 : 수당집 제4권 왕석천(王錫闡)과 혜사기(惠士奇)의 절기설(絶朞說)을 논박함
세상에 만약 제 환공(齊桓公)진 문공(晉文公) 같은 임금이 있다면 이와 같은 것들을 어찌 그냥 놓아두고 섬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상(主上)의 위(位)가 아직 바뀌지 않았으며 인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각국 공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조약을 맺은 문서가 다행히 폐하의 윤허와 참정의 인가(認可)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믿는 것은 다만 역신들이 강제로 조인한 헛조약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서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외부 장관(外部長官)을 갈아 세워 일본 공관(公館)에 조회(照會)하여 거짓 맹약의 문서를 없애 버리도록 하고, 또 각국 공관에도 급히 공문을 통해 모두 회합한 다음, 일본이 강국임을 믿고 약소국을 겁박한 죄를 성명(聲名)할 것입니다.
출처: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참고로 상당히 흥미로운 기록이 있는데 동문선에서 원간섭기 시절의 고려 국왕을 가리켜 주상폐하(主上 陛下)라 호칭한 기록들이 존재한다.[7][8][9]
主上 陛下。玉曆金輪之彌久。後天地以不窮。璿宮銅禁之咸寧。與松椿而難老。
주상 폐하께서 옥력(玉曆 해)과 금륜(金輪 날)이 더욱 장구하여서 하늘과 땅보다도 더 오래되어 다함이 없으며, 선궁(璿宮 왕족)과 동금(銅禁 궁중)이 모두 편안하여서 소나무와 춘(椿 8천년 가는 나무)나무처럼 늙지 마소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5A_1150_010_0160_2002_008_XML 동문선 제112권 / 소(疏)
主上陛 下。行仗百靈之翊衛。動資三寶之加持。東渤宣威。旋見島夷之納欵。北宸獻捷。寵承天子之報功。
주상(主上) 폐하께서 백신령[百靈]의 호위함을 의지하고 삼보(三寶)의 가지함을 자뢰하셔서, 동쪽 바다에 위엄을 펴시어 곧 섬 오랑캐[島夷]들의 항복을 받으시고, 북녘 대궐에 첩서(捷書)를 알려서 천자의 공을 표창받게 되어지이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5A_1150_010_0150_2002_008_XML 동문선 제112권 / 소(疏)
주상 전하께서 천조에 조회하시와 특별히 천총을 받자오시고 평안히 환어(還御 충렬왕 4년 4월에 왕과 공주가 원 세조에게 조회갔다가 9월에 돌아옴) 하셨다는 속을 엎드려 듣자옵고 진실로 기쁘고 춤출 듯하와 부랴부랴 삼가성덕을 하례하는 송시 18운을 지어 왕정(王廷)에서 도무하는 대신으로 바치나이다 [伏聞主上陛下利覲天朝別承寵睠穩回鸞馭誠懽誠忭且顚且倒謹成賀盛德頌一十八韻以當王庭之蹈舞云][10]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5A_0140_010_0190_2002_001_XML 동문선 제11권 / 오언배율(五言排律)

3. 기타

4. 관련 문서



[1] 그 외에 공문서 등 격식을 갖출 경우에는 '폐하'를 붙여 썼으나 임금 앞에서 직접 고할 때는 대부분 따로 썼다. 비문(금석문)이나 사적인 편지 등에선 '황상'을 쓰기도 하였다.[2] 자주국을 지향한 고려와 구한말 시기에는 성상이 가장 많이 쓰였으며 고종의 칭제건원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황상을 사용하게 되었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에서도 고종을 '황상 폐하'라고 지칭한다.[3] 만약 조선이 제후국의 법도를 FM대로 따르고자 했다면 '왕 전하', '국왕 전하', '군왕 전하', '현왕 전하', '대왕 전하' 등의 '상'자가 들어가지 않은 호칭을 사용하여야 했으나 고려 때부터 내려온 호칭을 아주 거스르기는 어려워 내부적으로 '상'자를 사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묘호 사용, 왕비 사후 왕후로의 추존 등과 더불어, 조선에서도 소극적으로나마 자주성을 지향하였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다만 '주상', '성상', '황상' 중 가장 격이 낮다고 여겨지는 주상을 사용하여 공식적으로 황상 칭호를 사용하는 상국 명나라에 대한 예의는 지키고자 하였다.[4] 사실 내부적으로 어떤 호칭을 사용하던,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세워 만천하에 천자국임을 공표하는 '칭제건원' 급의 큰 사건이 아닌 이상 중국이 간섭할 방법도 없었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묘호 사용 같은 경우는 중국 사신이 종묘를 둘러보면서 알아차릴 수도 있으나 폐하나 전하 같은 호칭의 경우는 속속들이 알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한반도 왕조의 내부 호칭체계(짐, 성상, 폐하 등)에 대해 문제삼고 개정을 요구한 중국 왕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유일했으며 그 이전 또는 이후 중국 통일왕조들은 굳이 한반도 왕조의 내부 호칭체계에 대해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성리학과 사대주의가 완고했던 조선이었으니 알아서 숙인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5] 유교 문화권에서 대비는 가족적으로는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도 왕의 윗사람이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266744[6] 단종처럼 상왕이지만 금왕보다 어린 사람은 '전하'라고 했다.[7] 만약 이 시기가 원종 내지 충렬왕 재위 시기였다면 충분히 폐하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다. 충렬왕 때까지만 해도 고려국왕은 오등봉작제를 통해 자국 강역 내에 제후를 임명하는 등 고려 내에서 천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절일 사용도 가능하였다. 다만 충렬왕 재위 후기로 가며 원나라에서 파견된 중서평장사 고르기스가 고려의 천자국 국체가 참월하다 하여 고려국왕의 황포와 황산, 원구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후국의 예법으로 격하시키게 되고 결국 충선왕 때부터 고려는 완전한 원나라의 제후국이자 부마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8] 참고로 고르기스는 고려국왕의 황포와 황산 또한 금지시키고자 했으나, 원나라 조정에서 세조구제에 의거해 내버려두라고 하여 유지시켜 준다. 다만 충선왕부터는 기존 한족 왕조의 전통 황포가 아닌 원나라 호복 형식의 황포를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황포는 적어도 우왕 재위 중반까지는 계속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설장수가 명나라에서 어의와 관복을 받아온 이후로 우왕, 창왕, 공양왕, 조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이 청포(청색 곤룡포)를 착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9] 물론 조선 세종 재위 중반에 명나라로부터 대홍포(홍룡포)를 새로이 사여받아 이후 고종 재위 중반까지 계속 홍포를 착용하게 되었다. 고종이 칭제건원을 한 이후로 순종까지는 고려 때처럼 황포를 착용했다.[10] 번역은 주상 전하라고 되어있지만 원문을 보면 主上陛下(주상폐하)라고 되어있다. 해당 자료를 제공한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들어가 원문 이미지를 클릭하기를 누르고 동문선 원문 이미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원문에서도 확실하게 고려 국왕을 가리켜 主上陛下라고 호칭한다.[11] 일본에서 현재의 천황을 지칭할 때 금상천황(今上天皇)이라고 부른다.[12] 섬기는 군주가 황제의 지위에 있는 경우 사용했다. 역대 중국 왕조나 외왕내제를 표방한 발해, 고려 등에서 쓰였으며 정식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 시기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발해와 고려의 경우 황상은 금석문이나 편지 또는 서적 등의 비공식 문서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성왕(발해), 성상(고려) 등의 표현이 사용되었다.[13] 현재 집정 중인 군주를 일컫는 말로 왕 이외의 사람과의 대화 또는 공문서에서 현왕을 지칭할 때 쓰이는 3인칭 용어이다. 물론 왕 앞에서 직접 고할 때는 절대 금상이라고 호칭하지 않으며 주상이나 성상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다만 태상왕, 상왕, 태상왕비, 상왕비, 대왕대비, 왕대비의 경우 선왕과 구별하기 위해 현왕에게 금상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다.[14] 성스러운, 신성한, 거룩한 군주를 의미하며 중국, 한반도, 일본 모두 쓰였다.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에서 폐하와 더불어 군주를 호칭하는 정식 용어였으며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에서도 주상만큼은 아니지만 빈번히 사용된 호칭이었다. 이후 구한말에 고종이 주상이라는 칭호를 대군주로 바꾸고 뒤이어 칭제건원한 이후에는 황상과 더불어 군주를 대하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굳어졌다. 일본에서도 제국시절(메이지, 다이쇼, 쇼와 전반기)에는 덴노를 성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5] 또한 성상은 왕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즉 신하와 백성들이 현왕을 높여부를 쓰는 표현이었으며 현왕을 굳이 높여부를 필요가 없는 태상왕, 상왕, 태상왕비, 상왕비, 대왕대비, 왕대비는 주상, 금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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