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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魏晉南北朝時代220년~589년
환관과 외척이 벌인 기나긴 암투극을 시작으로 후한이 멸망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수세기 동안 분열과 전란이 이어진 시대이다. 중간에 사마씨의 서진이 잠시 혼란에 빠진 중국을 통일하기도 했으나 40년도 유지하지 못했고, 통일 제국의 새로운 체제나 전망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이 잇달으며 나라의 내부 상태도 워낙 막장이었기에 결국 북방 이민족들에 의해 강남으로 밀려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마저도 유유의 송나라에 의하여 103년(317년~420년) 만에 무너졌다.[1]
왕망 이래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 윤리 붕괴와 소빙기 도래에 따른 기후 악화가 혼란의 원인으로 꼽힌다.
어떻게 보면 후한의 멸망 이후 한나라를 멸망시킨 모순과 그 후유증을 오랜 세기 동안 수습하지 못했던 시기가 바로 이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통일 왕조들 사이의 간격에 위진남북조시대와 같은 기나긴 분열기는 다시는 없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기점으로 중국에 유교, 율령, 불교, 과학, 학문이 확산되기 시작하며, 간다라 미술도 전래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도 이 시대에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벤치마킹했다. 한 마디로 동아시아 문화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대다. 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는 후에 수나라와 당나라는 물론이고 그들과 조공ㆍ책봉 관계를 맺는 통일신라, 발해, 일본, 베트남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중국이 뚜렷한 거대 세력을 출범하지 못하고 오랜 분열을 이어가는 사이 변방 국가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중국의 유민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유입되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국이 국력을 정비할 수 있었다. 4세기의 백제와 5세기의 고구려, 그리고 6세기의 신라가 차례대로 전성기를 누린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다.
위진남북조시대(220~589) 당시 중국의 영토 변화 |
혼란기이다 보니 나라와 국성도 자주 갈아치워졌으며, 제대로 된 국가로 안 치는 국가와 일단 국가는 다른데 성씨는 같은 나라까지 합쳐도 이 시대에 100년 이상 국가를 유지한 경우는 촉한, 유송의 유씨[2] 서진•동진의 사마씨[3], 대•북위•서위•동위의 탁발/원씨[4] 남제•양나라•후량의 소씨[5] 정도에 불과하고, 이들 외에는 그나마 모용씨가 80년 가까이 가긴 했다.[6] 민족으로는 한족 외에 선비족 국가가 다음으로 오래갔다.
2.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간
위진남북조 시대는 다시 다음과 같이 기간이 나뉜다.대략적으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연대 | 위진남북조 | 세부 | 육조시대 | |
220년~265년 | 조위 | 삼국 (위, 촉, 오) | 손오 | |
265년~420년 | 진 | |||
서진 | ||||
오호십육국 | 동진 | |||
북조 | 남조 | |||
420년~479년 | 남북조 | 북위 | 유송 | |
479년~502년 | 남제 | |||
502년~557년 | 동위 | 서위 | 소량 | |
557년~589년 | 북제 | 북주 | 남진 | |
북주(수) | ||||
수 |
3. 평가
3.1. 중세 통일 중국의 밑바탕
전근대적인 유교 정치사상의 시각에서 위진남북조시대는 어떻게 하면 망하는가, 통치자는 뭘 해선 안 되는가라는 반면교사의 향연이었다.육조시대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강남(중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할 때나, 문화사적인 시대구분으로 주로 쓰인다. 이 시기에 주로 강남에서 중세적인 귀족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여 수나라의 천하통일 이전까지, 무려 369년에 다다르는 이 시대는 중국의 흑역사이다. 지나치게 잦은 전쟁과 소빙기,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으로 예로부터 중국의 중심이었던 화북은 걸레가 되도록 털려 인구가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 대신 강남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중국의 인구는 8세기 초ㆍ중반이 되어서야(당현종) 다시 한나라 전성기 때의 숫자인 5,000~6,000만 명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 사학계는 자국, 외국 할 것 없이 이 시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중국인은 예전 제국이 멸망하면 다음 제국이 들어서서 그 자리를 대신함이 자연스러우며 타당하다고 여기는 역사 인식 경향이 있어 예전에는 이 시대를 흑역사로 취급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정통론의 도그마가 무너졌으며, 중국의 역사는 수많은 이민족과 맺은 관계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점이다.[9] 여기에 따르면 북중국에 이민족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이 시기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서양의 사학자들이 이 시대를 처음으로 주목했다. 로마 제국의 반쪽인 서로마 제국이 쇠락한 끝에 멸망하더니, 유럽 대륙이 여러 민족과 국가로 나뉘어서 몇 번의 통합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거대한 전쟁을 수차례 치르면서 오늘날 각각의 국가로 분리된 역사적 경험이 있어서였다.
- 한나라와 로마 제국은 고대 말기에 탄생하여 '명확하게 기록된' 역사시대의 초기를 연 대제국으로서, 이전까지 단일 문화권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영역을 통합했으며 '중화 문명권'과 '지중해 문명권'의 기반을 닦았다. 언어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력으로 인해, 이후 탄생한 국가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두 제국의 계승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 두 제국 모두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번영하며 사회적, 문화적 기틀을 완비했으나, 결국 축적되는 내부 모순과 외부(이민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다. 그러나 이 붕괴는 제국의 완전한 멸망에는 이르지 않았고, 이전 시대의 심장부[10]를 상실했음에도 제국의 일부는 살아남아 제국이 이룩한 문화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달했다. 살아남은 제국의 일부는 분열 초기에는 할거 세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종국에는 제국이 상실한 영역에서 성장한 세력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은 공통점을 가졌으나 수당교체기라는 당대 희대의 사건을 통해 분열을 수습하는데 성공한 중국과 달리 유럽은 결국 분리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유럽의 사학자들은 왜 중국은 이 시대를 거치고도 다시 통일되었는지 관심을 가졌다. ## 위진남북조시대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진시황의 통일 이후로 중국 대륙이 이 시대처럼 수백년에 걸쳐 분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열기와 다르게, 수백년간 분열한 경우는 이 위진남북조 시기뿐이었다. 유럽과 달리 중국은 이렇게 장기간 분열해 있었음에도 결국 통일을 이룬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중국의 역사, 중국인들의 국가 관념과 정신사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학자들이 위진남북조시대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분열기는 장장 369년이다. 서진이 일시적으로 통일한 시기를 빼더라도 332년이고, 진한시대 400여 년에 거의 맞먹으며, 5대 10국시대 이후 들어선 통일 왕조들의 존속 기간보다도 더 길었다. 이는 한나라가 구축한 사회 구조가 완전히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이 빠져든 대혼란과 분열 상태와 비교할 만하다.[11]
중국 역대 통일왕조들의 전통은 실질적으로 수당시대를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극단적인 관점[12]도 있다. 한나라가 중국사와 중국 통일왕조들의 전통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관점은 분명 극단적이지만 살펴볼 가치는 있다. 한나라 멸망 이후 수나라라는 통일왕조가 나타나기까지 400년에 가까운 기간은 한나라가 확립한 통일제국의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수•당 양 왕조가 한나라의 유산을 일종의 청사진으로 삼았지만 그 체제 자체를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그 이후의 통일왕조들이 역대 중국 통일왕조 가운데 정부 조직의 완성도가 가장 낮았다고 평가받는 원나라를 제외하면[13] 전 왕조의 체제를 계승하여 정착한 것과 분명 다른 점이다.[14]
당나라 멸망 이후 맞이한 오대십국시대는 지방 세력이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중심부에서도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위진남북조시대처럼 혼란이 장기간 고착화되지는 않았고, 송나라가 통일 제국의 위치를 계승했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탄생한 명나라의 경우 군벌들이 난립했음에도 분열기를 거치지 않고 통일 제국으로 성립했으며,[15] 이는 이후 만주족의 정복 이후 청나라로 이어졌다.[16] 이런 점에서 위진남북조시대는 통일제국의 멸망 이후 오랜 분열을 거쳐 재통합을 이룬 뒤 장기적인 통일제국의 형태를 완성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 사학계 역시 이 시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현대에 중국 소수민족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변방사나 이민족 유입의 역사 등에 관심이 높아졌고, 그 첫 단추가 오호십육국시대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의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해 스스로 중국 땅에 사는 여러 민족의 다민족 국가라고 공표한다. 따라서 중국사는 한족 외의 민족들의 역사도 포함되는 것이다.[17] 중국사의 이민족 왕조들은 대개 정복왕조로 취급받지만 이 시대의 이민족 왕조들은 침투왕조[18]라고 부른다. 이들의 씨족 중심적이고 분권적인 전통이 한족 왕조의 중앙집권제와 융화되지 못하다 아예 한화(漢化)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이나 중국 가릴 것 없이 이 시대에 관심이 높아졌고 연구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데다가, 이 시대는 워낙 자료가 적고 복잡한지라 어려움이 많다.
3.2. 빛나는 암흑시대
400년 가까이 중국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나뉜 위진남북조시대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전쟁과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서 끊이지 않았고, 후한 시기부터 불황에 빠진 경기는 바닥을 찍었다. 백성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었으며, 높으신 분들은 이 와중에 피비린내나는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오호에게 중원을 빼앗기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오랫동안 그곳을 터전으로 삼던 한족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장강 이남으로 밀려난 한족은 그동안 깔보던 이민족에게 '도이(島夷)', 즉 '섬 오랑캐'라고 불리는 굴욕에 시달리게 됐다. 한결같을 듯하던 '화이(華夷)' 질서는 뒤집혔고, 세계 문명의 중심임을 자처하던 '중화(中華)'의 자부심은 빛을 잃었다.이때 하루아침에 세워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망하여 없어진 왕조가 너무 많아서 그 이름들조차 외우기 어렵다. 화북에서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당했고, 후조는 염위에 넘어갔으며, 염위는 전연에 무너졌다. 또한, 전연은 전진에, 전진은 후진에, 후진은 동진의 장수 유유(송 무제)에게 패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강남(중국)에서 벌어진 상황도 강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정북벌로 영웅이 된 유유는 사마씨의 동진을 집어삼켜 황제 자리에 올라 송(宋)을 세우지만, 그의 못난 후손들은 나중에 소도성(제 고제)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하지만 소씨도 얼마 못 가서 먼 일족인 소연(양무제)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양나라는 남북조에서 보기 드물게 수십 년 동안 평화를 지켰으나,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쇠퇴했다. '삼국(三國)'이니 '십육국(十六國)'이니 '육조(六朝)'니 하는 숫자 섞인 명사 속에는 그러한 흥망사가 얼핏 새겨졌다.
일본의 동양사학자이자 '중국사의 대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중국중세사》에서 위진남북조시대를 아우르는 중국 중세를 가리켜 큰 골짜기의 시대라고 부른 게 마땅하다고 여길 만치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를 암흑기로만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도연명이 지은 시, 왕희지가 쓴 글씨, 고개지가 그린 그림은 당시 문화와 예술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한문 문체인 변려문이 성행한 것도 이 무렵에 생긴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된 때도 위진남북조시대였다.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는 지표로 꼽히는 한자, 유교, 율령, 불교 등이 이 시대에 접어들어서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으로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소수림왕이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서 개혁을 이루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한편 백제와 신라, 가야, 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중국 왕조들과 교류하면서 번영을 꾀했다. 이들은 주로 남조와 교류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ㆍ신라ㆍ왜ㆍ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북조는 물론이고 이들과 남조의 친선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 장수왕 때부터 남조하고도 교류했다.
이처럼 중국이 매우 혼란스러웠음에도 문명은 더욱 발달하여 중국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카와카츠 요시오는 이를 두고 빛나는 암흑시대라는 말로 위진남북조시대의 역설을 표현했다. '큰 골짜기의 시대'가 위진남북조시대의 그림자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면, '빛나는 암흑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보이는 용어다. 카와카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974년에 쓴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에서 "중국의 고대문명은 어떻게 이 기나긴 난세에도 불구하고, 단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풍요롭게 보다 넓은 범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귀족제 사회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전란이 계속된 육조시대에 무력을 가진 무장의 활약은 대단히 눈부셨다. 특히 화북에 침입한 북방 이민족은 그 뛰어난 무력을 배경으로 한민족을 제압했다. 이처럼 무인의 역할을 컸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이들 무인이 지배계급을 구성하고 봉건적인 무인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전란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대체로 지켜졌다. 육조에서부터 수·당시대에 걸친 사회는 보통 귀족제 사회라고 규정되는데, 여기에서의 귀족은 무인이라기보다 오히려 문인이고 그 성격상 본질적으로 지식계급이다. 화북을 제압한 이민족의 지배층은 원래 무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점차 지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으로 변모해 갈 수밖에 없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일이 잦았음에도 문인이 무인을 끝내 억누른 것은 위진남북조시대가 낳은 또 다른 역설이다. 후한이 무너지고 지식인들은 여러 정권에 참여하여 활약했다. 조조를 섬기며 무장들이 세력을 더 키우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맡은 순욱이 좋은 보기다. 수천 명이 넘는 사병을 거느린 가문에서 태어난 이전이 "유가의 단아함을 숭상하고, 재주와 덕망있는 사대부들을 존경하며, 예의를 잃을까 두려워할 만큼 공손한" 태도로 조조 밑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나, 이른 바 오하아몽과 괄목상대로 대표되는 무장 여몽의 지식인 편입기는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무력만 갖고서는 천하를 얻어도 다스릴 수는 없었고, 이는 삼국시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난세를 끝내기 위해 길을 찾는 지식인들의 노력도 더욱 치열해지고, 거기서 꽃피는 학문과 문화도 깊이가 더해졌다. 뿔뿔이 흩어진 사회 속에서 무수히 생겨난 소집단의 유력자들을 독서인으로 양성하고,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안정시키고자 이들 새로운 지식인을 중용하는 것은 중국의 여러 왕조, 그리고 이후의 통일제국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위진남북조시대는 암흑기였다. 카와카츠는 문벌귀족이 기나긴 난세에서 중국 문명을 강인하게 지켜내고, 발전시킨 중심축이라고 추켜세우지만, 한편으로는 국사에 무관심하거나 실무에 무능한 귀족들도 적잖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19] 위진남북조시대를 평가하면서 폭군, 혼군, 암군이 여느 때보다 자주 나타나서 백성들을 괴롭힌 일도 빼놓기 어렵다. 물론 그 속에서 과거제처럼 새 시대를 여는 요소가 싹텄고, 이것이 뒷날 '세계제국'으로 불리는 수당 제국이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하였음은 분명하다. 호한(胡漢)이 갈등을 겪으면서 공존을 위한 길을 모색한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억조창생이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견뎌야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안의 봄을 기다리며, 아름답게 보이면서도 모질고 사납게 느껴지는 '겨울'이 지나가기를 바란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대체역사물에서는 종종 중국을 약하게 설정할 때, 위진남북조시대에 다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이 지속되었다고 취급하는 일이 많다. 일례로 겁스 무한세계에서 고대 로마의 맥이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1>평행계에서, 중국은 그저 세리카라 불리는 지역으로 그 안에 여러 흩어진 나라들의 집합 정도로만 나온다.[1] 유송 역시 폭군들의 연이은 등장으로 약 60년만에 멸망한다.[2] 촉한 41년, 유송 59년[3] 서진 52년, 동진 103년[4] 대나라 61년, 북위 148년, 서위 22년, 동위 16년[5] 남제 24년, 양나라 58년, 후량 32년[6] 전연 33년, 후연 23년, 서연 10년, 남연 12년[7] 동진의 멸망은 420년이었으며, 5호 16국시대는 북량이 439년 북위에게 멸망하면서 종결되었다.[8] 북조는 북위가 534년 서위와 동위로 분열한 뒤 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킬 때까지 40여 년 동안 분열을 겪었다.[9] 현대 이전 중화사상에 기반한 중국사의 정통론은 간단히 말해 <한족이 중국사의 정통>이고 <중국의 역사는 정통성을 가진 통일제국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성립된 이민족 왕조, 대표적으로 5호 16국시대의 <침투왕조>들은 '한화되어 그 정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중국사에 흡수되었다.'는 것이 중국사적 정통론의 관점이다. 반면 <호한체제>와 같은 새로운 관점은 중국의 역사와 그 정체성 자체가 수많은 이민족들과 융합을 통해 탄생한 것이지 어느 한 쪽이 정통이라 나머지를 흡수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통일왕조가 무너지면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새로운 통일왕조가 뒤를 잇는다'는 유교적인 정통론은 당대인들의 관념일 뿐,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부합하는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관점이다.[10] 수도였던 로마와 낙양/장안, 또는 보다 넓게 보아 이탈리아와 사예 지역(중원)[11]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중국의 중세는 (굳이 구분한다면)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참고로 유럽 중세의 시작은 서로마 제국 멸망 시점으로 여겨진다.[12] 주로 고대 로마와 연계하는 데 치중하는 서구의 관점이다.[13] 단 원나라로부터 계승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오늘날까지 쓰이는 중국의 지방행정구역인 성(省) 역시 이때 들어온 것이다.[14] 한나라 시대의 문화적 전통이 이후의 통일 왕조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분명 존재하지만, 정치사의 관점에서 권력 기구와 제도 계승은 당나라 이후부터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15] 주원장이 군벌들을 정리한 다음에 원나라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16] 만주족의 청나라도 이이제이를 상당히 잘 활용했다.[17] 동북공정 역시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 내 조선족들의 역사도 중국사이므로, 현재 중국 땅에 있었던 고구려, 발해 역시 중국 조선족의 역사로서 중국사에 들어간다는 주장이다.[18] 학계에서는 한족을 지배하면서 이민족의 독자성을 유지한 요, 금, 청 등의 왕조를 정복왕조라고 부르며, 오호십육국과 북위처럼 한족을 지배하면서 독자성을 잃고 한족에 흡수된 왕조를 '침투왕조'라 부른다. 그러나 침투왕조 이론은 호한체제라는 개념에 도전을 받고 해체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 사학계가 주장한 이론 중에 드물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 바로 호한체제(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이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인 박한제 교수가 1988년에 발간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는 중국 중세사의 바이블로 취급된다. 호한체제에 관해서도 국내에 박사-교수급 학자 10여 명이 연구에 매진한다. 다만 이 학설이 주도설의 위치는 점하지 못하고 있다.[19] 그렇지만 위진시대에는 가문만 믿고 잘난 체하는 헛똑똑이로 살다가는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낭야 왕씨와 함께 명문으로 손꼽히던 진군 사씨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사안이라는 명재상이 나온 진군 사씨는 동진 시기에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 힘을 시나브로 잃으면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나라가 세워진 시기에 오면, 옛날과 달리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정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사실 의외로 문벌귀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시대는 역설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의 관료제를 구성한 구품관인법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사라진 채 붕괴하여 서한 초기의 임자제(任子制)로 퇴보하고, 황제의 가문조차 오래된 문벌귀족보다 가문의 격이 달린다고 비웃음을 받았던 수당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