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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투왕조

1. 개요2. 역사3. 정복왕조와의 차이점4. 유사 사례5. 관련 문서

1. 개요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y)는 독일계 미국인 역사학자 카를 비트포겔이 창안한 단어로 중국 본토에 정착한 비한족 세력이 세운 옛 중국 왕조들 중 한족과 정책적으로 동화한 왕조들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사회 문화적 차이나 이질감 보다는[1] 당대 유목민 정복자들이 중국식 관료제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2. 역사

2.1. 오호십육국 · 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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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설명할 때 가장 좋은 예시를 보여준다. 태무제의 화북 통일 이후 효문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사용하였다. 도읍을 낙양으로 천도하였고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바꾸게 하였다. 국성마저도 탁발씨에서 원씨로 바꾸었다. 또한 유목민족의 풍습과 언어를 금지하고 유목민족과 한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등 한화에 힘썼다.

그러나 급격한 한화정책에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에 북위 멸망의 원인인 육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2.2. 수나라 · 당나라

수나라와 당나라의 지배층의 중추는 북주 때부터 내려오는 한화된 선비족인 관롱집단이었다.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아직 과거제도는 초기단계이다보니 시험을 보기 이전 미리 합격자를 정하는 식으로 형식적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나라 말기까지는 관롱집단들이 대부분의 고위직(특히 군대)을 차지하였으며, 궁술과 창술 솜씨를 중시하는 시험 때문에 학문보다는 무예실력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8세기 말의 장군 장완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관직에 나간 학자였으나 고위직까지는 올라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완부는 책읽기에 뜻을 두지 않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고, 군대에 지원하여 요동에서 근무했고 장군이 되어 귀향했다.

관롱집단 가문의 자제들은 어려서무터 무예를 익혔으며 이는 황족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말년에 직접 전장에 나섰을 정도였다. 오호십육국 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의 이상적인 인재상은 이른바 출장입상[5]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군대는 부병제라는 병농일치의 민병체제를 골간으로 하였다. 부병제의 기원은 550년 서위우문태가 한족 병력을 징집한 데서 비롯되었다. 수나라의 군대는 부병제에 따라 소집된 한족 병사들과 선비족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였다. 수나라의 고위 장수 60여 명 가운데 최소 40%는 선비족이나 서역인 등 비한족 혈통이었으며 장수들 가운데 87% 가량이 수나라 이전 선비족이 세운 북주에서 복무했던 경력이 있었다.[6]

부병제는 백성을 총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세습 병역의무를 지는 군인 가문이나 일반 가문에서 선택적으로 병력을 뽑는 제도였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병을 보내는 집안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속하였다. 이러한 관롱집단 군인 가문들은 주로 북방에 압도적으로 몰려있었으며, 북방에서도 관중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관중은 300년에 걸친 오랜 전란으로 사회 자체가 군사화되어 있었다. 부병제는 당나라 때 들어서도 계속 적용되었다. 부병들은 전시에 즉시 소집할 수 있는 훈련된 예비군이었으며,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기 때문에 국가의 지출이 필요없었다. 또한 군대를 소부대 단위로 분할하여 수도 주변에 주둔시킨 다음 조정에서 직접 감독하였기 때문에 장수들이 다른 지방에 근거지를 만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3. 정복왕조와의 차이점

침투왕조는 중국사 관련해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정복왕조라는 개념에 비교하면 지칭하는 폭이 좁다.

1. 후대에 중국에 정복왕조를 새우게 되는 거란족과 탕구트족, 여진족은 한문을 바탕으로 고유의 문자를 창제하고, 몽골족은 티베트 문자와 위구르 문자를 참고하여 고유의 문자를 만들었다. 즉, 자신들만의 문자 언어 전통이 존재했다. 한편 정복왕조들 이전 이른바 침투왕조라 불리는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유목민 세력들은 자체 문자가 부재했기에, 관료제에 기반한 국가 통치를 위해서는 한문을 습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파일:몽골 카스트.png

2. 정복 왕조 중 원나라와 청나라는 정복 민족이 상위 계급에 위치하고 한족이 최하위 계급이 되는 "외세의 통치"라고 봐도 무방한 민족 차별 정책이 시행되었다.[7] 반면 북위에서 당나라로 이어지는 관롱집단이라는 개념은 민족 간의 상하를 나누는 것보다는 한나라 때 문벌귀족 집단을 모방, 계승하는 사회 계층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후금이 발흥하던 당시 몽골이 주요 지도자인 차하르부의 릭단 칸은 후금과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칭기스 칸의 마지막 후손인 그는 원나라의 옥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몽골 제국 전통의 적법한 대표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628년과 1632년 만주족과의 전투에서 옥새를 잃어버렸으며, 만주족이 원의 옥새를 획득하고 동몽골족 전체를 팔기 체계로 편입시켰다. 릭단 칸이 청해호에서 천연두로 죽은 후 그의 아들은 만주족 공주와 결혼했다. 이 최종적인 승리 후에야 홍타이지는 진정한 삼민족 제국을 선포할 수 있었는데, 1636년 제국의 이름을 대청이라 하였다. 만주족은 더 이상 12세기 지역 국가 금나라의 여진족 선조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그리하여 후금이라는 국명을 청으로 교체하였다.) 그들은 이제 정당하게 새로운 세계 제국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중국의 서진 / 피터 C. 퍼듀
과거의 해석은, 만주족중국의 다른 야심찬 이민족 정복자들처럼 그들 지배의 통치나 정당화에 중국식 방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로 사실상 문명화된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청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했다 보기 힘들다. 청 통치자들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만주족,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나라황제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였고, 몽골인에게는 중의 칸(대칸)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이었다. 청나라는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세계 제국이었다.

이번원(理藩院)은 만주어로 '바깥 지역을 통치하는 기구'를 뜻한다. 이번원은 중국 본토의 외부 지역, 즉 몽골과 티베트 등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의 행정 기관이었다. 6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이번원은 수도에 관청을 두고 있었으며, 이번원에 소속된 지방 관료들의 규모도 거대했다. 한족 지식층은 거의 모두 이번원에서 배제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 행정이 운용되었다.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3. 정복왕조들은 통치자의 권위를 중국 전통적인 개념보다는 여타 문화권의 개념에서 찾고 확립했다. 원나라는 여타 몽골 제국 방계 국가들과의 외교에서 몽골 대칸의 권위를 내세웠다. 청나라의 황제는 몽골에서는 전국옥새를 물려받은 대칸이었고, 티베트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전륜성왕(차크라바르틴)으로 숭앙받았다.

4. 유사 사례

유사 사례로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 동남아시아의 수코타이 왕국, 란나 왕국, 란쌍 왕국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 등이 있다. 물론 해당 사례들은 초기에는 정복왕조에 가깝긴 했다.

5. 관련 문서



[1] 오호십육국 시대 들어 한족이나 비한족 모두 평등하다는 불교가 당시 중국에서 관민 할 것 없이 유행하던 상황이었다.[2] 오호십육국 중 하나인 전진은 화북을 평정한 후 남조의 동진까지 침공해왔었다. 전진동진을 정복하면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 그 바로 직전까지 갔었지만, 비수대전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나라가 멸망하는 상황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화북지역은 다시 여러나라로 분열되며 화북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기 전까지 전란을 겪게 된다.[3] 북조는 "북부 왕조"라는 뜻으로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를 가리키는 단어다.[4] 북주에 의해 멸망.[5] 나가서는 장수, 들어와서는 재상. 문무를 겸비하여 요직을 두루 거친다는 뜻.[6] 출처 : Soldiers of the Dragon: Chinese Armies 1500 BC–AD 1840, Chris Peers / Osprey Publisher[7] 청나라의 경우 한푸를 금지하고, 변발을 강제하였다. 전족을 금지하기도 하였으나 한족 사회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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