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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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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북주~: 부병제의 시작과 발전2.2. 전기의 부병제2.3. 당 중기: 부병제의 파탄2.4. 부병제의 유지 노력과 붕괴
3. 평가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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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중국북조북주에서 시작해 당(唐)시대 중기까지 약 100여년간 시행되어온 군사제도.

토지를 소유하거나 받은 농민이 병역 의무를 담당하게 한 병농 일치 제도이다.[1]

2. 역사

2.1. 북주~: 부병제의 시작과 발전

부병제를 도입한 인물은 북위의 분열 이후 서위의 실권자, 북주의 시조였던 대승상 우문태였다. 북위나 서위는 북방 이민족 중 하나인 탁발선비족이 중심이 되어 수립한 국가였고[2], 건국 초기에는 당연히 선비족한족혼혈 위주의 무천진 관롱집단이 군사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위의 실권자인 우문태가 선비족과 한인간 동조화 정책(한화정책)을 실시하자 여기에 반대한 고환[3] 측에 선비족들이 대다수 합류하면서 군사력의 부족을 느꼈고 토착 한족들을 대거 중앙군에 편입시킬 필요를 느꼈다. 우문태는 결국 542년 6군의 창설을 시작으로 550년 중앙군 24군을 편성하고, 군제의 개편을 실시한다. 그것이 부병제이다.

우문태가 창설할 당시 지휘체계는 주국대장군 8인 - 대장군 12인 - 개부의동삼사(개부의동대장군) 24인 - 의동삼사(의동장군) 96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국대장군 6인 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국대장군 중에는 전 군을 총괄하는 우문태, 그리고 형식상 세워놓은 북위의 황족인 광릉왕 원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외에 최근 연구에 따르면 주국대장군직을 계승한 인물들은 호족(胡族) 7명, 한족(漢族) 3명이었다. 이 중 2명은 우문태의 자리를 노렸다가 그대로 작살났고, 대를 못이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6개의 자리를 10명이 거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무천진 출신으로(10명 중 8명) 서위의 군권은 사실상 무천진 출신 군벌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주국대장군, 대장군 밑에는 개부의동삼사가 존재한다. 이들은 하나의 군이 되는 개부(開府)의 담당자가 되었고, 그 밑의 의동삼사들이 각각의 의동부의 수장이 되어 평시 군정권을 담당한다. 전시에는 2개의 의동부가 하나의 단으로, 2개의 단이 하나의 군(軍)을 이루어 개부의동삼사의 지휘를 받으며, 평시에는 대도독, 도독 등 평시 군정권을 지닌 상급자의 지휘 하에 1개월 단위로 번상해 15일은 담당구역의 경비를 맡고 15일은 훈련을 받는다.

서위의 우문태는 부병제를 통해 북위의 군사력을 대부분 이어받은 동위를 연파했고 양무제 말년에 일어난 후경의 난으로 혼란스러워진 남조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과 양양지역을 빼았았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북주에게로 이어져 곡률광, 단소, 고장공 등 명장들이 버티던 북제를 멸망시켜 북방을 통일한다. 그러나 북위는 군역과 지휘권 세습을 유지하였기에(북주는 주국대장군, 대장군직이 전부 세습이었다!) 결국 수문제에 의해 찬탈이 이루어지면서 수나라가 들어선다. 참고로, 수문제는 서위~북주 시기에 12대장군직 중 하나를 세습하던 가문이고, 당고조 이연은 8주국대장군직 중 하나를 세습하던 가문이다.

수문제는 실권을 잡은 후 여타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란을 진압했고[4] 그 결과 황권이 확고해져 강고한 중앙집권을 이룩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독고 황후의 적극적인 지원까지 더해 확실한 정책 추진력을 구비한 수문제는 이를 토대로 개황율령을 반포하고, 선거제 실시, 지방행정체제 개편과 군권의 박탈, 부병제의 전국적 확대, 군령과 군정의 분리 등 개혁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후 남조 남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재통일한 후 몇 가지 수정이 더해진다.
이러한 군제 개혁을 통한 동원력의 확대, 개황의 치로 인해 부유해진 국고와 넘처나는 인구는 수나라에게 차원이 다른 동원력을 제공하였다. 수양제는 50만에 달하는 대군을 끌고 지방을 순시하곤 했으며, 고구려 원정시에는 113만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수나라의 동원력은 당나라의 그것을 한참 뛰어넘으며, 막강한 경제력의 송대에 와서야 겨우 따라잡힌다.

2.2. 전기의 부병제

수나라균전제-부병제-조용조삼위일체를 통해 개황의 치를 이룩했고, 개황의 치로 인해 넘쳐나는 국력을 통해 수양제의 적극적인 대외 팽창정책이 수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양제의 그러한 팽창정책은 고구려-수 전쟁에서 된서리를 맞았고, 결국 여타 지역에서의 성공마저 무위로 돌리며 수 왕조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자연스럽게 수의 그것을 가져온다. 이는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을 비롯한 무천진 군벌 지배계층이 곧 수나라의 지배계층이기도 했고 수문제의 개혁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은 90여 개 주에 흩어져 있는 응양부를 개칭한 절충부(折衝府)에서 부병들을 관리하였다. 절충부는 지금의 병무청+훈련소+보충대+예비군의 국민개병제 및 징병제의 성격을 띤 군부(軍府)로써 각각의 절충부는 규모에 따라 상부(1,200여 명), 중부(1,000여 명), 하부(800여 명)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측천무후 시기에는 임시로 통폐합되어 1부에 1,500명이었다. 절충부의 개수는 대략 570~630여 개 사이었다. 일단 <통전>에 따르면 574부, <신당서> 병지에 따르면 634부, 마찬가지로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566부, <당육전> 에 따르면 594부이므로 대략 600개 정도가 존재했다.

이러한 절충부는 중앙의 금군인 위(衛)의 관리를 받았는데, 최초에는 16개의 위가 있었고, 좌·우위, 좌·우효위, 좌·우무위, 좌·우위위, 좌·우영군위, 좌·우금오위, 좌·우감문위, 좌·우천우위로 구성되었다. 후에 황제 직속인 12개 위와 태자를 경호하는 6개 솔부로 개편되고, 소속에 따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 이를 소속(명칭)으로 명기하면 다음과 같다. 좌·우위(효기), 좌·우효위(표기), 좌·우무위(웅거), 좌·우위위(우림), 좌·우영군위(사성), 좌·우금오위(차비), 좌·우위솔부(초승), 좌·우사어솔부(여분), 좌·우청도솔부(직탕). 이렇게 만들어진 12위는 각각 50~60개 정도의 절충부를, 6솔부는 3~5개 절충부를 관리했다. 각각의 위는 대장군(이후 상장군을 상위직책으로 추가) 1명과 장군 2명이 지휘 통솔했다. 이 모두를 총괄하는 '총위'는 가장 서열이 높은 좌·우위였다.

각각의 부병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무장은 자기가 갖추어야 했고, 매년 1~2개월에 걸처 3경(장안, 낙양, 태원)으로 상번해 경비임무를 맡아야 했으며 1차레 3년에 걸처 변경 방위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근무지를 이탈할 경우 변경방위라면 도망 하루에 장형 80대, 도망일수가 3일이 넘어갈 때마다 1등급씩 무거운 처벌을 가하고 수도 경비라면 하루에 장형 100대, 2일이 넘어갈 때마다 처벌이 1등급씩 무거워지게끔 하였다. 또한 자해를 통해 병역이탈을 기도한 것이 밝혀지면 장형 40대 후 법에 따라 추가처벌하도록 하였다. 대신 국가는 병역에 대한 보상으로 17결에 달하는 토지를 지급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당의 토지 측량 단위로 따진다면 총 100무(구분전 80무, 영업전 20무)에 달하며 세금, 즉 조용조에 대해서 면세 혜택을 누렸다.

절충부는 장안 중심의 경조부를 포함하는 관내도, 낙양 중심의 하남부를 포함하는 하남도, 태원을 포함하는 하동도에 절충부를 집중적으로 배치(80%, 이 중 관내도에 44%(288개), 그 안에서도 경조부에 20%에 달하는 131개 배치, 하동도에도 164개, 나머지는 하남도에 존재)되어 있었고, 대략 90여 개 주에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병의 최초 구성원은 태원에서의 거병시 동참했던 병사와 중국 통일 과정에서 편입된 병사들이었고, 통일 이후 부유한 정남들을 편입시켜 그 숫자를 확충하였다.

2.3. 당 중기: 부병제의 파탄

부병제는 당태종~당고종 시기의 번영, 즉 정관의 치 시기에 당의 군사적 성공을 견인하면서 효과적인 제도였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병제의 근간은 당고종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야기한 것은 농민층의 분화와 토지 겸병 확대, 전쟁의 장기화 등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도호의 증가 때문이었다.

부병제가 붕괴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균전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부병제는 균전제를 그 근간으로 하는 제도이다. 즉, 국가에 의한 확고한 제민지배(호수의 파악)와 토지지배를 바탕으로, 이를 법률에 맞게 규정량만큼 나누어 주는 균전제를 절충부 소속 부병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거기서 자체적으로 군비와 훈련을 한 후 동원되는 체제이다. 그런데 이 균전제가 당고종대부터 흔들리더니 결국 측천무후 시기에 무너져 버린 것.

가장 근본적인 부병제의 붕괴 원인은 귀족층의 토지 겸병 확대이다. 균전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토지공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토지의 사유화 및 매매는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귀족들의 기존의 사전들은 상당수 그대로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균전제 하에서 귀족들은 세습 가능한 토지인 영업전(永業田)을 최대 100경, 최소 5경에 달하는 방대한 토지를 수여받았다. 1경은 100무에 달하므로 일반 정남이 부여받는 토지(직분전 80무, 영업전 20무)의 최소 5배, 최대 100배에 달하는 세습 토지를 수여받는 셈이다. 거기다 매매가 불가능한 균전제의 대원칙을 예외조항을 통해 우회하여 토지겸병을 더욱 확대하였다. 또한 당초에 일어났던 여러 정변 직후 공신들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것, 정권 구성원의 변화도 토지 겸병 확대를 거듭 강화하였다. 특히 당고종이 즉위하면서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관롱귀족들이 여타 세력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토지겸병은 심각해졌고, 질려버린 당고종측천무후를 내세워 관롱귀족층에 큰 타격을 입히고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토지겸병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 결과 균전제는 거듭 흔들리다가 결국 무너졌으며, 균전제를 기반으로 하는 부병제 또한 균전제가 무너짐에 따라 같이 붕괴되었다. 각지의 절충부에 속해 있는 부병들은 자신의 토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무장을 갖추고, 훈련을 행하며, 전시에 동원되는데 토지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동원도 불가능해진 것.

부병제를 지탱하는 절충부는 균전제를 통해 농지를 부여받고 그 대가로 군역에 종사하는 부병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유지의 급증과 인구의 증가로 인해 분배받는 토지가 감소하고, 그에 반해 관내도, 하남도, 하동도에 집중되어 있는 절충부로 인한 군역은 무거웠기에 결국 농민들이 이탈하기 시작한다. <당육전>을 보면 '행군 시 필요한 물품은 소재 주에서 공급하고, 부족한 것은 병사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고 명시하여 병사 스스로 장비류를 준비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는데 분배받는 토지가 적어지면서 이걸 부담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전쟁 양상도 점점 자신의 토지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오지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설령 균전제가 붕괴되지 않았더라도 시대가 흐를수록 각 부병들에게 땅을 더 많이 지급하던지 군수물자를 중앙정부가 추가로 보급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원을 더 해줘도 시원치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보급자체가 붕괴된 셈이다. 결국 균전제의 붕괴와 그로 인한 도호의 증가는 절충부와 소속 부병들의 충원능력 부족과 질적 저하를 낳게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처음에는 임시징집병이었던 병모의 상비화가 이루어지기까지 한다.

거기다 거중어경(居重御輕)의 원칙도 문제가 되었다. 이 원칙에 따라 절충부는 장안-낙양 축선, 그리고 태원에 집중되었는데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규정된 토지 지급에 미달하는 지역이 속출한 것이다. 부병에게는 구분전 80무, 영업전 20무를 지급하도록 규정이 존재했으나 실제로는 장안-낙양 축선 상에는 구분전을 40두밖에 주지 못하는 협향(狹鄕)이 대부분을 점했고, 40두도 지급할 수 없는 지역도 많이 있었다. 규정된 토지를 지급받지 못한다면 필요한 무장과 훈련을 하기 힘든데, 거기다 더해 이 지역의 정남들은 왕조의 핵심부에 있다 보니 자주 전쟁에 동원되었고 자기 농경지를 돌보지 못한 결과 매매가 불허된 영업전 20무마저 빼앗기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여기에 더해 당 왕조는 절충부 소속 정남들의 이주를 금지시켰고, 특히 수도권 인근 지역의 정남들은 설령 토지를 지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외부로 이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거중어경(居重御輕)의 원칙을 강화하기 위해 오히려 외부에서 관중 지역으로 이주시켜버리는 정책을 수행했다.

길어진 전란도 문제였다. 당태종 시기의 대외 전쟁은 단기전이 보통이었지만 당고종 시기가 되면 고구려-당 전쟁, 나당전쟁, 토번과의 전쟁 등 대외 전쟁은 장기전화 된다. 그나마 짧게 끝난 서돌궐 복속도 상당히 원거리 원정이었고 전쟁 기간도 제법 긴 편이었다. 이러한 전쟁의 장기화, 원거리화는 이에 동원된 부병들이 규정된 것 이상으로 군에 복무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자체적으로 구비해야 하는 전쟁 물자의 양을 증대시켰다. 그런데 당고종시기가 되면 토지 겸병이 문제화되기 시작하면서 부병들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거기다 이런 여러 문제들은 다른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켰고, 그 결과 호적에서 이탈한 농민인 도호(逃戶)가 급증하였다.

중국사에 있어 도호, 즉 농민의 도망은 청때까지 계속된 일이며, 언제나 심각한 사회 불안요소로 알려져 왔다. 당나라 초기에는 특히 수당교체기에 대량으로 발생한 농민의 농지 이탈과 미파악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 초기의 황제들은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 결과 당고조 시절에는 200만 전후였던 파악 호수는 정관지치로 빛나는 당태종 시대를 거치면서 350만까지, 당고종~측천무후 시기를 거치며 600만까지, 당현종 중엽인 천보 연간에는 드디어 수문제 시절을 뛰어넘는 900만에 달하는 호수를 확보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파악 호수는 늘어났지만 도호 문제는 계속되었고 관롱 귀족들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한 당태종 후반기부터 문제는 심각해졌다. 당고종측천무후를 내세워 귀족들을 억제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측천무후 자신도 황제에까지 오르면서 지속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귀족들을 억눌렀지만, 황제에 오른 후에는 대대적인 불사를 위한 조세, 요역을 증가시켰고 이는 대규모 도호가 계속 존재하는 큰 원인이 된다. 과장이 제법 있겠지만, 진자양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검남과 산동 지역에서는 10명중 4,5명, 위사립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호구의 절반이 도망가 세금까지 격감했다고 한다. 이후 황제에 오른 당현종은 우문융을 기용하고 대대적인 괄호(括戶) 정책을 수행하여 한번에 80여만 명에 달하는 객호(客戶, 호적에 올라 있던 지역에서 이탈해 다른 지역에 가서 마치 거기 살던 사람인양 살던 자들. 그래서 손님 객(客))를 호적에 올리는 등 도호를 최대한 억제하고자 노력했으나, 파악 호수가 최대에 달했던 754년에 파악 호수 920만이라는 기록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전>(通典)에서는 최소 350만 호 이상이 객호 상태로 존재한다고 추정하고 있다.(통전에서 파악하고 있는 이 시기 당의 총 호구수는 1300~1400만이다.) 측천무후 시절에 문제였던 사원은 억제되었지만 귀족층이 다시 부활했고, 나라가 안정화되고 부유해지면서 서민지주층까지 급성장하면서 장원제가 확대되고 정남(丁男)들은 숨거나 장원에 소작농으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의 호적을 보면 호적상 남:녀의 성비는 천보 연간을 기점으로 1:1.2에서 1:3으로 변해, 남자의 비율이 급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민지주층의 등장과 팽창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호족층으로 등장하여 귀족화, 관료화된 구지주층에 위기감을 심어주었고 신분과 가문을 더더욱 강하게 따지게 되면서 서민지주층과 충돌하다가 당송교체기에 서민지주층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사회발전을 이루게 되지만, 어쨌든 서민지주층이나 귀족, 호족 출신의 구지주층이나 어쨌든 소농민 중심의 촌락공동체, 즉 균전제-조용조-부병제를 구성하는 촌락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주층의 세력 확대, 소농민층에 지워진 과도한 부담 등으로 인해 부병제의 핵심인 정남들은 차츰 줄어들었고, 이는 곧 부병제 자체의 파탄을 가져왔다.

2.4. 부병제의 유지 노력과 붕괴

부병제가 토지겸병과 부병들에게 지워진 과도한 부담, 길어진 전쟁으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 당대를 살아가는 황제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시기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황제들, 당고종, 측천무후, 당현종은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5] 이는 물론 부병제가 곧 균전제에 속해 있는 것이며, 균전제는 조용조로 대표되는 수취제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즉, 균전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부병제로 대표되는 당의 통치체계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당고종은 구분전과 영업전의 판매 자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즉 토지거래 안하면 지주층이 땅 함부로 못 늘릴 것이다는 것. 그리고 측천무후를 황후로 맞이하면서 그 과정에서 당시의 최대 지주계층인 관롱 귀족들을 정계에서 억눌러 그 세를 죽여 놓았다. 몸 상태가 심히 안좋았던 당고종에게 뛰어난 정치력에 출신계층이 낮았던 측천무후는 이상적인 정치 파트너였다.

측천무후는 혹리들을 대거 기용해 공포정치를 펼첬고, 당고종 시대에 한번 기가 꺾인 관롱귀족들은 이에 대향하지 못했다. 또한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당 황실 세력들의 두 차례에 걸친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해 억제하였다. 즉, 서족층을 우군으로 삼고 문벌귀족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해 토지겸병도 억제한 것.

당현종은 대대적인 괄호 정책, 즉 도망치고 숨어든 농민들을 파악하고, 이들을 호적에 재등록시키는 정책을 수행했다. 우문융이 재상직까지 올라간 것도 한번에 80만명에 달하는 도호들을 재등록시키는 성과를 올렸기 때문. 또한 부병제 체제 하에서 부병들이 지는 부담을 줄여서, 20세에서 60세까지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50세까지로 감축하였다. 또한 괄호 정책의 원칙인 원래 호적이 올라 있던 지역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도 그만두고 숨어 살던 지역의 호적에 다시 올리는 것을 허가하였다. 적극적인 괄호 정책과 부병들의 부담 완화를 통해 균전제-부병제 유지를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귀족들에게도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불교 사원들을 압박해 그들이 보유한 토지와 농민들을 내어 놓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결국 실패했다. 그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쟁이 많았다는 것이다. 전쟁 동원은 부병들이 지는 최대의 부담으로, 특히 당고종 이후 시대에는 몇 년씩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예사였다. 이는 저 황제들의 탓도 있어서, 당고종은 항목만 봐도 알 수 있듯 호전적인 황제였고, 측천무후 시기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사해를 삼킬 뜻이 있었다고 평해지는 당현종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최대 3년, 짧게는 1년 단위로도 교체되곤 했던 변경 방위 임무는 국익이라는 명분 하에 무기한 연장되기도 하였고, 이는 병사로 복무하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를 낳았고, 노비를 대신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부병의 위상이 추락해, 당현종 시기를 전후로는 수도로 상번한 부병을 일컫는 시관(侍官)이라는 단어를 상대를 매도하고 모욕하는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거기다, 측천무후시기에는 당시의 문벌귀족들은 때려잡았지만 서민지주층, 즉 서족층이 성장했고 불교 사원이 측천무후의 후원을 받으며 급격히 그 수를 늘려가 이들이 측천무후 말기쯤 되면 그 세가 매우 강력해진다. 이들도 토지겸병과 도호 발생의 주 원인이었던 만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 당현종은 초기에는 균형을 잡으며 적절히 억제했지만 집권 중기가 넘어가면서 정책 수행의 의지가 부족해졌다. 그 결과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마지막 시도인 확기(彍騎)도 만족스러운 효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장정건아제를 실시하면서 당 후기의 군제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이로인한 군사적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당현종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한다. 군진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번진(藩鎭)과 절도사가 등장하게 되어 안사의 난, 오대십국시대로 이어진다.

3. 평가

부병제로 대표되는 왕조 전반기의 군제는 수많은 군사적 성공을 가져온, 매우 성공적이고 강력한 체제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결국 당 왕조의 전성기에 무너지게 된다. 이는 이 체제의 장단점을 살피면 짐작이 가능하다.

부병제로 대표되는 당 왕조 전기 군제의 최대 장점은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지닌 대규모 병력을 저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이 절충부 소속 병사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토지와 면세였는데, 수당교체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심지이자 절충부가 집중된 장안, 낙양, 태원에도 토지는 많이 남아돌았기에 사실상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은 조세의 면제 뿐이었다. 그 결과, 당은 대규모 군대 동원과 경작지 확대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질적 저하를 대비하여 농한기에는 각각의 절충부에서 훈련하게끔 하고, 포상체계를 철저하게 구축했다. 즉 공을 세우면 바로 출세가 가능하게끔 하여(일정한 공을 세우면 바로 품계를 내려주고 하급 관리가 될 수 있게끔 했다.) 출세를 위해 스스로 훈련하게 한 것. 여기에 더해, 군정과 군령을 철저하게 분리시킴으로써 반란의 위험을 낮추었다. 그러면서도 지방관에게서 군사력을 박탈하여 지방 할거세력의 발생 가능성을 감소시켰고 군령과 군정을 분리시켜 군부의 반란도 억제했다. 즉,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정한 질을 갖춘, 대규모 병력을 저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으면서도, 그 군대가 반란세력이 되는 것은 최소화했다는 장점을 지닌 셈. 이는 <신당서>를 집필한 북송의 학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반면, 대규모 자영농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농민층의 분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절충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감소하고 질적으로도 저하된다. 여기에,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였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에게 배부할 토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거기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동원 횟수와 기간이 길어지면 농업에 종사할 수 없는 부병들이 경제적 기반을 잃고 몰락하기 때문에 전쟁은 단기전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전쟁이 너무 없으면 포상 체계를 매개로 한 자체적인 질적 수준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전쟁을 너무 안할 수도 없다.

즉, 국가는 귀족,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장기간의 전쟁은 피하면서 소속 부병들의 몰락을 막고 지속적으로 토지를 확보해 이를 나누어 주며, 병사들의 훈련도를 계속 유지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계속해야 부병제를 이상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병농일치에 실패한다면? 부병제는 그대로 무너진다.

이러한 부병 체제는 고전 동북아시아(중국, 한국, 일본, 월남)에서 오랫동안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되어 후세에도 명나라위소제고려2군 6위, 조선오위와 같이 여러차례 이와 비슷한 병농일치적 군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군민일체 병제의 한계로 무너지게 되는 역사적 반복을 되풀이했다.

이와 같이 부병제는 이론적으로는 얼핏 문제가 없어 보이는 정책이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부병제의 기본 전제 자체가 "장기전의 부재"라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전제를 깔고 들어가 사실상 전근대 국가들의 전반적인 특성과는 완전히 괴리가 있다는 점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시기의 왕조들에게는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가 군주의 권위를 드높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필요악으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분위기 하에 부병제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기만 한 제도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가령 당나라보다 훨씬 이후의 근세 왕조인 조선 같은 경우만 해도 아예 "한 나라의 국왕 또한 사대부의 일원이다"라는 명제를 명문화 해놓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사례였는데 그런 조선조차도 후금의 건국으로 군세가 역전되기 전까지는 틈만 나면 여진족 정벌에 나설 정도였으니 그보다 이전 시기에 존재했거나 혹은 비교적 호전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왕조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4. 같이보기


[1] 출처 : miraen 세계사 중.[2] 정식 이름은 둘 다 위(魏)인데 선비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인 위를 북위, 이후에 위나라가 분열되자 서위와 동위라고 나눠 부른다.[3] 서위와 대립하던 동위의 실력자. 훗날 북제를 건국한다.[4] 이때의 반란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한 문벌귀족들 간 세력 다툼으로 여겨진다. 문벌귀족을 구성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문벌귀족에 약간이나마 나와있다.[5] 당중종, 당예종은 그런 통치력 자체를 발휘할 시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던 황제들이었다. 이들이 어떤 황제들이었는가는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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