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切韻
1. 개요
601년 수나라의 육법언(陸法言)이 편찬한 운서.2. 상세
중국에서 운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서진(西晉)시대부터였으나, 당대의 운서들은 통일되지 못하고 문제가 많았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육법언은 여러 운학자들과 함께 올바른 압운을 위해 새로운 운서를 편찬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절운이다.음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많으나 일반적으로 장안음이 근거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절운계 운서는 수나라-당나라 당시의 음가를 반영하였고, 사실상 후대의 한자음은 이런 절운계 운서의 음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중고음 연구의 핵심 사료로 이용된다.
책 전체가 현전하지 않아 자세한 구조는 파악할 수 없으나 남아 있는 서문과 다른 절운계 운서를 살펴보면 193운으로 나누었다고 추정된다. 사용된 음가는 장안음설이나 낙양음설 등이 있고 일부에서는 고금음을 정리한 가공음이란 설도 있다.
3. 절운계 운서
절운은 후대의 운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후대에 오류를 수정하거나 글자를 추가하는 등 수없이 많은 개정판이 나왔다. 이런 덕분에 절운 자체는 현전하지 않지만, 현전하는 개정판들을 바탕으로 학자들은 절운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절운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운서를 '절운계 운서'라고 부른다. 이후 수많은 운서가 나오지만 집운에 이르기까지는 사실상 절운의 증보판에 가까웠다.절운계 운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왕인구(王仁昫) - 간류보결절운(刊謬補缺切韻)
- 손면(孫愐) - 당운(唐韻)
- 진팽년(陳彭年) - 광운(廣韻)
줄여서 왕운(王韻)이라고 한다. 현전하는 필사본은 총 세 개인데, 특히 마지막으로 발견된 세 번째 필사본은 완본이라서 가치가 매우 높다. 이 필사본은 王三이라고 많이 부른다.
해당 문서 참조.
4. 서문
옛날 개황(581-9) 초에, 劉臻·顏之推·盧思道·魏彦淵·李若·蕭該·辛德源·薛道衡 등 8명이서 나, 육법언(陸法言)의 집에 찾아와 묵었다. 밤이 깊어 술자리도 무르익으니, 어느새 음운에 대해 토론하기에 이른다. 이는 고금의 음운과 성조가 이미 각기 달라졌는데, 학자들마다 취하고 버림 또한 다른 연유이다. 강동의 呉·楚 지방은 소리가 가볍고 얕아졌고, 하북의 燕·趙 지방은 탁해졌으며, 서북의 秦·隴 지방은 거성을 입성처럼 읽고, 梁·益 지방은 평성을 거성처럼 읽는다. 또 支章移反와 脂旨夷反, 魚語居反와 虞語倶反, 先蘇前反과 仙相然反, 尤雨求反와 侯胡溝反가 각각 같은 운으로 합쳐졌다.글의 길을 넓히고자 한다면 맑고 탁함에 있어 통용할 수 있으나, 만약 음운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가볍고 무거움에 다름이 있어야 한다. 呂靜의 《韻集》, 夏侯該의 《韻略》, 陽休之의 《韻略》, 李季節의 《音譜》, 杜臺卿의 《韻略》 등의 책은 서로 간에 내용이 어긋나기도 하며, 강동에서 운을 취한 것이 하북과 또 다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북의 음운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고, 고금을 통틀어 통하는 운과 그렇지 않은 운을 따져, 더 정제되고 정확한 것을 취하는 반면 투박하고 느슨한 것을 버리고자 하였다. 이를 결정하는 데는 顏外史와 蕭國子가 많이 기여하였다. 魏著作이 내게 말하기를, '여태까지 난제에 대해 토론하며 의심스러운 점을 다 풀었으니, 우리가 논한 바를 글로 적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 몇 사람이 정한 대로 정해지는 것이지.' 나는 곧바로 촛불 아래 붓을 들고, 대강 요약하여 적었다. 나중에 너른 탐문과 남다른 변증을 거쳐 더욱 빼어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하였으나 다른 학문도 익히고 박봉의 관직에도 종사하다 보니, 십수 년간 자료를 고치고 모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처음 입었던 관복을 물리고, 개인적으로 제자들한테 빼어난 글을 지으려면 음운을 알아야 함을 가르친다. 홀로 산야에 살며 교우관계도 끊고, 의문이 가는 점이 있어도 질문할 곳도 없다. 죽은 자는 생사의 길이 갈리어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수밖에 없고, 산 자는 귀천이 달라져 관계를 끊겠다는 뜻을 전했다. 결국 여러 학자들의 운서, 고금의 자서, 그리고 이전에 기록한 것들을 취하여 '절운' 다섯 권에 담았으니, 분석과 분별을 매우 세밀한 구석까지 하였다.
그러나 굳이 옥을 알아봐주지 않음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1], 천금을 걸 만큼 빼어나지도 않으며[2], '명산에 보관하겠다'라는 사마천의 말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고, '가지고 장독이나 덮겠다.'는 양웅의 말에는 탄식한다. 어찌 이 책을 감히 뭇 사람들에게 널리 보이겠으며, 마당 밖으로 들고 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는 본인의 독단적인 고집이 아니라 옛 현자들의 염원을 적은 바이다. 때는 신유년, 수나라 인수 원년(60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