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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21:08:06

고개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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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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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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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顧愷之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화가. 자는 장강(長康). 양주 진릉군(晉陵郡) 무석현(無錫縣) 출신. 상서좌승 고열지의 아들. 인물화, 산수화, 불화 등 다양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어 "화성(畵聖)"이라고도 불렸다. 이 그림 실력 덕에 환온, 사안 등 당대 여러 권력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고개지는 일찍이 박학하고 재기가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재주가 많아 재절(才絕), 그림이 출중하여 화절(畫絕), 재치가 뛰어나 치절(癡絕), 위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며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여기에 더해서 고개지 스스로도 자부심이 높았는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과하게 자랑했다고 한다. 《쟁부》(箏賦)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나의 부(賦)는 혜강의 거문고와 비견될 만하니, 이를 듣고도 보답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이후에 서로를 잊을 것이나, 그 깊이를 아는 자 역시 마땅히 높고 대단하다 평가하여 귀하게 볼 것이다."
라 이르렀다고 한다.

대사마 환온의 부름을 받아 그의 참군을 지냈는데, 환온은 고개지를 마음에 들어 하여 매우 친근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환온이 사망하자, 고개지는 그 묘지 앞에서
"산이 무너지고 드넓은 바다가 마르니, 물고기와 새는 장차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가!"
라는 부(賦)를 지어 읊었다. 이때 혹자가 물었다.
"경은 환공(桓公)에 심히 의지했고, 그의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에 곡을 한 것이라 보아도 되겠소?"
고개지가 긍정하며 답했다.
"소리는 천둥이 산을 깨뜨리는 것과 같고, 눈물은 강을 기울여 바다에 흘러 보내는 것과 같소."
이후 고개지는 형주자사 은중감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은중감은 환온과 마찬가지로 고개지를 귀하게 대접하였고, 당시 형주에서 유유자적하던 남군공 환현 또한 고개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번은 고개지가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 답사를 떠나면서 자신이 아끼는 그림 몇 점을 궤짝에 넣고, 그것을 환현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이때 환현은 고개지의 그림을 전부 훔친 뒤, 나중에 고개지가 돌아왔을 때 빈 궤짝을 내밀며 신선이 훔쳐갔다는 핑계를 대니, 고개지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의희 원년(405년) 3월, 유유가 역적 환현을 무찌르고 안제 사마덕종을 복위시켰다. 유유는 고개지가 환씨 집안과 친하게 지냈던 경력이 있음에도 그를 불러 산기상시로 삼았다. 이후 고개지는 62세의 나이로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남긴 문집으로는 《계몽기(啟矇記)》 등이 있고, 이 외에도 〈논화(論畵)>,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 〈위진승류화찬(魏晉勝流畵讚)> 등 그림에 대해 논한 글들을 남겨 세상에 알렸다.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