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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8 09:57:40

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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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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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ece5b6>
염위 초대 황제
염민 | 冉閔
출생 미상
위치 미상
즉위 350년
후조 위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사망 352년 6월 1일 (향년 미상)
전연 용성
(現 랴오닝성 차오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초대 황제
350년 ~ 3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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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ece5b6> 성씨 석(石) / 이(李) / 염(冉)
민(閔)
부모 부황 열조 고황제
모후 왕씨
형제자매 미상
배우자 황후 동씨
자녀 태자 염지 포함 6남
영증(永曾)
연호 영흥(永興, 352)
작호 미상 → 황제(皇帝)
묘호 없음
시호 무도천왕(武悼天王)[1] / 평황제(平皇帝)[2]
}}}}}}}}} ||
1. 개요2. 생애3. 군사적 능력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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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5호 16국시대 초기 염위(冉魏)의 유일한 황제.

한족 출신으로 염량(冉良)의 아들이었다. 는 영증(永曾)이었으며, 아명은 극노(棘奴)였다. 다른 기록에는 이름이 염민(染閔)으로 적혀 있다.

2. 생애

311년석륵이 걸활군을 물리치며, 진우를 점령했을 때 포로로 잡은 장령들 중 염첨(염량)이란 자를 의붓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염첨의 아들 염민은 석륵이 6촌동생인 석호에게 주어 양손으로 삼게 했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후조가 성립된 후 무장으로 각지에서 활약했으며 338년, 전연(前燕) 정벌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349년, 관중에서 일어난 동궁 수비군 100,000명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석민을 비롯한 제장이 출진해 있는 동안 태조 무황제 석호가 붕어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 중이던 석민 등은 하내 지역에서 석준(石遵)과 조우하여 제위를 찬탈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석준은 반정이 성공하면 석민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한 뒤 반정을 일으켜 석세를 폐위했다. 그러나 석준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황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석민은 아무 반항이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신제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확립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 그러나 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황제로 옹립했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의 인근만 유지했다. 옛 수도 양국에서는 석지(石祗)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했다. 이때 황제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분노한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 학살을 단행했다.[3] 특히 갈족은 태조 무황제 석호의 자손을 비롯해 남녀노소 200,000명이 죽어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으며, 그중에는 외모가 갈족과 비슷하여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있었다.

350년 정월, 석민은 국호를 위(魏)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으며, 윤정월에는 마침내 연금된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했으며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바꾸었다.[4]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했으며, 이후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했다.[5]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선비 모용부의 전연과 한족의 동진이 침입해 오고, 저족(氐族)의 부홍(苻洪, 포홍)이 전진(前秦)을 건국했다.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였던 양국을 포위했다.

하지만 351년에 전연과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이 구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했다.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성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했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했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염민은 양국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염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었고 보급이 부족하여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전했다. 이를 틈타 전연은 명재상이자 명장이었던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민을 공격했으며 염민은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6] 동북방의 용성으로 호송된 염민은 참수당했고,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慕容俊)은 염민에게 '무도천왕'(武悼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반면 염민의 후손들은 시호를 '평제'(平帝)로 추존했는데,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1년에 중국 허난 성 옌스 시(偃師市)에서 염민의 후손 염화의 묘비인 <염화묘지>(染華墓誌)[7]가 발견되어 염민의 시호가 전해지게 되었다.

염민은 이전에 후조를 멸하고 갈족에게 성적으로 학대받고 있었던 한족 소녀 50,000여 명을 구했는데, 이들은 양국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염위가 패망할 때 도망치지 못한채 그대로 전연군의 포로로 잡혀 선비족들의 성노예가 되어 버렸다.

염민이 처형되자 태자 염지(冉智)가 업성에서 농성했다. 염지는 동진(東晉)에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유명한 전국옥새를 동진에 보냈지만 구원군은 제때 오지 않았고, 곧 부하의 배반으로 업성이 함락되자 포로가 되었다. 염지마저 354년에 처형당하면서 염위는 완전히 멸망했다.

3. 군사적 능력

염민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용장으로 촉한관우, 북위양대안, 북제곡률광 등과 함께 곧잘 거론된다. 전략적 판단의 부재로 인해 열세인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듭했으며, 초인적인 용력을 보여주었다.

후조의 고조 명황제 석륵이 한족인 염민을 6촌동생인 석호의 양손으로 들일 만큼 어릴 때부터 용맹과 지략이 모두 뛰어났다. 염민은 군량이 부족해지면 근처를 돌며 약탈했는데, 전연의 제2대 황제 모용준은 명장 모용각을 보내서 염민을 상대하도록 했다. 불꽃 튀는 접전 끝에 10차례 싸워서 10번을 모두 염민이 이겼으나[8], 이미 전체적인 상황이 전연으로 많이 기운 터여서 모용각은 숲으로 염민을 유인해 사로잡았다.

4. 평가

염민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염민을
"항우의 전세이고, 한인을 구원해준 개세영웅"
이며,
"고의로 잊어버린, 화하 한족을 종종멸절의 화에서 구해준 중화제일의 민족대영웅이며, 그의 지위는 당연히 악비, 문천상, 원숭환, 사가법 등 정통 민족영웅보다 위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고,
"역사에 염민이 없었다면, 현재 한족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다."
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어려서부터 갈호족의 살부지구를 짊어지고, 적의 군영에서 20여년간 지내면서 계속하여 반항하고, 결국 성공적으로 갈호족의 통치를 무너뜨린 한족의 거군의 영수"
라고 말한다.

반면 염민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를 개돼지만도 못한 '망은부의한 자'로 본다. 폭정으로 분노가 끓고 있었던 한족들을 상대로, 이민족에 대한 무차별적인 인종말살을 하도록 선동하고 집행한 '극단적인 인종주의 도살자"이며, 어려서 이미 갈호화되고, 두 손에 한족의 선혈을 묻힌 '매국노이며 대야심가'라고 보고, 살인을 좋아하며 권력을 농단하는 "고가과인, 참위자"라고 본다. 즉 전조의 유총, 후조의 석호, 전진의 부생, 북하의 혁련발발 같은 류의 오랑캐 폭군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로 본다.

사실 염민이 도호령을 내리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수십만 명의 호갈육이들만이 아니었다. '상을 받기 위하여' 많은 한족도 오살되거나 고살되었다. '도호'로 인하여 일어난 도망 및 전화와 기근으로 다시 수백만 명이 죽었다. 그중에는 한족도 적지 않았다. 이런 '무차별적인 종족 말살'은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그후에 더욱 맹렬하고 피비린내나는 역방향의 종족 보복이 불가피해진다. 염민의 '도호'는 한족을 구원해주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대규모의 종족 말살 보복의 화근을 심었을 뿐이었다. 염민(冉閔): 그는 한족의 대영웅일까?(1) 염민(冉閔): 그는 한족의 대영웅일까?(2)

저 위의 링크에서도 나와있듯, 염민은 딱 두 번 패배했는데, 그 두 번이 다 염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패배였다. 전투에서는 항상 이기지만 전쟁에서 결국 지는 항우형 인물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염민의 정략적인 능력이 너무 떨어졌다. 그 성격 더러운 폭군 석호도 저족의 포홍이나 강족의 요익중을 어떻게든 포용해서 자기 밑에 놨지만 염민은 애시당초 저 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도, 덕망도 없었다. 덕분에 후조의 주요 군벌들이었던 포홍과 요익중은 찬탈 후에 염민의 적이 되고 만다. 요익중은 염위가 세워진 후에도 후조의 석씨들 편을 들었고, 요익중의 도움을 받은 후조의 잔존세력과 싸우다 보니 염위의 국력은 크게 축나고 말았다.

그리고 포홍과는 석호가 살아있을 때부터, 염민이 대놓고 포홍을 싫어해서 이래저래 참소하고 갈구다 보니 사이가 안 좋은 건 당연한 이치였다. 문제는 포홍을 다시 회유할 덕망도 그렇다고 대놓고 제거할 실력도 둘 다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이 좋아 황제이지, 염민은 저들과 다름없는 지방정권의 군벌에 불과했다. 저 원수진 군벌들을 군사적인 능력으로 여기저기 토벌하러 다닐 수야 있었지만 안정적인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일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 염민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건 관중에서 일어난 수많은 학살극과 3년을 다 채우지 못한 왕조, 그리고 중원의 또 다른 엄청난 혼란과 자신과 가문의 패가망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조차도 결코 좋다고 말 할 수 없어서 염씨에서 석씨로, 석씨에서 다시 이씨로, 그리고 다시 염씨로 성을 세 번이나 갈면서 자신의 이득에 따라 갈족의 장수로, 그리고 다시 한인들을 대변하는 척 하는 지도자로 계속 다른 포지셔닝을 했을 뿐이었다. 이렇듯, 염위를 세운 그 과정도, 그리고 그 뒤의 결과도 모두 처절한 실패에 불과한 판에 그를 한족의 영웅 운운한다는 건 엄청난 무리수라고 할 수 있다.


[1] 전연의 열조 경소제 모용준이 올린 시호.[2] 염위에서 올린 시호.[3] 석감은 신흥왕 석지를 이용해 강족의 요익중, 저족의 포홍 등을 포섭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석민 토벌을 위한 거병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에 호응한 종실 석성, 석계, 석휘 등은 나이도 어리고, 판단력도 미숙해 노련한 석민에게 제압당했다.[4] 이로 인해 석륵이 칭제한 328년부터 석감이 살해당한 350년까지 고작 23년 만에 후조는 완전히 멸망했다.[5] 전쟁 중 염민의 아들 염윤이 이끄는 호인의 군사들이 염윤을 포박하여 석지에게 항복하는 일도 있었다. 염윤은 큰 기둥에서 온몸이 해체되는 끔찍한 처형을 당했다.[6] 이때 염민은 '주룡'(硃龍)이라는 명마를 타고 있었는데, 하필 이 말이 후퇴하던 도중에 죽는 바람에 염민은 낙마하여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7] 중국어 위키백과 참고.[8] 심지어 이때 염민이 싸운 전연의 군대는 선비족들로 이루어진 중무장 기병이 주력이었다! 보통 기병이 그것도 중무장 기병이 보병과 싸우면 대부분은 기병이 유리한데, 염민은 보병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어, 사납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선비족의 중무장 기병 부대를 상대로 10번이나 이겼으니, 염민의 군사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다만 백등산 포위전의 한고조 유방이나 모히 전투의 헝가리군처럼 유목기병 특유의 위장후퇴전술에 당했을뿐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