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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0:43:03

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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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4대 황제
석세 | 石世
출생 339년
후조 위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사망 349년 (향년 11세)
후조 업성 황궁 태무전전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4대 황제
349년 5월 26일 ~ 349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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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세(世)
부모 부왕 태조
모후 안정공주
형제자매 13남 중 13남
배우자 유씨
원안(元安)
작호 초왕(譙王)
}}}}}}}}} ||
1. 개요2. 생애3.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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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4대 황제.

폐위되었기에 묘호와 시호가 없으며 폐위된 후에 초왕(譙王)이라는 작위에 봉해졌다.

2. 생애

건무 5년(339년), 천왕 석호와 안정공주 유씨(劉氏)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나 제공(齊公)에 봉해졌다.

건무 14년(348년) 9월, 천왕 석호가 천왕태자 석선(石宣)을 주살하면서 후계 자리가 비게 되었다. 석호는 군신들을 모아놓고 누구를 태자로 삼을 것인가 의논하였는데, 석호의 장성한 아들들인 연공 석빈과 팽성공 석준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때 석세의 생모 유씨와 친밀한 사이인 융소장군 장시(張豺)가 석빈은 모친이 창녀였던지라 태자로 삼기에 비천하고, 석준은 폐태자 석수와 친동생 사이라 믿을 수 없다며 모두 반대하였다. 그리고는 전조 황족 핏줄을 가진 유씨의 아들 석세야말로 태자에 알맞은 인물이라 유세하였다. 잠시 고민하던 석호는 다시 동당(東堂)에서 군신들을 모으고 말했다.
"나는 3석의 순수한 재로 내 뱃속에 더러운 것들을 씻겨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못난 아들들만 낳아 20세만 넘기면 나를 죽이려 들었다. 지금 석세는 10살이고, 그가 20살이 될 때 쯤이면 나는 이미 늙었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이에 태위 장거(張擧)와 사공 이농도 석호의 뜻이 정해졌음을 헤아리고, 칙서를 받들어 공경들에게 석세를 태자로 삼으라는 상서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 대사농 조막(曹莫)은 석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반대했으나, 석호가 친히 조막을 불러 독대하고 그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석호는 석세를 태자로 세우고, 그 어머니 유씨를 황후로 삼은 후, 태상 조유(條攸)와 광록훈 두하(杜嘏)를 각각 태부, 소부로 임명해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태녕 원년(349년) 4월, 무제 석호는 황위에 오른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병이 위독해졌다. 이에 석호는 연왕 석빈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고, 융소장군 장시를 진위대장군,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 나란히 석세를 보정하게 하였다. 하지만 석빈이 보정을 맡는 것이 석세에게 이롭지 못할까 생각하던 유 황후는 장시와 더불어 석빈 제거를 모의하고, 석호가 병으로 정신없는 틈을 이용해 석빈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유 황후는 조서를 사칭해 장시를 태보,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 녹상서사로 삼고, 그에게 곽광의 보좌를 다하게 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4월 23일[1], 무제 석호가 붕어하고 태자 석세가 11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태후에 오른 유씨는 장시를 승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장시가 이를 사양하면서 팽성왕 석준과 의양왕 석감을 좌, 우승상으로 임명해 그들을 위무하라는 조언을 하자 그대로 따랐다.

태보 장시는 태부 장거와 함께 이농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본디 이농과 친한 사이인 장거가 이를 누설하여 이농은 광종(廣宗)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걸활군 잔당 수만 호를 모아 상백(上白)에서 거병하였다. 이에 유 태후는 장거에게 궁중의 정예 숙위병을 주어 여러 군을 이끌고 이농을 포위케 하였다. 장시는 용양장군 장리(張離)를 진군대장군, 감중외제군사(監中外諸軍事), 사예교위에 임명하여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이농의 난)

태녕 원년(349년) 5월, 하내(河內)를 지나던 팽성왕 석준은 때마침 고력(高力)의 난 진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던 정서장군 요익중, 거기장군 부홍, 안서장군 유녕(劉寧), 무흥공 석민의 군대와 이성(李城)에서 우연히 만났다. 요익중 등이 석준을 만나 업(鄴)을 습격하자 주장하자, 제위를 찬탈할 마음이 생긴 석준은 각지에 격문을 뿌리고 이성에서 거병하여 석민을 선봉으로 세워 업을 향해 진격하였다. 석준의 격문을 읽은 장시는 크게 두려워 즉시 이농을 포위하던 군대를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석준의 반란에 낙주(洛州)자사 유국(劉國)도 합류하면서 석준의 군대가 업성 남쪽 탕음(蕩陰)에 진을 쳤을 때는 그 수가 90,000명에 달하였다. 이때 업성 내의 무제 석호의 옛 신하들과 갈족 병사들이 장시는 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며 성벽을 넘어 석준군과 합류하니, 장시는 도망자들을 보이는대로 참수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장시의 부관인 장리마저 용등군(龍騰) 2,000여 명을 인솔하여 관문을 부수고 석준을 영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 태후는 두려운 나머지 장시를 불러 그의 앞에서 슬피 곡하면서 석준에게 요직을 내어주어 그에게 권력을 넘기자 권하였다. 장시 역시 경황이 없어 태후의 말에 순종하였고, 이내 조서를 내려 석준을 승상, 영 대사마(領大司馬), 대도독, 중외제군사, 녹상서사에 임명하였으며, 황월(黃鉞)과 9석도 더하여 주었다.(석준의 난)

석준이 안양정(安陽亭)에 이르자 장시는 스스로 나와서 석준을 영접하였으나, 석준은 좌우에 명해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이튿날, 석준과 그 병사들은 번뜩이는 갑옷을 입은 채로 업성에 무난히 입성하였고, 봉양문(鳳陽門)으로 황궁에 들어가 태무전(太武殿)에 올랐다. 석준은 태무전전 위에서 가슴을 치며 아버지 석호를 위해 애도한 뒤, 동각(東閣)으로 들어갔다.

조정을 장악한 석준이 태보 장시를 평락시(平樂市)에서 처형하고 그 3족은 멸하였다. 이후 석준은 유 태후의 명을 사칭해 황제 석세로 하여금 황위를 양위케 하였다. 이리하여 태무전전에서 석세로부터 선양받아 후조의 황제에 오른 석준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상백에서 거병한 사공 이농의 죄를 사면하였다. 석세는 재위 33일만에 폐위되어 초왕(譙王)에 봉해지고, 유 태후도 태비로 폐출당하였다.

석준이 석세를 초왕에 봉할 때, 식읍 10,000호와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도 함께 하사하였으나, 그저 보여주기용으로 하사한 것이라 얼마 뒤에 석세와 유 태비 모자를 모두 죽였다. 향년 11세.

3. 가계도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