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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 추존 황제 석주갈주 | 石周曷朱 | |
<colbgcolor=#71a6d2>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원황제(元皇帝) |
성 | 석(石) |
휘 | 주갈주(周曷朱) |
생몰 | 3세기 ~ ? |
부황 | 선황(宣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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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갈족 소부락의 수장으로 자는 걸익가(乞翼加)였으며, 선황 석야혁우의 아들이자, 후조의 개창자인 석륵의 부친이었다.2. 생애
생전에 갈족 소부락의 수장이었으나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 부족 사람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 석륵은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과 지력이 있었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 늘 석륵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부락을 감독하고 살피게 하여 사실상 양위를 했으며, 부락에서는 석주갈주를 대신한 석륵을 사랑하며 믿었다고 한다.이외에도 어릴 때 아버지(석구멱)를 잃은 석호를 양자로 키웠기에 일부 사료는 석호를 석륵의 동생이라고 해서 석륵과 석호를 형제로 기술했다. 이후 아들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세종(世宗) 원황제(元皇帝)로 추존되었다.
이외에 석륵보다 나이가 많은 딸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장월(張越)과 결혼했다고 한다.
석주갈주의 부족은 서진 태안 연간[1]에 기근이 들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 생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인 석륵이 떠돌아 다니다가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에 노예로 팔리면서 아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1] 302년 12월~304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