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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06:36:35

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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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5대 황제
석준 | 石遵
출생 불명
후조 위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사망 349년 11월
후조 업성 황궁 곤화전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5대 황제
349년 6월 17일 ~ 34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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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준(遵)
부모 부왕 태조
모후 태후 정씨
형제자매 13남 중 6남
배우자 황후 장씨
대지(大祗)
작위 제왕(齊王) → 팽성왕(彭城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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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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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5대 황제. 제3대 태조 무황제 석호의 6남으로, 제위에 올랐을 때는 적자 중에서 최연장자였다.

2. 생애

건평 4년(333년) 8월, 중산왕 석호가 승상, 위왕(魏王)에 올라 후조의 정권을 장악하자, 석준은 다른 석호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왕위에 올라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건무 3년(337년) 정월, 석호가 천왕을 칭하면서 여러 왕들의 작위를 격하할 때, 석준의 작위도 공작으로 내려갔고 봉지도 팽성공(彭城公)으로 옮겨졌다.

건무 14년(348년) 9월, 장남 석수에 이어 석선(石宣)까지 죽인 석호는 다음 태자를 책봉하기 위해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였다. 장성한 석호의 아들들인 석준과 연공 석빈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융소장군 장시(張豺)가 석빈은 모친이 비천하고, 석준은 전(前) 태자인 석수와 친동생 사이라 둘 모두 불가하다 간하였다. 이에 천왕 석호는 10살 밖에 되지 않은 안정공주 유씨 소생인 석세를 태자로 세웠다.

태녕 원년(349년) 정월, 석호가 마침내 황제를 칭하자, 석준은 여러 황자들과 함께 왕으로 높여져 팽성왕이 되었다.

태녕 원년(349년) 4월, 병이 심해져 앓아누운 무제 석호는 당시 유주(幽州)를 진수하던 석준을 대장군으로 삼아 관우(關右)를 지키라 명하는 동시에 석빈, 장시와 나란히 어린 석세를 보정케 하였다. 석준은 업(鄴)에 이르러 서쪽으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 석호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석빈과 석준을 경계하던 장시와 유 황후가 멋대로 알현을 거부한 뒤 조당(朝堂)에서 칙서를 내려 금군 30,000명을 그에게 배속시키고 얼른 부임지로 떠나게 하였다. 이에 석준은 석호를 만나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업을 떠났다. 석준이 떠나던 그 날, 무제 석호는 병환이 조금 나아져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석준은 아직 오지 않았느냐?"
그러나 신하들은 유 황후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떠난지 오래라고 답하였다. 이에 석호가 한탄하였다.
"만나지 못하다니 한스럽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제 석호의 병은 다시 악화되어 업에서 붕어하였다.

무제 석호의 뒤를 이어 11살 밖에 되지 않은 석세가 즉위하자, 유 태후가 섭정을 시작하였다. 유 태후는 장시를 승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장시가 사양하며 팽성왕 석준을 좌승상으로 삼고 의양왕 석감을 우승상으로 삼아 위로하라 청하니, 유 태후가 이를 따랐다.

한편, 하내(河內)에서 무제 석호의 붕어 소식을 들은 석준은 때마침 고력(高力)의 난 진압 후 귀환하던 정서장군 요익중, 거기장군 포홍, 안서장군 유녕(劉寧), 무흥공 석민의 군대와 이성(李城)에서 우연히 만났다. 석민, 요익중 등이 석준을 만나 유세하였다.
"전하께서는 장성하셨고, 또 현명하시어 선제의 뜻은 분명 전하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장시에게 현혹되어 그 뜻을 그르치고 마셨습니다. 지금 이농이 반란하여 상백(上白)에서 버티고 있어 경사(京師)에 숙위병이 모두 나가있으니, 장시의 죄를 널리 알리고 북을 울려 토벌하다면 창을 거꾸로 들고 문을 열어 전하를 영접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자 석준은 거병을 결심하고, 석민에게
"힘을 다하라! 일이 성사되면 그대를 태자로 삼겠다!"
라 약속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5월, 석준이 각지에 격문을 뿌리고 이성에서 거병하여 석민을 선봉으로 세워 업을 향해 진격하니, 낙주(洛州)자사 유국(劉國)도 이에 동조해 합류하였다. 석준의 격문을 읽은 장시는 크게 두려워 즉시 이농을 포위하던 군대를 거두어 다시 업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석준의 선봉인 염민이 융졸 90,000명으로 업성 남쪽 탕음(蕩陰)에 진을 치자, 무제 석호의 옛 대신들과 갈족 병사들이 장시는 업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며 성벽을 넘어 석준군에 투항하였다. 장시는 도망자들을 보이는대로 참수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장시의 부관인 용양장군 장리(張離)마저 무제 석호가 친히 키운 정예 부대인 용등군(龍騰軍) 2,000여 명을 인솔하여 관문을 부수고 석준을 영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 태후는 두려운 나머지 장시를 불러 그의 앞에서 슬피 곡하면서 석준에게 요직을 내어주어 그에게 권력을 넘기자 권하였다. 장시 역시 경황이 없어 태후의 말에 순종하였고, 이내 조서를 내려 석준을 승상, 영 대사마(領大司馬), 대도독, 중외제군사, 녹상서사에 임명하였으며, 황월(黃鉞)과 9석도 더하여 주었다.(태녕정변)

석준이 안양정(安陽亭)에 이르자 장시는 스스로 나와서 석준을 영접하였으나, 석준은 좌우에 명해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이튿날, 석준과 그 병사들은 번뜩이는 갑옷을 입은 채로 업성에 무난히 입성하였고, 봉양문(鳳陽門)으로 황궁에 들어가 태무전(太武殿)에 올랐다. 석준은 태무전전 위에서 가슴을 치며 아버지 석호를 위해 애도한 뒤, 동각(東閣)으로 들어갔다. 조정을 장악한 석준이 태보 장시를 평락시(平樂市)에서 처형하고 그 3족은 멸하였다. 이후 석준은 유 태후의 명을 사칭해 황제 석세로 하여금 황위를 양위케 하였다.

태무전전에서 석세로부터 선양받아 후조의 황제에 오른 석준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폐제 석세를 초왕(譙王), 유 태후를 태비로 강등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두 모자를 모두 살해하였다. 또, 석준은 생모인 동해태비 정씨를 황태후로 받들었고, 처 장씨를 황후로 삼았다. 다만, 연왕 석빈의 아들인 석연(石衍)을 황태자로 세움으로써 당초 하내에서 석민과 했던 약속을 어겼다. 의양왕 석감은 시중•태부, 패왕 석충(石沖)은 태보, 낙평왕 석포(石苞)는 대사마, 여음왕 석곤(石琨)은 대장군, 무흥공 석민은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보국대장군에 각각 임명되었다. 상백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사공 이농도 석준의 즉위 소식에 직접 업으로 출두하여 사죄하였고, 석준은 그를 사면시켜 이전의 직위를 돌려주었다. 석준이 즉위한지 3일째 되는 날, 업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고, 하늘에서 우레와 함께 사발만한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살해당한 석세의 동복형 패왕 석충(石沖)이 석준 주살을 내걸고 계(薊)에서 50,000명의 병력을 일으켜 남하하면서 연(燕), 조(趙) 일대에 석준을 비판하는 격문을 뿌리니, 그 무리가 상산(常山)에 이르렀을 때 즈음에 어느새 100,000명에 달해 있었다. 석충이 군대를 원향(苑鄉)에 주둔시키자, 석준은 지금 돌아가면 사면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그를 타일렀다. 이에 석충도 마음이 꺾여 좌우를 향해 말하였다.
"동생은 이미 죽었고,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거늘, 어찌 다시 형제끼리 다툴 수 있겠는가! 나는 돌아가겠다."
이때 석충의 장수 진섬(陳暹)이 진언하였다.
"팽성왕이 황위를 찬탈하고 윗사람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입니다. 왕께서 비록 북으로 깃발을 돌리신다 한들, 신은 남쪽으로 나아가 경사를 평정하고 팽성왕을 사로잡은 후에 대가(大駕)로 영접하겠습니다."
그러자 석충은 다시 석준과 맞서기로 마음을 바꿨다. 석준은 왕탁(王擢)을 사신으로 파견해 다시 서신을 전달함으로써 석충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석충은 듣지 않았다.

석준은 하는 수 없이 석민에게 황월(黃鉞), 금징(金鉦)을 하사하여 이농 등과 정예병 100,000여 명을 이끌고 석충을 토벌케 하였다. 석민은 진군하여 평극(平棘)에서 석충을 대파하고 원지(元氏)에서 석충을 사로잡아 그를 자결토록 하였다. 그리고 석충의 병사 30,000여 명도 구덩이 묻어 죽였다.(석충의 난)

석충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석민이 반정 당시의 공을 인정받아 도독옹진2주제군사, 옹주자사를 지내고 있던 포홍을 모함하였다. 석준은 석민의 말만 듣고 포홍을 곧바로 면직시켰고, 포홍은 이러한 처우에 분노하여 방두(枋頭)로 돌아가 동진에 투항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6월, 무제 석호를 현원릉(顯原陵)에 매장하고, 묘호를 '태조(太祖)', 시호를 '무황제(武皇帝)'라 하였다.이때 후조의 양주(揚州)자사 왕협(王浹)이 회남(淮南)을 들어 동진에 귀순하자, 동진 조정에서는 서중랑장 진규(陳逵)를 파견해 수춘성을 접수하게 하였다. 동진의 정북장군 저부가 후조의 정세가 혼란을 이용해 북벌하고자 조정에 상표하니, 동진 조정에서도 이를 허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7월, 저부가 병력 30,000명을 거느리고 팽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동진군이 하비(下邳)에 이를 때까지 항복해오는 후조의 백성이 하루에 1,000여 명에 달하였는데, 노(魯)의 백성 500여 호도 동진군에 호응하여 거병하였다. 이에 저부는 장수 왕감(王龕), 이매(李邁)에게 정예병 3,000명을 주어 거병한 백성들을 구원케 하였다. 석준은 이농을 남토대도독으로 삼아 왕감과 이매를 치게 하였고, 이농은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대피(代陂)에서 이들을 전멸시켜 몰살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8월, 왕감의 패배로 더이상 진군할 수 없다 판단한 저부는 물러나 광릉(廣陵)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저부의 북벌이 실패했다는 소식에 수춘을 접수했던 서중랑장 진규(陳逵)는 성에 비축해둔 물자를 전부 불태우고, 성곽을 부순 다음 후조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철수하였다. 이때 후조의 혼란으로 발생한 화북 지방의 유민 20만 명이 황하를 건너 동진에 귀부하고자 구원을 청하였는데, 이미 저부의 군대는 돌아갔고 동진의 위세도 한풀 꺾이면서 여기에 부응하지 못 하였다. 결국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유민 무리들은 모용황 등 이민족 무리의 공격을 받고 약탈당하면서 전부 사망하였다.(저부의 북벌)

태녕 원년(349년) 9월, 장안(長安)을 지키던 낙평왕 석포가 업을 습격할 음모를 꾸미자, 좌장사 석광(石光)과 사마 조요(曹曜)가 굳게 간하였다. 이에 석포가 분노하여 석광, 조요를 비롯한 100여 명을 주살해버리니, 옹주의 호족들은 반란이 실패할 것이 뻔하다 생각하고 모두 동진에 투항하였다. 동진의 양주(梁州)자사 사마훈은 이 기세를 타고 낙곡(駱谷)을 통해 북벌하여 후조의 여러 보루를 함락시켰다. 사마훈이 군대를 장안성에서 200리 떨어진 현구(懸鉤)에 주둔시킨 뒤, 치중 유환(劉煥)을 보내 장안을 압박하였다. 유환이 후조의 경조(京兆)태수 유수리(劉秀離)를 참수하고 하성(賀城)을 공략하니, 삼보의 호족들이 모두 각자 군의 태수나 현령을 죽이면서 동진군에 호응하였다. 이로써 사마훈에게 넘어간 보루는 30여 개였고, 그 무리는 50,000명에 달하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석포는 업 습격 계획을 잠정 중단하고, 장수 마추(麻秋)와 요국(姚國) 등을 보내 사마훈을 막았다. 석준은 석포가 반란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채고, 장안을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표기장군 왕랑(王朗)에게 정예병 20,000명을 주어 장안으로 보냈다. 이윽고 장안에 도착한 왕랑은 석포를 붙잡아 업으로 압송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10월, 석준이 왕랑을 보낸 진짜 목적은 석포를 사로잡기 위함이었지만, 이를 모르던 사마훈은 왕랑의 구원군이 온다는 보고에 자신의 군사가 적음이 두려워 진군하지 않았다. 이후 사마훈은 장안 공략을 포기하고 완성(宛城)을 공격해 후조의 남양(南陽)태수 원경(袁景)을 죽이고 동진으로 귀환하였다.(사마훈의 북벌) 이때 무제 석호 시기에 후조에 복종했던 구지양초가 기현(冀縣)을 기습하고 서성(西城)을 무너뜨렸다.(기 전투)

당초 석민은 자신의 공적을 뽐내며 조정을 장악하고 싶어하였으나, 석준이 방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그래도 약속받은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해 크게 실망했던 석민은 석준을 향한 원망의 감정이 점점 커져만 갔다. 석민은 날래고 용맹하였으며, 수많은 전공을 세워 갈족, 한족 할 것 없이 후조의 숙장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 하였다. 또, 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되어 궁중의 병권을 장악하고 전중의 장수와 병사들을 지휘하였다. 석민은 그들을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석준에게 그들 전원을 전중원외장군(殿中員外將軍), 관외후(關外侯)로 삼고, 궁녀를 하사해달라 상주하며 자신의 은덕을 보이려 하였다. 하지만 석민의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석준은 석민이 올린 명단을 전부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궁중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분노하여 석준을 원망하였다. 중서령 맹준(孟準), 좌위장군 왕난(王鸞)은 병사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석준에게 석민의 병권을 빼앗으라 권하였다. 이를 들은 석민이 매우 한스러워 하는 안색을 내비치자, 맹진과 왕난은 곧바로 다시 석준을 찾아가 아예 석민의 주살을 주장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11월, 석준이 고민 끝에 의양왕 석감, 낙평왕 석포, 여음왕 석곤, 회남왕 석소(石昭) 등을 불러 태후 정씨와 더불어 석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해 의논하였다. 황제 석준이 먼저 말하였다.
"석민의 신하답지 못한 행적이 점차 현저해지고 있어 지금 그를 주살하려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의양왕 석감 등은 모두 입을 모아 마땅히 석민을 주살해야 한다며 찬성했지만, 태후 정씨만이 반대하며 말하였다.
"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만약 극노(棘奴: 석민의 아명)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약간 교만하고 방종하여도 용서하고 함부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어머니인 태후 정씨가 이렇게 말하자, 석준은 석민의 주살을 취소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이때 석감은 밖으로 나와 환관 양환(楊環)을 보내 석민에게 회의 내용을 일러바치게 하였다.

양환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전달받은 석민은 사공 이농과 우위장군 왕기(王基)를 겁박해 석준 폐위를 모의하였다. 이후 석민은 계획을 실행에 옮겨 장수 소언(蘇彦)과 주성(周成)에게 갑사 3,000명을 주고 남대(南臺)에서 석준을 포박하게 하였다. 당시 남대 위에서 황후 장씨와 바둑을 두던 석준은 소언 등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를 포박하자, 주성을 향해 물었다.
"반란한 자는 누구인가?"
이에 주성이 답하였다.
"의양왕 감(鑒)께서 곧 세워질 것입니다."
석준이 말하였다.
"나조차 이렇게 되었거늘, 너희들이 석감을 세운다고 며칠이나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석민은 끌려온 석준을 곤화전(琨華殿)에서 살해하고, 아울러 태후 정씨, 황후 장씨, 황태자 석연, 중서령 맹준, 좌위장군 왕난, 상광록대부 장비(張斐) 등도 죽였다. 재위 183일만에 일어난 일이었다.(석민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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