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匈奴 | 선비鮮卑 | 저氐 | 갈羯 | 강羌 |
1. 개요
羯族중세 중국에서 활동했던 북방 종족으로, 위진남북조 시대 5부족인 오호의 일종이었으며, 흉노에 속해 있었다. '갈호'(羯胡)라고도 일컫는다.
2. 기원과 중국 정착
갈족은 본래 흉노족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 종족의 하나로써 흉노의 일파로 여겨졌다. 원래 갈족의 갈(羯)은 '거세한 양'을 뜻하지만, '갈'(羯)은 중고한어로 캿(kiat) 정도로 재구성된다. 고대 튀르크어로 ‘khes’ 또는 ‘kit’는 돌을 뜻하며, 예니세이어족의 남예니세이어파에 속한 아린-품포콜어에서도 돌을 'kes' 또는 'kit'라고 하므로[1], 후조 황족의 성씨가 돌을 뜻하는 석(石)씨라는 점과 연결지어서, 민족명인 '갈'은 돌을 뜻하는 단어에서 기원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민족명에 쓰인 한자 '갈'(羯)은 당시 중국인들이 그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2]코가 크며 눈 색깔이 푸르거나 수염이 붉고 많다는 기록(출처 필요)도 있고 중앙아시아에 살던 스키타이 아리아인의 후손인 소그드인 혹은 강거, 월지 등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는 토하라인으로 추측하는 학설도 있지만, 전근대 중국의 기록에서는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들을 묘사할 때도 수사적인 의미에서 '얼굴에서 빛이 난다', '눈에서 불이 보인다', '머리가 붉다', '코가 높다' 등의 얼핏 보면 타 인종을 묘사하는 듯한 기록을 꽤 자주 볼 수 있기에 단순히 기록만으로 갈족이 백인과 유사한 코카시안계였다고 확신하는 건 무리다. 심지어 조선 말기 한반도에 온 서양인들이 상류층인 양반들을 백인 인종 같다고 기록했고, 조선의 아이들 중에는 파란 눈과 붉은 머리를 가진 아이들이 있다고 기록한 적도 있어서 단순히 경험에 의거한 기록은 왜곡되거나 과장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맹신하는 건 위험하다.
한편, 갈족의 정체를 예니세이계 민족으로 추측하는 설도 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동북아 인종 계통이지만 고대 아파나시에보 문화권[3]의 영향으로 이들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이전에 이미 혼혈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케트족들 중에는 외모가 마치 코카시안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중국 기록상에서 언급되는 갈족의 외모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케트족은 몽골 계통처럼 생겼으며, 일부 특이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한국인도 얼마든지 동북아 인종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4]
알렉산더 보빈을 포함한 언어학자들이 단편적으로 남은 갈족의 언어로 된 문장을 재구한 결과에 의하면, 케트족보다는 이들과 같은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인 아린-품포콜족[5]과 가까운 민족일 가능성이 더 크다.
종교적으로 후조의 황실에서는 호천(胡天), 호천상제(胡天上帝)란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리아인과 연관짓는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로 추정하고, 튀르크나 예니세이어족 계열로 보는 측은 텡그리로 추정한다. 옥황상제 항목에 나오는 호천상제와는 다르다. 대체로 이란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권에서는 전자를, 몽골·튀르키예·헝가리 등 우랄 알타이 제어권의 범투란주의 진영에서는 후자를 정설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중국 측 기록에는 갈족이 식인을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고대 시베리아 원주민들 일부는 잉여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 때문에 전쟁 포로를 바로 죽이거나 종종 잡아먹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나 노르드인들의 역사 기록에도 한대 지방 민족들의 식인 풍습이 종종 언급된다. 호밀, 귀리 같은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 보급되고 모피와 식량을 교환하는 무역이 성립되면서 식인 문화가 사라진 듯하다. 비슷한 이유로 그린란드를 포함한 북아메리카에는 중세 때 이주해 와 정착한 바이킹들의 후손들이 없다. 이누이트들에게 전쟁 포로로 잡히는 즉시 다 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갈족의 식인 행위에 대한 기록은 이와 같은 원인이 있는 듯하다.
서기 1~3세기경 흉노가 동서남북으로 유린당하자, 흉노의 지배를 받던 갈족과 남흉노 및 동호가 중국으로 남하하여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에 종속되었다. 이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중국의 최북단 지역 병주나 유주로, 그 바로 위에 선비족이나 오환족 등과 같이 북방 종족들의 영역과는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당시 중국 고위층 사이에선 갈족 여자들이 첩으로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어느 관리건 병주나 유주의 자사로 부임한다고 하면 그 관리에게 갈족 여자를 구해다 달라고 청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인기가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다만, 갈족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전리품 같은 느낌으로 선호했을 수도 있으며, 고대 그리스와 전국시대 일본 고위층 남성들의 동성애 선호 현상처럼 특정 시기 고위층의 특이 성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갈족이 백인처럼 생겼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던 거라는 등의 와전된 정보가 인터넷 등지에 퍼지기도 했는데, 갈족에 대한 자료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너무 오래 전에 소멸된 민족이기 때문에, 갈족임이 확실한 유골을 토대로 DNA 분석하여 복원하지 않는 이상, 실제 그들이 어떤 생김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전까지는 그저 몇몇 기록만으로 추측할 뿐인데, 전근대의 기록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수사적인 의미에서 쓰인 묘사를 맹신할 수도 없다. 실제로 전근대 중국에선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을 묘사할 때도 붉은 머리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서양인들이 조선에 왔을 때는 마치 조선인들이 백인(아리아 인종)처럼 생겼다고 기록한 바 있었다. 북주 무제의 경우도 외모가 서구적이었을 거라 추측했던 일부 학자들이 있었지만, 2024년에 무제의 유골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한 결과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외모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 또한, 갈족의 외모가 어땠는지와는 상관없이 전근대 동아시아는 대부분의 시대에서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외모를 아름답다고 여겼다는 걸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는데, 바로 불상과 미인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스러운 대상을 묘사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최대한 미화했기에 불상도 당시의 미적 기준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6], 대부분의 불상이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 그리고 미인도는 말 그대로 미인을 묘사한 그림인데, 이 또한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들을 묘사했다.[7]
3. 흥기와 전성기
5호 16국이 개막하면서 유연의 휘하에 있던 갈족 부하 석륵[8]은 자립하여 후조를 세운 후 유연의 조카 유요를 죽이고 전조를 멸망시켰다. 석륵과 석호 시대에 갈족의 후조는 중국의 화북 대부분을 제패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4. 몰락
석호의 폭정으로 후조가 피폐해지고, 석호 사후 후계자 분쟁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염민이 염위를 세우고 갈족을 비롯한 여러 호족(胡族)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 학살하였다. 특히 갈족은 석호의 자손을 비롯해 남녀노소 20여만 명이 죽어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다고 한다.후조 멸망 후 세력이 크게 꺾여 오호십육국, 남북조시대 중기까지 잔존하기는 했으나 결국 한족, 선비족 등에 동화되었다. 북위 말의 패권자 이주영(爾朱榮)의 이주씨 일족, 소량(蕭梁)의 반란자 후경(侯景) 등이 선비족에 동화된 갈족이다. 이후 완전히 동화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오호 중에서 인지도가 제일 떨어진다. 흉노는 대표적인 유목민족으로 잘 알려졌고, 선비족 역시 북위로 인해 인지도가 있다. 강족은 이들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저족은 삼국지에서 나와서 그나마 인지도가 있다. 그러나 갈족은 이렇다할 특징이 없다. 종종 말갈족[9]과 같은 종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다만 말갈을 중심으로 일부 갈족들과 선비족이 혼혈되고 이들이 퉁구스화되면서 여진족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5. 언어
진서에 "秀支替戾岡 僕谷劬禿當"이라는 갈족 언어로 된 문장이 딱 하나 등장한다. 여기서 '수지'(秀支/si̯u-ci̯e)는 군(軍)을, '체려강'(替戾岡/tʰei-let, lei-kɑŋ)은 나오다(出)를, '복곡'(僕谷/bok, buk-kuk, yok)은 유요의 오랑캐 직위 이름(劉曜胡位)을, 그리고 '구독당'(劬禿當/ɡi̯u̯o-tʰuk-tɑŋ)은 붙잡다(捉)를 일컫는다는 해설이 있다.여러 학자들이 이 문장을 튀르크어족[10][11] 내지는 예니세이어족[12]에 속하는 언어로 보아 재구성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혹은 아리아인과 연관지어 고대 영어 혹은 고대 노르드어를 참고해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문장인 "Fylki dragan, Prōcūrātor clūs tūr takan(군대가 나오면 프로쿠라토르[13]를 잡아 탑에 가두리라)"으로 재구성한 시도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
시베리아 중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케트족과 연관성을 찾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케트어는 예니세이어족[14]에 속하는데, '갈'(羯)의 중고한어 발음 'Kiat'과 '케트'(Ket)의 발음이 유사한 점, 갈어의 동사 어미 -ŋ이 예니세이어족의 일반적인 동사 어미와 동일한 점, 갈어 단어 '구독당'(劬禿當)의 재구 발음 "kot-o-kt-aŋ"이 케트어 문장 "d-kas-a-qos-n"(그들이 잡을 것이다)과 유사한 점을 근거로 한다. 다만 "kot-o-kt-aŋ"의 /t/ 발음이 케트어 발음 /s/에 해당되는 품포콜어 발음 /t/의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동아시아 제어 연구의 권위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갈족이 몽골 북부에 거주했던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인 품포콜족과 친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품포콜어의 형제격 언어인 아린어에서 싸움을 'Kel'이라고 하는데, 이는 재구된 갈어에서 군대를 의미하는 'Suke'의 두번째 음절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나 연관성이 의심되어 보빈은 이를 흉노어에서 온 차용어라고 제시했다.
6. 갈족 관련 인물
갈족이 세운 국가 또는 서진 이후의 갈족 소속 부족 계열은 제외.[1] 사족으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Taş.[2] 실제로 이민족을 가리키는 한자명 중 좋은 뜻을 가진 글자는 별로 없다.[3] 기원전 2300년 무렵부터 기원전 1000년 즈음까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예니세이 강 유역에서 생긴 인도유럽어족 계통 문화권으로,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의 선주민인 토하라인의 직계 조상이다.[4] 예를 들어, 노라조의 이혁 같은 외모를 가진 한국인은 이혁 외에도 많다.[5] 17세기까지 오늘날의 몽골 북부에 살았던 예니세이어족 계통 민족이다.[6] 1927년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소설가인 현진건이 경주 여행 중에 불국사를 탐방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수기인 불국사 기행에서는 석굴암에 있는 관음보살의 불상을 두고 관능적인 미녀라는 식으로 묘사하다가, 자신에게 안겨준 마음 속 불길에 그만 넋을 잃어서 불경한 묘사를 했다며 용서해달라는 개드립(...)이 실려있기도 하다. 이 수필에서 나온 '좁은 듯하면서도 슬밋한 허리를 대어 둥그스름하게 떠오른 허벅지' 내지는 '어여쁜 손가락이 곰실곰실 움직이는 듯'이라는 묘사는, 당대 한국인들의 미적 기준을 보여주는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상을 직접 제작했던 고대에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는 얘기다.[7] 비슷한 예로,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에서 제작된 성화에서의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외모 묘사도 당대 유럽인들이 생각한 미남미녀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중세 중기까지만해도 성모 마리아를 포함한 여러 성녀들의 모습이 청초하고 갸날픈 몸매로 표현되던 것이, 르네상스 시기 이후로 갑자기 풍만한 가슴에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로 바뀌어서 묘사되기 시작한 것이 그 예다. 예수에 대한 묘사 역시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지역별로 다른 미적 기준이 적용되어서, 서유럽에서는 아폴론을 연상시키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이 말끔한 미청년으로 그려졌고, 중동에서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모습에 가깝게 덥수룩한 수염에 장발인 고고한 모습의 중년 남성으로 그려졌던 바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대해 재조명하게 되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최후의 심판의 경우처럼 수염없는 미청년으로서의 예수의 묘사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당대 이탈리아 사회의 미적 기준이 반영된 결과다.[8] 석륵은 흙수저를 넘어 노예 출신이다.[9] 이쪽은 후손인 여진족과 만주족이 각각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민족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인지도가 높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관계를 가져온 이웃 민족이라서 잘알려져 있다.[10] 1922년 핀란드의 외교관이자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J. 램스테트가 재구한 문장으로 Sükä talıqın bügüg tutun!(전쟁에 나가 복곡을 잡아라!).[11] 194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루이스 바쟁이 재구한 문장으로 Süg tägti ıdqaŋ boquγıγ tutqaŋ!(군대를 보내어 공격하고, 지휘관을 잡아라!).[12]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이 재구성한 문장으로 suke t-i-r-ek-ang bok-kok k-o-t-o-kt-ang(군대가 나갔으니 복곡을 잡아올 것이다).[13]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 속주의 행정관을 뜻했다.[14] 이 어족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 및 유전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 알래스카와 캐나다 서부의 원주민 어족인 나데네어족과 묶는 데네예니세이어족이라는 가상의 어족 학설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