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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20:09:24

석수(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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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石邃
(? ~ 337)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제3대 황제 석호(石虎)의 장남. 자는 대연(大淵). 아명은 아철(阿鐵).

2. 생애

어릴 적부터 당당한 성격에 총명하였고, 장성하여서는 날쌔고 용맹하기까지 하여 아버지 석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태화 원년(328년) 11월, 전조의 군대가 낙양을 침공하자 석륵은 내외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석수를 좌위장군, 도독중군사(都督中軍事)로 삼아 아버지 석호와 더불어 석문(石門)을 점거케 하였다. 이후 석호와 낙양 전투에 종군하여 전조군을 대파하는 데 일조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정동장군으로 승진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2월, 낙양 전투에서 유요를 사로잡은 석륵은 다시 수도 양국(襄國)으로 귀환하면서 석수에게 유요 호송 임무를 맡겼다. 당시 유요는 술에 취한 상태로 도망치다가 빙판에서 자빠지는 바람에 칼과 창에 찔려 부상이 심했으므로, 금창의(金瘡醫) 이영(李永)을 함거에 넣어 유요의 상처를 치료하게 하면서 이동하였다. 이윽고 무사히 양국으로 호송된 유요는 영풍(永豐)의 소성(小城)에 유폐되었다.

건평 원년(330년) 2월, 석륵이 군신들의 권유로 대조천왕(大趙天王), 행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자, 석수는 기주(冀州)자사, 산기상시, 무위장군에 임명되었고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이때 수많은 문무관리들의 관직이 높아졌음에도 정작 여러 전장에 출전하여 군공을 세웠던 석호는 중산왕으로 진봉된 것이 전부하였다. 스스로 가장 공이 많다 생각하며 대선우 직책에 오를 것을 확신했던 석호는 이와 같은 논공행상에 크게 실망하고 원망하며 비밀리에 석수를 찾아가
"주상께서 양국을 도읍으로 삼은 이래로 나는 몸소 화살과 돌을 맞아가며 줄곧 공훈을 세웠다. 그렇게 싸운지 어언 20년, 남으로는 유악(劉岳)을 생포하였고, 북으로는 삭두(索頭)를 달아나게 하였으며, 동으로는 제(齊)와 노(魯)의 땅을 평정하였고, 서로는 진(秦), 옹(雍)의 땅을 정벌하였으니, 도합 13개의 주를 섬멸한 셈이다. 대조(大趙)의 업을 이룬 자가 바로 나란 말이다. 대선우는 실로 내가 받아야 마땅한 자리인데, 젓내 나는 첩의 자식[1]한테 빼앗기고 말았으니, 매일 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수치스러워 밥이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구나. 훗날 주상께서 승하하신다면 우리 종족은 멸절되고 말 것이다."
라 하소연하였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의 병세가 심해지니, 석호는 광아(廣阿)에서 발생한 황충 피해 조사를 핑계로 기병 3,000기를 빼내어 이를 석수에게 주고 잠시 광아로 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제 석륵이 병으로 붕어하자, 석수는 석호의 명령에 따라 병력을 거느리고 돌아와 그대로 황궁에서 숙위하였고, 문무관리들은 두려워 감히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건평 4년(333년) 8월, 조정의 대신들을 숙청하고 마침내 정권을 잡아 승상, 대선우, 위왕(魏王)에 오른 석호는 장남 석수를 위태자(魏太子)로 삼고, 사지절, 시중, 대도독, 독중외제군사(督中外諸軍事), 대장군, 녹상서사를 더하였다.

건평 4년(333년) 10월, 관중을 통할하던 장안(長安)의 하동왕 석생과 낙양의 무위대장군 석랑(石朗)이 연합해 석호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하였다. 석호는 태자 석수를 도성 양국에 남겨 지키게 하고, 직접 보•기 70,000명을 거느려 석생과 석랑의 난을 진압하였다.

건무 원년(335년) 정월, 천왕에 오른 석호가 상서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은 석수로 하여금 결재하도록 하였다.

건무 3년(337년) 2월, 석호가 남교(南郊)에서 대조천왕으로 즉위하고, 태자 석수를 천왕태자로 삼았다.

석호는 비록 잔혹한 군주였으나, 평소 아들 석수만큼은 매우 아껴 좌우의 군신들에게 항상 이르기를
"사마씨(司馬氏)의 집안은 부자와 형제가 서로 다투어 결국에는 멸망하였기에, 짐이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짐이 사마씨 집안과 같은 처지였다면 그 지경에 이를 때까지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짐이 아철(阿鐵)을 마땅히 죽일 리가 없지 않은가?"
라 자부하였을 정도였다. 석수는 이와 같은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백관들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과도하게 주색을 탐했고, 교만하고 방자해져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언제나 들판에 나가 사냥하면서 놀기 바빴고, 궁전으로 돌아올 때는 고악(鼓樂)을 크게 울렸다. 또, 황음무도하여 밤에는 신하들의 거처에 침입해 그 처첩과 음란한 행위를 하는가 하면, 예쁜 궁녀를 화장시킨 후 목을 잘라 접시에 올려놓고 바라보았으며 얼굴 아래는 손님들을 초청해 잘 요리해서 먹기도 하였다. 심지어 비구니라도 용모가 아름다운 자가 있으면 강제로 범한 뒤에 살해하고, 그 고기를 양고기, 소고기와 썪어 끓여서 먹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인육의 맛을 남들에게도 알리고자 그 고기를 좌우에 나눠주었다.

석호도 천왕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 주색에 빠지면서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기쁨과 분노를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였다. 한번은 상소를 결재하던 석수가 석호와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가니, 석호가 성내며 말했다.
"이런 사소한 일을 어찌 일일이 보고하느냐!"
이에 석수가 석호와 상의 없이 일을 처리하자, 석호가 다시 화를 내며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
라 문책하고는, 석수를 몽둥이로 내리치거나 회초리로 때렸다. 이런 일이 한 달에 2 ~ 3번씩 발생하니, 석수는 무척 한스러워 하며 항상 측근인 무궁(無窮), 장생(長生), 중서자 이안(李顏) 등에게
"관가(官家)[2]를 섬기기 어려우니, 나는 묵돌의 고사를 행하고자 한다. 경들도 나와 함께하지 않겠는가?"
라 물을 때면, 이안 등은 그저 엎드려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건무 3년(337년) 7월, 결국 불만이 폭발한 석수는 병을 핑계로 일을 완전히 내팽개치고, 몰래 문무관원 500여 명과 함께 말에 올라 이안의 별장에 가서 술 마시며 놀았다. 한창 술을 마시던 와중에 석수는 갑자기 이안 등을 향해
"나는 기주(冀州)로 가서 석선을 죽이려 한다.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참수하리라!"
라 선언하고 별장을 나섰다. 그렇게 몇 리 정도 가자, 그의 뒤를 따르던 기병들이 하나둘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고, 이를 본 이안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간하였다. 석수 역시 술이 너무 취하여 도중에 의식을 잃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석수의 어머니 정앵도(鄭櫻桃)가 중인(中人)을 보내어 석수를 나무라니, 석수는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보낸 자를 죽여버렸다. [3]

한편, 석수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석호가 태자를 문병하려고 하자 불도징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절대 동궁(東宮)으로 행차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불도징의 말을 들은 석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하의 주인이거늘, 부자 간의 믿음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는 신임하는 여상서(女尙書)를 보내 먼저 석수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마침 여상서는 석수가 어머니가 보낸 그 중인과 대화 내용부터 살해하는 장면까지 전부 목격했고, 이를 보고받은 석호는 노하여 곧장 중서자 이안 등을 붙잡아 힐문하였다. 이안 등이 석호 앞에서 자세한 경위를 죄다 털어놓자, 석호는 이안을 포함한 30여 명을 죽이고 태자 석수를 동궁에 유폐시켰다.

그 후로 마음이 조금 풀어진 석호는 석수를 사면하고 태무전(太武殿) 동당(東堂)으로 불렀는데, 석수는 사죄도 없이 불쑥 동당에서 나와버렸다. 석호는 사자를 보내
"태자는 응당 중궁(中宮)에 입조해야 하거늘, 어딜 가려 하는가?"
라 따졌으나, 석수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석호는 굉장히 노하여 석수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삼은 후, 그 날 밤에 석수를 바로 죽였다. 아울러 석수의 태자비 장씨(張氏)와 남녀 26명을 주살해 모두 같은 관짝에 넣어 매장하고, 동궁의 신하들과 석수와 무리지어 다니던 측근들 200여 명도 살해하였다. 또, 석수의 생모이자 석호의 정처인 정앵도도 천왕후에서 폐위되어 동해태비(東海太妃)로 내려갔고, 하간공 석선과 그 모친 소의 두씨(杜氏)를 각각 태자, 천왕후로 새로 삼았다.

3. 기타


[1] 석륵의 아들인 유씨 소생의 석굉이 대선우에 올랐다.[2] 황제를 둘러 말하던 호칭, 훗날 조광윤 송나라 시대까지 쓰였다.[3] 아마 석호는 이때까지도 아들이 미쳤다는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이후에도 석호는 아들을 챙기기 위해 여러 사람을 보냈지만 석수는 오는 족족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