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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5:51:35

모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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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전연 제2대 황제
모용준 | 慕容儁
출생 319년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60년 2월 23일 (향년 42세)
전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용릉(龍陵)
재위기간 전연 왕세자
341년 ~ 348년 9월
제2대 국왕
348년 9월 ~ 352년
제2대 황제
352년 ~ 360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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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준(儁)
선영(宣英)
아명 하뢰발(賀賴跋)
부모 부황 태조
모후 문명황후
형제자매 19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경소황후, 경덕황후
자녀 8남 1녀
신장 195cm
작호 좌현왕(左賢王)
묘호 열조(烈祖)
시호 경소황제(景昭皇帝)
연호 원새(元璽, 352년 ~ 357년)
광수(光壽, 357년 ~ 3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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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연왕 즉위2.3. 제1차 남벌2.4. 염위와 대립2.5. 제2차 남벌2.6. 칭제2.7. 제왕 단감 토벌2.8. 업 천도2.9. 동진 정벌2.10. 최후
3.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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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제2대 황제.

휘는 준(儁)이었고, 자는 선영(宣英)으로 묘호는 열조, 시호는 경소황제였다. 선비 모용부의 제5대 대인으로 전연을 건국한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차남. 선비족식 이름은 賀賴跋(하례발 or Helaiba)

2. 생애

2.1. 초기

초기에 그의 조부 모용외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는 덕(德)을 쌓고 인(仁)을 누적하니, 내 자손은 중원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후 모용준의 생모인 단씨(叚氏)는 13개월에 걸쳐 모용준을 임신한 끝에 출산하였는데, 그가 태어날 때 몸에서 기이한 빛이 발하였다고 한다. 모용외는 갓 태어난 모용준을 보고 말했다.
"이 아이의 골격이 범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하니, 우리 가문은 특별한 아이를 얻었구나."
이윽고 장성한 모용준은 신장이 8척 2촌이었고, 외모가 빼어나면서도 위엄이 있었으며, 다양한 서적을 널리 익혀 문무 모두에 능통하였다. 그는 문장 짓는 실력도 뛰어나서 글의 내용이 적합하고 우아했으며, 사부(詞賦)를 짓는 데에 능하였다.

함강 원년(335년) 7월, 요동공 모용황이 모용준을 세자로 삼았다.

함강 2년(336년) 10월, 모용황이 모용준을 보내 단부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게 하고, 우사마 봉혁을 보내 우문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모용준과 봉혁 모두 큰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였다.

함강 3년(337년) 6월, 단료가 사촌동생인 양위장군 단굴운(段屈雲)을 보내어, 정예 기병을 이끌고 모용준이 있는 흥국성(興國城)을 야습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영격하였고, 두 군대는 오관수(五官水)에서 크게 싸운 끝에 단굴운이 패하여 참수되었으며, 그의 병력은 모두 모용부의 포로가 되었다.(오관수 전투)

함강 3년(337년) 11월, 연왕을 자칭한 모용황이 부인 단씨는 왕후, 모용준은 왕태자로 삼았다.

함강 8년(342년) 2월 28일[1], 성제가 마침내 대홍려 곽희(郭悕)를 보내 모용황의 연왕 작위를 승인하였다. 이때 모용준도 가절•안북장군•동이교위•좌현왕으로 임명되어, 수백만 전 어치의 군자금과 병장기를 지급받았다.

건원 원년(343년) 8월, 모용황이 모용준, 전군사 모용평(慕容評)을 보내 대나라를 침공하니, 탁발십익건은 무리를 거느리고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모용준의 군대는 탁발십익건의 뒤를 쫓아 텅 빈 들판만 가로지르다가 허탕만 치고 연나라로 돌아갔다.

건원 2년(344년), 동진에서 사신을 보내 모용준을 사지절•진군장군으로 삼았다.

연왕(황) 13년(346년) 정월,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에게 광위장군 모용군, 도요장군 모용각, 절충장군 모여근 세 장수와 17,000명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중앙에서 군대를 지휘하였고, 모든 임무는 모용각에게 맡겨졌다. 전연군은 마침내 부여를 뽑고, 부여의 현왕과 부여 백성 50,000여 명을 붙잡아 돌아왔다.(부여 정벌)

2.2. 연왕 즉위

연왕(황) 13년(348년) 9월, 모용황이 낙마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병사하자, 모용준이 그 뒤를 이어서 연왕으로 즉위하였다.

연왕(준) 원년(349년) 정월, 모용준이 춘추시대 제후의 고사에 의거하여 다시 원년으로 개원하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외의 수형자들을 모두 사면시켰다. 그리고 건강(建康)으로 사신을 파견해 동진 조정에 아버지 모용황의 상사를 보고하였다. 동생 모용우(慕容友)[2]를 좌현왕, 좌장사 양무를 낭중으로 삼았고, 이후 문무 백관들에게도 차등있게 관직을 수여하였다. 이 달에 모용준은 28자루의 칼을 만들라 명령하고, 그 검들에 '28장(二十八將)'이라는 문구를 예서체로 새기게 하였다.

연왕(준) 원년(349년) 4월, 폭군 석호가 붕어한 후, 갈족의 후조와 한족의 염위가 석씨 황실내 내분과 갈족/한족 간의 대립으로 혼란해지자, 국경을 수비하던 동생 평적장군 모용패가 상소하여 모용준에게 아뢰었다.
"석호는 극도로 흉폭하여 천하에 버림받았으나, 여전히 그의 잔재가 남아 서로를 해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中國)은 위험하고 절박한 상황으로, 사람들은 인자하고 자비로운 지도자를 바라고 있으니, 만약 대군이 일제히 일어난다면, 그 세력은 반드시 창을 반대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때 북평(北平) 태수 손흥(孫興) 역시 상소하여 석씨의 대혼란을 지적하고, 지금이 바로 중원을 차지할 때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이 부친상을 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불허하니, 모용패는 급히 말을 몰고 수도 용성(龍城)으로 들어가, 모용준을 알현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것이 바로 시기입니다. 만약에 쇠퇴하는 석씨가 다시 일어나거나, 누군가가 영웅이 되어 이때를 기반으로 삼는다면, 이는 큰 이익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위험을 더욱 걱정하게 될 일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비록 업(鄴)을 중심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낙안(樂安)에 주둔하고 있는 등항(鄧恒)의 군세는 강하고 식량도 충분하다. 따라서 지금 조나라를 친다 가정하면 동쪽 길은 통과할 수 없고, 마땅히 노룡(盧龍) 방면으로 지나가야 한다. 하나, 노룡의 산길은 험난하고 좁으니, 적들이 높은 곳을 점령하여 중요한 통로를 끊어버리면 군대는 앞뒤로 우환이 닥칠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장차 어찌하려 하느냐?"
모용패가 답했다.
"등항은 비록 석씨를 위해 방어하고 있지만, 그의 장병들은 가족을 생각하며 돌아가길 원하고 있어, 대군이 그들에게 들이닥친다면 그들은 저절로 와해될 것입니다. 청컨대, 전하께서 선봉에 서서 동쪽으로 출발하여 황하를 건너고, 몰래 접근하여 그들을 불시에 공격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은 이를 듣고, 반드시 크게 놀라 성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고, 최악의 경우라도 성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에 그칠 뿐인데, 어찌 저희들을 막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이후로 전하께서는 안심하고 전진하실 수 있으며, 더 이상의 어려움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용준은 확신이 서지 않아, 오재장군 봉혁에게 이를 물었다. 이에 봉혁이 답했다.
"무릇 용병에서 적이 강할 때 지(智)를 쓰고, 적이 약할 때 세(勢)를 써야 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대(大)가 소(小)를 삼키는 것은 늑대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과 같고, 혼란을 다스리는 것은 낮의 태양으로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역대 대왕 모두 덕과 인자함을 쌓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한 군대를 길러왔으나, 흉역한 석호는 죽어서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그 자손들은 나라를 두고 골육상쟁하고 있습니다. 또, 중원의 백성들은 진흙에 빠져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 도탄에서 벗아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거병하셔서 먼저 남쪽으로 나아가 계성(薊城)을 취하시고, 그 다음 목표를 업도(鄴都)로 세워 그 위덕은 널리 빛내면서 유민들을 위무하신다면, 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대왕을 영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흉악한 무리는 대왕의 깃발만 보아도 얼음조각처럼 뿔뿔이 흩어질 것이니, 어찌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종사중랑 황홍 또한 말했다.
"지금 태백(太白)이 하늘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그 빛을 모음으로써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의 주인 바뀌고 음국(陰國)이 천명(天命)을 받는 것을 의미하므로, 청컨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도록 하십시오."
그제서야 모용준이 크게 웃으며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모용각을 보국장군, 모용평을 보필장군, 양무를 보의장군으로 삼으니, 이들은 합쳐서 '삼보(三輔)'라 불렸다. 또, 모용패를 전봉도독(前鋒都督)•건봉장군으로 삼아, 정예병 200,000명을 선발하게 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동시에 계엄을 선포하여 출진할 준비를 갖추었다.

연왕(준) 원년(349년) 7월, 동진에서 알자 진침(陳沈)을 사자로 파견해 모용준을 사지절•시중•대도독•도독하북제군사(都督河北諸軍)•유기병평4주목(幽冀并平四州牧)•대장군•대선우•연왕으로 삼음으로써 승제케 하고, 나머지 모용외, 모용황의 옛 직책들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연왕(준) 원년(349년) 12월, 모용준이 전량으로 사자를 파견해 장중화와 후조를 치기로 약조하였다. 이때 고구려고국원왕이 예전에 모용황을 배신하고 고구려로 도망쳤던 전(前) 동이호군 송황을 보내오자, 모용준은 그를 송활(宋活)로 개명시키고 중위로 삼아 다시 기용하였다.

2.3. 제1차 남벌

연왕(준) 2년(350년) 2월, 모용준이 모용패에게 20,000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동쪽 길에서 황하를 건너게 했고, 모여근은 서쪽 길을 통해 열옹새(蠮螉塞)로 나아가게 하였으며, 자신은 그 중간의 길에서 노룡새(盧龍塞)로 진군하였다. 전연군은 세 갈래로 동시에 진격하면서 모용각과 선우량이 선봉에 세우고, 경거장군 모여니(慕輿埿)에게는 나무를 베어 산길을 뚫는 임무를 맡겼다. 수도 용성은 세자 모용엽(慕容曄)이 수비하였고, 대사농 유빈(劉斌)과 전서령 황보진은 세자를 보좌하여 후방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모용패의 군대가 삼경(三陘)에 이르자, 후조의 정동장군 등항은 두려워 창고를 불태우고, 낙안을 버리고 후조의 유주자사 왕오(王午)에게로 달아나 그와 더불어 계성(薊城)을 지켰다. 이에 전연의 남부도위 손영(孫泳)은 도하(徒河)에서 급히 낙안으로 들어가, 등항이 놓은 불길을 진압하고 아직 타지 않은 곡식과 비단을 얻었다. 이후 모용패는 낙안과 북평의 군량을 거두어 들이고, 임거(臨渠)에서 모용준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연왕(준) 2년(350년) 3월, 모용준과 모용패가 진군하여 무종(無終)에 도착하자, 왕오는 계성에서 달아나면서 부장 왕타(王他)와 병력 수천 명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였다. 5일[3]에 모용준이 계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왕타를 붙잡아 참수한 뒤에 남은 후조군 1,000여 명을 생매장해 죽이려 하니, 모용패가 반대하며 말했다.
"조나라가 폭정을 행하였기에, 전하께서는 백성을 곤경에서 구하고 중주(中州)를 위무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지금 막 계성을 얻었는데, 전하께서 그 병사들을 매장한다면 이는 왕의 군대가 달려온다는 소식이 퍼지는 것에 오히려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모용준이 이를 받아들이고 계성으로 입성하자, 중원의 남녀가 잇따라 항복해왔다.(계성 전투) 이후 모용준의 군대가 범양(范陽)에 이르렀을 때, 후조의 범양태수 이산은 석씨를 위해 저항하고자 했으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산은 하는 수 없이 저항을 포기하고, 8개 성의 현령들을 거느리고 나와 모용준에게 투항하였다. 모용준은 항복한 이산을 다시 태수로 삼고, 후조군 소속으로 노구(魯口)에 있다가 왕오가 보내주어서 돌아온 그의 아들 이적을 유주별가로 삼았다.

연왕(준) 2년(350년) 4월, 모용준이 동생 모용의(慕容宜)를 대군성랑(代郡城郎), 손영(孫泳)을 광녕(廣寗) 태수로 삼고, 유주의 군현들에 태수와 재상을 모두 두었다. 이후 중부후리(中部侯釐) 모여구(慕輿句)를 계성에 남겨서 나머지 일들을 감독케 하고, 모용준은 직접 노구에 있는 등항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모용준의 군대가 청량(青梁)에 들어섰을 때, 등항의 장수 녹발조(鹿勃早)가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밤에 전연군의 진영을 기습하였다. 녹발조의 군대는 진영의 절반 정도 들어가, 선봉도독 모용패를 가장 먼저 공격하였다. 이때 모용패가 즉시 장막 아래로 뛰어들어 무용을 떨치며 수십 명을 손수 척살하니, 이로 인해 연나라 군대는 엄중한 태세를 갖출 수 있었고, 녹발조는 야습을 실패하여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용준은 이 습격으로 불안해 하며 모여근을 불러 물었다.
"적의 기세가 강성한데, 일단 퇴각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모여근이 안색을 고치고 답했다.
"우리의 병력이 많으나 적의 병력은 적으므로, 적은 정면 승부에서는 승산이 없는 것을 알고 야습한 것일 뿐입니다. 저희들은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고, 지금 도적이 눈 앞에 있는데 어찌 주저하십니까! 대왕께서 그냥 누워계시기만 하셔도 신들이 대왕을 위해 적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모용준은 군영을 나와서 내사 이홍과 함께 인근의 높은 무덤 위에 따로 주둔하였다. 모여근은 좌우에 정예병 수백 명을 이끌며, 중앙의 군영문을 박차고 나와 녹발조의 진영으로 돌격하자, 무덤 위에 주둔해있던 모용준도 이홍에게 기병을 주어 모여근을 원호하게 하였다. 녹발조는 패하여 40리 가량 전연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도망쳤고, 홀로 목숨만 겨우 보존할 수 있었으나 데리고 온 병력은 대부분 전사하였다. 청량에서 승리한 모용준도 일단 병력을 거두어 계로 퇴각하였다.(청량 전투)

연왕(준) 2년(350년) 8월, 대군 사람 조합(趙榼)이 300여 호를 거느리고 전연을 배반해 후조의 병주자사 장평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광녕과 상곡(上谷) 두 군의 백성을 서무(徐無)로 이주시키고, 대군의 백성을 범성(凡城)으로 이주시켰다.

연왕(준) 2년(350년) 9월, 모용준이 남쪽으로 다시 진격하여 기주(冀州)의 장무(章武)와 하간(河間)을 취한 뒤, 모용평을 장무태수, 모용각을 하간태수로 각각 삼았다. 당시 모용준의 명령에 따라 발해군을 순행하던 모용평은 고성(高城)에서 가견과 싸워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3,000여 명을 참수하였다.(고성 전투)

연왕(준) 2년(350년) 10월, 모용준이 계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몇몇 장수들을 계성에 남겨 지키게 하고 용성으로 떠났다. 이윽고 용성으로 돌아온 모용준은 능묘에 참배하였다.

2.4. 염위와 대립

연왕(준) 3년(351년) 2월, 후조의 황제 석감을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염민이 양국(襄國)에서 후조의 황제로 즉위한 석지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위기에 빠진 황제 석지는 스스로 존호를 내려 조왕(趙王)을 칭하고, 태위 장거(張舉)를 전연으로 파견해 구원군을 보내준다면 전국옥새를 바치겠다 하였다. 모용준이 이를 받아들여 장거를 잠시 용성에 남게 하고, 열관을 어난장군으로 삼아 30,000 군사로 석지를 구원하게 하니, 염민은 광녕 출신인 대사마 종사중랑 상위(常煒)를 전연으로 보내 모용준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다. 모용준이 상위를 불러 그와 대면하고 있을 때, 기실참군 봉유가 상위를 힐난하며 말했다.
"염민은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혜를 배반하고 권력을 찬탈했습니다. 대체 어떤 상서로움에 응하여 감히 황위를 찬탈하고 대호(大號)를 자처하는 것입니까?"
상위가 답했다.
"하늘이 일으킬 때에는 그 목적이 항상 동일하지 않습니다. 삼황이 등장하자 늑대와 까마귀가 나타났고, 한나라, 위나라가 일어나자 기린과 용이 나타났듯이, 저희 임금께서 하늘의 뜻을 따라 역사를 다스리려 하시는데, 어찌 상서로움이 없겠습니까? 또, 용병으로 살육하거나 정벌하는 것은 명철한 왕의 성전(盛典)으로, 탕왕무왕이 친히 폭군의 죄를 책망하고 주살하니, 중니(仲尼)가 이를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위무제는 환관에 의해 키워졌고, 그의 출신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병력 또한 충분하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성공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흉폭한 오랑캐가 혼란을 야기하여 백성들을 도축해 회로 만들자, 저희 임금께서 검을 떨쳐 이들을 제거하셨고, 백성들은 이로 인해 구제되었습니다. 이는 가히 황천(皇天)에 부합하는 공적이고, 고조에 버금간다 이를 수 있는 공훈입니다. 건명(乾命)을 높이 받들었는데, 어찌 잘못이 있겠습니까?"
봉유가 다시 말했다.
"석지가 지난번에 장거를 보내 구원을 청하면서 옥새가 양국(襄國)에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은 믿을 수 있습니까?"
상위가 반론하며 말했다.
"오랑캐를 주살한 날, 아무도 업을 빠져나가지 못했는데, 옥새가 어찌 양국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단지 구원을 얻어내기 위한 말에 불과하며, 하늘의 신성한 옥새는 사실 저희 임금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요사스러운 요괴 무리는 거짓되고 기이한 것으로 대중을 현혹하거나, 혹은 만사를 고쳐 바꿔서 그 일을 신성시하려 합니다. 한데, 저희 임금께서 지금 하늘의 권력을 쥐고 계신 것이 마치 상제(上帝)와 같으시고, 사해(四海)를 손아귀에 넣으시어 대업(大業)을 한 몸에 모으셨으니, 이러한 것들을 어찌 믿으십니까!"
그러나 모용준은 이미 장거의 말을 깊이 믿었고, 염민 세력이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음을 기뻐하고 있었기에, 상위를 시험하고자 그의 옆에 장작을 쌓은 다음, 봉유 등에게 자신의 의도를 암시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장작에 불을 붙이는 척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상위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단호히 말했다.
"석씨는 탐욕스럽고 폭력적이어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의 수도를 공격한 적이 있었으며, 비록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그들의 의지는 분명 연나라를 취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원과 식량을 동북쪽에 모으고 무기를 집결시킨 것은 서로를 돕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를 멸망시키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위주(魏主)께서 석씨를 처단하셨을 때, 비록 연나라의 신하들의 마음을 살피지는 않았으나, 원수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의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원수를 위해 저를 책망하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듣기로, 죽은 이들의 육체는 땅에 묻히고 정신은 하늘로 올라간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어 속히 장작을 더하고 불을 지펴주심으로써 제가 천제께 항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좌우에서 상위를 죽이라 권하자, 모용준이 말했다.
옛날에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신이 그 사이에 있었고, 이것 역시 신하의 일반적인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는 충성스러운 신하이다. 게다가 염민에게 죄가 있어도, 사신과 그것이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상위를 사면시키고, 숙소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날 밤, 모용준은 상위와 동향인 조첨(趙瞻)을 보내 상위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그를 떠보게 하였다. 조첨이 상위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진실을 말하지 않았소?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변방에 비석이 세워졌으면 어찌하려고 그랬던 것이오?"
상위가 답했다.
"나는 머리를 땋은 이후로 지금까지 평범한 사람조차 속인 적이 없었건만, 하물며 군주를 속이려 했겠는가? 굽히거나 아첨하는 것은 나의 성정과 부합하지 아니하여 진실된 마음을 다하여 말했으며, 비록 동해(東海)에 있더라도 이를 피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고는 벽을 향해 누워 더이상 조첨과 말을 섞지 않았다. 조첨은 모용준에게 돌아가 상위와 나눈 대화를 자세히 전하였고, 모용준은 분노하여 상위를 용성에 가두어 억류시킨 뒤, 계성으로 이동하였다.

연왕(준) 3년(351년) 3월, 발해 사람 방약(逢約), 후조의 전(前) 태위 유준(劉準), 토착 호족 봉방(封放)이 후조의 혼란을 틈타서 각자 무리를 모으고 할거하다가 염위로 귀순하였다. 염민은 방약을 발해태수, 유준을 유주자사로 삼아 발해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오재장군 봉혁을 보내 방약을 토벌하게 하고, 창려(昌黎) 태수 고개를 보내 유준과 봉방을 토벌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약은 봉혁에게 사로잡혔고, 유준과 봉방은 고개를 영접하여 전연에 투항하니, 모용준은 봉방을 발해태수, 유준을 우사마, 방약을 참군사로 삼았다.

연왕(준) 3년(351년) 5월, 광의장군•만산공(岷山公) 황적(黃笛)이 자신의 지위가 이전과 다르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모용준에게 백지(白紙)로 상소를 올렸다.

연왕(준) 3년(351년) 8월, 모용준이 모용각을 파견해 중산(中山)의 땅들을 빼앗게 하고, 모용평을 파견해 노구(魯口)의 왕오를 공격하게 하였다. 모용각이 당성(唐城)에 이르렀을 때, 염민의 장수 백동(白同)이 염위의 중산태수 후감(侯龕)과 방비를 굳혔다. 이윽고 모용각이 중산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니, 좌장군 모용표(慕容彪)를 남겨 당성을 계속 공략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남쪽 상산(常山)으로 우회하여 구문(九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자 염민의 조군(趙郡) 태수 이규(李邽)가 조군을 들어 모용각에게 투항하였고, 모용각은 이규를 후히 대우하였다. 이후 모용각이 다시 중산으로 돌아가 포위 공격을 계속 하자, 후감이 성을 들어 항복하고 중위로 임명되었다. 중산을 점령한 모용각은 백동을 참수한 뒤, 중산의 장수와 토호 수십 호를 계성으로 이주시켜 안락히 지내게 하고, 군령을 엄격히 하여 그의 군대가 조금도 백성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중산 전투) 한편, 노구의 왕오는 장수 정생(鄭生)을 보내 남안(南安)에서 모용평의 진격을 막게 하였는데, 모용평은 이를 쳐서 격파하고 정생을 참수하였다.(남안 전투)

양국에서 강족 요익중 등과 협력해 염민의 대군을 격파한 어난장군 열관이 임무를 마치고 빈손으로 귀환하여 모용준에게 석지와 장거가 거짓말했음을 고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장거를 처형하고 상위를 석방하여, 당시 중산에 있는 상위의 자녀들을 데려와 그를 만나도록 하였다. 상위가 상소를 올려 은혜에 감사를 표하자, 모용준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경(卿)이 본인의 목숨을 위해 계략을 쓰지 않았으므로, 과인은 경을 주리(州里)로 보내 살게 하고자 한다. 지금 큰 혼란 속에서도 모든 자녀가 무사히 모이는 것을 보면 이것이 곧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경을 이처럼 생각하는데, 과인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여인 하나를 첩으로 하사하고, 곡식 300석을 줄 것이니, 경은 자녀들과 함께 범성에 살도록 하라. 또한, 북평태수 손흥을 중산태수로 삼겠다."
이후 손흥이 중산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위무하니, 결국 중산이 안정되었다.

연왕(준) 3년(351년) 10월, 방조(逄釣)[4]가 모용준을 배반하고 발해로 도망쳐서 무리를 모아 거병하려 하였다. 이때 낙릉(樂陵) 태수 가견이 발해 사람들에게 화복을 알리도록 하니, 방조의 무리는 이내 흩어졌고 방조는 다시 도망쳐 동진으로 갔다. 이 시기에 상당(上黨)의 오환족 고녹관위(厙傉官偉)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전연에 투항하였다.

연왕(준) 3년(351년) 12월, 모용준이 용성으로 돌아갔을 때, 정령족의 적서(翟鼠)가 그 무리를 이끌고 전연에 투항하니, 모용준은 적서를 '귀의왕(歸義王)'에 봉하였다. 이 시기에 모용준은 용성 근교에서 군대를 검열하다가 길에서 감당나무를 보았다. 모용준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 나무를 몰랐지만, 모용준은 이를 알아보고 말했다.
"아, 이것이 바로 《시경》에서 말하는 길 위의 감당나무로다. 감(甘)은 맛의 주인이며, 목(木)은 봄의 행실이다. 오덕(五德)의 주인은 인(仁)이며, 오행(五行)의 주인은 토(土)이다. 봄은 생명을 베풀고, 맛은 사물을 기른다. 그 색깔이 역시 붉은 것을 보아하니, 조만간 중토(中土)에 혁혁한 경사가 드리울 것임을 암시하는구나. 과인은 이것이 국가가 번영한다는 징조로 생각한다. 전승에 따르면, '높이 오르려면 부(賦)에 능해야만 가히 대부(大夫)가 될 수 있다.'라 하였으니, 여러 관리들에게도 각자의 뜻을 적어 과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라."
이에 내외의 신료들이 모두 감당나무 찬가를 작성해 제출하였다.

2.5. 제2차 남벌

연왕(준) 4년(352년) 정월 15일[5], 모용준이 계로 다시 이동하면서 군대의 문무 관리, 병사와 그 가족인 일반 백성들을 계로 이주시켰다.

연왕(준) 4년(352년) 4월 5일[6], 후조의 입의장군 단근(段勤)이 전연에 귀순했다가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모용준은 모용패를 보내 역막(繹幕)에서 단근을 토벌하게 하고, 모용각, 모용평과 상국 봉혁을 보내 안희(安喜)에서 염민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후 모용준은 중산으로 가서 두 군대를 응원해 기세를 높였다. 염민이 전연과 전투를 준비할 때, 대장군 동윤(董閏)과 거기장군 장온(張溫)이 염민에게 간곡히 간언하였으나, 염민은 듣지 않고 안희로 진군하였다. 이때 모용각의 군대가 염민의 뒤를 쫓으니, 염민은 상산(常山)으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모용각 역시 그를 추격하였다.

4월 17일[7], 모용각과 염민은 위창(魏昌)의 염대(廉臺)에서 염민과 열 번의 전투를 벌였으나, 모용각은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염민은 본래부터 위명을 떨치고 있던지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에 모용각이 진영을 돌아다니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염민의 군대는 노쇠하고 병사들은 지쳐 있어 실제로 쓰기는 어렵다. 염민은 용기는 있으나 계획이 없어, 단 한 명의 적에 불과할 뿐이고, 비록 갑병들이 있더라도 우리를 공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나는 지금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뿔을 만들고 기다리겠다."
이때 염민이 이끄는 것은 대부분 보병이었고, 모용각의 군대는 모두 기병이었는데, 염민이 병력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가려 할 때 모용각의 참군 고개 말했다.
"염민이 숲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그를 제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속히 경기병을 보내 적에게 보이게 하고, 못 이기는 척 후퇴하여 적을 평지로 유인한 뒤에 전군을 들어 공격해야 합니다."
모용각이 그의 말을 따랐다. 결국, 염위의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평지로 돌아왔고, 모용각은 세 부대로 뿔을 만들어 염민이 공격하기만을 기다렸다. 모용각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염민은 성정이 경박하고 날카롭다. 또한, 그는 우리 군대가 그의 적수가 아님을 알고 있으므로, 필사적으로 우리 진영의 중앙을 돌파하려 할 것이다. 나는 지금 갑옷을 두껍게 하여 중군(中軍)에서 그가 이르기만을 기다리겠다. 그대들은 강력한 병력을 가지고, 옆에서 전투가 시작되면 즉시 염민을 포위하여 공격하라. 이렇게 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이후 모용각은 방진(方陣)을 펴고 염대에서 다시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염민의 군대는 대패하여 7,000여 명이 참수되었고, 염민은 사로잡혀 모용준에게로 보내졌다.(염대 전투) 염민을 격파한 모용각이 상산에 주둔하자, 모용준은 계성으로 가고 모용각에게 명해 중산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4월 20일, 염민이 마침내 계성에 도착하자, 모용준은 그를 일으켜 세우게 하고, 꾸짖으며 말했다.
"너는 노복이고 보잘것 없는 재주를 가진 자로서 어찌 스스로 황제라 칭할 수 있느냐?"
염민이 말했다.
"천하는 큰 혼란에 빠져있고, 너희와 같은 흉악한 자들이 교만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 아직도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나는 중토(中土)의 영웅인데, 어찌 황제라 칭할 수 없겠는가?"
이에 모용준은 노하여 염민에게 300대의 채찍질을 가한 후, 그를 용성으로 보내 처형시켰다.[8] 이리하여 염민이 죽었음에도 염민의 장수 소언(蘇彥)은 그의 장수 김광(金光)에게 수천 기병을 주어, 당시 호타(滹沱)에 있던 모용각의 군대를 기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용각이 이를 격파하고 김광을 붙잡아 처형하니, 소언은 크게 두려워 병주로 도망쳤다. 한편, 단근도 모용패의 군대를 보고는 두려워하며 동생 단사총(段思聰)과 함께 성을 들고 투항하였다.(호타 전투)

4월 25일, 모용준이 보필장군 모용평, 중위 후감 등에게 10,000 정예 기병을 주어 모용패를 도와 업을 공격하게 하였다. 염위의 대장군 장간(蔣幹)과 염민의 아들 염지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으며, 업성 외곽의 땅들은 모두 전연에게 항복한 상태였다. 이에 유녕(劉寧)과 유숭(劉崇) 형제는 업을 빠져나와 3,000기의 이민족 기병을 이끌고 진양(晉陽)으로 달아났다.

연왕(준) 4년(352년) 5월 2일[9], 모용준이 광위장군 모용군, 전중장군 모여근, 우사마 황보진 등에게 보•기 20,000명을 주어, 모용평을 도와 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길조가 많이 나타났다. 사남차(司南車)가 완성되어 모용준은 크게 기뻐하며 모용황의 사당에 이를 보고하였다. 또, 정양전(正陽殿) 서쪽에 위치한 산초나무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3마리의 새끼를 낳았으며,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각기 세워진 털이 있었다. 범성에서는 특이한 새 하나가 잡혀 헌상되었는데, 다섯 빛깔의 색으로 이루어진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용준은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것을 상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신하들은 상서롭다 답했다. 그들은 먼저 제비 새끼 머리에 깃털 왕관이 있는 것은 대연(大燕)의 용이 솟아오르고, 왕관이 하늘에 닿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또, 제비가 정양전 서쪽 산초나무에 둥지를 튼 것은 최고의 권위가 만국을 맞이하는 것을 나타내며, 세 마리의 새끼는 삼통(三統)의 징표에 해당하고, 특이한 새의 다섯 가지 색은 성스러운 연나라 조정이 오행(五行)과 사해(四海)를 다스리는 것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장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연왕(준) 4년(352년) 6월 5일[10], 장간이 정예병 5,000명을 거느리고 업성 밖으로 나와 전연군에게 도전하였다. 이에 모용평 등이 10,000 기병으로 이를 쳐서 4,000여 명을 참수하자, 장간은 홀로 말을 타고 업성으로 들어갔고, 업성 이북의 모든 군현들이 전연에 투항하였다.

상국 봉혁 등 120명이 모용준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권유하였다. 모용준이 거절하며 답했다.
"나는 본래 광활한 들판에서 사냥하던 마을 출신이고, 머리를 풀고 옷을 왼쪽으로 매는 풍습의 사람이다. 존호를 올리는 것이 나의 분수에 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서로 추대하여 바라지 않는 일을 기대한다면, 실로 그것은 과인의 덕이라 하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연왕(준) 4년(352년) 7월 29일[11], 모용준이 상산(常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때 노구에서 할거하던 왕오는 염민이 패사하고 등항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안국왕(安國王)을 자칭하였다.

연왕(준) 4년(352년) 8월 11일[12], 모용준이 모용각, 봉혁, 양무를 파견해 왕오를 토벌하게 하였다. 왕오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일전에 도망쳐왔던 염민의 아들 염조(冉操)를 전연군에게 주었다. 이에 모용각 등은 노구성 인근의 벼만 약탈하고 돌아갔다.

8월 13일, 염위의 장수교위 마원(馬願) 등이 업성 문을 열고 전연군을 맞이하였다. 대장군 장간은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와 창원(倉垣)으로 도주하고, 모용평 등은 염민의 아내 동씨(董氏), 태자 염지, 태위 신종, 사공 조유(條攸) 등과 함께 황제의 어의, 수레와 여섯 개의 인장을 계성으로 보냈다. 전국옥새는 이미 장간이 들고 동진으로 튀어서 손에 넣을 수 없었지만, 모용준은 자신의 사업을 신성화하고, 시대의 운수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염민의 부인에게서 전국옥새를 넘겨받은 것으로 꾸며, 그녀에게 '봉새군(奉璽君)'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항복한 염지는 해빈후(海濱侯), 신종은 대장군 우장사로 삼았고, 모용평은 사주(司州) 자사로 임명해 업성을 진수하게 하였다.(염위 멸망)

2.6. 칭제

연왕(준) 4년(352년) 10월 11일[13], 모용준이 계성으로 돌아갔다. 당시 후조는 멸망하고 후조의 옛 장수들은 각자 군대를 이끌고 주와 군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모두 모용준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왕탁(王擢)을 익주(益州) 자사, 기일(夔逸)을 진주(秦州) 자사, 장평을 병주자사, 이력(李歷)을 연주(兗州) 자사, 고창(高昌)을 안서장군, 유녕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한편, 모용각은 안평(安平)에 주둔해 양식을 쌓고, 공성 도구들을 제작하면서 왕오를 토벌하려 하였다. 이때 무극(無極)에서 소림(蘇林)이 거병해 천자를 칭하자, 모용각은 잠시 노구에서 돌아와 모여근의 도움을 받고 소림을 무찔러 참수하였다. 마침 왕오도 부장 진흥(秦興)에게 살해당했고, 진흥은 다시 여호(呂護)에게 살해당해 노구도 혼란스러웠다. 진흥을 죽인 여호는 스스로 안국왕을 칭하였다.

연왕(준) 4년(352년) 11월, 모용각 등 505명이 황제의 옥새를 가지고 함께 모용준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니, 모용준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2일[14]에 백관을 설치하여, 봉혁을 태위, 모용각을 시중, 양무를 상서령, 황보진을 상서좌복야, 장희(張悕)를 상서우복야, 송활을 중서감, 한항을 중서령으로 삼고, 그 외의 문무 관료들에게도 차등있게 관직을 분배하였다.

원새 원년(352년) 11월 13일, 정양전에서 마침내 황제로 즉위하여,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 죄수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연호는 '원새(元璽)'라 하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하고,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11월 15일, 모용준이 명령을 내려 조부 무선왕 모용외를 '고조 무선황제'로, 부친 문명왕 모용황을 '태조 문명황제'로 추존하였다. 그때 마침 동진의 사신이 전연을 방문하자, 모용준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돌아가 네 천자에게 말하라. 나는 부족함이 있으나, 중국(中國)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사주(司州)를 중주(中州)로 고쳐서 사예교위부를 따로 설치하고, 용성에 유대(留臺)를 세웠으며, 현도태수 을일을 상서로 임명하여 유대의 업무 전부를 그에게 위임하였다.

원새 2년(353년) 2월 17일[15], 처 가족혼씨를 황후, 아들 모용엽을 황태자로 세워, 이들 모두를 용성에서 계궁(薊宮)으로 옮겨 기거하게 하였다.

당초 후조의 석호가 살아있을 때, 석호는 화산(華山)으로 사람을 보내 명판 하나를 얻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신유(申酉)년부터 줄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 임자(壬子)년에 진인(真人)이 나타날 것이다.
이 내용을 들은 연나라 사람들은 모두 모용준이 그 진인이라 생각하였다. 또,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연(大燕)은 천명을 받아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았으니, 광기(光紀)라 하여 흑정(黑精)의 군주를 내세워야 한다 주장하였다. 따라서 마땅히 하나라의 복장을 착용하고, 주나라의 면류관을 써야 하며, 제사용 깃발은 검은색으로 해야 한다 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모두 채택하여 그대로 시행하고, 여러 문무 제후들에게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이후 모용준은 관료들의 직위를 모두 세 단계씩 올리고, 병사와 전사자들의 보상도 각각 차등을 두어, 전사한 이들에게는 추가로 2등급의 보상을 더하였으며, 그 유가족의 자손들은 전부 복권되었다. 궁중에서 오래 근무한 이들은 능력에 따라 승진시켰다.

이 시기에 동진의 녕삭장군 영호(榮胡)가 동진 조정에 반란하여 팽성(彭城)과 노군(魯郡)을 들어 모용준에게 투항하였다.

원새 2년(353년) 3월, 옛 후조의 위위 이독(李犢)이 수천 명을 모아 보벽루(普壁壘)에서 거병하였다.

원새 2년(353년) 5월, 모용준이 위장군 모용각을 보내 이독을 토벌하니, 이독이 투항하였다. 이후 모용준은 명을 내려 모용각으로 하여금 동쪽으로 가 여호를 토벌하게 하였다.

원새 2년(353년) 11월, 후조가 멸망할 때부터 낙릉(樂陵)의 주독(朱秃), 평원(平原)의 두능(杜能), 청하(清河)의 정요(丁嬈), 양평(陽平)의 손원(孫元)이 각자 성읍을 점거하며 할거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모용준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주독을 청주자사, 두능을 평원태수, 정요를 입절장군, 손원을 연주자사로 삼아 각자의 군영을 다스리게 하였다.

원새 2년(353년) 12월, 위장군 모용각, 무군장군 모용군, 좌장군 모용표(慕容彪)[16] 등이 모용준의 동생인 황문시랑 모용패를 세상을 이끌 인재로 큰 임무를 맡기에 적합하다며 여러 차례 천거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그를 사지절•안동장군•북기주자사(北冀州刺史)로 삼아 상산(常山)을 진수케 하였다. 그 해에 모용준이 탁발부의 대나라로 사신을 보내 친교를 맺었다.

원새 3년(354년) 2월, 강족 수령 요양이 사신을 보내 모용준에게 투항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모용준은 모용평을 진남장군•도독진옹익양강양형서연예10주제군사(都督秦雍益梁江揚荆徐兖豫十州諸軍事)로 삼아 여러 군대를 감독해 낙수(洛水) 일대에 주둔하게 하였다. 또, 모용강(慕容疆)을 전봉도독(前鋒都督)•독형서2주연회제군사(督荆徐二州緣淮諸軍事)로 삼아 황하 이남으로 진격해 점거하게 하였다.

원새 3년(354년) 3월, 모용각이 마침내 노구를 함락시켰고, 여호는 패하여 야왕(野王)으로 도주하면서 그 동생을 보내 모용준에게 사죄의 글을 올렸다. 이에 모용준은 여호를 하내태수로 삼았다.(기주 장악)

원새 3년(354년) 4월, 모용준이 여러 황족들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무군장군 모용군은 양양왕(襄陽王), 좌장군 모용표는 무창왕(武昌王), 위장군 모용각은 대사마•시중•대도독•녹상서•태원왕(太原王), 진남장군 모용평은 사도•표기장군•상용왕(上庸王), 안동장군 모용패는 오왕(吳王), 좌현왕 모용우는 범양왕(范陽王), 전봉도독 모용강은 낙양왕(洛陽王), 산기상시 모용의는 여강왕(廬江王), 북녕장군 모용도(慕容度)는 낙랑왕(樂浪王), 모용환(慕容桓)은 의도왕(宜都王), 모용록(慕容逯)은 임하왕(臨賀王), 모용휘(慕容徽)는 하간왕(河間王), 모용용(慕容龍)은 역양왕(曆陽王), 모용납(慕容納)은 북해왕(北海王), 모용수(慕容秀)는 난릉왕(蘭陵王), 모용악(慕容嶽)은 안풍왕(安豐王), 모용장(慕容臧)[17]은 낙안왕(樂安王), 모용량(慕容亮)은 발해왕(渤海王), 모용온은 대방왕(帶方王), 모용섭(慕容涉)은 어양왕(漁陽王), 모용위는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졌다. 또, 모용덕은 양공(梁公), 모용묵(慕容默)은 시안공(始安公), 모용누(慕容僂)는 남강공(南康公)에 봉해졌고, 상서령 양무는 사공•수상서령으로 임명되었다.

모용준은 오왕 모용결[18]에게 치소를 신도(信都)로 옮기도록 명했다가, 다시 그를 시중•녹유대사(錄留臺事)로 승진시켜 용성을 지키게 하니, 동북쪽 일대가 뜻밖에도 크게 화목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크게 싫어하여 그를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이때 그의 휘인 '결(𡙇)'에서 '夬'자가 도참서를 범한 것을 깨닫고 '夬'자를 제거해 '수(垂)'로 바꾸게 하였다.

원새 3년(354년) 7월, 모용한의 아들인 낙릉태수 모용구(慕容鉤)는 청주자사 주독과 더불어 염차(厭次)를 다스렸는데, 모용구는 자신이 황실의 종친임을 믿고 상관인 주독을 항상 업신여겼다. 결국 주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모용구를 습격해 죽인 뒤, 남쪽으로 달아나 단감에게로 갔다.

원새 3년(354년) 8월 11일[19], 모용준이 조서를 발표하여 병력을 대폭 조정하였다. 조서를 발표한 날이 병술일이라 이를 '병술거(丙戌舉)'라 칭하였다.

원새 3년(354년) 9월, 누군가가 모용준에게 송빈(宋斌)과 그 일당이 멸망한 염위의 태자 염지를 주군으로 모시고 반란을 모의한다 고변하여 모용준이 그들을 싸그리 붙잡아 주살하였다.(염지의 난)

원새 3년(354년) 10월, 모용준이 용성으로 행차하자, 대나라의 탁발십익건이 전연으로 사신을 보내 혼사를 청하였다.

원새 4년(355년) 4월, 모용준이 다시 계로 돌아왔다. 당시 유주와 기주 사람들이 모용준이 동쪽으로 옮겨갔다고 서로 놀라며 소란을 피우니, 여러 신하들이 그들을 토벌하는 것을 허락해달라 주청하였다. 이에 모용준이 말했다.
"소인배들이 짐이 동쪽으로 순행한 것을 이유로 모여서 혼란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제 짐이 이미 돌아왔으니 곧 알아서 정리될 것으로, 토벌할 필요는 없다. 하나, 예상치 못한 상황 역시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내외에 경계를 강화하라고 명령하였다.

원새 4년(355년) 5월, 전진의 하내태수 왕회(王會)와 여양태수 한고(韓高)가 각각 군(郡)을 들어 동진에 투항하였고, 전진의 난릉(蘭陵) 태수 손흑(孫黑), 제북(濟北) 태수 고주(高柱), 건흥(建興) 태수 고옹(高甕)이 각각 군(郡)을 들어 전연에 투항하였다. 이때 유성(蕕城)을 들어 전진에 항복했던 거기장군•범양공 유녕도 다시 2,000호를 거느리고 전연으로 돌아와 계성에 직접 출두하여 사죄를 청하니, 모용준이 그를 사면하고 이내 후장군으로 삼았다.

황문시랑 신윤(申胤)이 모용준에게 상소하여 말했다.
"무릇 명성은 존귀하고 예(禮)는 중시되어야 하니, 선왕의 제도와 관복의 형식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한나라 시기에 소하조참의 공은 특별하므로, 그들은 신하된 자임에도 검을 찬 채로 조정에 설 수 있었고, 입조할 때 종종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상에 그와 같은 공이 없이 없는 자들이 이런 짓을 행하면 예(禮)가 결여되므로, 동궁(東宮)에 이를 때에도 신하들은 이를 법도로 삼아 행동하여야 합니다. 위(魏), 진(晉) 시기에도 관습에 따라 동궁에서는 신발을 신지 않았는데, 작금에 황태자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시어 백관과 같은 예(禮)로 격이 낮아져 조정의 의례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태자께서는 천하를 통치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어, 여러 왕들과 함께 같은 관을 쓰고, 멀리 유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귀천(貴賤)을 특별히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와 조정의 경사는 의당 정복(正服)인 곤의(袞衣)와 아홉 문의 구슬이 아홉 줄로 달려있는 먄류관을 착용해야 합니다. 또한, 11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면 태음(太陰)의 수가 끝나니, 황종(黃鍾)의 기운이 미세하게 아래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달에는 문을 닫아걸고, 여행을 쉬면서 잘 살펴보지 않아야 합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이 달은 일이 조용해야 하며, 군자는 모든 소리와 색채를 경계해야 한다.'라 하였고, 오직 주나라의 관제에서만 '천자는 남교(南郊)에서 여덟 마리 용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일이 있어 영령이 오지 않으므로 음악을 연주하는 예(禮)가 있다고 하나, 왕자(王者)는 예를 신중히 여기고 그것을 중요하게 따릅니다. 따라서 제사나 경사와 같은 중요한 날에 대궐에서 북을 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경쾌한 북소리는 전통적인 예절에 어긋나며, 지나치게 소란스럽게 금속 소리를 내어 신령의 기운을 방해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침 복장은 고대의 예법에 따르면 주홍빛 의복을 입어야 하는데, 이는 진나라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곤의와 신발을 입어야 하며, 제후가 천자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에는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수 있는데, 물기가 많은 땅에서는 신발을 벗고 다른 복장으로 바꿔야 하듯, 이러한 경우에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지 말고 상황에 맞게 조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절은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적용해야 하며, 고대의 예법을 따르되 필요에 따라 수정하여 황제 시대처럼 영구적인 제도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에 모용준이 말했다.
"동궁에서 신발을 신거나 칼을 차지 말고, 종종걸음으로 다니도록 하라.

짐이 태상과 황태자의 복장에 대해 논의하였다. 곤의와 아홉 문의 면류관은 황태자가 착용하기에는 과하여 즉시 실행할 수 없다. 하나, 관복에 대해서는 일단 시행하고 있는 것이나 폐지된 것이 모두 상세히 정리되어야 한다. 주나라의 예법에서 관과 면류관의 제도는 군신 간에 비슷하고, 중세 이후로는 일정한 예 역시 없다. 지금 특별히 연나라의 평상관(平上冠)을 정위(廷尉) 이하 관원들에게 수여할지니, 신중히 법을 다루어 집행하도록 하라.

모든 공(公)들은 얼굴을 가리고, 대나무와 비단으로 엮은 띠로 '공(公)'자의 자격을 대신한다.

금과 비취로 된 장식은 대들보에 설치하며, 상서(尚書)가 이를 관리할 뿐이다. 중비감(中祕監)은 별도로 진주 장식을 다르게 배치하여 백성들에게 경건하고 신중한 위엄을 보여주도록 하라."

2.7. 제왕 단감 토벌

원새 4년(355년) 11월, 단란(段蘭)의 아들 단감은 염민이 후조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부터 거병하여 광고(廣固)를 점거하고 스스로 제왕(齊王)이라 칭하다가 동진에 칭번하였다. 이리하여 동진 조정에 의해 진북장군으로 임명된 단감은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중표(中表)의 의례를 운운하며 그가 칭제한 것을 비난하고, 낭산(郎山)을 습격해 전연의 장수 영국(榮國)을 패퇴시켰다.(단감의 난) 모용준은 심히 노하여 태원왕 모용각을 정토대도독으로 삼고, 무군장군 양무를 부관으로 배속시켜 그를 토벌케 하였다. 단감의 세력이 강성하다 생각한 모용준은 토벌군이 출병하기 전에 모용각에게 말했다.
"만약 단감이 군대를 보내 강을 막아서 도하할 수 없다면 여호라도 사로잡아서 돌아오라."
이후 군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먼저 강가에 도착한 모용각은 배를 띄워서 단감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때 용맹한데다 지략이 있는 단감의 아우 단비(段羆)가 단감에게 진언하였다.
"모용각은 용병에 뛰어나고, 그의 병력 또한 많아, 막을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그가 강을 건너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의 군대는 우리의 성 아래에 주둔하게 될 것이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항복을 청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굳게 성을 방어하시고, 이 단비는 정예병을 이끌고 나아가 강가에서 적을 막겠습니다. 운 좋게 제가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왕께서 대군을 이끌고 추격하시어 적의 말을 빼앗아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왕께서 즉시 항복하신다면 천호후의 지위는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감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비가 계속해서 요청하자, 단감은 분노하여 단비를 죽였다.

원새 4년(355년) 12월, 고국원왕이 전연으로 사신을 보내 아들 구부[20]를 인질로 바치고 그의 어머니를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허하고, 장수 조감(刁龕)으로 하여금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를 고구려로 호송하게 하였다. 어머니가 무사히 온 것을 확인한 고국원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고, 고구려의 특산물들을 모용준에게 바쳤다. 이에 모용준은 고국원왕을 녹영제군사(錄營諸軍事)•속대장군(束大將軍)•영주자사(營州刺史)로 임명하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했으며, 고구려 왕 호칭은 이전처럼 그대로 쓰게 하였다.

원새 5년(356년) 정월, 모용각의 군대가 강을 무사히 건너고, 광고로 곧장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광고에 이르기 전 200리 남짓에서 단감이 30,000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맞섰으나, 치수(淄水) 남쪽에서 모용각과 싸웠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모용각은 단감의 동생 단음(段欽)을 사로잡고, 단감의 우장사 원범(袁範) 등을 참수하였으며, 단감의 병사 수천 명의 투항을 받았다.(치수 전투) 대패한 단감은 재빨리 광고성으로 들어가 방어하였고, 모용각은 이내 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단감의 벗인 벽려울(辟閭蔚)이 부상을 입었는데, 모용각은 그가 훌륭한 인재라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모용각의 부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벽려울이 사망한 후였다.

원새 5년(356년) 2월, 모용각이 단감에게 항복했던 여러 성들을 회유하였다. 이에 단감이 임명한 서주자사 왕등(王騰)과 탁발부의 선우 설운(薛雲)이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모용각에게 투항하였다. 모용각은 이들을 단감에게 투항하기 전의 직책으로 복귀시키고, 양군(陽郡)에 주둔하라고 명령하였다.

원새 5년(356년) 5월, 모용준이 상서좌승 국은을 동래(東萊) 태수, 장무(章武) 태수 선우량을 제군(齊郡) 태수로 삼았다.

원새 5년(356년) 7월 12일[21], 황태자 모용엽이 사망하니, '헌회(獻懷)'로 위시(偽謚)하였다.

원새 5년(356년) 10월, 모용각은 여전히 광고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전에 여러 장수들이 그에게 속히 성을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모용각이 거절하며 말했다.
"전쟁에서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느리게 할 필요가 있을 때와 급히 취할 필요가 있는 때가 따로 있는 법이다. 만약 양측의 힘이 비슷하고, 외부에 적의 강한 지원 세력이 있다면, 뒤통수를 걱정해야 하므로 즉시 공격해야 한다. 이리하면 빠른 시간 내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나, 우리의 힘이 강하고, 적이 약하며 외부에 지원 세력까지 없다면, 그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어도 일단 묶어두고 알아서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병법에서 '열 배의 군사로 포위하고, 다섯 배의 군사로 공격한다(十圍五攻)'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단감의 은혜로 아직 적들의 마음이 아직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치수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단감이 패한 이유는 그 병력이 정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단감이 용병하는 방법을 몰라서 패했을 뿐이다. 한데, 지금은 천혜의 장애물에 의지하여 상하가 힘을 합쳐 공방을 주고 받는 상황이라, 그 위세가 일반적인 군대에 비해 배로 늘었다. 물론 급히 공격한다면 수 주 내에 반드시 정복할 것이나, 나는 우리 군사들이 다칠까 두렵다. 아직까지도 군사들은 내외로 쉬지 못하고 있어, 나는 항상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잠을 잊곤 한다. 내가 어찌 백성의 생명을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마땅히 장기적으로 접근하여 정복해야 하고, 무리해서 신속한 성과를 구할 필요는 없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감탄하며 납득하였다. 모용각의 군사들도 이를 듣고는 모두 감동하여 목책을 강화하고, 둔전을 시작했으며, 경계를 철저히 하여 성 안의 제나라 사람이 양식이나 연료를 가지러 나가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단감은 성 안에 갇혀서 땔감이나 양식을 구하지 못했고, 이내 성 안의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궁지에 몰린 단감은 하는 수 없이 모든 병력을 이끌고, 성 밖을 뛰쳐나와 모용각에게 도전하였다. 이때 모용각은 더욱 포위망을 좁혀 단감을 격파하고, 성문 앞을 기병으로 막아 단감이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단감은 돌진하여 가까스로 모용각의 기병들을 베어넘기고, 성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이미 성 안에 남은 병력들은 모두 사기를 잃은 상태였고, 굳건한 의지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단감은 부하 단운(段藴)을 동진으로 보내 구원을 청하였고, 동진 조정에서는 북중랑장 순선을 파견해 단운의 길 안내를 받으며 단감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순선이 광고성 인근에 이르렀을 때, 모용각의 군대가 자못 강성한 것을 보고 차마 광고성을 구원하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서 견성(鄄城)에서 왕등을 습격해 잡아죽인 다음 동진으로 돌아가버렸다.

원새 5년(356년) 11월 14일[22], 마지막 희망인 동진의 구원군마저 돌아가자, 단감은 면박한 채로 성에서 나와 모용각에게 투항하였다. 모용각은 이전에 배반하고 단감에게로 도망쳤던 주독을 붙잡아 계성으로 압송하게 하고, 새로운 백성들을 위무하여 제나라 땅을 안정시켰다. 모용준은 단감을 복순장군(伏順將軍)으로 삼고, 선비족과 갈족 3,000여 호를 계성으로 옮겼으며, 잡혀온 주독에게 5형을 선고하여 죽였다. 이후 모용각은 진남장군 모용진(慕容塵)을 광고에 남겨 진수하게 하고, 군대를 정돈해 귀환하였다. (광고 전투)

한편, 하비(下邳)에 머물고 있던 순선은 단감 세력이 마침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산(太山) 태수 제갈유(諸葛攸)와 고평(高平) 태수 유장(劉莊)에게 병력 3,000여 명을 주어 낭야(琅邪)를 지키게 하였다. 또, 참군 대록(戴逯) 등에게 병력 2,000여 명을 주어 태산을 방어하게 한 뒤, 순선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변성(汴城)에 주둔하고 있는 전연의 장수 모용난(慕容蘭)를 격파하여 참수한 후 돌아갔다.(변성 전투)

원새 5년(356년) 12월, 모용준이 대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혼사를 청하였다.

2.8. 업 천도

원새 6년(357년) 정월, 모용준이 유주자사 을일을 중앙으로 불러 좌광록대부로 삼았다.

광수 원년(357년) 2월 23일[23], 모용준이 차남인 중산왕 모용위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또, 연호를 '광수(光壽)'로 개원하였다.

광수 원년(357년) 5월 19일[24], 모용준이 무군장군 모용수, 중군장군 모용건(慕容虔), 호군장군 평희(平熙) 등에게 보•기 80,000명으로 철륵 정벌을 명하였다. 전연군은 북쪽 국경에서 철륵을 대파하여 100,000명 이상을 포로로 사로잡고, 130,000필의 말을 노획하였으며, 양과 소는 수억 마리를 헤아렸다. 같은 달에 모용준은 대나라로 사신을 보내 예물을 바쳤다.

광수 원년(357년) 3월, 모용준이 단감을 죽이고, 그의 부하 3,000여 명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 이때 흉노의 선우 하뢰두(賀賴頭)가 35,000여 명의 부락민을 이끌고 전연에 귀순하자, 모용준은 그를 녕서장군•운중군공(雲中郡公)으로 삼고, 평서성(平舒城)에 거주하게 하였다.

광수 원년(357년) 11월 17일[25], 계성에서 업(鄴)으로 천도하였다.(업 천도)

광수 원년(357년) 12월 19일[26], 모용준이 업궁(鄴宮)으로 들어가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동작대(銅雀臺)를 재건하였다. 정위 상위가 상소하여 조정의 정책과 관행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강조하자, 모용준은 상위의 상소를 받아들여 호군장군 평희를 장작대장으로 삼아 모용외와 모용황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전진의 평주(平州) 자사 유특(劉特)이 5,000호를 거느리고 전연에 투항하였다. 이 시기에 하간(河間) 사람 이묵(李黑)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주군(州郡)을 침략하고, 이 과정에서 조강(棗彊)현령 위안(衛顏)을 살해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장락태수 부안(傅顏)을 보내 반란군을 무찌르게 하였고, 이묵은 이내 부안에게 패하고 붙잡혀 참수당했다. 이후 모용준은 오왕 모용수를 동이교위•평주자사로 삼아 요동을 진수하게 하였다.

광수 2년(358년) 정월, 본래 하내태수였던 풍앙(馮鴦)은 상당(上黨)에서 상당태수를 자칭하며 할거하다가, 병주의 군벌인 장평에게 붙었다. 이후 장평이 전연에 귀순할 때, 장평이 모용준에게 누차 말한 덕에 풍앙은 사면받아 경조(京兆) 태수로 임명되었으나, 풍앙은 반란할 마음을 품고 여호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동진 조정과 내통하였다. 이를 알게된 모용준은 상용왕 모용평을 보내 상당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광수 2년(358년) 2월, 전진의 천왕 부견이 장평을 토벌해 그를 굴복시켰다.

광수 2년(358년) 3월, 모용준은 영군장군 모여근을 파견해, 모용평을 도와 풍앙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시 모용평은 상당을 천천히 공략할 계획이었으나, 모여근이 속전속결로 끝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그 의견을 따랐다. 갑자기 전연군의 기세가 날카로워지자, 풍앙과 그 무리는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풍앙이 성을 빠져나와 야왕의 여호에게로 도망치면서 그 무리가 모두 상당을 들어 전연에 투항하였다.(상당 전투)

상산사(常山寺) 왕모(王母)의 제단 앞에 있던 큰 나무가 뽑히자, 그 뿌리 아래에서 특이하게 생긴 옥 70개와 73개의 광채가 나는 기이한 물건을 발견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모용준은 산신의 명령이라 여기고, 상서랑 단근(段勤)에게 명하여 태뢰(太牢)의 예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재단 옆을 오갔는데, 성질이 다소 온순하여 사람이나 사물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광수 2년(358년) 5월, 모용준이 요서로 사냥을 나가 검은 토끼를 잡았다.

광수 2년(358년) 9월, 장평은 이전에 옛 후조의 장수인 이력, 고창과 더불어 모용준에게 투항하고 칭번한 바 있었으나, 그들은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지 않아 동진과 전진에도 투항하여 각기 작위를 받았다. 그들은 겉으로는 공물을 끊이지 않게 하면서도 방어를 굳게 다져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으려 하니, 모용준은 상용왕 모용평을 보내 장평을 공격하고, 사공 양무를 보내 동연(東燕)의 고창을 토벌하게 하고, 낙안왕 모용장을 보내 복(濮)의 이력을 토벌하게 하였다. 비록 양무가 여양에서 고창의 부하 장수와 싸워 이기지 못하였지만, 모용장은 이력을 형양(滎陽)으로 달아나게 하여 그 무리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 장평의 정서장군 제갈양(諸葛驤), 진북장군 소상(蘇象), 녕동장군 교서(喬庶), 진남장군 석현(石賢) 등이 각자 보루를 들어 전연에 투항하니, 이때 투항한 보루의 수가 도합 138개에 달하였다. 이에 장평은 군사 3,000여 명을 거느리고 평양(平陽)으로 들어가 전연에 항복하였다.(병주 장악)

광수 2년(358년) 10월, 동진의 태산태수 제갈유가 먼저 전연의 동군(東郡)을 침공해 무양(武陽)으로 들어갔다. 모용준은 대사마 모용각으로 하여금 사공 양무, 낙안왕 모용장 등을 통솔해 병력을 이끌고 제갈유를 저지하게 하였다. 제갈유는 모용각에게 패하여 태산으로 도망쳤고, 모용각은 계속 진격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빼앗고 태수와 재상을 두었다.(무양 전투) 이 시기에 모용준은 상서랑 단근을 동진과 내통한 죄로 처형하였고, 단근의 동생 단사(段思)는 동진으로 도망쳤다. 동진의 침략을 막아낸 모용준은 관서(闗西) 일대를 도모할 마음을 품었다.

광수 2년(358년) 12월, 모용준이 주와 군의 문서를 검열하여 실제 장정을 조사하게 한 결과, 누락된 장정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당시 모용준은 대대적으로 동진과 전진을 정벌할 야망을 품고 있었기에, 주와 군에 엄격한 재조사를 진행하라 명령하고, 한 가구 당 1명의 장정만을 제외한 모든 장정을 징발하게 하여, 보병의 수를 50만으로 채우려 하였다. 모용준은 내년 봄까지 병력을 대집결시켜 낙양(洛陽)으로 진공할 생각이었으나, 무읍(武邑) 사람 유귀(劉貴)가 백성의 피폐와 징병의 불법을 극렬히 주장하며,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이 반드시 국가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가 당시의 정치적 불합리한 점을 13가지로 나열하자, 모용준은 이를 듣고 기뻐하여 공경과 함께 많은 논의 끝에 대체로 수용하기로 하였고, 병사 징발을 장정 3~5명으로 완화하여 여유를 두고 준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기일을 늘려 내년 겨울까지 업(鄴)에 모이게 하였다.

당시 전연에는 수조와 징병이 자주 행하여졌기에, 사자가 자주 지방에 파견되었는데, 안그래도 길이 복잡한 마당에 교통까지 불편해져 군과 현에서 모두 고통을 호소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태위 봉혁의 요청을 받아들여, 앞으로 군사적 긴급 상황이 아닐 경우 사자를 보내지 말 것을 명했고, 나머지 세금 거두는 것은 주군에 알아서 맡기기로 하여, 이를 감독하던 자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였다.

동진의 서연2주자사 순선이 산치(山茌)를 공격해 전연의 태산태수 가견을 잡아서 죽였다. 이에 청주자사 모용진이 사마 열명(悅明)을 파견해 순선을 격파하고 산치를 탈환했으며, 모용준은 충절을 지켜 사망한 가견의 아들 가활(賈活)을 임성(任城) 태수로 삼았다.(산치 전투)

2.9. 동진 정벌

광수 3년(359년) 2월, 모용준이 현현리(顯賢里)에 소학(小學)을 세워 제왕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광수 3년(359년) 3월, 모용준이 그의 아들 모용홍을 제북왕(濟北王), 모용충을 중산왕(中山王)으로 봉하였다.

같은 달에 모용준은 포지(蒲池)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를 읊으며 경전과 역사에 대해 담론하였다. 그러다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晋)에 관한 화제가 나오자, 모용준은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과거 위무제가 창서(倉舒)를 추모하며 애통해 하고, 손권손등을 애도함이 끝이 없었는데, 짐은 늘 이 두 임금이 빼어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대아(大雅)의 체통을 잃었다고 여겼었다. 하나, 경선(景先, 모용엽의 字)을 잃은 이래로 짐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중백(中白)이 되고서야 비로소 두 임금이 족히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경들은 경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짐이 그를 위해 애도하는 것이 장래에 괴이한 일로 남지 않겠는가?"
그때 사도 좌장사 이적이 대답하며 말했다.
"헌회태자께서 동궁에 계실 적에 신은 중서자(中庻子)로서 황송하옵게도 가까이에서 모셨기에, 태자의 성질(聖質)과 지업(志業)을 신은 실로 감히 모르지 않습니다. 신이 듣기로 '도(道)가 갖추어지고 허물이 없는 것은 오직 성인(聖人)뿐이다.'라 하였는데, 돌아가신 태자께서는 여덟 가지 큰 덕(德)이 있었으며, 결점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경의 말은 지나치나, 시험삼아 말해보아라."
이적이 다시 말했다.
"지극한 효도는 본래의 성품에서 비롯되어 도(道)와 하나가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첫번째 덕입니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지혜롭게 깨닫고, 기민한 생각이 물 흐르는 듯하니, 이것이 두번째 덕입니다. 침착하고 굳건하며, 이치를 잘 판단하고 깊은 곳까지 이르니, 이것이 세번째 덕입니다. 아첨을 미워하고 사물에 밝으며, 우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직언을 받아들이니, 이것이 네번째 덕입니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현자를 사랑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다섯번째 덕입니다. 영명한 자질이 옛 사람보다 낫고, 재주와 업적이 시대를 초월하였으니, 이것이 여섯번째 덕입니다.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스승을 존경하며, 도(道)를 중시하니, 이것이 일곱번째 덕입니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열심히 백성의 고통을 돌보니, 이것이 여덟번째 덕입니다."
이를 들은 모용준이 말했다.
"비록 경이 기리며 칭찬하기 위해 한 말이기는 하나,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짐이 죽어도 걱정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짐은 당(唐), 우(虞)처럼 덕있는 자에게 양보해 천하를 다스리게 할 수는 없으나, 삼왕(三王)과 가깝도록 그들을 본받아 대대로 전수할 것이다. 경무(景茂, 모용위의 字)는 아직 어려서 기예(器藝)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경은 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적이 말했다.
"태자의 천부적인 자질은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하여 나날이 성경(聖敬)이 높아지고 있으나, 앞서 언급한 팔덕(八德)을 지니지 않았고, 두 가지의 결점을 아직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두 가지의 결점이란 평소에 밖에 나가셔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다는 점인데, 이것들은 모두 해로운 행실입니다."
이에 모용준이 모용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양(伯陽, 이적의 字)의 말은 약석(藥石)과도 같이 은혜로운 말이다. 너는 마땅히 그것들을 경계하거라."
그러나 모용위는 이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후 모용준은 명령을 내려 고령자나 병약자, 홀로 사는 자들 중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이들에게 쌀과 비단을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

광수 3년(359년) 4월 17일, 모용준이 밤에 자다가 석호가 나타나 이빨로 자신의 팔을 물어뜯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이에 명령을 내려 석호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을 찾았으나, 시신은 기이하게도 온데간데 없었다. 모용준은 시신의 위치를 알고 있는 자를 찾기 위해 100금의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한참동안 아는 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업에서 이도(李莵)라는 여인이 나타나, 스스로 석호에게 무척 총애받았던 후궁이라 주장하며, 석호의 시신은 그 무덤이 아니라 동원(東苑)에 매장되어 있음을 일러바쳤다. 곧바로 동원으로 행차한 모용준은 구덩이를 파면서 석호의 시신을 찾았고, 세 군데 정도 팠을 즈음에 실제 석호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발견하였다. 모용준이 관을 열어 시신을 꺼내어 보니, 시신은 굳어 있었지만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모용준은 석호의 시신을 발로 밟고 욕하며 외쳤다.
"죽은 오랑캐가 감히 살아있는 천자(天子)의 꿈에 나오느냐!"
그리고는 어사중위 양약(陽約)에게 석호의 잔혹한 죄를 나열하라 명령한 뒤, 석호의 시신을 채찍으로 때리고 장수(漳水)에 내다버렸다.

광수 3년(359년) 7월, 동진에 투항해 평북장군으로 임명된 고창이 전연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마(白馬)에서 형양으로 달아났다.

광수 3년(359년) 8월, 동진의 태산태수 제갈유가 다시 20,000여 병력을 이끌고 전연을 침략하여, 석문(石門)으로 들어가 하저(河渚)에 진을 쳤다. 이때 제갈유의 부장 광초(匡超)는 숭오(嵩嶅)와 소관(蕭館)에 따로 진을 쳤으며, 독호 서경(徐冏)이 수군 3,000명으로 함선들을 거느리고, 동서를 오가면서 제갈유와 광초의 진을 연결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상용왕 모용평과 장락태수 부안 등에게 보•기 50,000명을 통솔하여 동진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부안 등은 동아(東阿)에서 제갈유와 전투를 벌여 대파하였다.(동아 전투)

광수 3년(359년) 10월, 모용준이 남진하여 장강 동쪽에서부터 동진을 침구하자, 동진 조정은 서중랑장 사만을 파견해 하채(下蔡)에 주둔하게 하고, 서중랑장 치담은 고평(高平)에서 북진하여 전연을 역으로 침공하게 하였다. 하채에 도착한 사만은 먼저 정로장군 유건(劉建)을 보내 마두성(馬頭城)을 수리하게 하고,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와영(渦潁)으로 들어가 낙양(洛陽)을 지원하였다. 이때 치담이 병에 걸려 팽성(彭城)으로 귀환했는데, 사만은 치담이 퇴각했다는 소식만 듣고 전연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퇴각한 것이라 착각하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만이 섣불리 군대를 후퇴시키니, 갑작스런 퇴각 소식에 병사들은 크게 놀라 무너졌고, 전연군은 그 틈을 타 사만의 군대를 공격해 궤멸시켰다. 전연군은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허창(許昌), 영천(穎川), 초(譙), 패(沛) 등 예주 산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예주 장악) 이때 하란(賀蘭), 섭륵(涉勒) 등 새북(塞北)의 일곱 부락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로써 강남의 한족 왕조인 동진, 후조를 몰락시킨 관중(혹은 관서)의 저족 왕조 전진과 더불어 중원을 삼분하게 되었다.

파일:전량-전진-전연-동진.jpg

2.10. 최후

광수 3년(359년) 12월 17일[27], 갑자기 병에 걸린 모용준이 침상에 누워 동생인 태원왕 모용각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심각하여 숨이 찰 지경인 것을 보아하니, 마땅히 이겨내지 못할까 두렵구나. 수명이란 길거나 짧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한스러워 할 것이 또 있겠는가! 다만, 두 적(동진, 전진)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는데, 경무(景茂)가 아직 어려서 많은 고난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되는구나. 나는 멀리 송선공(宋宣公)을 따르듯이, 사직(社稷)을 너에게 맡기고자 한다."
모용각이 말했다.
"태자께서는 비록 어리시나, 천성이 지혜롭고 성스러우니, 반드시 잔악한 이들을 멸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시어 형벌을 받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臣)이 어찌 정통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모용준이 노하여 말했다.
"형제 간에 어찌 헛되이 꾸며서 말하느냐!
모용각이 답했다.
"폐하께서 만약 신(臣)이 천하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신다면, 어찌 능히 어린 주인을 잘 보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에 모용준이 기뻐하며 말했다.
"네가 주공(周公)의 일을 수행한다면, 내가 또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이적은 청렴하고 반듯하며 충량하니, 그에게 큰 일을 맡기기 적합하다. 너는 그를 그를 잘 대하라."
이후 모용준은 오왕 모용수를 업으로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이 무렵, 모용준의 징집령에 의해 각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전연의 군사들이 업성에 모여들었는데, 도적들이 이 틈을 타고 마구잡이로 일어나 매일 밤마다 공격하고 아침저녁으로 길을 차단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백성들의 세금을 느슨하게 해주어 특별한 금지령을 정하고, 도적 중에서 서로 고발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려 봉거도위로 삼았다. 이로써 도적의 두목인 목곡화(木穀和) 등 100여 명을 체포해 주살하니 비로소 그치게 되었다.

광수 4년(360년) 정월 20일[28], 모용준은 병환이 조금 차도를 보여 업성에 모인 대규모 병력을 친히 사열하였다. 이후 태원왕 모용각과 사공 양무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진을 대대적으로 정벌하라 명하려 하였으나, 곧 병세가 심각해져 모용각, 양무, 모용평, 모여근 등을 불러 유언을 전하고 정사를 보좌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21일에 응복전(應福殿)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42세.[29] 재위 12년만이었다. 그는 황제로 지낼 때에도 문서와 서적을 좋아하였고, 성격은 엄중하고 신중하여 위엄이 있었다. 그는 편안한 복장으로 조정에 선 적이 없으며, 한가하더라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건희 원년(360년) 3월, 모용준은 용릉(龍陵)에 매장되었고, 위시(偽謚)로 '경소황제(景昭皇帝)'라 하였으며, 묘호는 '열조(烈祖)'이다. 여담으로 모용준이 애써 징집한 병력들은 그의 사후 모여근의 반란까지 겹치면서 모두 놀라 뿔뿔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3.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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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인년 계묘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2월 28일이고, 양력으로 4월 19일이다.[2] 혹은 모용교(慕容交)[3] 경술년 경진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3월 5일이고, 양력으로 4월 27일이다.[4] 앞에서 항복한 방약과 동일 인물. 봉혁에게 속아서 사로잡혔다는 이유로 '조(釣)'로 개명당했다.[5] 임자년 임인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2월 16일이다.[6] 임자년 을사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4월 5일이고, 양력으로 5월 5일이다.[7] 임자년 을사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4월 17일이고, 양력으로 5월 17일이다.[8] 염민 사망 얼마 후 큰 가뭄과 메뚜기 재해가 일어나자 염민이 죽은 뒤 조화를 부린 거승로 생각해 무도천왕으로 추시하고 제사를 올렸다.[9] 임자년 병오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5월 2일이고, 양력으로 5월 31일이다.[10] 임자년 정미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6월 6일이고, 양력으로 7월 4일이다.[11] 임자년 무신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7월 29일이고, 양력으로 8월 25일이다.[12] 임자년 기유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8월 11일이고, 양력으로 9월 6일이다.[13] 임자년 신해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10월 1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4일이다.[14] 임자년 임자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352년 11월 12일이고, 양력으로 353년 1월 3일이다.[15] 계축년 을묘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353년 2월 17일이고, 양력으로 353년 4월 6일이다.[16] 또는 모용팽(慕容彭)[17] 또는 모용함(慕容咸)[18] 모용패와 동일 인물. 당초 모용황은 모용패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총애하여 세자로 삼으려 했는데, 신하들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모용준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황은 모용패를 모용준보다 더욱 총애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준은 모용패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모용패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이빨을 부러뜨리자, 모용준이 명령을 내려 그의 휘를 '결(𡙇)'로 바꿨다.[19] 갑인년 계유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8월 11일이고, 양력으로 9월 14일이다.[20] 훗날의 소수림왕인지는 불명.[21] 병진년 병신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7월 12일이고, 양력으로 8월 24일이다.[22] 병진년 경자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11월 14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2일이다.[23] 정사년 계묘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2월 23일이고, 양력으로 3월 29일이다.[24] 정사년 병오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5월 19일이고, 양력으로 6월 22일이다.[25] 정사년 임자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11월 17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4일이다.[26] 정사년 계축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357년 12월 19일이고, 양력으로 358년 1월 15일이다.[27] 기미년 정축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359년 12월 17일이고, 양력으로 360년 1월 21일이다.[28] 경신년 무인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1월 20일이고, 양력으로 2월 22일이다.[29]십육국춘추》만 53세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