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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16:31:31

윤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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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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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尹緯
생몰연도 불명

후진의 인물. 자는 경량(景亮). 진주(秦州) 천수군(天水郡) 출신.

2. 생애

윤위는 어릴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으며, 재산을 관리하지 않았다. 그의 키는 8척이었고, 허리 둘레는 10위에 달했으며, 기개는 크고 웅장하였다. 어떠한 일에 대해 의논할 때에는 시원하고 기개가 넘쳤고, 항상 책을 읽다가 재상이 공을 세우는 대목에 이르면 자주 독서를 멈추고 한숨을 쉬곤 하였다. 하지만 같은 집안 사람인 윤적(尹赤)은 본래 강족 추장 요양을 따르던 인물이었기에, 천왕 부견은 윤씨 가문의 자제들을 모두 금고(禁錮)에 처하여 임관시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윤위의 출사는 늦어져, 만년에야 이부랑에 임명될 수 있었다. 윤위의 풍모와 뜻은 호탕하고 패기 있었으며, 이부랑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였다.

부견 재위 말년에 요성(妖星)이 동정(東井)에 나타났다. 동정(東井)은 진나라(秦)를 뜻하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윤위는 부견이 멸망할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하늘을 향해 두 번 절하였다. 이후 눈물을 흘리며 길게 한숨을 쉬자, 친구인 약양(略陽) 사람 환식(桓識)이 이를 이상히 여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윤위가 말했다.
"하늘의 뜻이 이와 같으니, 이제야 패왕이 날아오를 때가 되었소. 우리도 어느덧 지팡이를 짚고 다닐 날이 왔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기 어려웠으니, 내 재능과 뜻을 펼치지 못할까 두려워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이오."
이후 윤위는 요장의 별기교위로 등용되었다.

건원 20년(384년) 4월, 요장이 천왕 부견의 명령을 받고 거록공 부예(苻叡)와 함께 모용홍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부예가 전사하였다. 요장은 장사 조도(趙都), 참군 강협(姜協)을 보내 부견에게 사죄하였으나, 부견은 노하여 이 둘을 모두 죽여버렸다. 요장이 두려워 마목(馬牧)으로 도망오자, 윤위는 그곳에서 윤상(尹詳), 방연(龎演) 등과 함께 여러 호걸들을 규합하여 50,000여 호를 거느리고 요장을 맹주로 추대하였다. 이후 요장은 윤위를 우사마로 삼았다.

건원 21년(385년) 6월, 천왕 부견이 선비족에게 패망하자, 요장은 윤위를 보내어 부견에게 양위를 요구하게 하였다. 이때 부견이 윤위에게 물었다.
"경은 짐으로부터 어떤 관직을 받았는가?"
윤위가 답했다.
"상서랑입니다."
부견은 탄식하며 말했다.
"경은 재상(宰相)의 재능을 가진 자로, 왕경략(王景略)과 동급이다. 그러나 짐이 이를 알아채지 못했으니, 멸망하는 것도 당연하구나."

윤위는 장소를 본받아,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빙익(馮翊) 사람 단긍(段鏗)은 성품이 교활하였는데, 요장은 그의 박식함을 총애하여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윤위는 불가하다 주장하였으나, 요장이 따르지 않았다. 이후 윤위는 여러 번 사람들 앞에서 단긍을 모욕하였고, 단긍은 이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결국 이는 요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요장은 이에 대해 윤위에게 물었다.
"경은 학문을 좋아하는 성품도 아니면서 어찌 학문하는 자를 미워하는가?"
윤위가 답했다.
"신(臣)은 학문을 미워하지 않고, 단지 단긍의 정직하지 못함을 미워할 뿐입니다."
그러자 요장이 다시 물었다.
"경은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한다. 늘 소하에 비한다 하던데, 정말로 경은 소하만큼 뛰어난가?"
윤위가 답했다.
"한나라의 고조와 소하가 함께 평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서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폐하께서는 귀족 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신(臣)을 천하게 여기십니다."
이에 요장이 말했다.
"경은 진실로 소하에 미치지 못한다. 어찌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윤위가 되물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한나라의 고조만큼 뛰어나십니까?"
요장이 말했다.
"짐은 실로 한나라의 고조만큼 뛰어나지 않다. 따라서 경이 소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윤위가 말했다.
"한나라의 고조가 폐하보다 나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단긍과 같은 무리를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장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단긍을 북지(北地) 태수로 내보냈다. 이후 윤위는 상서좌복야로 승진하였다.

건초 6년(391년) 12월, 이전에 배반하여 전진에 투항하였던 예주자사 구요(苟曜)가 다시 후진에 항복하자, 윤위는 태자 요흥의 명령을 받고 구요를 꾸짖은 뒤에 주살하였다.

건초 7년(392년) 3월, 무소제 요장이 병들어 눕게 되자, 윤위는 장안을 진수하였다.

건초 8년(393년) 7월, 고제 부등이 야인보(野人堡)에서 두충을 공격하니, 두충은 후진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윤위가 무소제 요장에게 진언하였다.
"태자는 인자하고 후덕하다는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져 있으나, 영략(英略)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태자로 하여금 부등을 공격하게 하여 그 영략을 드러내도록 하소서."
요장이 이를 채택하여 태자 요흥에게 두충을 구원하게 하였고, 요흥은 전진의 호공보(胡空堡)를 공격하였다. 부등이 호공보를 구원하기 위해 야인보의 포위를 풀자, 요흥은 방향을 틀어 평량(平涼)을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후 요장은 사자를 보내 요흥에게 장안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건초 8년(393년) 12월, 무소제 요장은 태위 요민(姚旻), 상서우복야 요황과 좌복야 윤위, 장수 요대목(姚大目), 상서 적백지(狄伯支) 등을 불러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고, 이들에게 유조를 받들게 하여 태자 요흥의 보정을 부탁한 뒤 붕어하였다. 하지만 요흥은 즉시 발상하지 않고 일단 대장군을 자칭하였으며, 윤위를 장사, 적백지를 사마로 삼아 전진 정벌에 몰두하였다.

건초 9년(394년) 4월, 고제 부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육맥(六陌)에서 폐교(廢橋)로 향하자, 안원장군 요상은 마외보(馬嵬堡)를 점거하여 전진군을 막았다. 이에 태자 요흥도 윤위를 파견해 요상을 구원하게 하였고, 윤위는 폐교를 점거해 위수(渭水)의 물길을 끊었다. 당시 전진군은 요상과 싸우면서 위수에서 식수를 공급하고 있었기에, 병사들이 탈수로 죽어가는 것을 본 부등은 급히 폐교를 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요흥은 적백지를 보내
"부등은 궁지에 몰린 도적이니, 의당 신중하게 대처하여 그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라며 장기전을 준비하라는 말을 전하게 했지만, 윤위가 반대하며 말했다.
"선제(先帝)께서 승하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하여 힘을 모아 적을 잡지 않으면, 큰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부등을 요격해 그날 밤에 대파하였다. 부등은 홀로 말을 타고 평량으로 들어가 패잔병을 어느정도 수습한 후, 마모산(馬毛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후 부등이 결국 요흥에게 붙잡혀 살해당하면서 전진이 멸망하였고, 윤위는 황제로 즉위한 요흥을 섬기며 보좌하였다. 그는 보국장군, 사예교위, 상서우복야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청하후(清河侯)에 봉해졌다.

한번은 윤위의 친구인 농서(隴西) 사람 우수(牛壽)가 한중(漢中)의 유민을 이끌고 문환제 요흥에게 귀순하였다. 우수가 윤위에게 말했다.
"족하는 평생을 밝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재능이 있어 공적을 세울 수 있다고 하였지만, 도(道)가 쇠하여 두 소(疏)와 주운(朱雲)을 추억하고 그들의 직언을 발휘할 수 없다면 결국 족하도 호광(胡廣) 같은 자들처럼 세태에 물들 것이오. 지금 그 시기가 왔고,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날이 되었으니, 힘써야 하지 않겠소?
윤위가 답했다.
"내가 바라던 바가 그러하나, 아직도 이오(夷吾)에게 재상을 맡기거나 한신(韓信)을 알아볼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부끄럽소. 그러나 공을 세우고 업적을 이루는 데 있어, 예전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오."
요흥이 이를 듣고 윤위에게 물었다.
"그대와 우수의 말이 어찌 그리 거창한가? 공을 세우고 업적을 이루는 데 있어 스스로를 옛 사람에 비하면 어떠하다 생각하는가?"
윤위가 답했다.
"신(臣)은 실로 옛 사람에 비하면 부끄럽지 않다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운(時運)을 만나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800년의 기틀을 열었고, 폐하께서 용처럼 비상하실 때 부등을 제거하고 진(秦)과 옹(雍)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죽어서도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것이니, 옛 군자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에 요흥이 크게 기뻐하였다.

황초 4년(397년) 9월, 후진의 태후 사씨(虵氏)가 사망하였다. 문환제 요흥은 예법을 어겼을 정도로 심히 애도하였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은 한(漢)이나 위(魏)의 고사를 따라 즉시 장례를 마치는 것이 길하다 하였다. 상서랑 이숭(李嵩)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효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선왕의 높은 덕목입니다. 마땅히 성인의 본성을 따르고 도덕적 가르침을 빛내야 합니다. 따라서 장례를 모두 마친 후에는 소복을 입고 조정을 주재하십시오."
이에 윤위도 상소를 올려 말했다.
"이숭이 예법을 어기고 규정을 넘었습니다. 유사(有司)에 맡겨 죄를 논하게 하소서."
하지만 요흥은 불허하며 말했다.
"이숭은 충신이자 효자인데, 무슨 죄가 있겠나! 그의 의견을 따르겠다."

이후 윤위가 사망하자, 문환제 요흥은 심히 애석해하며 그를 사도로 추증하고, 태묘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충성후(忠成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