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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06:24:41

두충(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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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竇衝
생몰연도 불명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익주(益州) 무도군(武都郡) 출신. 전진이 비수대전 이후로 무너지자 자립하여 진왕(秦王)을 칭하면서 자립했다.

2. 생애

건원 4년(368년) 3월, 천왕 부견의 명령을 받고 조공(趙公) 부쌍(苻雙), 연공(燕公) 부무(苻武)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 후장군 양성세(楊成世) 등이 상규(上邽)에서 부쌍의 장수 구홍(苟興)에게 패하였다.

건원 4년(368년) 4월, 천왕 부견은 30,000 병력을 추가로 발동해 부쌍과 부무를 다시 토벌케 하고, 서현후 부아와 좌금장군을 지내고 있던 두충에게 명해 우림기병 7,000기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양성세 등을 무찌른 부쌍과 부무는 구홍을 선봉을 삼고, 승세를 타 빠르게 진격하였다가 유미(榆眉)에서 토벌군을 만나 대패하고 상규로 도망쳤다.

건원 4년(368년) 7월, 토벌군을 지휘하던 무위장군 왕감(王鑒) 등과 함께 상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부쌍과 부무를 베었다. 이 공으로 두충은 좌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16년(378년) 4월, 행당공(行唐公) 부락이 화룡(和龍)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두충은 보병교위 여광과 함께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부락을 토벌하러 향하였다.

건원 16년(378년) 5월, 부락의 형인 북해공 부중(苻重)이 합류하면서 중산(中山)에 주둔한 반란군의 무리가 100,000명에 이르렀으나, 두충과 여광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도 부락의 무리를 대파하고 부락과 그 장수 난주(蘭殊)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북해공 부중은 본거지인 계성(薊城)으로 도망을 시도했다가 여광에게 참수당하였다.

건원 19년(383년) 8월, 하북을 평정한 천왕 부견은 본격적으로 강동까지 병합할 야심을 품고 강족 요장을 용양장군으로 삼은 뒤에 요장에게 말했다.
"짐은 본래 용양장군을 지냄으로써 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직책을 다른 자에게 내린 적이 없었으나, 지금 그대에게 이를 수여하노라."
그때 두충이 말했다.
"왕자(王者)는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폐하께서 이처럼 이르시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말이옵니다."
이에 부견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원 20년(384년) 3월, 북지장사 모용홍이 반란을 일으켜 화음(華陰)에서 부견이 보낸 장수 강영(强永) 패퇴시키고, 도독섬서제군사(都督陝西諸軍事)•대장군•옹주목(雍州牧)•제북왕(濟北王)을 자칭하였다. 천왕 부견은 자신의 아들인 광평공 부희(苻熙)를 옹주자사로 삼아 포판을 수비케 하고, 거록공 부예(苻叡)를 도독중외제군사•위대장군•녹상서사로 삼아 50,000명의 병력을 주고 두충을 장사, 요장을 사마로 배속시켜 모용홍을 토벌케 하였다.

건원 20년(384년) 4월, 모용홍의 동생 모용충도 형에게 호응하여 20,000 군사를 거느리고 포판(蒲阪)으로 진격해오자, 두충은 하동(河東)에서 모용충의 군대와 싸워 대파하였다. 모용충은 기병 8,000기만 이끌고 도망쳐 모용홍과 합류하였다.

건원 20년(384년) 6월, 천왕 부견이 두충 등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히 20,000 군대를 일으켜 후진을 건국한 요장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였다. 전진군은 북지(北地)에서 후진군을 격파하여 요장을 조씨오(趙氏塢)로 몰아세웠고, 호군장군 양벽(楊璧)이 3,000 기병으로 요장의 퇴로까지 차단하였다. 이때 두충은 좌군장군에 임명되어 우군장군 서성, 진군장군 모성(毛盛)과 함께 후진군을 다시 격파하고, 둑을 쌓아 조씨오로 통하는 수로를 끊었다. 궁지에 몰린 요장은 동생인 진북장군 요윤매(姚尹買)에게 20,000 군사를 주어 전진군의 둑을 파괴하게 하였지만, 두충이 이를 간파하고 학작거(鶴雀渠)에서 요윤매를 공격해 요윤매와 후진군 13,000여 명을 죽였다. 후진군은 얼마 안 가 갈증에 시달려 무리가 붕괴되기 직전에 이르렀으나, 운이 좋게도 비가 와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고, 때마침 모용충의 선비족 군대가 장안성을 공격해준 덕에 전진군까지 물러가면서 겨우 멸망을 면하였다.

건원 21년(385년) 정월, 모용홍이 부하들에게 피살되면서 그 무리의 추대를 받은 모용충은 서연을 건국하고 장안성을 포위하였다. 모용충이 야밤에 상서령 고개(髙蓋)를 보내 장안성을 습격케 하니, 고개는 장안성의 남성(南城)으로 들어갔다. 이에 두충은 전금장군 이변(李辨)과 더불어 고개를 격파해 남성을 금방 되찾았고, 서연군 1,800여 명을 죽여 기근으로 먹을 게 없던 병사들에게 그 고기를 나누어 먹게 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11월, 태자 부굉이 장안성을 버리면서 성은 서연군에게 넘어갔고, 천왕 부견은 요장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하니, 두충은 자천(茲川)을 점거해 수만 무리를 모으고 애평제 부비에게 전진의 잔존 세력들을 합쳐 요장을 토벌할 것을 상표하였다. 이에 부비는 두충을 양주목(梁州牧)•개부의동삼사•산기상시로 삼았다.

태안 2년(386년) 6월, 좌승상•태위 왕영(王永)이 후진의 요장과 후연의 모용수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사방에 뿌려 잔존 전진 세력들을 자극하였다. 이에 천수(天水)의 강연(姜延), 하동의 왕소(王昭), 빙익(馮翊)의 구명(寇明) 등 아직도 전진을 지지하는 수많은 군벌들이 들고일어나고, 각기 부비에게 사자를 파견해 충성을 맹세하였다. 당시 전진의 맹장 등강의 아들인 관군장군 등경(鄧景)은 5,000명의 무리를 모아 팽지(彭池)를 점거하고 자천의 두충과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어 후진을 공격해 세력을 크게 떨치니, 후진의 황제 요양은 크게 두려워 근심하였다.

태초 2년(387년) 3월, 전사한 애평제 부비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고제 부등은 두충을 남진주목(南秦州牧)•거기대장군으로 삼고 후진 정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두충은 견(汧), 옹(雍) 두 성을 공격해 떨어뜨리고, 후진의 장수 요원평(姚元平), 장략(張略) 등을 살해하였다. 요장은 반격하여 견성 동쪽에서 두충을 쳤으나 패하였다.

태초 4년(389년) 10월, 고제 부등이 두충을 대사마•표기대장군•전봉도독농동제군사(前鋒都督隴東諸軍事)•옹주목으로 삼고, 함께 후진이 점거하고 있는 장안성을 도모하기로 약조하였다. 이때 두충은 먼저 번천(繁川)에서 나아가 장안으로 향하기로 합의하였다.

태초 7년(392년) 10월, 고제 부등이 두충을 좌승상으로 삼으니, 두충은 화음(華陰)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그러나 동진의 영토를 넘보다가 호성(湖城)에서 동진의 하남태수 양전기에게 격파당하였고, 두충은 화음으로 패주하였다.

태초 8년(393년) 6월, 고제 부등에 의해 우승상에까지 오른 두충은 항상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는데, 어느 날 고제 부등에게 자신을 천수왕(天水王)에 봉해달라 청하였다. 부등은 이를 불허하자, 두충은 자립하여 스스로 진왕(秦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원광(元光)'으로 정해 개원하였다.

원광 원년(393년) 7월, 고제 부등이 야인보(野人堡)에 주둔해있던 두충을 공격하니, 두충은 후진의 요장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요장이 태자 요흥을 보내 전진의 호공보(胡空堡)를 공격케 하자, 부등은 하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호공보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돌렸다.

원광 2년(394년) 7월, 고제 부등이 요흥에게 대패해 살해당하자, 전진의 안남장군 강희(強熙), 진원장군 강다(強多) 등이 두충에게 귀순하여 두충을 맹주로 추대해 후진을 배반케 하였다. 이에 요흥이 군대를 일으켜 무공(武功)에 주둔하면서 두충의 세력을 압박하니, 강다의 조카 강량국(強良國)이 강다를 죽여 요흥에게 투항하였고, 강희는 진주(秦州), 두충은 견천(汧川)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하지만 견천의 저족 구고(仇高)가 두충을 사로잡아 후진에게 보내었고, 두충의 사촌동생 두통(竇統)은 무리를 들어 후진에 투항하였다. 이후의 두충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