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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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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전진 초대 황제
부건 | 苻健
출생 317년
후조 진주 약양군 임위현
(現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사망 355년 7월 10일 (향년 39세)
전진 장안성 황궁 태극전
(現 산시성 시안시 인근)
능묘 원릉(原陵)
재위기간 동진 양국공
350년 2월 10일 ~ 351년 3월 4일
대진천왕
351년 3월 4일 ~ 352년 1월
전진 초대 황제
352년 1월 ~ 355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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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성씨 포(蒲) → 부(苻)
비(羆) → 건(健)
세건(世建) → 건업(建業)
부모 부황 경원황제
모후 태후 강씨
형제자매 4남 중 3남
배우자 황후 강씨
자녀 12남
작호 양국공(襄國公)
묘호 세종(世宗) → 고조(高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 경명황제(景明皇帝)
연호 황시(皇始, 351 ~ 355)
}}}}}}}}} ||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전진 건국2.3. 칭제2.4. 관중의 호족 봉기2.5. 환온의 1차 북벌 방어전2.6. 말년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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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1대 황제. 초대와 1대를 나눈 이유는 그의 아버지 부홍(苻洪)이 이미 실질적인 건국, 재위하였기에 부홍을 초대 황제로 표기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경명제(景明帝).

2. 생애

2.1. 초창기

부건의 생모인 부인 강씨(姜氏)는 부건을 잉태하였을 때, 커다란 곰과 관계하여 임신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날 밤, 그 아버지인 부홍도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조씨(曹氏)가 나와서 부건을 가리키고 말하길,
"이 아이가 가문을 일으킬 것이니, 내 이름을 그에게 붙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잠에서 깬 부홍은 부건의 휘를 '비(羆)'로 하고, 자를 '세건(世建)'이라 지었다. 하지만 나중에 후조의 황제 석호의 외조부인 장비(張羆)와 휘가 겹쳐 '건(健)'으로 피휘하였다. 이후 장성한 부건은 활과 말을 잘 다루었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사람들이 그를 잘 따랐다. 또, 부건은 석호와 그 아들들에게 무척 총애를 받아 후조에서 익군교위, 진군장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석호는 겉으로는 부씨 가문을 예우하는 척하면서 내심 그들을 경계하여 부건의 형제들을 암살하고는 하였지만, 부건만은 아예 건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영화 6년(350년) 정월, 부홍이 후조가 내분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자립하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 칭신하였다. 이에 동진에서도 부홍에게 관작을 내리고, 그 아들 부건도 가절•우장군•감하북정토전봉제군사으로 임명하고, 양국공(襄國公)에 봉하였다.

2.2. 전진 건국

영화 6년(350년) 3월, 부홍이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 자리에서 군사장군 마추(麻秋)에 의해 짐독을 마시고 말았다. 가까이 있던 세자 부건이 마추를 곧바로 참살하였으나, 부홍은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부건에게
"내가 아직 입관(入關)하지 않은 이유는 여유롭게 중원을 가히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였다. 한데 지금 당황해 있는 애송이 같은 너의 모습을 보아하니, 중원을 평정하는 것은 너희 형제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 하구나. 네가 관중으로 들어가 승리한다면 내가 죽은 후에도 우리 세력은 가히 서쪽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이에 부건은 아버지 부홍을 대신해 무리를 규합하고, 대도독•대장군•삼진왕 호칭을 포기한 뒤, 동진의 관작을 다시 칭하였다. 그리고 숙부 부안(苻安)을 동진에 사신으로 보내어, 아버지 부홍의 죽음을 보고하고, 조명(朝命)을 받기를 청하였다. 이때 양국(襄國)에서 신흥왕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고, 조서를 내려 부건을 도독하남제군사•진남대장군•개부의동삼사•연주목(兗州牧)•약양군공(略陽郡公)으로 삼았다.

영화 6년(350년) 8월, 경조(京兆) 사람 두홍(杜洪)은 본래 장안을 지키던 후조의 거기장군 왕랑(王朗)의 사마였는데, 왕랑이 장안을 떠난 이후로 장안을 점거하고, 스스로를 동진의 정북장군, 옹주(雍州) 자사라 자칭하며, 빙익(馮翊) 사람 장거(張琚)를 사마로 삼고, 융족과 한족의 영웅들을 많이 포섭하였다. 몰래 관중(關中)을 도모할 뜻을 품고 있던 부건은 두홍이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석지가 내린 관작을 받고, 조구를 하내(河內) 태수, 온우(溫牛)를 수집장군으로 삼아 각각 온(溫)과 회(懷)를 지키게 하였다. 또, 방두(枋頭)에 궁실을 비밀리에 고치고, 부하들에게는 보리를 심게 하여 서쪽으로 갈 의도가 없음을 보였다. 그리고 눈속임하려는 부건의 의도를 눈치채고, 보리를 심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죽여서 경고하였다.

이러한 준비가 모두 끝나자, 부건은 동진의 정서대장군•개부•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옹주자사를 자칭하였다. 그리고 무위(武威) 사람 가현석(賈玄碩)을 좌장사, 약양 사람 양안(梁安)을 우장사, 단순(叚純)을 좌사마, 신뢰(辛牢)를 우사마, 경조 사람 왕어(王魚)와 안정(安定) 사람 정굉(程肱), 호문(胡文) 등을 군자좨주로 삼고,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부건은 어준을 선봉으로 삼아 맹진(盟津)에 부교를 띄워서 황하를 건넜다. 이후 명을 내려 동생 부웅은 보•기 5,000여 명을 이끌고 동관(潼關)으로 들어가게 하고, 조카 양무장군 부청은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지관(軹關)으로 들어가 하동(河東)에 도착하게 하였다. 부건은 부청이 출진하기 직전에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며 말했다.
"만약 일이 성공하지 않으면 너는 하북에서 죽고, 나는 하남에서 죽으리라. 황천(黃泉) 아래에서는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부청은 강을 건너고 나서 다리를 불태우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부웅을 따라 나아갔다.

한편, 장안의 두홍은 이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부건에게 서신을 보내 조롱하였다. 그리고 사마 장거의 동생 장광(張光)을 정로장군으로 삼아, 13,000명의 군사로 동관에서 부웅을 역습케 하였다. 하지만 장광은 도리어 부웅에게 대패하여 장안으로 도망쳤다. 부건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여전히 두홍에게 서신을 보내어 명마와 진귀한 보물을 바치며, 두홍에게 장안에서 존호를 올리라 청하였다. 하지만 두홍은 이를 보고
"예물이 많고 말이 달콤한 것을 보아하니, 나를 유혹하려는 것이다."
라며, 관중의 무리를 모두 소집해 부건과 맞설 준비를 하였다. 이때 부건은 점을 쳤는데, 태괘(泰卦)와 임괘(臨卦)가 나왔다. 부건이 말했다.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니, 길하고 형통하다. 예전에 동쪽으로 갔을 때는 작았으나, 지금 서쪽으로 돌아오니 커졌다. 길함은 어찌하여 큰 것인가? 그대들은 아는가? 이는 바로 한조(漢祖)가 진나라(秦)를 멸한 계기이다."
또, 당시 여러 별들이 강을 끼고 서쪽으로 흐르자, 여러 점쟁이들이 이를 보고는 백성이 서쪽으로 옮겨가는 징조로 해석하였다.

부건은 군사를 이끌고 적수(赤水)에 이르러 그 성을 점거하여 두홍과 맞섰다. 두홍의 동생 두욱(杜郁)이 두홍에게 부건을 영접할 것을 권했으나 두홍이 듣지 않자, 두욱은 자기 무리를 이끌고 나와 부건에게 항복하였다. 부건은 부웅을 보내어 위수(渭水) 이북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저족 수령 모수(毛受)는 고릉(高陵)에, 서차(徐磋)는 호치(好畤)에, 강족 수령 백독(白犢)은 황백(黃白)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들의 무리는 각각 수만 명에 달했으며, 모두 두홍의 사자를 참수하고, 자신의 아들을 부건에게 인질로 보내 투항하였다. 또, 부청과 어준의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성읍들을 모두 항복시키니, 두홍은 두려워하여 장안에서 굳게 지켰다.

영화 6년(350년) 9월, 부청이 장광과 위수 이북의 음반(陰槃)에서 싸워 그를 사로잡았고, 삼보(三輔)의 군현(郡縣)과 보루들이 모두 부건에게 항복하였다.

영화 6년(350년) 10월, 부건이 마침내 장안 코앞까지 진격하자, 두홍과 장거는 장안을 버리고 사죽(司竹)으로 달아났다.

영화 6년(350년) 11월 27일[1], 부건이 장안성으로 입성하였다. 당시 장안의 백성들은 진나라(晉)를 그리워하였기에, 부건은 참군 두산백(杜山伯)을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보내 승전을 보고하고, 동진의 대사마 환온과 교류하였다. 이때 진나라의 옹주(雍州), 이주(夷州), 하주(夏州)의 백성들이 모두 와서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후조의 양주(梁州) 자사 석녕(石寧)만은 상규(上邽)를 점거하고 귀부하지 않았다.

영화 6년(350년) 12월, 보국장군 부웅이 군대를 이끌고 석녕을 공격해 그를 참수하였다.

영화 7년(351년) 정월, 군사장군•좌장사 가현석 등이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한 고사를 본받아, 부건에게 시중•대도독•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대장군•대선우•진왕(秦王)을 칭할 것을 상표하였다. 이에 부건이 분노하여 말했다.
"내가 어찌 진왕(秦王)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또한 진나라(晉)의 사신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내 관작의 경중은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밀리에 양안을 시켜, 가현석 등에게 계속 존호를 올리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이때 가현석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권유를 계속하였고, 부건은 이를 거짓으로 세 차례 사양한 뒤에야 수락하였다.

황시 원년(351년) 정월 20일[2], 부건은 남교(南郊)에서 천황위(天皇位)에 올랐다. 그리고 기사본말체로 역사서를 집필하게 하고, 천왕(天王)•대선우를 자칭하여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하였다. 또한,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황시(皇始)'로 개원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백관을 장안에 두었다.

아버지 부홍을 '무혜황제(武惠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으며, 어머니 강씨를 황태후(皇太后)로 추존하였고, 아내 강씨(强氏)를 천황후(天皇后), 아들 부장(苻萇)을 태자로 세웠다. 또, 여러 아들들을 공작에 봉하여, 부정(苻靚)을 평원공(平原公), 부생을 회남공(淮南公), 부적(苻覿)을 장락공(長樂公), 부방(苻方)을 고양공(高陽公), 부석(苻碩)을 북평공(北平公), 부등(苻騰)을 회양공(淮陽公), 부류(苻栁)를 진공(晉公), 부동(苻桐)을 여남공(汝南公), 부수(苻廋)를 위공(魏公), 부무(苻武)를 연공(燕公), 부유(苻幼)를 조공(趙公)으로 삼았다. 동생 부웅 역시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승상•영 거기대장군(領車騎大將軍)•옹주목(雍州牧)으로 삼고, 동해공(東海公)에 봉하였다. 조카 부청은 위대장군•평창공(平昌公)으로 삼아 이궁(二宮)을 숙위케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관직을 받아, 뇌약아(雷弱兒)는 태위, 모귀(毛貴)는 사공, 강백주(姜伯周)는 상서령, 양능(梁楞)은 상서좌복야, 왕타(王墮)는 상서우복야, 어준은 태자태사, 강평(強平)은 태부, 단순은 태보, 여파루는 산기상시로 임명받았다. 이때 후조의 병주(并州) 자사 장평의 투항을 받아주고, 그를 대장군•기주목(冀州牧)으로 삼았다.

황시 원년(351년) 3월, 천왕 부건이 사예교위를 설치하고, 관리를 나누어 파견해 백성들의 괴로움을 물어보게 하였다. 또, 인재를 모으고, 세금을 감면하였으며, 궁궐의 사치를 줄이고, 쓸모없는 기물을 없앴다. 여기에 더하여 사치스러운 옷을 제거하고, 후조의 석호가 펼치던 가혹한 정치를 모두 폐지하였다.

황시 원년(351년) 4월, 사죽으로 도망쳤던 두홍과 장거가 사자를 보내어 동진의 양주(梁州) 자사 사마훈을 관중으로 불러들였다. 사마훈이 보•기 30,000명을 거느리고 한중(漢中)에서 진천(秦川)으로 들어오자, 천왕 부건은 오장원(五丈原)에서 그를 영격하여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결국 사마훈은 남정(南鄭)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왕 부건은 이전에 중서령 가현석이 존호를 다시 상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기에, 사람을 시켜 가현석이 사마훈과 통모했다며 거짓으로 고발하게 한 뒤, 가현석과 그의 자식들을 모두 죽였다.

그 해, 들에서 자란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들에서 자란 곡식이 널리 퍼졌다. 백성들은 그 고치로 옷을 만들어 입고, 곡식으로 식량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관서(關西) 지역의 집집마다 풍족하게 되었다.

2.3. 칭제

황시 2년(352년) 정월, 승상 부웅 등이 천왕 부건에게 정식으로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며, 한(漢)과 진(晉)을 본받아 황제와 왕의 칭호를 겸할 것을 건의하였다. 부건은 이를 따라, 태극전(太極殿)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모든 공작들의 작위는 왕으로 진급시켰다. 또한, 선우(單于)는 백만(百蠻)을 하나로 통일하고, 천자(天子)를 적합하게 보좌해야 한다 말하면서 태자 부장을 선우로 삼았다. 그리고 오등작을 세워 차례로 진급시켰다.

한편, 사마훈이 부건에게 패해 한중으로 돌아간 이래로, 두홍과 장거는 의추(宜秋)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두홍은 자신의 가문이 고귀하다 여기며 장거를 깔보았는데, 사마훈이 장거의 군세를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는, 사마훈에게
"장거를 죽이지 않으면 관중은 국가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라며 장거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사마훈은 장거를 초대하여 자리에 앉힌 후, 신호를 보내 그를 죽여버렸다. 이에 동생 장광이 지양(池陽)으로 도망쳐 무리를 모아 사마훈을 공격하니, 사마훈은 장광에게 또 여러 차례 패하였다. 두홍은 이를 틈타 진왕(秦王)으로 자칭하고, 연호를 건창(建昌)으로 개원하여 백관을 두었다.

황시 2년(352년) 4월, 두홍이 장우(張遇)를 정동대장군•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황시 2년(352년) 5월, 경명제 부건이 보•기 20,000명을 이끌고, 진왕 두홍을 공격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두홍을 토벌한 부건은 돌아오는 길에 석안원(石安原)에 올라,
"아름답구나, 이 원야(原野)가."
라 탄식하면서 석안원에 묻힐 뜻을 품었다.

황시 2년(352년) 6월 26일[3], 경명제 부건이 장안으로 돌아왔다.

동진의 진서장군 사상이 두홍이 임명했던 예주목 장우를 허창(許昌)에서 공격하자, 장우는 부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부건은 동해왕 부웅과 평창왕 부청에게 20,000 군사를 주어 장우를 구원함과 동시에 관동 일대를 약탈하게 하였다. 부웅은 영수(潁水)의 성교(誠橋)에서 사상과 싸워 이를 대파하고, 사상은 1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회남(淮南)으로 도망쳤다. 부웅은 승세를 이용해 북쪽으로 추격하여 뇌문(壘門)에 이르렀고, 동진군의 절반 이상을 살상하였다.

황시 2년(352년) 7월, 부웅이 장우와 진(陳), 영(穎), 허(許), 낙(洛)의 백성 50,000여 호를 관중으로 이주시켰고, 우위장군 양군(楊群)을 예주자사로 삼아 허창에 주둔하게 하였다.

황시 2년(352년) 8월, 경명제 부건이 뇌약아를 대사마, 모귀를 태위, 장우를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황시 2년(352년) 10월, 일전에 패하여 도망쳤던 사상이 관군장군 왕협(王俠)을 파견해 허창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전진의 예주자사 양군은 후퇴하여 홍농(弘農)에 주둔하였다.

황시 2년(352년) 12월, 동해왕 부웅이 왕탁(王擢)을 농상(隴上)에서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왕탁은 홀로 말을 타고 양주(涼州)로 도망쳐 전량에 투항하였다. 이후 부웅은 다시 농동(隴東)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초기에
"열 말과 두 되의 모래를 누가 왕탁의 집에 두었는가."
라는 내용의 동요가 있었는데, 이것이 퍼질 시기에 왕탁이 패배하였다.

황시 3년(353년) 정월, 부건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공경(公卿)들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하며, 효렴(孝廉)하고, 청렴(清才)하며, 다략(多略)하고, 박학(博學)하며, 수재(秀才)와 이행(異行)을 지닌 자 각 1명씩 추천하라. 혹 상소를 바쳐 사리에 맞는 간언을 하거나, 면전에서 짐의 과실을 지적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경청하도록 하라. 귀천(貴賤)을 가리지 말라.

황시 3년(353년) 2월, 전량의 왕 장중화가 장수 장홍(張弘)과 송수(宋修)를 보내, 왕탁과 함께 보•기 15,000명을 거느리고 전진을 공격케 하였다. 이에 부웅과 부청이 병력을 이끌고 이를 막아, 용려(龍黎)에서 이들을 전멸시켜 12,000여 명의 적병을 참수하고, 장홍과 송수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다. 이 패배로 인해 왕탁은 진주(秦州)를 버리고 고장(姑臧)으로 도망갔다. 경명제 부건은 영군장군 부원(苻願)을 진주자사로 임명하여 상규에 주둔시켰다.

황시 3년(353년) 3월, 서역 호인(胡人) 유강(劉康)이 유요의 아들이라 사칭하고 평양(平陽)에서 무리를 모아 거짓으로 진왕(晉王)을 자칭하였다.

황시 3년(353년) 4월, 좌위장군 부비(苻飛)가 유강을 토벌하여 사로잡았다.

황시 3년(353년) 5월, 왕탁이 병력 20,000여 명을 이끌고 상규를 공격하자, 진주의 군현들이 대부분 이에 호응하였다. 영군장군 부원은 왕탁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상규를 상실하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황시 3년(353년) 6월, 좌위장군 부비가 구지의 저왕(氐王) 양초를 구지(仇池)에서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때 승상 부웅과 위대장군 부청은 병력 40,000여 명을 이끌고 농동에 주둔하였다.

2.4. 관중의 호족 봉기

초기에 장우가 장안으로 들어가 전진에 귀순하였을 때, 부건은 장우의 계모 한씨(韓氏)를 소의(昭儀)로 삼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장우를 향해,
"그대는 나의 양아들이다!"
라 농담하였다. 장우는 무척 수치스러워하며 부건에게 원한을 품었고, 부웅 등이 정예병을 외지에 주둔시킨 틈을 타, 관중의 호걸들과 결탁해 부씨(苻氏)를 멸망시키고 옹주를 동진에 귀속시키려 하였다.

황시 3년(353년) 7월, 장우는 중황문 유황(劉晃)과 모의해 야밤에 경명제 부건을 기습하려 했으나, 하필 그날 부건이 유황에게 명을 내려 외부로 나가게 하였다. 유황은 나가기를 고사했으나, 결국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알지 못한 장우는 병력을 이끌고 성문에 이르렀으나, 당연히 유황이 부재중이다보니 문이 열리지 않았고, 머지않아 일이 발각되어 참수되었다. 이로 인해 장우와 내통하던 관중의 호족들은 황급히 반란을 일으켰고, 공특(孔特)이 지양(池陽)에서, 유진(劉珍)과 하후현(夏侯顯)이 호(鄠)에서, 교병(喬秉)이 옹(雍)에서, 호양적(胡陽赤)이 사죽에서, 호연독(呼延毒)이 패성(灞城)에서 각각 수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은 동진의 대사마 환온과 중군장군 은호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황시 3년(353년) 8월, 경명제 부건이 상서좌복야 어준을 사공으로 삼았다.

황시 3년(353년) 9월, 대규모 반란 소식을 들은 승상 부웅이 병력 20,000명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갔고, 평창왕 부청은 남아서 상락(上洛)에서 땅을 약탈하고, 형주(荊州)에 봉양현(豐陽縣)을 설치하였다. 이후 보병교위 곽경(郭敬)을 형주자사로 임명하여, 남쪽의 금, 기이한 물건, 활, 칠, 밀랍 등을 무역하게 하고, 멀리서 오는 상인들에게 제공하게 하였다. 이에 국고가 풍족해지고 진기한 물건들이 쌓이게 되었다.

황시 3년(353년) 10월, 승상 부웅은 청하왕(清河王) 부법, 좌위장군 부비와 함께 군사를 나누어 공특 등을 토벌하였다. 이때 부건의 조카인 보국장군 부황미가 낙양(洛陽)에서 도망쳐 왔다.

황시 3년(353년) 11월, 승상 부웅이 지양을 점령하고 공특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황시 3년(353년) 12월, 청하왕 부법과 좌위장군 부비가 호를 점령하고 하후현과 유진을 참수하였다.

황시 4년(354년) 정월 13일[4], 승상 부웅이 사죽을 점령하고 호양적을 격파하자, 호양적은 패성으로 도망쳐 호연독에게 의지하였다.

2.5. 환온의 1차 북벌 방어전

황시 4년(354년) 2월, 동진의 정서장군•대사마 환온이 40,000명의 병력을 직접 지휘하여 강릉(江陵)에서 출발하였고, 수군은 양양(襄陽)에서 균구(均口)를 거쳐 남향(南鄉)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보병은 절천(浙川)에서 무관(武闗)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환온은 사마훈에게 명하여 자오도(子午道)를 통해 장안을 습격하게 하였다.

황시 4년(354년) 3월, 환온은 별장(別將)을 보내 상락을 함락시키고, 전진의 형주자사 곽경을 사로잡았다. 이후 청니성(青埿城)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자오도를 통해 올라오는 사마훈도 전진의 서쪽 변경을 어지럽혔으며, 전량의 진주자사 왕탁은 진창(陳倉)을 공격하며 환온의 북벌군에 호응하였다. 경명제 부건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태자 부장, 승상 부웅, 회남왕 부생, 평창왕 부청, 북평왕 부석에게 병력 50,000명을 주어 요류성(嶢栁城)에서 환온을 막게 하였다.

황시 4년(354년) 4월 22일[5], 두 군대가 남전(藍田)에서 전투를 벌였다. 회남왕 부생은 단기로 여러 차례 돌진하여 환온의 장수 응탄(應誕)과 유홍(劉泓)을 죽였으나, 환온은 군을 지휘하여 전력을 다해 싸웠다. 결국 부장 등은 대패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승상 부웅 또한 백록원(白鹿原)에서 환충에게 패하였다. 환온이 계속 전진하여 남전 전투 이후로 3일만에 패상(灞上)에 도착하자, 부장 등은 장안성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경명제 부건은 노약자 6,000여 명을 이끌고 장안의 소성(小城)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고, 정예병 30,000명을 뇌약아에게 주어 부장 등과 합류케 하였다. 이처럼 전진의 패하는 기색이 명백해지니, 삼보의 군현들은 서로 앞다투어 소와 술을 준비하여 환온에게 항복하였다. 환온은 주민들을 위로하며 안심시켜 생업에 복귀하게 하였고, 남녀 모두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가면서 환온의 군대를 구경하였다. 이때 노인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날 다시 관군(官軍)을 보게 될 줄은 몰랐소."
한편, 경명제 부건은 다시 승상 부웅에게 정예 기병 7,000여 기를 주어 자오곡을 통해 올라오는 사마훈을 습격케 하였다. 사마훈은 패하여 여왜보(女媧堡)로 퇴각하였다.

황시 4년(354년) 5월, 왕탁이 진창을 점령하고, 전진의 부풍(扶風) 내사 모난(毛難)을 죽였다. 이때 승상 부웅은 다시 환충과 백록원에서 싸워 환충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동진군 10,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황시 4년(354년) 6월, 환온은 인근의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며 군량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경명제 부건이 이를 모두 베어내어 청야(清野)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군량이 공급되지 않아 환온의 병사들은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결국, 환온은 군량을 모두 소진하여 관중의 백성 30,000여 호를 데리고 동진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호연독도 병력 10,000여 명을 이끌고 환온을 따라갔다. 환온이 퇴각하는 것을 본 태자 부장은 이를 추격하여 동관(潼關)에서 환온의 군대를 여러 차례 패퇴시키고, 동진군 10,000여 명을 죽였다. 승상 부웅은 사마훈과 왕탁을 진창에서 공격해 격파하였고, 사마훈은 한중으로 도망갔으며, 왕탁은 약양으로 도망갔다. 부웅은 이어서 옹의 교병을 공격하였으나, 옹성 공략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부웅의 부고를 들은 부건은 피를 토하며 한탄하였다.
"하늘은 나의 천하통일을 원치 않는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의 원재(元才)를 이렇게 일찍 빼앗아 가는가?"

황시 4년(354년) 8월, 태자 부장이 부웅을 대신해 교병을 공격하여 옹성을 함락시키고 교병을 참살하니, 관중 일대가 모두 평정되었다. 경명제 부건은 광록대부 조구를 낙주(洛州) 자사로 삼아 의양(宜陽)에 주둔시켰다. 경명제 부건은 부건은 환온을 막아낸 공을 치하하며, 뇌약아를 승상, 모귀를 태부, 어준을 태위, 부생을 중군대장군, 부청을 사공으로 승진시켰다.

이 해, 서쪽의 선비족 걸몰홀사(乞沒渾邪)가 전진에 귀부하면서 아들을 보내 경명제 부건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부건은 평삭문(平朔門)에 내빈관(來賓館)을 설치하여 먼 곳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두문(杜門)에 영대를 세워 삼장법(三章法)을 적용하였다. 또, 세금을 경감하고 궁실을 낮추며, 정사에 마음을 쏟고 공경들을 자주 불러 치도(治道)를 논의하였다. 후조의 가혹하고 사치스러운 정치 이후, 이를 완화하고 간략하게 하여 예를 중시하니, 관중의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황시 4년(354년) 10월, 태자 부장은 동관에서 환온을 추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이것이 덧나 결국 사망하였다. 경명제 부건은 부장을 추시하여 '헌애태자(獻哀太子)'라 하였다.

황시 4년(354년) 11월, 왕탁이 병력을 이끌고 귀순하자, 경명제 부건은 왕탁을 상서로 삼았다. 또한, 상장군 담철(啖鐡)을 진주자사로 삼았다. 이때 부건의 숙부 부안이 겨우 동진에서 빠져나왔으나, 전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후진의 요양에게 납치되어 낙주자사로 임명되었다.

황시 4년(354년) 12월, 부안이 후진에서 탈출하여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왔다. 경명제 부건은 부안을 대사마•표기대장군•병주자사로 삼아 포판(蒲阪)에 주둔시켰다. 이 해, 관중에는 큰 기근이 들어 쌀 한 말의 값이 베 한 필과 같았다.

2.6. 말년

황시 5년(355년) 2월, 메뚜기떼가 크게 발생하여 화택(華澤)에서 서쪽으로 농산(隴山)까지 퍼지면서 모든 풀을 먹어치웠다. 또, 소와 말이 서로의 털을 뜯어먹고, 호랑이와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어 길이 끊어졌다. 경명제 부건은 백성들의 조세를 면제하고, 자신의 음식도 줄였으며, 소복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였다.

신평(新平)에서 키가 다섯 장이나 되는 거인이 나타나 백성 장정(張靖)에게 말했다.
"부씨(苻氏)는 하늘의 명을 받아 지금 태평을 이루리니, 외면하던 자들도 중원으로 돌아와 안정될 것이다."
이에 장정이 거인에게 그 이름을 물었으나, 거인은 대답하지 않고 사라졌다. 장정은 이를 신평의 현령에게 보고하였고, 이를 전달받은 경명제 부건은 요괴의 짓이라 생각해 장정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이때 마침 큰 비가 내리고 하수(河)와 위수(渭水)가 범람하였다. 포판진(蒲阪津)에서 큰 신발 한 짝이 떠내려왔는데 길이가 7척 3촌, 발자국이 신발에 맞으며 발가락 길이가 1척이 넘고, 무늬가 깊이 1촌이었다. 이를 들은 부건은 감탄하며 말했다.
"천지간에 없는 것이 없구나. 장정이 제대로 본 것임이 틀림없다."
이에 장정을 사면하였다.

황시 5년(355년) 4월, 하내(河內) 태수 왕회(王會)와 여양(黎陽) 태수 한고(韓高)가 거병하여 전연에 투항하였다.

경명제 부건은 회남왕 부생을 태자로 세우고, 평창왕 부청을 태위로, 상서령 왕타를 사공으로, 사예교위 양능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황시 5년(355년) 6월 6일[6], 경명제 부건이 병에 들자, 평창왕 부청이 병력을 이끌고 동궁에 들어가 태자 부생을 죽이고 자신이 즉위하려 하였다. 당시 부생은 서궁에서 부건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부청은 부생이 동궁에 없는 것을 보고 부건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여 동액문(東掖門)을 공격하였다. 이때 부건은 변란을 듣고 단문(端門)에 올라 병력을 정비하여 스스로를 지키니, 부청을 따르던 무리들이 부건을 보고 놀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부건은 부청을 붙잡아 죄를 물어 죽였고, 나머지 자들은 묻지 않았다.

6월 12일[7], 대사마•무도왕 부안을 중외제군사(中外諸軍事)로 삼았다.

6월 14일[8], 경명제 부건이 죽음을 앞두고, 태사 어준, 승상 뇌약아, 태부 모귀, 사공 왕타, 상서령 양능, 상서좌복야 양안, 상서우복야 단순, 이부상서 신뢰 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였다. 이후 부건은 태자 부생에게 말했다.
"육이(六夷)의 추장 및 대신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서서히 제거하라."
그리고 다음날인 15일에 태극전(太極殿)에서 재위 5년만에 붕어하였다. 향년 39세. 원릉(原陵)에 안장되었고, 시호는 '명황제(明皇帝)', 묘호는 '세종(世宗)'이었다. 그리고 훗날 부견이 즉위하였을 때, 시호는 '경명황제(景明皇帝)', 묘호는 '고조(高祖)'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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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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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역대 황제
초대 태조 무혜제 부홍 1대 고조 경명제 부건 2대 여왕 부생


[1] 경술년 무자월 갑자일. 음력으로 350년 11월 27일이고, 양력으로 351년 1월 11일이다.[2] 신해년 경인월 병진일. 음력으로 1월 20일이고, 양력으로 3월 4일이다.[3] 임자년 정미월 갑신일. 음력으로 6월 26일이고, 양력으로 7월 24일.[4] 갑인년 병인월 신유일. 음력으로 1월 13일이고, 양력으로 2월 21일이다.[5] 갑인년 기사월 기해일. 음력으로 4월 22일이고, 양력으로 5월 30일이다.[6] 을묘년 계미월 병자일. 음력으로 6월 6일이고, 양력으로 7월 1일이다.[7] 을묘년 계미월 임오일. 음력으로 6월 12일이고, 양력으로 7월 7일이다.[8] 을묘년 계미월 갑신일. 음력으로 6월 14일이고, 양력으로 7월 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