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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전진 2대 황제 부생 | 苻生 | |||
출생 | 335년 | ||
후조 진주 약양군 임위현 (現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 |||
사망 | 357년 6월 (향년 22세) | ||
전진 장안성 황궁 별실 (現 산시성 시안시 인근) | |||
능묘 | 없음 | ||
재위기간 | 전진 회남공 | ||
351년 3월 ~ 352년 1월 | |||
전진 회남왕 | |||
352년 1월 ~ 355년 4월 | |||
전진의 황태자 | |||
355년 4월 ~ 355년 7월 11일 | |||
전진 2대 황제 | |||
355년 7월 11일 ~ 357년 6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성씨 | 부(苻) | |
휘 | 생(生) | ||
자 | 장생(長生) | ||
부모 | 부황 경명황제 모후 명덕황후 | ||
형제자매 | 12남 중 3남 | ||
배우자 | 황후 양씨 | ||
아들 | 부규(苻馗) | ||
작호 | 회남공(淮南公) → 회남공(淮南王) → 월왕(越王)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여왕(厲王) | ||
연호 | 수광(壽光, 355 ~ 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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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제2대 황제. 고조 경명황제 부건의 3남으로, 생모는 명덕황후(明德皇后) 강씨(强氏)이다.2. 생애
어릴 때부터 거칠고 방탕했으며, 항상 술에 취해있던 무뢰배였다. 부생이 7살일 때, 한번은 조부 부홍이 부생을 놀리기 위해 그가 있는 자리에서 시종에게 넌지시 물었다."내 듣기로, 애꾸눈의 아이는 한쪽 눈으로만 눈물을 흘리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시종이 그렇다 답하니, 태어날 때부터 애꾸눈이었던 부생은 분노하여 칼을 뽑아 자신을 찌르고는 피를 흘리며 말했다."이 또한 눈물입니다!"
이에 부홍이 크게 놀라 부생을 회초리로 때리자, 부생은 이를 맞으면서도 다시 말했다."저는 칼이나 창은 견딜 수 있어도, 회초리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부홍이 말했다."네가 이런 행실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노예로 삼을 것이다."
부생이 답했다."그렇다면 석륵처럼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부홍은 두려워하며, 부생을 발가벗기고 그의 입을 막은 뒤, 부건을 찾아가 말했다."이 아이는 미쳤으니, 의당 일찍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성하여서는 사람들의 집안을 파괴할 것이다."
부건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부생을 죽이려 하였으나, 동생 부웅이 나서서 말렸다."아이가 장성하면 마땅히 수양하여 스스로 고칠 것입니다.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이에 부건이 그만두었다. 이후 부생은 자라면서 엄청난 힘을 지녀 1,000균(均)의 무게를 들었고, 용맹하였으며, 죽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맹수를 맨손으로 잡았고, 달리는 말을 추격하여 창으로 찌르거나 기마사격에 능숙한 솜씨를 보이는 등 뛰어난 무예를 선보였다.황시 원년(351년) 정월, 장안을 차지한 부건이 천왕을 자칭하자, 부생은 회남공(淮南公)에 봉해졌다.
황시 2년(352년) 정월, 천왕 부건이 태극전에서 황제로 즉위하자, 부생은 여러 부건의 아들들과 함께 왕으로 승작되었다.
황시 4년(354년) 4월, 형인 태자 부장(苻萇)의 지휘 아래 남전(藍田)에서 동진의 대사마 환온의 북벌군과 싸웠다. 부생은 단기로 여러 차례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의 깃발을 빼앗았고, 환온의 장수 응탄(應誕)과 유홍(劉泓) 등 수십 명을 베어 죽였으나, 결국 환온에게 패하여 장안으로 후퇴하였다.
황시 4년(354년) 10월, 승상 부웅과 태자 부장의 고군분투로 환온의 북벌과 관중 일대의 호족들이 일으킨 반란들을 모두 막아냈지만, 부장이 환온군을 추격하다가 입은 부상으로 병사하였다.
황시 5년(355년) 4월, 경명제 부건이 누구를 새로운 태자로 세울지 고민할 때, 명덕황후 강씨는 막내아들 부류(苻栁)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부건은 "세 마리의 양과 다섯 개의 눈(三羊五眼)"이라는 참언을 믿어 부생을 태자로 세웠다.
황시 5년(355년) 6월 14일[1], 경명제 부건이 죽음을 앞두고, 태사 어준, 승상 뇌약아, 태부 모귀(毛貴), 사공 왕타, 상서령 양능(梁楞), 상서좌복야 양안(梁安), 상서우복야 단순, 이부상서 신뢰 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였다. 이후 부건은 태자 부생에게 말했다.
"육이(六夷)의 추장 및 대신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서서히 제거하라."
그리고 다음날인 15일에 태극전(太極殿)에서 재위 5년만에 붕어하였다.수광 원년(355년) 6월 16일[2], 부생이 황제로 즉위하여 경내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수광(壽光)'으로 개원하였다. 아울러 어머니 강씨를 황태후로, 처 양씨(梁氏)를 황후로 올렸다. 상서우복야 단순은 해가 바뀌기 전에 연호를 바꾸면 안 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부생이 그를 죽였다.
3. 재위
수광 원년(355년) 7월, 태자문대부 조소(趙韶)를 상서우복야로, 태자사부 조회(趙誨)를 중호군으로, 저작랑 동영을 상서로 삼았는데, 이들 모두는 아첨하여 승진한 자들이었다.수광 원년(355년) 8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위대장군 부황미를 광평왕(廣平王)에, 전장군 부비(苻飛)를 신흥왕(新興王)에 각각 봉하고, 여파루를 시중•좌대장군으로 삼았다. 포판(蒲阪)을 진수하던 대사마•무도왕 부안을 중앙으로 소환하여 태위로 삼고, 동생인 진왕(晉王) 부류를 정동대장군•병주목(并州牧)으로 삼아 부안을 대신해 포판을 지키게 하였다. 또, 위왕(魏王) 부수(苻廋)를 진동대장군•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아 섬성(陜城)에 주둔시켰다. 그 외에도 봉작을 수여할 때에는 각각 차등을 두었다.
과거 부생이 동진군과 남전에서 싸울 때, 부생의 장수 강회(強懷)가 전사하였고, 그 아들인 강연(強延)은 유공자의 자녀로서 봉작을 받기도 전에 경명제 부건이 붕어하였다. 이에 강회의 처 번씨(樊氏)가 황제 부생이 외출나갔을 때를 기회로 삼아 길가에서 부생에게 상소를 올려 남편의 충렬을 논하고, 자신의 아들을 봉작해주길 청하였다. 그러자 부생은 분노하여 활로 그녀를 쏘아 죽였다.
어느 날, 중서감 호문(胡文)과 중서령 왕어(王魚)가 황제 부생에게 나아가 말했다.
"최근 대각(大角)에 객성(客星)이 나타났고, 형혹(熒惑)이 동정(東井)으로 들어갔습니다. 대각은 황제의 자리이고, 동정은 진(秦)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점을 보면 3년 안에 나라에 대상(大喪)이 발생할 것이고, 대신(大臣)들이 처형되어 죽을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주문(周文)을 본받아 덕을 수양하시고, 여러 신하들과 화합하시어 성강(成康)의 아름다움을 이룩하십시오."
부생이 답했다."황후와 더불어 짐이 천하를 다스리고 있으니, 나라에 대상(大喪)의 변고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모 태부, 양 거기, 양 복야는 모두 유조를 받들어 보정하고 있으니, 그들 또한 가히 대신(大臣)이라 할 수 있다."
수광 원년(355년) 9월, 황후 양씨(梁氏), 거기대장군•상서령 양안, 상서좌복야 양능과 황후의 외삼촌인 태부•녹상서 모귀를 제거함으로써 외척을 숙청하였다.
수광 원년(355년) 11월, 이부상서 신뢰(辛牢)를 수상서령으로, 상서우복야 조소를 상서좌복야로, 중호군 조회를 사예교위로, 상서 동영을 상서우복야로 승진시켰다.
수광 원년(355년) 12월, 승상 뇌약아(雷弱兒)는 강직하고 솔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조소나 동영 등의 무리를 매 조회 때마다 공개적으로 비판하고는 하였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조소 등은 황제 부생을 알현해 뇌약아를 참소하였다. 부생은 이들의 말을 믿고, 뇌약아와 그 아들 9명, 손자 27명을 모두 처형하였다. 뇌약아는 경명제 부건을 따르던 개국공신이자, 남안(南安) 강족 추장이었기에, 여러 강족들이 이반하여 전진을 떠났다.
황제 부생은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기간에도 놀이와 음주를 즐기며 방탕하게 생활하였고, 음란하고 잔혹하여 재위 기간 동안 살인과 폭력을 일삼았다. 그는 항상 활시위를 당기거나 칼날을 드러내어 조정의 신하들 앞에서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철퇴, 집게, 톱, 끌 등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도구들을 좌우에 비치해 두었다. 부생은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후궁부터 공경, 심지어 노복에 이르기까지 무릇 500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수광 2년(356년) 정월, 하늘에 변괴가 일어나 나라 안팎으로 흉흉해졌다. 상서우복야 동영과 시중 강국(强國)은 이를 이용해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공 왕타를 제거하고자 황제 부생에게 나아가 말했다.
"오늘날 하늘이 꾸짖은 것은 심히 중대한 사항이므로 마땅히 귀한 신하를 죽임으로써 달래야만 합니다."
부생이 답했다."귀한 신하라면 오직 대사마(부안)와 사공 뿐이오."
이에 동영과 강국이 말했다."대사마께서는 고귀한 황족이시니 형을 내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결국 부생은 왕타를 주살하기 위해 체포하였다. 왕타가 처형되기 직전, 동영은 직접 감옥을 찾아가 왕타를 조롱하며 말했다."지금 그대가 감히 이 동룡을 다시 닭이나 개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이에 왕타 또한 눈을 부릅 뜨고 동영을 향해 욕설을 퍼붓다가 이내 사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때 왕타의 외조카인 낙주(洛州)자사 두울(杜鬱)도 조소의 미움을 사 동진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부생에게 주살당했다.정월 26일[3], 황제 부생은 태극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성대하게 연회를 벌였다. 이때 부생은 직접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북돋았고, 상서령 신뢰를 주감(酒監)으로 삼았는데, 연회 중에 술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분노하여
"어찌하여 술을 강요하지 않아,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냐!"
라며 꾸짖은 뒤, 그 자리에서 활을 들고 신뢰를 쏘아 죽였다. 그러자 모든 대신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마구 술을 마셨고, 결국에는 취하여 다들 옷이 더러워졌고, 관을 잃어버린 채로 머리가 헝클어져 쓰러졌다. 부생은 이를 보면서 크게 즐거워하였다.수광 2년(356년) 2월, 전량의 군주 장조가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은 장현정이 아직 어리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 부생은 진왕 부류에게 명하여 장현정에게 유세케 하였다. 이에 부류는 참군 염부(閻負)와 양수(梁殊)를 전량으로 보내어 장현정에게 회유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다. 하지만 염부와 양수가 전량의 도읍인 고장(姑臧)에 도착했을 때, 장현정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때 전량의 양주목(涼州牧) 장관(張瓘)이 장현정 대신 그들을 만나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염부, 양수와 대화한 끝에 전진의 강대한 세력이 두려워졌고, 결국 장현정은 사자를 보내 칭번하였다. 부생은 장현정이 칭한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전연의 연왕(燕王) 모용준이 장수 모여장경(慕輿長卿) 등에게 병력 7,000명을 주고 지관(軹闗)으로 들어가 배지보(裴氏堡)에서 전진의 유주(幽州) 자사 강철(強哲)을 공격하게 하였고, 동진에서도 장수 유도(劉度) 등에게 병력 4,000명을 주어 전진의 청주(青州) 자사 왕랑(王朗)을 노지보(盧氏堡)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부생은 신흥왕 부비를 파견해 유도를 막고, 건절장군 등강을 파견해 모여장경을 막게 하였다. 유도는 부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알아서 물러갔으며, 모여장경은 배지보 남쪽에서 등강과 싸웠다가 등강에게 대패하여 전연의 갑병 2,700명여 명이 전진군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때 강족 요양도 10,000여 무리를 거느리고 흉노보(匈奴堡)에서 전진의 평양(平陽) 태수 부산(苻產)을 공격하니, 진왕 부류가 이를 구원하러 갔다가 요양에게 패하여 포판으로 돌아갔다. 결국 흉노보는 요양에게 함락되었고, 부산은 붙잡혀 죽었으며, 흉노보를 지키던 병사들 또한 모두 매장당했다. 요양은 농서(隴西)로 돌아가기 위해 황제 부생에게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부생이 이를 허하려 하자 동해왕 부견이 반대하며 말했다.
"요양은 뛰어난 인물로, 지금 그를 농서로 돌려보내면 훗날 심각한 해악을 끼칠 것이니, 오히려 그를 큰 이익으로 유혹하고, 기회를 보아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에 부생은 요양에게 길을 빌려주는 대신 관작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요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생의 사자를 참수하고 그 서신을 불태운 후, 하남(河南) 일대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부생은 노하여 대장군 장평에게 요양 토벌을 명하였고, 요양은 장평에게 패하여 겸손한 말과 뇌물로 그와 의형제를 맞은 뒤에야 군대를 물렸다.수광 2년(356년) 3월, 황제 부생이 삼보(三輔)의 백성들을 동원해 위교(渭橋)를 수리케 하였다. 이때 금자광록대부 정굉(程肱)이 농업을 방해하고 시기를 해친다며 강력히 간언하자, 부생이 그를 죽였다.
수광 2년(356년) 4월,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큰 바람이 불어 집을 날리고, 나무를 뽑았으며,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궁중에서도 소란이 일었는데, 누군가가 도적이 왔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려 낮에도 궁문을 닫았다. 그리고 5일이 지나서야 바람은 비로소 멈췄다.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황제 부생은 궁성에서 도적이 왔다는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색출해, 그들의 배를 가르고 심장과 위를 드러내 죽였다. 이에 부생의 외숙부인 좌광록대부 강평(強平)이 강력히 간하였다.
"새해 첫날 아침에 일식이 일어났는데, 그 날이 바로 정양(正陽)의 신월(神朔)이었습니다. 또, 어둠 속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홍수과 가뭄이 때를 맞추지 못하며, 야생 짐승에 의한 재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폐하께서 정치에 힘쓰지 않아, 조화로운 기운을 해쳤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근본을 살피시고,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시고, 사소한 의심을 버리시어 큰 잘못이라도 포용해주십시오. 또, 종묘에 경의를 표하시고, 공경들을 사랑하시고, 가을의 서리처럼 차가운 위엄을 버리시어 봄비처럼 은혜를 베푸십시오. 그리하면 사악한 기운은 사라지고, 요사스러운 것들은 자연히 소멸될 것이며, 황실은 하늘의 보호를 받아 무궁한 아름다움을 유지할 것입니다."
부생은 분노하여 강평이 요사스런 말을 한다 꾸짖고, 강평의 정수리를 꿰뚫어 죽였다. 부황미, 부비, 등강은 연회 자리에서 부생에게 나아가 태후를 언급하면서 강평을 죽인 건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며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생은 이들의 용맹을 아꼈으므로,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부황미를 좌빙익(左馮翊), 부비를 우부풍(右扶風), 등강을 행 함양(咸陽)태수로 내보냈다.수광 2년(356년) 5월, 황태후 강씨가 근심과 분노로 인해 사망하였고, 시호는 '명덕(明徳)'이라 하였다.
수광 2년(356년) 6월, 황제 부생이 다음과 같은 칙서를 내렸다.
짐은 황천(皇天)의 명을 받들어 조상의 업을 이어받았고, 만방(萬邦)을 다스리며 백성을 양육해왔다. 계승 이래 어떤 부분이 부족하여 온 천하에 비방과 중상의 소리가 퍼졌는가? 1,000명을 넘지 않게 살해했음에도 잔혹하다고 말한다. 길 가는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사람이 드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엄중한 형벌과 극심한 처벌이 필요한 시기이니, 그 누가 짐처럼 할 수 있겠는가!
당시 맹수가 크게 날뛰어, 낮에는 길을 막고, 밤에는 민가를 습격했으며, 오직 사람만 해치고 집의 가축들은 먹지 않았다. 이 사태는 수광 원년 가을부터 계속되어 700명 이상이 맹수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백성들은 크게 고통 받아 모두 마을 단위로 모여 살았다. 피해는 점점 심해져 백성들은 농사와 뽕나무 재배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내외로 모두 두려워하였다.수광 2년(356년) 7월, 여러 신하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려 재앙을 물리칠 것을 청했으나, 황제 부생은 거부하며 말했다.
"야생 짐승은 굶주리면 사람을 먹고, 배부르면 알아서 멈출 것이다. 결국, 수년이 지나도록 해를 끼칠 수는 없을 것이니, 뭐하러 이를 물리쳐야 하겠는가? 그리고 하늘이 어찌 모든 생명을 사랑하지 않아서 매년 벌을 내리겠는가? 그것은 바로 백성 중에 죄를 짓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짐으로 하여금 그들을 처벌하고 가르쳐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지 말아야 하거늘, 어찌 인간의 허물로 하늘을 원망하고 탓하려 하느냐!"
수광 2년(356년) 10월, 황제 부생은 늘 술에 취해 정사를 다스리지 않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폭정을 일삼았으며, 또, 애꾸눈이었기에 나머지, 모자람, 치우침, 한 짝, 적음, 없음, 갖추지 못함 같은 말을 꺼려 잘못해 이런 말을 했다가 죽은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다리를 자르고, 태아를 꺼내고, 갈비뼈를 끌어내고, 목을 톱으로 자르는 일이 수천 건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 어느 날, 부생은 아방성(阿房城)에서 노닐다가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한 남매를 보고, 그들을 붙잡아 핍박하며 부적절한 행동을 하라 강요하였다. 남매가 끝까지 이를 거부하자, 부생은 화를 내며 그들을 모두 죽였다.
- 함양(咸陽)의 고성(故城)에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는데, 뒤늦게 도착한 자는 모두 참수하였다.
- 상서복야 가현석(賈玄石)은 아름답고 웅장하였다. 한번은 부생과 그의 아내가 누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가현석을 뜰에서 목격하였다. 아내가 가현석을 가리키며 누구냐 묻자, 부생은"네가 원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 대답해 놓고는 곧바로 가현석을 처형하였다. - 부생이 야밤에 대추를 너무 많이 먹다가 탈이 나, 태의령 정연(程延)을 불러 진료케 하였다. 정연이 진찰을 마치고 말하길"폐하께서는 다른 병은 없으시고, 단지 대추를 너무 많이 드셨을 뿐입니다."
라 하자, 부생은"그대는 성인도 아닌데, 어찌 짐이 대추를 먹었다는 걸 알았느냐!"
라며 정연을 죽였다. - 부생은 또 다른 태의령을 불러 안태(安胎) 약을 조제케 하고, 인삼이 좋은지 나쁜지와 약의 양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때 태의령이"비록 조금 부족하더라도 사용하기에 충분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부생은 애꾸눈인 자신을 조롱한다 여겨 그의 눈을 파내고 나서 처형하였다. - 부생은 수레 위에서 오줌을 지리고는 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부르길 "천우(天雨)"라 하였다.
수광 3년(357년) 2월, 관리가 보고하였다.
"태백(太白)이 동정(東井)을 침범하였습니다. 동정은 진나라(秦)의 영역이고, 태백은 형벌을 내리는 별이므로, 필시 경사(京師)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에 부생이 답했다."별이 우물에 들어갔다면, 그저 목마를 뿐일 텐데,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
수광 3년(357년) 4월, 강족 요양이 관중(闗中)을 도모하기 위해 북굴(北屈)로 나아가 행성(杏城)에 주둔하고, 보국장군 요난(姚蘭)을 보내 부성(敷城)을 빼앗았다. 그리고 요무장군 요익생(姚益生)과 좌장군 왕흠(王欽)으로 하여금 각기 군사를 이끌고, 정양(定陽) 이북과 근천(芹川) 일대의 여러 강족과 이민족들을 불러들이게 하니, 본래 전진의 백성이던 강족과 이민족 50,000여 호가 요양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요양은 무리 27,000여 명을 이끌고 황락(黃落)을 점거하였다.
황제 부생은 광평왕 부황미, 동해왕 부견, 평북장군 부도룡(苻道龍), 건절장군 등강 등에게 15,000여 군사를 주고 요양을 토벌케 하였다. 아울러 장수 부비룡(苻飛龍)을 따로 보내 요난을 쳐서 사로잡았다. 그러자 요양은 보루를 높이 쌓아 방어에만 집중하였고, 응전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등강이 부황미에게 유세하였다.
"한 번 화살에 맞은 새는 구부러진 나뭇가지만 보아도 놀라 땅바닥에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요양은 환온과 장평에게 빈번히 패하여 예기가 꺾여있어, 지금 방어만 고수하는 것도 그 곤궁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요양의 사람됨은 강단있고 사나우나 그만큼 쉽게 움직이니, 만약 그의 루문(壘門)까지 나아가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린다면 요양은 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뛰쳐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황미는 등강의 계책을 채택하였다.수광 3년(357년) 5월, 부황미가 먼저 등강을 보내 기병 3,000기로 요양의 보루까지 나아가 북을 크게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게 하였다. 등강이 이렇게 요양의 루문을 압박하면서 그 앞에 진을 치자, 과연 등강의 예상대로 요양은 노하여 모든 병력을 휘몰아 보루를 뛰쳐나왔다. 등강은 요양과 맞서 싸우다가 못 이기는 척 달아났고, 요양은 그 뒤를 추격해 삼원(三原)에 이르렀다. 그때 등강은 말머리를 돌려 기병들과 함께 요양을 향해 돌격했고, 인근에 매복해있던 부황미와 부견도 복병을 일으켜 요양을 덮쳤다. 결국 전진군에게 대패한 요양은 전장을 빠져나오려다 그의 준마인 여미과(黧眉騧)가 넘어지는 바람에 전진군에게 사로잡혀 곧바로 참수당했고, 그의 동생 요장은 잔당을 인솔해 전진에 투항하였다.
요양 토벌에 성공한 부황미는 군사를 거두어 도성 장안으로 개선하였나, 황제 부생은 부황미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포상을 전혀 내리지 않고, 자주 사람들 앞에서 부황미를 업신여겼다. 화를 참다 못해 격분한 부황미는 황제 부생을 죽이고 스스로 황위에 오를 음모를 꾸몄다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각되어 주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전진의 왕공들이 연루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황제 부생은 어느날 꿈에서 큰 물고기(魚)가 창포풀(苻)을 먹는 것을 보았다. 이때 장안에 동해의 큰 물고기가 용이 되었는데 남자는 모두 왕, 여자는 공이 되었다는 요언[4]이 퍼졌는데, 꿈에 대해 어씨가 포와 관련된 부씨를 잡아먹은 걸로 해석해 개국공신인 태위 어준과 그 아들 일곱 명, 열 명의 손자를 죽였다.
당시 물고기 동요 외에도 이러한 동요도 유행하였다.
"백 리를 바라보니 텅 빈 성,
어찌하여 우거져 푸르른가.
애꾸눈 아이는 법을 알지 못하고,
올려다보아도 하늘의 별을 보지 못하네."
이에 황제 부생은 텅 빈 성들을 모두 허물어 재앙을 막고자 하였다. 금자광록대부 우이(牛夷)는 심상치 않은 낌새에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상락(上洛)으로 나아가 외지를 방어하기를 자원하였다. 하지만 부생이 불허하며 말했다.어찌하여 우거져 푸르른가.
애꾸눈 아이는 법을 알지 못하고,
올려다보아도 하늘의 별을 보지 못하네."
"그대는 충숙하고 공손하니, 의당 짐의 좌우에 있어야지, 어찌 외지로 나가려 하는가."
그러고는 중군장군으로 임명하고 다시 불러 말했다. "소는 성정이 느리고, 무거우며, 멍에를 잘 잡고 간다. 비록 말의 발처럼 빨리 뛰지는 못하나, 100석을 지고도 움직일 수 있다."
이에 우이가 답했다."신은 큰 수레를 끌고도 가파른 언덕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무거운 짐을 시험해 보고 그 공적을 알고 싶습니다."
부생은 웃으며 말했다."얼마나 빠르게 가기를 바라는 것인가! 공은 지금 짐이 너무 가볍게 대우한다 불평하는가? 그렇다면 짐은 장차 공에게 어공(魚公, 어준)이 누리던 직위를 내리겠다!"
그러자 우이는 두려워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황제 부생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동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고, 술에 절어있는 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신하들은 초하루와 보름날이 되면 조정에 나아가 참배하려 했으나, 시간이 다 되어도 부생은
"벌써 낮이 다 됐느냐? 그래도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라."
라고 말하며, 거의 나타나지도 않았다. 때로는 해가 진 뒤에도 나오지 않아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쳤으며, 때로는 오후 늦게 나타나 조정에 서더라도 항상 화를 내며, 오직 살인과 학살만을 행하였다. 또, 수개월 동안 술에 취해 문서 검토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중요한 문서가 자주 누락되고 술에 취한 상태로 결정이 내려졌다. 부생의 측근들은 이를 악용하여 상과 벌을 불규칙하게 집행하기도 하였다.어느 날, 부생이 술에 취한 채로 좌우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짐이 천하를 다스리기 시작한 이래로 그대들은 밖에서 무엇을 들었느냐?"
그때 누군가가 답했다."폐하께서는 성스럽고 현명하시어 세상을 다스리시고 백성을 돌보십니다. 상은 반드시 공로에 따르고, 벌은 반드시 죄와 합당하게 이루어집니다. 천하에는 오직 태평성대를 노래할 뿐 불만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생은"너는 나에게 아첨하고 있구나!"
라 성을 내며 그를 끌고 가 참수하였다. 그리고 다른 날에 다시 같은 질문을 하니, 이번에는 어떤 이가"폐하께서는 형벌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라 말하자, 부생은 이번에도"네가 나를 비방하고 있구나!"
라며 화를 내고, 그 역시 참수하였다.또, 부생은 자신의 지시에 조금이라도 불복하는 아내나 첩을 즉시 죽여 그 시체를 위수에 버렸다. 때로는 궁녀들과 남성들이 궁전 앞에서 알몸으로 성관계를 하게 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그것을 지켜보게 하였다. 또한 소, 양, 당나귀, 말을 살아 있는 채로 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닭, 돼지, 거위, 오리 수십 마리를 한데 모아 궁전 앞에서 풀어놓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사형수의 얼굴을 벗겨내어 그들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하여 이를 관람하며 즐겼다. 황족, 공신, 외척, 충신들을 거의 다 부생에게 살해당했고, 왕공들은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길거리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신하들도 밭과 들로 도망쳤는데, 이들은 "호랑이 입에서 벗어났다."라 말하고 다녔고, 부생의 측근들조차 하루를 살아남으면 10년을 산 것 같다 느꼈다고 한다.
수광 3년(357년) 6월, 태사령 강권(康權)이 황제 부생에게 진언하였다.
"어제 밤에 세 개의 별이 나타났고, 패성(孛星)이 태미(太微)로 들어가 들어가 동정(東井)과 연결되었습니다. 또, 지난달 초부터 비가 오지 않고 계속해서 맑기만 합니다. 이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해를 끼칠 징조이니, 폐하께서는 속히 덕을 쌓으시어 이를 해소하십시오."
하지만 부생은 분노하여 이를 요사스러운 말로 여기고 강권을 때려 죽였다. 그러자 어사중승 양평로를 비롯한 대신들은 부웅의 아들인 동해왕 부견에게 부생을 죽이고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부견은 처음엔 따르지 않으려 하였다.어느 날 황제 부생이 밤 중에 시녀에게
"아법(阿法: 부법의 아명) 형제는 역시 믿을 수가 없으니, 날이 밝으면 마땅히 제거할 것이다."
라 말하였다. 그 날 부법은 자다가 신령이"내일 아침에 화가 네 가문에게 미칠 것이나, 먼저 깨닫게 된다면 이를 면하리라."
라고 말하는 내용의 꿈을 꾸고, 이내 잠에서 깨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안한 상태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시녀가 찾아와 황제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부 털어놓자,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부법은 어사중승 양평로, 광록대부 강왕(強汪)을 불러 장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운룡문(雲龍門)을 통해 황궁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동생 부견이 상서 여파루와 함께 사병 300명으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부법의 뒤를 이으니, 궁중의 숙위병들은 모두 병장기를 버리고 부견에게 투항하였다. 부견의 병사들이 마침내 황제의 침실로 침입하여 아직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황제 부생을 붙잡았다. 이에 부생은 놀라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자들은 누구인가?"
주변 사람들이 대답했다."도적입니다."
그러자 부생은 다시 물었다."도적이라면 어찌하여 절을 하지 않는가?"
이를 들은 부견의 병사들은 모두 웃었다. 부생은 분노하여"어째서 빨리 절을 하지 않는 것이냐? 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참형에 처하라!"
그러거나 말거나 부견의 병사들은 이윽고 부생을 끌고가 별실에 유폐시켰다. 부생은 폐위되어 월왕(越王)에 봉해졌다가 얼마 안 가 부견에 의해 살해당했다. 향년 22세. 재위 약 2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호는 '여왕(厲王)'이라 하였고, 그의 아들 부규(苻馗)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월왕이 되었다. 부규는 딱히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부견의 견제를 받고 작위가 삭감되어 월후(越侯)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규 사망 이후에는 후사가 없어 대가 끊겼다.4. 평가
사서에서 부생은 잔학한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나 방계로써 직계의 제위를 찬탈한 부견에 의해 재위기간중의 행적이 과장,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오호십육국 시대에 부생만한 폭군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과 달리 부생은 여러 사학자들로부터 실제 폭군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재평가를 계속 받고 있긴 때문. 《낙양가람기》에서 부생은 긍정적인 군주였으나 부견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기록했고, 당나라 시대의 사학자인 유지기(劉知幾) 또한 자신의 저서 『사통』에 부생이 억울하게 무고당했음을 강조했다.[5] 근현대 중국의 4대 사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뤼쓰몐(呂思勉) 교수 역시 부생이 민가를 돌아다니며 학살한 일화나 칼과 망치로 대신들을 위협한 기록은 당대 사관의 의도적인 모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했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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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묘년 계미월 갑신일. 음력으로 6월 14일이고, 양력으로 7월 9일이다.[2] 을묘년 계미월 병술일. 음력으로 6월 16일이고, 양력으로 7월 11일이다.[3] 병진년 경인월 임술일. 음력으로 1월 26일이고, 양력으로 3월 13일이다.[4] "동해 대어가 용이 되니,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는 공주가 된다네. 어디가 낙양 성문의 동쪽인지 물어보게나!"[5] 유지기는 측천무후실록 편찬에 참여했다가 궁궐 사관들이 권력자 눈치 보며 역사를 기록하는 현실에 분노해 뛰쳐나온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정보를 수집한 뒤 역사비평사인 『사통』을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