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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3 12:46:39

저삽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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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장평목백(長平穆伯)
褚翜 | 저삽
시호 (穆)
작위 장평현백(長平縣伯)
(褚)
(翜)
모원(謀遠)
생몰 275년 ~ 341년
출신 하남군(河南郡) 양적현(陽翟縣)
부모 부친 - 저위(楮頠)
모친 - 유씨(庾氏)
자녀 저희(楮希)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모원(謀遠). 사예주 하남군(河南郡) 양적현(陽翟縣) 출신. 사촌동생 저부(楮裒)의 딸이 강제 사마악에게 시집을 가고 강헌황후에 오르면서 외척이 되었다. 아버지 저위는 일찍이 명성이 있었으나 요절했고, 그의 작위인 관내후(關內侯)는 저삽이 물려 받았다.

2. 생애

재능과 기예가 뛰어나다 알려져, 징소되어 관군참군으로 임관했다. 팔왕의 난이 한창 진행 중에 장사왕 사마예가 권력을 잡자, 저삽은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 예견해, 관직을 버리고 유주(幽州)로 피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란의 불길이 화북에도 미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하남윤으로 천거되어 양적현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광희 원년(306년), 동해왕 사마월의 활약으로 팔왕의 난이 종결되었으나 천하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저삽은 자신과 뜻을 함께할 이들을 모집해, 강을 건너 양성(陽城) 경계에 정착할 계획을 품었다. 저삽의 외삼촌 유애(庾敳)도 천하의 혼란함을 걱정해, 저삽과 뜻을 함께하기로 하고 가산을 전부 그에게 맡겼다. 하지만 무리를 이끌고 내려가는 도중에 길이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동해왕 사마월이 저삽을 불러 참군으로 삼으려 했지만, 저삽은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영가 5년(311년) 6월, 낙양이 함락되었을 때, 저삽은 영양태수 곽수(郭秀)와 함께 만수대(萬氏臺)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리를 통솔할 능력이 없었던 곽수는 자신의 부하 장수인 진무(陳撫), 곽중(郭重) 등과 불화하다 못해, 서로 부대를 이끌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삽은 자신의 무리에게도 불똥이 튈까 두려워 진무 등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외부의 재난을 피하기 위함이오. 지금은 힘을 합쳐 적에 대비해도 모자라는 마당에, 내부에서 서로 치고받는 것은 구덩이를 피하다가 우물에 빠지는 격이오. 곽수가 도리에 어긋난 자임은 맞으나, 당장은 용인할 수밖에 없소. 만약 분노를 참지 못하면 성은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 오랑캐의 표적이 될 것이고, 그대들이 곽수를 죽인다 한들, 오랑캐의 포로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여기에 따르는 해악은 분명 한두가지로 끝날 것이 아니니, 그대들은 마땅히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시오."
진무 등은 깨달은 바가 있어 곽수와 화해했다. 일은 큰 전투로 번지지 않은 채 마무리 되었고, 그 덕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영가 6년(312년), 수천 호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동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또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밀(密)현에 머물렀다. 당시 밀현에 있던 사예교위 순조(荀組)는 저삽을 사예참군, 광위장군으로 삼아, 읍 사람 3,000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 양(梁), 양성(陽城) 세 군에 세워둔 모든 영사를 감독하게 했다. 이후 순조의 곁을 떠나 다시 무리를 이끌고 여수(汝水) 시비구(柴肥口)에 이르렀으나, 이번에는 도적들에 의해 길이 막혔다. 저삽은 단기로 허창(許昌)으로 달려가 사공 순번(荀籓)을 만나니, 순번은 그를 진위장군, 행양국내사에 임명했다.

건흥 원년(313년), 예주사마, 독사주군사(督司州軍事)로 옮겨지고, 저삽의 후임으로 왕현(王玄)이 부임했다. 당시 양국(梁國) 출신의 장수 경노(耿奴)가 지역에서 민심을 얻어 자신의 세력을 길렀는데, 저삽은 항상 그를 후히 대접해 허튼 생각을 품지 않게 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왕현의 정치가 조급한 것을 보고, 자신이 떠나면 경노와 마찰할 것을 걱정했다. 저삽은 인수인계 하면서 왕현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경은 이미 위세를 이용해 살육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인정(人情)을 일치시키기 어려울 것이네. 그러니 좀 더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게나."
왕현은 저삽의 경고를 새겨듣고 겉으로는 경노를 잘 대접했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품고 매우 노여워했다. 이윽고 왕현이 진류태수로 승진하여 양국을 떠날 때가 되자, 경노를 유인해 참살함으로써 그동안의 분풀이를 하고 떠났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경노의 무리들은 곧바로 왕현을 따라잡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때 서주에서 활동하던 도적 장평(張平)은 양국을 차지하기 위해 경노의 무리를 유혹하니, 양국의 민심은 장평에게로 쏠리려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저삽은 다시 양국으로 파견돼 백성을 어루만져 주었고, 이내 민심이 진정되면서 반란을 일으켰던 무리도 자연스레 와해하였다. 이후 이부랑으로 천거 받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은 채, 다시 무리로 복귀하고 피난을 재개했다. 저삽의 무리는 마침내 강을 건너고 목적지인 강동에 도착하면서 기나긴 피난길을 마무리했다.

건무 원년(317년), 원제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즉위하자, 동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산기랑, 태자중서자, 분위장군, 회남내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영창 원년(322년), 대장군 왕돈유외조협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저삽은 정서장군 대연의 명을 받고 장수 500명을 파견해 국난 극복에 힘썼다. 이후 명제 사마소가 황위에 오르자, 둔기교위, 태자좌위솔을 역임했다.

함화 4년(328년), 소준이 역양에서 난을 일으키자, 조정은 수도 건강(建康)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저삽을 시중, 전정토군사(典征討軍事)로 삼았다. 그러나 관군이 소준에게 패하면서 수도가 반란군 손아귀에 넘어가 버렸다. 사도 왕도가 저삽에게 말했다.
"지존(至尊:황제)께서 마땅히 정전에 올라 어좌에 앉아 계셔야 하니, 그대는 어서 폐하를 모시고 와주십시오."
저삽은 즉시 합문(閤門)으로 들어가, 몸소 성제 사마연을 안고 태극전(太極殿) 앞의 전각에 올랐다. 이후 왕도가 어상에 올라 저삽으로부터 성제를 넘겨받았고, 저삽, 유초, 종아는 왕도와 성제의 좌우를 호위했다. 당시 백관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음에도 대궐만은 숙연함을 유지했다. 그때 소준의 병사들이 대궐로 진입해 저삽에게 전각에서 내려오라 명했다. 하지만 저삽은 움직이지 않고 그들을 향해 크게 꾸짖었다.
"소준은 황제를 알현하러 왔거늘, 어찌 그의 병사가 핍박하려 드는가!"
이에 병사들은 위축되어 감히 올라가 강제로 끌어내릴 생각을 못했다. 소준이 집권한지 수 개월이 지났을 무렵, 소준은 성제 사마연을 겁박해 강제로 수레에 태우고 석두성으로 향하자, 저삽도 그 뒤를 따랐다.

함화 5년(329년), 소준이 허무하게 전사하면서 반란이 평정되었다. 저삽은 공을 인정받아 장평현백(長平縣伯)에 봉해지고 단양윤으로 승진했다. 저삽은 소준에 의해 초토화 된 건강을 재건하기 위해 흩어진 자들을 다시 모으고, 은혜로운 정치를 펼쳤다. 이후 평서장군으로 승진한 유량을 대신해 중호군에 임명되어 석두성에 주둔했다가, 영군(領軍)으로 옮겨지고, 오병상서(五兵尚書), 봉거도위, 감신궁사(監新宮事), 상서우복야, 상서좌복야, 산기상시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함강 6년(340년), 호군장군 하충이 중서령으로 승진하자, 저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함강 7년(341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 조정에서 그를 위장군으로 추증했다. 시호는 목(穆). 아들 저희(楮希)가 후사를 이었고, 관직은 예장태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