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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의 반란자 蘇峻 | 소준 | |
성 | 소(蘇) |
이름 | 준(峻) |
자 | 자고(子高) |
생몰 | ? ~ 328년 |
출신 | 장광군(長廣郡) 액현(掖縣) |
부친 | 소모(蘇模) |
국적 | 진(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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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장수였다가 반란을 일으킨 인물.자는 자고(子高)였으며, 서진 시기 안락상(安樂相)을 지낸 소모의 아들이었다.
2. 생애
2.1. 영가의 난
관동의 청주 장광군(長廣郡) 액현(掖縣)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하며 재주와 학식을 겸비했으며, 군의 주부로 관직을 시작하고, 18살에는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서진 말기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소준은 고향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액현에서 보루를 쌓고 버텼는데, 유민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드니 소준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졌다.소준은 장사 서위(徐瑋)로 하여금 각지에 격문을 띄워 교화를 선양했고 죽은 사람들의 뼈를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 소준의 모습에 감격한 사람들은 소준을 맹주로 추대했고, 소준은 이후 해변의 청산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다.
2.2. 동진의 장수
한편 강남에서 사마씨 진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이은 중종 원제 사마예는 소준의 평판을 듣고는 그를 임시로 안집장군(安集將軍)으로 삼았다.청주(靑州)자사를 겸하고 있었던 조억(曹嶷)이라는 인물이 소준을 액현령으로 천거하자, 소준은 병을 핑계로 조억의 천거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준의 위세를 두려워한 조억이 소준을 제거하기 위해 세운 계략이었고, 조억이 군대를 일으켜 소준을 토벌하려고 하자, 소준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사마예에게 귀순했다. 동진 조정에서는 소준의 귀순을 환영하여 그를 응양장군(鷹揚將軍)으로 삼았다.
319년 2월, 서주에서 동진의 팽성내사 주무(周撫)가 패국내사 주묵(周黙)을 살해하고 동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소준은 하비내사 유하와 태산태수 서감을 도와 난을 진압했다. 원제 사마예는 소준에게 회릉내사를 겸하게 하고, 난릉상(蘭陵相)으로 전임시켰다.
322년, 왕돈이 동진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소준에게 왕돈의 난을 진압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소준은 왕돈을 토벌하러 가기 전에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는데 불길한 점괘가 나오자 소준은 진군하지 않았다. 왕돈의 난을 토벌하기로 한 관군이 패배하자, 소준은 우이(盱眙)로 달아나니 조정에서는 그의 회릉내사 직위를 박탈했다. 이에 소준의 부하인 서심(徐深)과 애의중(艾毅重)이 조정에 소준을 다시 회릉내사로 삼아달라고 거듭 청하자, 조정에서는 서심과 애의중의 주청을 허락하여 소준을 내사로 삼고 분위장군(奮威將軍)을 더했으며, 뒤에 임회내사에 임명했다.
324년 6월, 왕돈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상서령 치감은 소준과 연주자사 유하(劉遐)를 수도로 불러들여서 수도를 사수하게 하도록 건의했다. 한편 왕돈은 소준의 형을 보내
"부귀는 잠자코 있으면 굴러들어 올 것이다. 어찌 스스로 죽기를 택하는가?"
라며 소준을 설득했으나, 소준은 이를 따르지 않고 수도 건강으로 달려가 왕돈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 소준의 군대는 먼 길을 걸었으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랐기에 병사들이 지쳐있었다. 이에 왕돈의 심복인 심충과 전봉(銭鳳)은 소준의 군사들은 당장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라 판단해, 그날 밤 죽격저(竹格渚)에서 회수를 건너 소준을 습격했다. 하지만 이미 적의 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소준은 장수 한황(韓晃)을 거느리고 남당(南塘)에서 적의 측면을 공격해 대파했다. 심충과 전봉은 도주했으며 3,000명이 남당에 빠져 익사했다. 좌위장군 유량(庾亮)은 소준을 감독하여 심충을 몰아냈고, 심충은 도망치다가 조정에서 건 현상금을 탐내던 부하 오유(吳儒)에게 배신당해 목이 베였다. 소준은 왕돈의 난을 진압한 공적을 인정받아 사지절(使持節), 관군장군(冠軍將軍), 역양현(曆陽縣) 내사로 진위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으며 소릉공(邵陵公)으로 책봉되고 식읍 1,800호를 받았다.
2.3. 반란의 조짐
하지만 왕돈의 난을 진압한 이후 위세와 명망이 점점 높아지면서 소준은 정병 10,000명을 얻고 정교한 무기와 장비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소준은 동시에 점점 교만해져갔고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망명한 이들을 위무하여 맞아들이거나 죄를 저지르고 형벌을 피해 도망쳐온 이들을 숨겨주어 세력을 점점 키우기 시작했다. 게다가 조정에서 지급하는 물자가 조금도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여기에 대해서 폭언을 퍼부었다이런 가운데 325년 제2대 숙조 명황제 사마소가 붕어하고 현종 성황제 사마연이 즉위했다. 성제는 5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정사는 모두 외척인 중서령 유량에게 위임했는데, 유량은 이런 소준을 의심하고 온교를 강주자사로 삼아 무창(武昌)을 진수케 하고, 상서좌복야 왕서를 회계내사로 삼아 석두성(石頭城)을 수리하게 하여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했다. 또, 유량은 소준과 친한 남돈왕 사마종(司馬宗)이 반란을 꾀했다는 명목으로 주살하고, 그 아들들의 성씨를 마(馬)씨로 바꿔 황족에서 폐출해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여기에 더해, 사마종의 형인 서양왕 사마양을 태재에서 면직시키고, 작위를 익양현왕으로 깎아내렸다. 사마종은 본래 황족이었고, 사마양은 명제 사마소를 태자 시절부터 곁에서 보필한 황실 내 주요 인물이었는데, 이들을 하루 아침에 축출하니 조야의 인심이 유량을 떠났다.[1] 남은 사마종의 무리는 유량의 마수를 피해 소준에게로 피신했고, 유량은 소준에게 그들을 압송하라고 청했으나 이번에도 소준은 듣지 않았다.
326년 11월, 후조의 석총이 수춘을 침공하자 예주자사 조약이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외척 유량은 평소 조약을 미워했으므로 조약이 전사하길 바라는 마음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덕분에 석총은 순조롭게 수춘을 점령해, 준주(逡遒)와 부릉(阜陵)을 약탈하여 남녀 5,000명을 학살했다. 그제서야 조정은 사도 왕도를 보내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느려터진 행동을 보다못한 소준이 먼저 장수 한황을 보내 석총의 후조군을 격파했다.
유량은 소준이 역양에 있으면 내란의 화근이 될 것이라고 여겨 그를 중앙으로 징집해 그가 양성한 병사들을 빼앗으려고 했다. 사도 왕도는 소준을 자극해선 안되고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유량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조정의 이러한 낌새는 소준의 귀에도 들어갔고, 이에 소준은 사마 하잉(何仍)을 보내 보좌를 감당할 수 없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유량은 듣지 않고 오히려 곽묵을 징소해 후장군, 영둔기교위로 삼고, 유빙(庾冰)을 오국내사로 삼아 모든 장병들에게 소준에 대비하라고 일렀다.
327년 11월, 소준을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하며 특진의 지위에 두고, 소준의 아우인 소일(蘇逸)이 소준의 군대를 대신 통솔하라는 조서가 내려왔다. 소준은 자신이 중앙에 가면 필시 유량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에 청주의 외딴 군을 자신에게 보충해달라고 청했지만, 조정에서는 소준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준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장차 부궐하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때 소준의 참군 임양(任譲)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장군께서 멀리 떨어진 작은 군에 살 것을 청하셨음에도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형세가 이래서 살길이 없으니 차라리 군대를 배치해서 스스로 지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부릉현령 광술(匡術) 등도 동조하며 같은 의견을 내비치자 소준은 결국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 소준을 달래보았지만, 소준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역정을 냈다."조정에서는 내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데 내가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는 차라리 산꼭대기에서 정위를 바라볼지언정, 정위가 산꼭대기를 바라보게 할 수는 없다. 옛날 나라가 매우 위태로웠을 때 내가 아니면 위기를 넘길 수 없었는데, 교활한 토끼가 이미 죽으면 사냥개는 당연히 구워지는 것이 이치에 맞지만, 마땅히 죽음으로 음모를 꾸민 자에게 보답할 것이다."
2.4. 소준의 난
소준은 평소 조약이 조정을 원망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의 참군 서회(徐會)를 수춘의 조약(祖約)에게 보내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부추겼다. 조약은 크게 기뻐하며 조카인 패내사 조환(祖渙)과 사위인 회남태수 허류(許柳)에게 군사를 주어 소준을 돕도록 했다. 초국내사 환선은 조약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간언을 하려 했으나 조약이 만나주지 않자, 이내 그만두고 조약과의 절교를 선언했다. 이리하여 소준과 조약은 유량을 토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돈의 난에 이어 다시 한번 동진을 뒤흔든 소준의 난이 시작된 것이었다.327년 12월 1일, 소준이 마침내 장수 한황과 장건(張健)을 보내 고숙(姑孰)을 점령하고 쌀과 소금을 탈취했다. 이에 유량을 매우 싫어하던 팽성왕 사마웅(司馬雄)과 장무왕 사마휴(司馬休)가 소준의 반란군과 합류했다. 유량은 정토대도독에 올라 좌위장군 조윤(趙胤)과 좌장군 사마류(司馬流)를 보내 자호(慈湖)를 점거하여 소준의 진격을 막으려고 했다. 한편 선성내사 환이는 소준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듣고 급히 무호(蕪湖)에 주둔했지만 한황에게 격파당해 광덕(廣德)을 지켰다.
328년 정월, 한황이 자호를 치자, 사마류는 원래 겁이 많고 나약한 성격이라 자호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잡혀 죽임을 당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소준은 조환 및 허류와 함께 총합 20,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친정하여, 바람을 타고 횡강진을 건너, 우저(牛渚)에 도착해 능구(陵口)에 주둔했다. 동진의 관군은 여러 차례 소준의 군대를 쳤으나 소준의 용병술에 당해 전부 패배했다. 소준은 한껏 기세를 올려 동오의 대제 손권의 능을 지나 수도 건강 북쪽의 복주산(覆舟山)을 점령했다.
사도사마 도회는 유량에게
"소준은 석두에 병력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감히 곧바로 직진해서 내려오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반란군은 반드시 소단양(小丹陽)의 남쪽 길을 통해 걸어서 내려올 것이니, 중요 길목에 병사를 매복시키면 의당 한 번의 전투로 소준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라고 건의했지만, 유량은 이를 듣지 않았다. 과연 소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야밤에 소단양을 통해 산을 내려왔는데, 주변이 너무 어두워 한동안 산길을 헤맸다. 후에 이를 들은 유량은 도회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산을 완전히 내려온 소준의 군대가 마침내 건강성 코앞까지 도착했다. 건강을 수비하던 도독대항동제군사 변곤(卞壼)과 시중 종아(鍾雅)는 성에서 나와, 서릉(西陵)에서 소준의 군대를 요격했지만 패배하고 1,0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소준은 도망치는 변곤의 군대를 뒤쫓아 건강성 안쪽으로 진입했고, 풍향을 이용해 불을 지펴 변곤이 황궁 동쪽 청계(靑溪)에 펼쳐둔 목책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 화재로 인해 수도 건강의 상서부, 군부, 중앙관청 등 주요한 시설들이 파괴되었으며, 변곤 등은 목숨을 바쳐 황궁 진입을 막으려다가 전사했다.
사도 왕도는 시중 저삽에게 성제 사마연을 정전(正殿)으로 모셔오라 명했다. 저삽은 8살 짜리 성제를 안아 태극전(太極殿) 앞에 올랐고, 왕도, 상서 장개(張闓), 좌광록대부 육엽이 황제의 곁을 호위했다. 조정의 백관들은 모두 흩어져 정전은 매우 초라했는데, 소준의 병사들이 들어와 비웃으며 어린 황제 곁에 있는 저삽에게 전각에서 내려오라며 협박했다. 하지만 저삽이 큰 소리로 꾸짖자 소준의 병사들은 감히 강제로 끌어내릴 생각도 못하고, 후궁으로 발걸음을 돌려 약탈을 계속했다.
황궁을 장악한 소준이 군사를 풀어 6궁을 크게 약탈하니, 광록훈 왕빈(王彬)을 비롯해 미처 도망치지 못한 백관들은 그대로 병사들의 장난감이 되어 채찍과 곤봉을 맞았고, 궁녀들은 발가벗겨져 주변에 너덜너덜한 거적데기나 풀 등으로 몸을 가리려고 애썼다. 그조차도 찾지 못한 궁녀는 땅에 앉아 흙으로 알몸을 가리려 했고 울부짖는 소리가 안팎으로 진동했다. 그나마 소준은 백성은 건드리지 않아 관리라도 평민복을 입은 자는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전투복을 입고 있는 자는 가차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 약탈로 인해 베(布) 200,000필, 금•은 5,000근, 돈 억만 전, 비단 수만 필 등이 모두 약탈되어 소준의 무리에게 소비되었으며, 어린 성제 사마연은 소준이 있는 동안 타다남은 쌀을 먹어야 했을 정도로 빈궁해졌다.
다음날, 황궁 약탈이 끝나자 조정을 장악한 소준은 스스로 표기장군, 녹상서사에 올랐고 조약을 시중, 태위, 상서령으로 임명하는 한편 대사면령을 내렸으나 유량은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 왕도에게 덕이 있음을 알아 자신보다 상석에 두었으며, 일전에 유량에 의해 억울하게 퇴출당한 익양현왕 사마양도 불러들여 이전 관직을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
328년 3월, 소준은 유빙을 공격해 쫓아내고 시중 채모(蔡謨)를 대신 오국내사로 삼았다. 심양에 주둔해있었던 강주자사 온교는 도망쳐오는 유량을 받들고 건강성 함락 소식에 비통해했다. 온교와 유량은 소준을 토벌하기 위해 조약과 소준의 죄상을 적은 격문을 각지의 장수들에게 뿌려 군사를 소집했다. 정서장군, 형주자사 도간이 온교의 부름에 응해 갑주를 입고 배에 올라 호응했다. 소준은 황궁을 지키다가 전사한 도간의 아들 도첨의 시신을 형주로 보내 위로했으나 도간은 관을 쳐다보지도 않고 수군을 휘몰아 온교와 합류했다.
328년 5월, 도간이 유량, 온교와 더불어 4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 건강을 탈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소준은 참군 가녕(賈寧)의 건의를 따라 석두성을 점거하고 군을 나누어 적을 막았다. 도간이 소준이 파견한 군대를 상대로 모두 승리하며 진군을 멈추지 않자, 소준은 회덕령 광술, 좌광록대부 육화(陸華)에게 건강을 맡기고, 성제를 핍박해 강제로 석두성으로 끌고 갔다. 그때 하늘에서 폭우가 내려 도로가 엉망이 되니, 우위장군 유초와 시중 종아가 황제를 좌우에서 보위했다. 소준이 말을 내어주려 했지만 이들이 거절하자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후 석두성에 도착한 소준은 창고에 어린 성제를 유폐시키고, 매일같이 찾아와 성제를 향해 방자하고 추악한 말을 했지만 성제는 그런 와중에도 태연히 《논어》를 공부했다.
이때 회계내사 왕서가 도망쳐온 유량을 받들어 거병하여 10,000명의 병사로 건강성을 노리니, 소준이 임명한 오국내사 채모는 유빙에게 관직을 돌려주고 왕서에게 호응했다. 이에 소준은 장수 관상(管商), 홍휘(弘徽), 장건을 보내 막게 했지만 어느 쪽도 이기지 못했고 건강 동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광덕을 지키던 환이도 경현(經縣)에 주둔하여 장수 유종을 보내 난석(蘭石)을 지키게 했지만, 이내 유종을 격파하고 쫓아온 한황에 의해 살해당했다.
도간의 군대는 가자포(茄子浦)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옹주자사 위해(魏該), 서주자사 치감 등도 하나둘 합류하며 그 군세가 점점 부풀려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강성해졌다고 판단한 도간은 나아가 사포(查浦)에 주둔했고, 온교는 사문포(沙門浦)에 주둔해 석두성의 소준을 압박했다. 유량이 보병 2,000명으로 석두성 동북쪽 백석(白石)에 군루를 세우자, 소준은 10,000여 명의 보•기를 거느리고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백석루 혼자 모든 공세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으므로 치감과 곽묵이 경구(京口)를 점거하고, 경구 남쪽 대업(大業), 곡아(曲阿), 능정(庱亭) 3곳에 각각 군루를 세워 소준의 군세를 분산시켰다.
328년 7월, 후조의 석총과 석감이 수춘을 함락시켰고 조약 등은 역양으로 달아났다. 소준의 심복 노영(路永), 광술, 가녕은 거사가 실패할까 두려워 소준에게 대신들을 전부 죽이고 측근으로 채우자고 건의했지만, 소준은 사도 왕도를 공경해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이에 노영 등이 딴 마음을 품기 시작하니, 왕도는 참군 원탐(袁耽)을 보내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328년 9월, 도간과 온교가 지난 몇 개월간 소준과 대치했으나 소준은 동서로 제장들을 통솔하며 동진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했다. 대업루를 지키던 곽묵이 홀로 도망쳐 위태로워지자, 소준의 군세는 날마다 왕성해져갔고 동진군은 점점 의기소침해져 두 마음을 품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교는 장수들을 독려해 이후로도 여러 차례 소준과 맞서 싸웠으나 매번 패배하고 마니, 온교 자신조차도 소준을 깊이 두려워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관상 등이 마침내 왕서와 유빙 등을 격파해 오, 해염(海鹽), 가흥(嘉興) 3군을 크게 약탈했다. 도간은 크게 불리했으나 여강태수 모보가 소준군의 군량 창고를 기습해 불태워버린 덕에 아직 기회가 있음을 믿고 물러나지 않았다.
온교는 대업루의 포위를 풀기 위해 장수 조윤에게 10,000명의 보병을 주고 백석 남쪽에서 소준을 도발했지만, 소준은 일부 병력만 거두어 석두성으로 가고 나머지는 대업루를 그대로 압박하게 했다. 그리고 장수 광효(匡孝)와 아들 소석(蘇碩)에게 8,000명의 기병을 주어 조윤을 격파했다. 소준은 승리하고 온 장병들에게 술을 나누어 위로하고는, 술에 취한 채 성 위에 올라 패주하는 조윤의 군대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광효도 능히 적을 격파했으니, 나 또한 당연히 그처럼 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는 기병 몇 기를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적진으로 돌격했지만 이내 막히자 다시 말을 돌려 석두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소준이 백목피(白木陂)를 지날 때 추격하던 도간의 아문 팽세(彭世)와 이천(李千)이 창을 던져 말을 넘어뜨리고 낙마한 소준의 목을 베었다. 이후 돌아와 시신을 태우자 동진의 삼군이 모두 만세를 크게 외쳤다.3. 사후
소준의 사마 임양은 건강성에서 황급히 동생 소일(蘇逸)을 추대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소일은 형 소준의 시체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유량의 부모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를 시전하고 그들이 형 소준에게 한 것과 똑같이 그 시신들을 불에 태웠다. 그러나 황궁 수비를 담당하던 광술이 광록대부 육엽 등의 설득에 넘어가 동진에게 투항하면서 건강성 서쪽 구역을 잃고 말았다. 한편, 석두성에서 유초와 종아가 성제를 모시고 동진군의 군영으로 도망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소일이 보낸 장수 임양에게 둘 다 죽었다.석두성에서는 소준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일이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관상 등을 석두성으로 보내 남겨진 장수들과 함께 경구 공략을 계속 진행하도록 했다. 관상과 홍휘가 능정루를 쳤으나 독호 이감(李閎)과 경군장사 등함(滕含)에게 격파당하니, 죽은 이가 수천 명에 달했다. 관상은 이감의 추격을 받아 연릉(延陵)에서 한 번 더 격파당했고, 또 군사 수천 명을 잃고 나서야 유량에게 투항했다. 홍휘는 곡아루를 공략 중이던 장건에게 달아났다.
소일은 한황과 소준의 아들 소석을 이끌고 궁성을 공격해, 태극전(太極殿)의 동당(東堂)과 비각(秘閣)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모보가 궁성의 서성(西城)에서 분투해 한황 등이 물러났다. 이때 등함이 소일 등을 쳐 대파하니, 소일은 건강을 내주고 석두성으로 도망쳤다.
소석이 회수 건너편에서 결사대 수백 명으로 추격해오는 동진군과 싸웠으나 전멸하고 목숨을 잃었다. 온교와 도간이 여러 군을 대동해 성문을 부수고 석두성에 진입하자, 한황 등은 두려워 서둘러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성문이 비좁아 서로 밟고 밟히는 아비규환이 벌어지면서 10,000명이 죽었다. 미처 성에서 나가지 못한 소일은 이탕(李湯)에게 뒷덜미가 잡혀 참수당했다. 성에 진입한 군신들은 성제를 알현해 머리를 조아리며 벌을 받기를 청했다. 이후 소준에게 동조했던 팽성왕 사마웅, 서양왕 사마양과 그 아들 사마파(司馬播) 및 사마충(司馬充), 손자 사마숭(司馬崧)을 모두 붙잡아 주살했다. 임양은 도간과 친분이 있어 죽음을 면할 뻔했으나, 성제가
"이 자가 유초와 종아를 죽였다."
고 일러 결국 처형되었다.여기서 겨우 살아남은 한황과 소준의 잔당들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장건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세력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 장건이 홍휘를 살해하면서 금세 혼란에 빠지니, 양렬장군 왕윤지가 이들을 곡아에서 소탕했다. 패배한 소준의 잔당들은 고장(故鄣)으로 도망쳐 엄산(巖山) 깊숙이 숨어들었고, 한황이 활을 들고 유격대를 이끌며 진입을 시도하는 수많은 토벌군을 사살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치감이 이끄는 토벌대가 소준의 잔당을 멸하고 장수 한황과 장건을 잡아 참수하면서 소준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 당시 어린 성제 사마연도 외할아버지인 유량이 사마종을 함부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울면서 질책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