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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융(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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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양평애공(陽平哀公)
苻融 | 부융
시호 (哀)
작위 양평공(陽平公)
(苻)
(融)
박휴(博休)
생몰 ? ~ 383년 11월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부황 문환제
형제자매 5남 중 막내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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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문환황제 부웅의 막내아들. 세조 선소제 부견의 동생.

2. 생애

어릴 때부터 재능이 남달라 또래들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였고, 체구도 장대하고 튼튼하여 장정 100여 명에 맞먹는 힘을 지녔으며, 승마와 사격, 검술 모두 준수하여 많은 칭찬을 받았다. 또, 글을 좋아하고 언변이 능숙하였고, 기억력도 뛰어나 한 번 귀로 들은 것은 바로 외웠고, 한 번 눈으로 스친 것은 잊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자태까지 지니고 있었다. 경명제 부건은 일찍이 부융을 안낙공(安樂王)에 봉하려 하였으나, 부융이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니, 부건은 그를 심히 기이하게 여기고
"또 나의 아이 중에 기산(箕山)의 지조를 지닌 자가 나왔도다."
라 말하며 그만두었다. 경명제 부건의 뒤를 이은 황제 부생 역시 부융의 기량과 용모를 아껴 항상 좌우에 두고 보살폈다. 부융이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국정을 보좌할 포부를 품었고, 그의 명성은 조야로 높아져 황제 부생을 알현해 국정에 대해 의논하는 일이 잦아졌다.

영흥 원년(357년) 6월, 형 부견이 정변을 일으켜 황제 부생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즉위하자, 부융은 양평공(陽平公)에 봉해졌다. 비록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국정을 보좌하려는 부융의 뜻은 변함이 없었고, 선소제 부견을 보좌하여 형벌과 정치를 공명정대하게 집행하였으며, 재주있는 자를 천거해 나라의 이익이 되게 하였다. 선소제 부견 또한 그를 중히 여겨 항상 부융, 재상인 왕맹과 더불어 국정을 논의하였고 형제 간의 우애도 깊었다.

감로 원년(359년) 12월, 선소제 부견이 왕맹을 사예교위, 보국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왕맹은 사양하고 자기 대신 부융, 임군(任羣) 등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부견은 이를 불허하고 왕맹의 관직을 그대로 임명했으며, 부융은 시중, 중서감으로 삼았다.

감로 2년(360년) 10월, 오환의 독고부선비족 몰혁간이 각자 수만 무리를 이끌고 전진에 투항해오니, 선소제 부견은 그들을 요새 남쪽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 부융은 이들이 필시 변경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간해 이민족 무리를 요새 밖으로 내보내게 하였다.

건원 8년(372년) 6월, 사지절, 도독6주제군사(都督六州諸軍事), 진동대장군, 기주(冀州)목에 임명되었다. 기주로 부임한 부융은 관리들의 기강을 보고 인재를 가려서 발탁해, 방묵(房黙)을 상서랑, 신소(申紹)를 치중별가, 최굉(崔宏)을 기주종사로 삼아 기실(記室)을 담당하게 하였다.

건원 10년(374년) 3월, 태사령 장맹(張孟)과 함께 선소제 부견에게 항복해온 전연의 무리를 제거할 것을 주청했지만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원 16년(380년) 3월, 대나라 정벌에 큰 공을 세웠던 유주(幽州)자사 부락은 선소제 부견의 명령에 따라 한수(漢水)를 타고 녕주(寧州)의 서남이족 토벌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내심 변방을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에 불만을 품고, 선소제 부견의 명령을 거역해 이동하지 않은 채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대장군, 대도독,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국 등 여러 국가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청하였다.

건원 16년(380년) 4월, 여러 국가들이 굳이 부락의 반란을 도울 이유가 없어 모두 호응하지 않으니, 부락은 두려워 도중에 그만두려 했으나 유주치중 평규(平規)는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돌이킬 수 없다며 70,000 대군을 거느리고 화룡(和龍)에서 출진하였다.

건원 16년(380년) 5월, 선소제 부견은 당장 토벌하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무르고, 부락에게 서신을 보내 유주를 영원히 대대로 봉지로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그를 회유해보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선소제 부견은 분노하여 좌장군 두충과 보병교위 여광에게 보•기 40,000명으로 부락을 토벌케 하는 한편, 우장군 도귀(都貴)를 업(鄴)으로 보내 부융을 정토대도독으로 삼아 기주병 30,000명으로 토벌군 선봉에 서게 하였다. 그러자 계성(薊城)을 지키던 부락의 형 북해공 부중(苻重)도 성에서 나와 부락과 군사를 합쳐 중산(中山)에 주둔하니 그 수가 100,000명에 달하였다. 이윽고 부융은 좌장군 두충과 함께 중산에서 부락, 부중의 반란군과 싸워 그들을 대파하였다. 부융은 부락을 생포해 장안으로 호송하였고, 여광으로 하여금 계로 도망친 부락의 형 부중을 추격하게 하여 그를 참수케 하였다. 둔기교위 석월은 기병 10,000기를 이끌고 화룡으로 도망친 평규를 토벌하여, 그를 붙잡아 참수하고 유주를 다시 평정하였다.

건원 16년(380년) 6월, 선소제 부견은 부락을 사면하고 서해(西海)로 귀양보내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부융을 시중, 중서감, 도독중외제군사, 거기대장군, 사예교위, 녹상서사로 삼았다.

건원 18년(382년) 4월, 선소제 부견이 부융을 사도로 삼으려 했으나 부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건원 18년(382년) 5월, 천하통일까지 동진 하나만을 남겨둔 선소제 부견은 동진 정벌을 획책하고자 부융을 정남대장군, 개부의동삼사에 임명하였다.

건원 18년(382년) 9월, 선소제 부견이 효기장군 여광 등에게 병력 70,000명을 주어 서역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부융은 한창 농번기에 병력을 원정에 동원해서는 안 된다 굳게 간하였으나 부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원 18년(382년) 10월, 선소제 부견이 태극전(太極殿)에서 군신들을 모아 동진 정벌을 논의하였다. 비서감 주융을 제외한 석월, 권익(權翼) 등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간곡히 말리자, 부견은 신하들을 내보내고 부융과 독대하여 의논하고 말했다.
"자고로 대사(大事)란 한두사람과 정책을 결정할 수 없는 법이나. 군신들과 의논하였는데 그 의견이 분분하여 공연히 마음만 어지럽혔으니, 나는 마땅히 너와 결단을 내릴 것이다."
부융이 말했다.
"한평생 이어지던 내분을 진압하여 오월(吳越) 지역에 복이 있으니 이는 정벌이 불가한 첫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의 주인이 명철하여 조정의 신하를 잘 부릴 줄 아는 것이 정벌이 불가한 두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북을 통일하면서 여러 차례 전투하였기에 병사들이 지쳐 적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는 정벌이 불가한 세번째 이유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불가하다 상책하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받아들여주시옵소서."
이에 부견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네가 이처럼 말한다면 나는 누구와 천하의 일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무리는 100만이 넘고, 재산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늘, 내 비록 아직 천하의 주인을 칭하지는 않았으나 지금이라도 그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차 쌓아올린 위세로 죽어가는 적을 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 쏘냐! 내가 적을 멸하지 않고 자손들에게 떠넘긴다면 종묘사직에 근심거리가 되리라!"
그러자 부융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吳)의 정벌이 불가함은 명백하여 대대적으로 헛된 소모만 한 채 필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신이 우려하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선비족, 강족, 갈족을 총애하여 변경에 널리 그들을 포진시켰으나, 과거부터 사람들은 이러한 오랑캐들을 멀리하였습니다. 지금 나라가 무너져 풍진(風塵)의 변고가 생긴다면 종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로지 약한 병졸 수만 명만이 수도를 지키는 가운데 선비, 강, 갈이 숲처럼 주위를 두르고 있는데, 이들 모두 나라의 도적이자 원수입니다! 신은 역시 이에 대한 대비책이 만전을 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헛되이 돌아온 후에 벌어질 일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신의 지식이 얕고 우매하여 진실성이 부족하다 할 수 있어도, 한때 폐하의 공명을 이룩하는 데에 도움을 주웠던 기이한 선비 왕경략의 임종 전에 남겼던 유언을 잊지마시옵소서!"
부견은 부융의 말을 다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부융은 상서 원소(原紹), 석월, 권익 등과 상소를 올려 여러 차례 간언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건원 19년(383년) 8월, 선소제 부견이 모용수, 요장의 말만 듣고 조서를 내려 군사를 징집하였고 부융은 다시 한번 간했다.
"폐하는 선비, 강, 갈족을 총애하시어 기내에 살게 하고는 동족은 먼 곳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병란이 일어나면 국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읍에는 약한 병사 수만 명뿐이나, 선비, 강, 갈 등은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고 우리들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선소제 부견은 듣지 않았고, 부융으로 하여금 표기대장군 장자, 무군장군 부방(苻方), 위장군 양성, 평남장군 모용위, 관군장군 모용수와 보•기 250,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선소제 부견은 보병 600,000명과 기병 270,000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건원 19년(383년) 9월, 부융이 이끄는 선봉대가 영구(穎口)에 이르러 수춘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동진의 평로장군 서원희(徐元喜), 안풍(安豐)태수 왕선(王先) 등을 사로잡았다. 그때 마침 모용수의 선비족 부대가 운성(鄖城)을 공략해 동진의 장수 왕태구(王太丘)를 살해하니, 부융은 위군장군 양성, 양주(揚州)자사 왕현(王顯), 익양(弋陽)태수 왕영(王詠) 등에게 50,000 군사를 주어 낙간(洛澗)에 주둔케 하였다. 당시 동진의 수비군을 지휘하던 정로장군 사석은 70,000 병력을 이끌고 하간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는데, 적의 군세가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이에 부융은 군대를 몰아 동진의 용양장군 호빈(胡彬)이 지키는 협석(硤石)을 포위하였다.

부융군과 맞서 싸우던 호빈은 양식이 다하자 은밀히 사석에게 군량이 다 떨어졌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신을 들고 가던 병사가 전진군에게 사로잡혔고, 이를 입수한 부융은 선소제 부견에게 보내 보고하였다. 선소제 부견은 크게 기뻐하며 대군을 항성(項城)에 남기고 경기병 8,000여 명만 거느린 채 하루만에 부융이 있는 수춘으로 갔다.

건원 19년(383년) 11월, 선소제 부견이 사석에게 항복을 권유하라고 보낸 사신 주서가 동진군 진영에 가서 항복을 권유하기는 커녕 이길 책략만 알려주고 돌아왔다. 이에 사현은 광릉상 유뢰지를 파견해 낙간의 양성 등을 습격케 하니, 전진군은 궤멸당해 양성, 왕영은 참수당하고, 퇴로까지 끊겨 도망치던 전진군 15,000여 명이 익사하였으며, 전진의 양주자사 왕현은 사로잡혔다. 승전보를 들은 사석의 군대가 다시 진군을 시작해 낙간을 돌파하였고, 부융과 함께 수춘성에 올라 비수(肥水) 인근에 진을 친 동진군 진영의 엄정함을 살피던 선소제 부견은 비로소 두려운 얼굴빛을 드러냈다.

비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선소제 부견은 부융과 작전을 의논한 끝에, 강만 건너게 해달라는 동진군의 청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뒤로 돌아 기습할 계획을 꾸몄다. 이후 군대를 뒤로 물리는 과정에서 전진군은 자신들이 패하여 후퇴하는 것으로 착각해 큰 혼란에 빠졌고, 병사들이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동진군의 선봉인 사현과 사염 등이 비수를 건너 그들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부융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베어가면서 진영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부융의 말이 넘어져 낙마하여 이내 동진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건원 19년(383년) 12월, 비수대전에서 처참히 패하고 장안으로 돌아온 선소제 부견은 전사한 동생 부융을 위해 통곡한 뒤, 그를 대사마로 추증해주고 시호를 '애(哀)'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