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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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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 4대 천왕
여륭 | 呂隆
즉위 401년 2월
후량 양주 고장성
(現 간쑤성 우웨이시)
사망 416년 8월
후진 사예 부풍군 옹현
(現 산시성 바오지시 펑샹구 남쪽)
능묘 백석릉(白石陵)
재위기간 후량의 4대 천왕
401년 2월 ~ 4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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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4F67><colcolor=#ece5b6> 성씨 여(呂)
휘 륭(隆)
자 영기(永基)
부모 부황 문황제(文皇帝)
모비 황태후 위씨(衛氏)
배우자 황후 양씨(楊氏)
자녀 불명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작호 건강공(建康公)
연호 신정(神鼎, 401년 ~ 4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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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반 후량의 제4대이자 마지막 황제. 태조 의무제 여광의 동생이었던 여보(呂寶)[1]의 아들로 여찬, 여소 형제와는 사촌 관계이다.

묘호와 시호는 없고, 말제나 건강공(建康公)으로 불린다.

2. 생애

여륭은 용모가 아름답고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났다. 백부인 천왕 여광의 치세 말년에 북부호군(北部護軍)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점차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명성과 평판이 함께 높아졌다.

신정 원년(401년) 2월, 여륭의 동생인 여초(呂超)가 선비족 사반(思盤)을 공격한 일로 천왕 여찬으로부터 심하게 질책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여초가 형 여륭과 공모해 연회에서 술에 취한 여찬을 시해하였다. 수도인 고장(姑臧)을 장악하고 여찬의 동생인 농서공 여위까지 제거한 여초가 여륭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여륭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여초가 말했다.
"지금은 마치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중도에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
이에 여륭은 마침내 천왕(天王)의 자리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여초가 번화(番禾)에서 작은 솥 하나를 얻었는데, 여륭은 이를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징조라 여겼다. 여륭은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를 모두 사면하고 연호를 '신정(神鼎)'으로 고쳤다. 또, 아버지 여보를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하고, 어머니 위씨(衛氏)를 황태후, 아내 양씨(楊氏)를 황후로 삼았다. 동생 여초는 왕위에 오르는 데 도운 공이 있었으므로, 사지절 · 시중 · 도독중외제군사 · 보국대장군 · 사예교위 · 녹상서사로 삼고 안정공(安定公)에 봉하였다.

정권이 갑자기 뒤바뀌자, 시해당한 영제 양찬의 장인어른인 상서우복야 양환(楊桓)이 남량의 독발리록고에게 달아났다. 독발리록고는 양환을 좌사마로 임명하였고, 아직 불안정한 틈을 타 군대를 거느리고 후량을 공격하였다. 여륭이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독발리록고는 백성 2,000여 호를 노략질하여 데리고 돌아갔다.

신정 원년(401년) 5월, 여륭은 잔혹하고 포학함이 극에 달하여 위세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명망 있는 호걸들을 많이 죽였다. 이에 조정 안팎이 떠들썩하게 동요하였고,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고 여기지 못하였다. 위안(魏安) 사람 초랑(焦朗)은 사신을 보내 후진의 농서공 요석덕을 설득하며 말했다.
"여씨(呂氏)는 진(秦)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 양주(涼州)를 장악하고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여씨 집안은 무황(武皇)께서 세상을 떠난 이래로 형제가 서로 공격하여 정치가 바로서지 못하고, 권력을 다투면서 위세를 부려 혹독하게 백성들을 부리니 굶주리거나 죽는 자가 과반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명공(明公)께서는 도(道)가 옛 현인들보다 뛰어나고, 맡으신 직책 또한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릴 만큼 존귀하십니다. 마땅히 약한 자를 병합하고 어리석고 혼란한 자를 공격하여 이 지역을 경략하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며 옥문(玉門)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정치를 펼치셔야 합니다. 지금처럼 왕위를 찬탈하고 빼앗는 혼란의 시기라면 공을 세우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초랑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인질로 보내자, 요석덕은 마침내 보병과 기병 60,000명을 거느리고 후량을 정벌하러 나섰다.

신정 원년(401년) 7월, 요석덕은 금성(金城)에서 황하를 건너 곧장 광무(廣武)로 향한 뒤 고장에 이르렀다. 여륭은 동생들인 보국대장군 여초와 용양장군 여막(呂邈) 등을 내보내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모두 크게 패하여 달아나 고장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여막은 요석덕에게 사로잡혔고, 잃은 병력은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여륭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아 성을 굳게 지켰다. 이 와중에 파서공 여타(呂他)는 동원(東苑)의 병사 25,000명을 거느리고 후진에 항복하였다.

신정 원년(401년) 윤달 8월, 형혹성이 천제(天帝)의 자리를 침범하였고, 또 참새 떼가 태묘(太廟)에서 서로 싸워 죽은 것이 수만 마리에 이르렀다. 당시 고장이 여러 달 동안 포위되자 성 안에 있던 동쪽 출신 사람들 가운데 밖의 적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많아졌다. 장군 위익다(魏益多)가 다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선동하여 여륭과 여초를 죽이려 모의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여기에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300여 호에 이를 정도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표문을 올려 후진과 화친할 것을 청하였으나 여륭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정공 여초가 간하였다.
"길이 열리고 막히는 데에는 때가 있고, 환난과 평안은 서로 번갈아 찾아옵니다. 손권(孫權)이 위(魏)나라에 몸을 굽혔고, 초주(譙周)가 임금에게 적을 맞아 항복하도록 권하였는데, 그들이 어찌 대장부가 아니었겠습니까? 다만 형세가 불리하여 어쩔 수 없이 굽힌 것입니다. 장천석(張天錫)은 7대에 걸쳐 쌓아 온 국력을 이어받았고 백 년 동안 은덕을 베풀었으며, 무장한 병사가 10만이고 조정에는 모사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진(秦)의 군대가 국경에 닥치자 식견 있는 자들은 형세를 살펴 기회를 알아차리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간언을 거부하고 제 뜻만 고집하였다면 사직은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멀지 않은 옛일이 바로 우리의 거울입니다. 한 자짜리 편지 한 통과 사신 한 사람 보내는 일을 무엇 때문에 꺼리시어,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려 하지 않으십니까? 우선 말을 낮추어 적을 물러가게 한 뒤, 적이 물러나면 안으로 덕정을 닦으면 됩니다. 나라의 흥망은 사람의 노력에 달린 것이니, 이것이 큰 계책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여륭이 말했다.
"내가 비록 평범한 사람이기는 하나 국가의 중책을 맡고 있다. 선대가 이루어 놓은 기반을 계승해 지키고 사직을 보전하지 못한 채 태조(太祖)의 대업을 남에게 넘긴다면,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제(先帝)를 뵙겠는가?"
여초가 다시 말했다.
"응룡(應龍)은 굽히고 펴는 것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신령스럽다고 하고, 성인은 조짐을 알아차리는 것을 훌륭하게 여깁니다. 지금 몇 해째 전쟁이 이어져 성 안의 군량은 이미 바닥났고, 밖에서는 강대한 적이 압박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입에 풀칠할 방도조차 없습니다. 가령 장량(張良), 진평(陳平), 한신(韓信), 백기(白起)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형세에 따라 굽히고 펴는 임기응변을 생각하시고, 눈앞의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 왕조에 정해진 천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어찌 옛 대업을 다시 회복하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만약 천명이 이미 떠났다면 그래도 종족만큼은 온전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렇게 궁지에 몰린 채 앉아서 성만 지킨다면 끝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륭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랐다.

신정 원년(401년) 9월, 여륭이 사신을 보내 후진에 항복을 청하였다. 후진의 무소제 요장은 홍려 환돈(桓敦)을 보내 여륭을 사지절(使持節) · 진서대장군(鎮西大將軍) · 도독하서제군사(都督河西諸軍事) · 양주자사(涼州刺史)으로 임명하고 건강공(建康公)에 봉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후한 조서를 내려 그를 칭찬하였다. 이에 여륭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우들, 총애하는 아들들, 그리고 오랜 신하인 모용축(慕容築), 양영(楊穎), 사난(史難), 염송(閻松) 등 50여 호를 후진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보내 인질로 삼게 하였고, 요석덕은 군대를 물려 돌아갔다.

신정 원년(401년) 12월, 안정공 여초는 초랑과 함께 배반한 상서 강기(姜紀)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위안의 초랑을 공격하니, 초랑은 남량의 독발리록고에게 인질로 보냈고, 독발리록고는 동생 독발녹단을 보내 초랑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발녹단이 도착할 무렵에는 여초가 이미 군대를 물려 돌아간 뒤였다.

독발녹단이 고장에서 군세를 과시하고 호갱(胡坑)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여초는 밤중에 중루장군 왕집(王集)에게 정예 기병 2,000기를 거느리고 독발녹단의 진영을 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독발녹단이 군대를 풀어 맞받아치자 왕집은 전사하였고, 병사 300여 명을 잃었다. 여륭은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독발녹단과 화친을 맺고, 원내(苑內)에서 맹약을 맺자고 청하였다. 이에 독발녹단은 진북장군 구연(俱延)을 보내 맹약에 참석하게 하였는데, 구연은 복병이 있을 것을 의심하여 원(苑)의 담장을 허물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과연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구연을 공격하였고, 구연은 탈출하는 도중에 군마를 잃었으나 걸어서 독발녹단에게 무사히 돌아갔다. 이를 전달받은 독발녹단은 크게 노하여 마침내 현미(顯美)에 있던 후량의 창송태수(昌松太守) 맹위(孟褘)를 공격하였다. 여륭은 광무장군 구안국(茍安國)과 녕원장군 석가(石可)에게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맹위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구연국 등은 독발녹단의 군세가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싸우지 않고 달아나 돌아왔다. 독발녹단은 마침내 현미를 함락시키고 맹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신정 2년(402년) 2월, 후진의 문환제 요흥은 겸산기상시 석확(席確)을 보내 후량의 실정과 허실을 살펴보게 하였고, 여륭의 아우 여초를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때마침 북량의 저거몽손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륭을 공격하자, 여륭은 남량의 독발리록고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독발리록고는 거기대장군 독발녹단에게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여륭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독발녹단이 도착하기 전에 여륭이 저거몽손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저거몽손은 여륭에게 서로 맹약을 맺자고 청하고, 곡식 10,000여 석을 주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독발녹단은 창송(昌松)에 이르러 그 소식을 듣고, 양택(涼澤), 단총(段冢)의 백성 500여 호를 데리고 돌아갔다.

당시 고장에는 큰 기근이 들어 곡식값이 폭등하였다. 쌀 한 말의 값이 5,000문에 이르렀으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굶어 죽은 사람이 10여만 명에 달하였다. 성문은 낮에도 닫혀 있었고, 땔감을 구하러 나가는 길마저 끊겼다. 백성 가운데 성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하면서 남의 품팔이꾼이 되거나 노비가 되어서라도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날마다 수백 명씩 생겨났다. 여륭은 이들의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사기를 꺾는 것을 싫어하여, 이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시신이 길거리에 가득 쌓였으며, 가구 가운데 완전히 끊겨 없어진 집이 열에 아홉이나 되었다.

신정 2년(402년) 10월, 하서왕 독발녹단이 다시 고장을 공격하였다.

신정 3년(403년) 7월, 남량의 독발녹단과 북량의 저거몽손이 번갈아 군사를 보내 후량을 침략하였다. 여륭은 두 적의 압박을 받으면서 고장에서는 끝내 스스로 보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여초에게 기병 200기를 거느리고 많은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후진으로 가서 자신들을 맞아들여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이에 문환제 요흥은 마침내 제난(齊難) 등에게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거느리고 여륭을 맞이하게 하였다.

후진의 군대가 고장에 이르자, 여륭은 흰 수레에 흰 말을 타고 길가로 나가 이들을 맞이하였다. 제난은 사마 왕상(王尚)을 행양주자사(行涼州刺史)로 삼고 병사 3,000명을 배속시켜 임시로 고장을 지키게 하였다. 또 지방관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창송과 번화(番禾) 두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한편 여륭은 여윤(呂胤)을 보내 여광의 사당에 이렇게 고하게 하였다.
"폐하께서는 지난날 신묘한 지략을 발휘하여 서하(西夏)에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고, 덕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위엄은 먼 변경까지 떨치셨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선하지 못하여 서로 잇달아 왕위를 찬탈하고 죽였으며, 이제 두 적이 함께 압박해 오므로 장차 동경(東京)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삼가 폐하께 이 자리에서 영결을 고합니다."
여윤은 말을 마치며 흐느끼고 통곡하였고, 슬픔에 젖었는데, 요흥의 군사들까지도 이 광경에 감동하였다. 여륭은 마침내 종족과 관료들, 그리고 백성 10,000여 호를 거느리고 제난을 따라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장안(長安)에 도착하자 문환제 요흥은 여륭을 산기상시(散騎常侍) · 상서(尚書)로 삼았으며, 공(公)의 작위는 이전과 같이 유지하게 하였다. 또, 그 동생 여초는 안정태수(安定太守)로 삼았고, 함께 온 문무 관료 30여 명도 모두 발탁하여 관직을 주었다.

당초 후량에 반역한 곽논(郭黁)은 일찍이 "여씨(呂氏)를 대신할 자는 왕씨(王氏)이다."라는 참언을 말하면서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는 왕상(王詳)을 추대하였고, 뒤에는 왕걸기(王乞基)를 추대하였다. 그런데 여륭이 동쪽으로 옮겨 간 뒤에는 왕상이 마침내 그를 대신하여 양주(涼州)를 맡게 되었으니, 결국 곽논의 말과 들어맞은 셈이었다.

영화 원년(416년) 2월, 여륭은 문환제 요흥의 아들 광평공 요필(姚弼)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고, 나중에 그 당파인 남양공 요음(姚愔)이 궁성에서 거병하여 소요를 일으킬 때 역시 가담하였다. 그러나 요필의 반란을 끝내 실패하였고 여륭은 옹(雍)으로 달아났으나, 요흥의 뒤를 이은 황제 요홍이 그를 토벌해 주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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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69권 「유외등전(劉隗等傳)」70권 「응첨등전(應詹等傳)」71권 「손혜등전(孫惠等傳)」
유외 ,유파, · 조협 · 대약사 · 주의응첨 · 감탁 · 변곤 · 유초 · 종아손혜 · 웅원 · 왕감 · 진군 · 고숭
<rowcolor=#ece5b6>72권 「곽박등전(郭璞等傳)」73권 「유량전(庾亮傳)」74권 「환이전(桓彝傳)」
곽박 · 갈홍유량 · 유역 · 유빙 · 유익환이(彝) ,환운 환활 환비 환충,
<rowcolor=#ece5b6>75권 「왕담등전(王湛等傳)」76권 「왕서등전(王舒等傳)」77권 「육엽등전(陸曄等傳)」
왕담(湛) · 순숭 · 범왕 · 유담 · 장빙 · 한백왕서 · 왕이 · 우담 · 고중 · 장개육엽 · 하충 · 저삽 · 채모 · 제갈회 · 은호
<rowcolor=#ece5b6>78권 「공유등전(孔愉等傳)」79권 「사상등전(謝尙等傳)」80권 「왕희지전(王羲之等傳)」
공유 · 정담 · 도회사상 · 사안 ,사염 · 사혼 · 사현 · 사만 · 사랑 · 사석 · 사막,왕희지
81권 「왕손등전(王遜等傳)」
왕손 · 채표 · 양감 · 유윤 · 환선 ,환이(伊), · 주사 · 모보 · 유하 · 등악 · 주서
82권 「진수등전(陳壽等傳)」
진수(陳壽) · 왕장문 · 우부 · 사마표 · 왕은 · 우예(預) · 손성 · 간보 · 등찬 · 사침 · 습착치 · 서광
<rowcolor=#ece5b6>83권 「고화등전(顧和等傳)」84권 「왕공등전(王恭等傳)」8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고화 · 원괴 · 강유 · 차윤 · 은의 · 왕아왕공 · 유해 · 유뇌지 · 은중감 · 양전기유의 · 제갈장민 · 하무기 · 단빙지 · 위영지
<rowcolor=#ece5b6>86권 「장궤전(張軌傳)」87권 「양무소왕전(涼武昭王傳)」
장궤양무소왕 · 양후주
88권 「효우전(孝友傳)」
이밀 · 성언 · 하방 · 왕부 · 허자 · 유곤(庾袞) · 손구 · 안함 · 유은 · 왕연 · 왕담(談) · 상우 · 하기 · 오규
89권 「충의전(忠義傳)」
혜소 · 왕표 · 유심 · 국윤 · 초숭 · 가혼 · 왕육 · 위충 · 신면 · 유민원 · 주해 · 환웅 · 한계 · 주기 · 이웅 · 악도융 · 우괴 · 심경 · 길읍 · 왕량 · 송구 · 차제 · 정목 · 신공정 · 나기생 · 장의
90권 「양리전(良吏傳)」
노지(魯芝) · 호위 · 두진 · 두윤 · 왕굉 · 조터 · 반경 · 범귀 · 정소 · 교지명 · 등유 · 오은지
91권 「유림전(儒林傳)」
범평 · 문립 · 진소 · 우희 · 유조 · 범육 · 서묘 · 최유 · 범륭 · 두이 · 동경도 · 속함 · 서막 · 공연 · 범선 · 위소 · 범홍지 · 왕환
92권 「문원전(文苑傳)」
응정 · 성공수 · 좌사 · 조지(趙至) · 추담 · 조거 · 저도 · 왕침(王沉) · 장한 · 유천 · 조비 · 이충 · 원굉 · 복도 · 나함 · 고개지 · 곽징지
93권 「외척전(外戚傳)」
양수 · 왕순 · 양문종 · 양현지 · 우예(豫) · 유침 · 두예(乂) · 저부 · 하준 · 왕몽 · 왕하 · 왕온 · 저상
94권 「은일전(隠逸傳)」
손등 · 동경 · 하통 · 주충 · 범찬 · 노승 · 동양 · 곽원 · 곽기 · 오조 · 노포 · 범등 · 임욱 · 곽문 · 공장 · 맹루 · 한적 · 초수 · 적탕 · 곽번 · 신밀 · 유린지
삭습 · 양가 · 공손봉 · 공손영 · 장충 · 석원 · 송섬 · 곽하 · 곽우 · 기가 · 구형 · 사부 · 대규 · 공현지 · 도담 · 도연명
95권 「예술전(藝術傳)」
진훈 · 대양 · 한우 · 순우지 · 보웅 · 두불건 · 엄경 · 외소 · 복후 · 포정 · 오맹 · 행령 · 불도징 · 마유 · 선도개 · 황홍 · 색담 · 맹흠 · 왕가 · 승섭 · 곽논 · 나습 · 욕곽 · 태산
96권 「열녀전(列女傳)」
신헌영 · 엄헌 · 종염 · 왕혜풍 · 이락수 · 순관 · 사도온 · 용린 · 유아 · 염부인 · 소혜 · 모황후 · 단원비 · 양황후 · 윤태후
97권 「사이전(四夷傳)」
부여 · 숙신 · 마한 · 진한 · 왜 · 토욕혼 · 언기국 · 구자국 · 대완국 · 강거국 · 대진국 · 임읍국 · 부남국 · 흉노
<rowcolor=#ece5b6>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왕돈 · 환온환현 · 변범지 · 은중문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왕미 · 장창 · 진민 · 왕여 · 두증 · 두도 · 왕기 · 조약 · 소준 · 손은 · 노순 · 초종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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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3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재기(戴記)]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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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 아들 여륭이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