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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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諒(? ~ 323)
동진의 인물. 자는 유성(幼成). 양주 단양군(丹陽郡) 출신.
2. 생애
왕량은 젊었을 적부터 재간과 지략이 있었다. 초기에 진동대장군 왕돈에게 발탁되어 진동장군부의 업무를 처리하다가 무창태수로 승진하였다.건흥 3년(315년) 8월, 교주자사 고비(顧秘)가 사망하자 교주 사람들은 고비의 아들 고수(顧壽)를 교주자사로 옹립했는데, 당시 교주에서 위세를 떨치던 호족인 신창태수 양석(梁碩)이 고수를 살해하고 교주를 장악했다. 이에 왕돈은 광주자사 왕기를 교주자사로 전임시키고 양석을 토벌하게 했지만, 양석은 교지태수를 자칭하고 멋대로 동오 시절 교주자사를 지냈던 수칙의 아들 수담(修湛)을 영접해 행주사(行州事)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왕기의 부임을 막으니, 왕기는 울림(鬱林)에서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 했다. 이에 왕기는 다시 광주(廣州)로 돌아가 두홍(杜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
영창 원년(322년) 10월, 왕돈이 왕량을 교주자사로 삼으면서 이르길,
"수담, 양석은 모두 국가의 적이니, 경은 이르거든 그들을 붙잡아 참수하도록 하라."
라 하였다. 왕량이 교주 경계에 이르자 수담은 구진(九真)으로 도망쳤는데, 광주자사 도간이 수담에게 사람을 보내 그를 안심시키면서 왕량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결국 도간의 설득 끝에 수담은 마지못해 왕량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 왕량은 수담이 데리고 온 측근들은 방 바깥에 머물게 하고, 수담은 안으로 초대한 뒤에 사로잡았다. 바깥에서 대기하다가 사태를 파악한 양석이 말했다."수담님은 과거 교주를 다스리셨던 분의 아드님이시오. 죄가 있다면 수도로 압송할 일이지 죽일 수는 없소."
이에 왕량은"그대의 과거의 의리는 내 업무과 관계없는 일이오."
라 답하고는 즉시 수담을 참수하였다. 양석이 분노하여 문을 박차고 나가자, 왕량은 뒤이어 암살자를 고용해 양석을 죽이려 했지만 암살자가 역으로 당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양석은 곧바로 자신의 무리를 일으켜 거병하고, 왕량이 있는 용편(龍編)을 포위하였다.태녕 원년(323년) 4월, 광주자사 도간이 양석의 거병을 알고 왕량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도간의 군대가 이르기도 전에 왕량은 패했고 용편은 함락되었다. 왕량을 사로잡은 양석은 그의 부절을 강탈하려 했지만, 왕량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부절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양석이 부절을 들려있는 왕량의 오른팔을 자르니, 왕량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을진대, 팔이 잘린들 어떠하랴!"
이후 10여 일 동안 양석의 포로로 구금되어 있던 중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왕량을 죽인 양석은 교주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흉폭한 성격 탓에 이내 민심을 잃었고, 도간에게 공격받은지 2개월만에 패하여 도간의 참군 고보(高寶)에 의해 참수당했다. 도간은 양석의 수급을 넘겨받고 수도 건강(建康)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