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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3:49:57

안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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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제10대 황제
안제 | 安帝
출생 382년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즉위 396년 11월 7일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419년 1월 28일 (향년 37세)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태극전 동당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휴평릉(休平陵)
재위기간 동진의 황태자
387년 9월 16일 ~ 396년 11월 6일
동진의 황제
396년 11월 7일 ~ 404년 1월 1일
환초의 평고왕
404년 1월 1일 ~ 404년 6월 19일
동진의 황제 | 복위
405년 3월 2일 ~ 419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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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덕종(德宗)
부모 부황 열종 효무제
모후 안덕태후
형제자매 3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안희황후
안덕(安德), 덕종(德宗)
작호 황태자(皇太子) → 황제(皇帝)
→ 평고왕(平固王) → 황제(皇帝)
시호 안황제(安皇帝)
연호 융안(隆安, 397년 ~ 401년)[1]
원흥(元興, 402년 ~ 404년)
대형(大亨, 402년)
의희(義熙, 405년 ~ 419년)
섭정 숙부 사마도자 (396년 ~ 4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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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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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晉)의 제14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제10대 황제이다. 선대 황제인 사마충과 함께 백치 황제로 유명한데, 그래도 사마충은 일상생활 정도는 문제가 없고 최소한의 판단 능력은 있었던 반면,[2] 사마덕종은 아예 스스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중증의 지적장애인이었다.

2. 생애

태원 7년(382년), 효무제(孝武帝) 사마요와 안덕태후(安德太后) 진씨(진귀녀, 陳歸女)[3]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는 안덕(安德)이다.

태원 12년(387년) 8월, 사마덕종은 태자에 책봉되고, 태원 21년(396년) 9월, 사마요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황제가 되었다. 사마덕종의 나이가 어려 숙부인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4]가 섭정하며 보좌했으나, 어린 나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마덕종이 서진 사마충을 능가하는 저지능자였다는 것이다.

서진 혜제 사마충은 낮은 지능으로 인해 통치는 불가능했으나, 일상생활 기능은 정상이었고 최소한의 판단력은 있었다.[5] 그러나 사마덕종은 『진서(晉書)』, 「안제기(安帝紀)」에 이르기를 말을 제대로 못하고 추움, 더움, 배고픔을 몰랐으며 음식과 용변 등 생활 일체를 스스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6] 현대의 기준으로는 IQ 30 미만(지적장애 1급)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의 생활은 숙부로서 후견인이자 섭정을 맡은 회계왕 사마도자가 전적으로 돌봤다. 문제는 사마도자가 지능만 정상이었지 통치자로서는 극히 무능한 인간이라는 데 있었다. 사마도자는 큰일이 있으면 귀신의 힘을 빌렸고 늘 술에 취한 꽐라였다. 결국 온전히 사마덕종을 돌본 것은 낭야왕으로 있는 동생 사마덕문이었다.

융안 3년(399년) 4월, 사마도자는 아예 정사를 보는 일을 18세 된 아들 사마원현(司馬元顯)에게 맡겼다. 사마원현은 17세의 나이에 동진 절반이 들고 일어난 왕공(王恭)의 난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진압하는 등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징집령을 내려 민심을 잃고 손은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해 동진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사마원현과 유유가 이끄는 관군이 손은의 반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환온(桓溫)의 아들이었던 형주, 강주 자사 환현(桓玄)이 수도 건강으로 진군, 사마원현은 북부군을 동원하여 이를 막으려 했으나 북부군의 수장 유뢰지의 배신으로 실패한다.

원흥 원년(402년) 3월, 환현은 건강에 입성하여 사마도자, 사마원현 부자를 죽이고 시체를 뱃머리에 달아매어 동진의 대권을 장악했다. 환현은 스스로 승상, 태위에 오른다. 그러나 환현의 사치와 방종은 사마도자 부자를 넘어섰으며 정령을 수시로 바꿔 조정의 당파는 더욱 분열되어 부패는 극을 달렸고 조정은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원흥 2년(403년) 11월, 환현은 사마덕종을 협박하여 선양하게 하고[7] 초나라(楚)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사마덕종은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되어 심양으로 이주되었다.

원흥 3년(404년) 3월, 건무장군 유유가 건강으로 진격했다. 환현은 불리해지자 사마덕종을 강제로 데리고 강릉으로 도주했지만 유유는 환현의 선봉 환수(桓修)를 죽이고 5월에는 환현도 죽였다.

의희 원년(405년) 정월, 환현의 잔당 환진(桓振)이 다시 사마덕종을 끌고 가서 강진으로 도망치며 사람을 보내 강주와 형주를 주면 사마덕종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유유는 이 협상을 거절하고 환진을 쳐서 죽였다. 3월, 사마덕종은 다시 건강으로 돌아와 복위했고 유유는 조정의 대권을 모두 장악했다. 유유는 모용선비족의 남연, 강족의 후진 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유의, 제갈장민, 초종 등의 군벌 등을 제거하면서 북벌에 성공하고 서량과 황하 이북을 제외한 중원 일대를 수복하며 동진 최강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유유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던 유목지가 죽자 북벌을 팽개치며 돌아왔고, 결국 북하에게 일부 영토를 다시 잃었다. 군사적 승리로 권위를 쌓았던 유유였기에 패전은 거꾸로 그의 위망은 떨어뜨렸고, 의희 14년(418년) 12월 몸이 달아오른 유유는 '창명(昌明)[8] 이후로는 두 황제가 즉위할 뿐이다.'라는 참언을 날조하며 황제를 돌보던 아우 사마덕문이 병든 사이에 중서시랑 왕소지를 시켜 건강 동당에서 사마덕종을 교살했다. 이렇게 사마덕종은 재위 23년 만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이듬해 정월에 휴평릉(休平陵)에 안장되었다.

유유가 안제를 죽인 이유는 사마덕종이 천치였기 때문이다. 선양이 정치적 쇼인 만큼 최소한의 형식은 갖추어야 쇼를 할텐데, 똥오줌도 못 가리는 백치가 갑자기 천명이 옮겨진 것을 깨달아 이제 물러나고자 한다 같은 소리를 했다고 하면 각본이 설득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마덕종을 실덕으로 폐위하자니 그가 딱히 실정을 저지를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리에 어둡다고 폐위하자니 여태까지 사리에 어두운 사람을 섬겼던 자신도 우스운 꼴이 되어버린다. 결국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일 배우를 옹립하기 위해서는 사마덕종을 죽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 평가

"안제는 방종무도한 국운을 이어받아, 대도가 기세를 몰아 날뛰었다."
(安承流湎 大盜斯張)

- 『진서(晉書)』

4. 여담

참고로 안제 사마덕종의 황후였던 안희황후(安僖皇后) 왕씨(王氏)[9]왕희지(王羲之)의 손녀였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왕희지의 7남 왕헌지(王獻之)였고 어머니는 간문제 사마욱의 장녀 신안민공주(新安愍公主)[10]였다. 고생하다가 남편보다도 일찍 죽었다.

파일:attachment/사마덕종.jpg
삼국지 도원결의에서는 이 인물의 초상화를 만들었는데 얼빠진 표정에 콧물을 질질 흘리는 모습으로 지적 장애가 있다는 걸 잘 표현했다. 참고로 원본은 아마 삼국지 10, 삼국지 11왕업인 듯하다.

5.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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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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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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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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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02년 환현이 정권을 잡은 뒤 융안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치통감에서는 융안 6년과 대형 연호를 인정하지 않고 402년은 원흥 원년으로 표기한다.[2] 그 판단이 매우 단순해서 그렇지 자기를 위하는 것과 해하는 것 정도는 구분 할 수 있었다.[3] 사마요가 살아있을 때는 부인(夫人)이었으나, 아들 사마덕종이 황제가 되자 태후가 된 것이다.[4] 사마요의 친동생으로 간문제 사마욱의 7남이다.[5] 쌀이 없으면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는 어리석은 발언을 한 기록이 있으나, 자신을 보호하다 죽은 혜소의 피가 옷에 묻자 충신의 피라며 닦지 못하게 한 일화나, 팔왕의 난 당시 조왕 사마륜에게 제위를 찬탈당했다가 복위 후 사마륜의 측근이었던 의양왕 사마위를 가리켜 '이 사람이 나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옥새를 빼앗았다'고 증언하며 주살을 명한 일화도 있다. 현대적 기준으로는 IQ가 60~75(지적장애 3급~경계선 지능) 정도로 추정된다.[6] 진서 안제기 마지막줄 "황제는 슬기롭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입으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추워지거나 더워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모든 동작을 스스로 할 수 없었다. 帝不惠,自少及長,口不能言,雖寒暑之變,無以辯也。凡所動止,皆非己出"[7] 웃긴 건 이 때 사마덕종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그 덕택에 환현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것도 행운일지도 모른다.[8] 사마요의 자.[9] 이름은 왕신애(王神愛) 또는 왕신수(王神受)이다.[10] 이름은 사마도복(司馬道福)이었다. 결국 신안민공주는 안제 사마덕종의 고모이므로 왕씨는 사마덕종의 고종 사촌이 된다. 사실 신안민공주는 원래 환현의 일족이었던 환제(桓濟)의 아내였다가 환제가 죽은 후에 왕헌지에게 재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