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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 간문제의 황자 회계문효왕 | 會稽文孝王 | |||
출생 | 364년 | ||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 |||
사망 | 403년 2월 3일 (향년 39세) | ||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 회계왕비릉(會稽王妃陵) | ||
재위기간 | 동진 제12대 낭야왕 | ||
372년 9월 12일 ~ 392년 | |||
동진 제3대 회계왕 | |||
392년 ~ 403년 2월 3일 | |||
동진의 섭정 | 1차 | |||
385년 ~ 397년 | |||
동진의 섭정 | 2차 | |||
397년 ~ 403년 2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 하내 사마씨 | |
휘 | 도자(道子) | ||
부모 | 부황 태종 간문제 모후 효무문태후 | ||
형제자매 | 부황 기준 7남 4녀 중 7남 모후 기준 2남 1녀 중 차남 | ||
배우자 | 정실 왕씨, 첩실 유씨 | ||
자녀 | 2남 2녀 | ||
자 | 도자(道子) | ||
작호 | 낭야왕(琅邪王) → 회계왕(會稽王) | ||
시호 | 문효왕(文孝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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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정치가이자 동진의 종실 일원. 자는 이름과 같은 도자(道子)[1]. 등록기준지는 사례 하내군 온현이고, 출생지는 양주 단양군 건강현이다.2. 생애
2.1. 초기 생애
사마도자는 동진의 제8대 황제였던 간문제 사마욱과 흑인 노예 출신 이능용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이 바로 간문제 사후 동진의 9대 황제로 즉위한 효무제 사마요이다.2.2. 효무제 시기
사마도자는 372년에 낭야왕으로 책봉되어 식읍 1만 7651호를 받고 회계 내사를 겸했으며, 태원(太元) 연간에 산기상시(散騎常侍), 중군장군(中軍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을 역임하였다. 380년에 개부가 더해지고 사도를 겸하였다. 383년 녹상서육조사가 되었으며, 387년에는 다시 서주 자사, 태자태부가 더해졌다.사마요는 초기에 황제에 맞는 기량과 권위를 보여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인 사마도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기 시작하고 자신은 주색에 빠졌다. 문제는 사마도자 본인도 통치자로서는 무능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이후 동진의 정치는 혼란에 빠졌다. 특히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나 소인들을 가까이 했으며, 왕국보는 성품이 비루했고 아첨을 일삼으며 사마도자에게 의지하며 총애를 받았다. 비수대전에서 승리하여 동진을 구해낸 명재상 사안도 사마도자에 의해 실각하였다.
사마도자의 집권기에 동진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좌위영영장군 허영이 상소를 올리고 중서시랑 범녕 또한 조정의 득실에 대해 상소하자, 사마요는 겉으로는 사마도자를 대우하고 존숭했지만 사마도자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범녕은 사마도자의 총신인 왕국보의 외삼촌이었는데 왕국보의 모습을 보다 못해 왕국보를 전출시킬 것을 주청하였으나, 왕국보는 오히려 범녕을 모함하여 예장군 태수로 전출시켰다. 이로 인해 사마도자는 점점 오만해졌다.
그로인해 사마도자는 말을 가려 하질 못했는데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환현을 가벼운 술자리에서 이렇게 자극했었다.
"환온이 만년에 모반하려 했을 때도 이와 같았을까?"
다른 날에는 또 이같이 말했다. 그날은 환현이 의흥군에서 돌아와 사마도자를 만나는 자리였는데 사마도자는 취해있었다."환온(환현의 아버지, 일부러 모반을 꾀했던 환온이라 이름을 바꾸어 부름)이 돌아와서 모반을 일으키려고 하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주변의 만류에 사마도자는 억지로 그에게 사과하며 술을 권했다."환현, 자아, 한 잔"
여러 번이나,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같이 큰소리로 말하자 환현은 가슴속에 큰 원한을 품었다.사마도자는 황태비 이능용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이능용의 총애를 믿고 더더욱 주색에 빠져서 사마요에게 실례를 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마요는 사마도자를 내쫓으려고 했으나 어머니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사마도자를 폐출시키지 않았고, 대신에 왕공(王恭)을 연주(兗州)로 전출시키고 은중감을 형주(荊州)로 전출시키고 왕순(王珣)을 복야(僕射)로 삼고 왕아(王雅)를 태자소부(太子少傳)로 삼아 사마도자를 견제하려고 했다. 한편 사마도자는 왕서(王緖)를 심복으로 끌어들였고 사마요와 사마도자의 관계가 험악해져서 이능용이 이를 중재하기도 했다.
왕국보 이외에 사마도자의 측근들도 있었는데, 조아(趙牙)와 여천추(茹千秋)였다. 조아는 본래 연극배우 출신으로 여천추는 본래 전당현(錢塘縣)에서 도적을 잡는 아전이었으나, 사마도자에게 뇌물을 바쳐서 조아는 위군 태수가 되었고 여천추는 사마도자의 자의참군이 되었다.
392년, 사마덕문이 낭야왕이 된 이후에는 회계왕으로 옮겼다. 이후 사마요가 396년에 장귀인에게 살해당했는데, 사마도자에 의해 장귀인 사건이 그대로 묻혀버렸다.
2.3. 안제 시기
사마요 사후 사마요의 아들인 사마덕종이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사마덕종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그가 재상이 되어 섭정하며 사마덕종을 보좌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사마덕종이 백치로 알려진 서진 혜제 사마충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의 지적장애인이었다는 것이다.[2] 사마도자 또한 지능만 정상일 뿐 무능한 인물이었으므로, 동진의 정치는 더욱 나락으로 빠졌다.이런 가운데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왕공[3]의 거병이었다. 사마도자는 왕공을 두려워하여 결국 왕국보와 왕서를 체포해 참수하였으며, 왕공은 이 사실을 받아들여 거병을 중단했다. 또한 사마도자는 자신을 도독중외제군사와 녹상서육조사에서 해임해달라고 사마덕종에게 주청했으나 사마덕종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도자는 왕국보를 처형한 이후에도 여전히 왕공을 두려워하여 종실의 일원인 초왕 사마상지를 끌어들였으며, 사마상지의 건의에 따라 왕유(王愉)를 강주(江州) 자사로 전출시켜 왕공을 감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공은 다시 거병하여 이번에는 사마상지의 토벌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며, 여기에는 형주 자사 은중감과 예주 자사 유해, 광주 자사 환현이 모두 호응하였다. 사마도자는 유해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유해는 설득을 거절했고, 결국 정무를 아들인 사마원현에게 맡긴 채 자신은 술에 빠졌다.
양전기, 환현, 은중감 등이 다시 석두(石頭)로 당도하자, 사마원현이 석두에서 환현을 방비하고 사마도자도 중당에서 환현을 방비할 준비를 했으나 말 한 마리가 갑자기 군중을 헤집고 다니면서 군중에 혼란이 일어나 많은 병사들이 장강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뒤에 사마도자는 과도한 음주로 인해 병에 걸렸고, 사마원현은 사마도자가 이미 조정의 인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조정에 사마도자를 양주 자사와 사도에서 해임시킬 것을 주청했고 사마원현이 양주 자사가 되었다. 사마도자는 술이 깬 뒤에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분노했으나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사마도자는 다시 술에 빠져 사무를 사마원현에게 위임했다.
환현의 반란으로 동진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399년, 손은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도자는 이때도 별다른 방도가 없이 날마다 장후묘(蔣侯廟)에서 기도를 올리기만 했다. 402년, 사마원현이 다시 환현을 토벌하고자 출병할 때 사마도자는 시중, 태부로 제수되고 표기부의 관료들을 모두 태부부로 옮겼다. 그러나 환현이 건강으로 진군할 때 사마원현은 부하 장수인 유뢰지의 배신으로 인해 군사가 괴멸했다. 사마원현은 겨우 달아나 사마도자에게 대책을 물었지만 사마도자는 단지 울면서 대답하기만 했다. 환현이 권력을 잡은 뒤 사마도자는 안성에 유폐되었다가 이후 환현이 보낸 짐독으로 살해당했다.
2.4. 사후
환현이 몰락하고 안제가 복위한 뒤인 405년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다.3. 평가
道子地則親賢 任惟元輔 耽荒曲蘖 信惑讒諛. 遂使尼媼竊朝權 奸邪制國命 始則彝倫攸斁 終則宗社淪亡. 道子實晉朝之宰嚭者也.
사마도자는 땅으로는 재덕을 겸비한 인재를 사모하고 중신을 맡았음에도 술에 깊이 빠져 참소와 아첨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결국 여승을 부려 조정의 권위를 훔치고 간사한 이들이 국운을 다스렸으니, 바야흐로 오륜이 무너지고 끝내는 종묘사직이 멸망하였다. 사마도자는 실로 진나라의 재비(宰嚭)였다.
― 『진서』, 「(간문삼자전(簡文三子傳)」, 사신왈(史臣曰)
사마도자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동진 멸망의 원흉이다. 사마도자는 동진의 종실재상이라는 입장에 있었으면서 술에 빠지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여 동진을 쇠퇴하게 만들었고 결국 아들과 함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사마도자 부자의 무능함으로 인해 비수대전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동진에서는 이후 북부군과 서부군의 대립과 손은&노순의 난으로 내홍을 겪었으며, 결국 사마요 이후에 즉위한 2명의 황제인 안제와 공제는 환현, 유유와 같은 인물에게 황위를 찬탈당하여 동진이 멸망하게 되었으니 동진 멸망의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사마도자는 땅으로는 재덕을 겸비한 인재를 사모하고 중신을 맡았음에도 술에 깊이 빠져 참소와 아첨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결국 여승을 부려 조정의 권위를 훔치고 간사한 이들이 국운을 다스렸으니, 바야흐로 오륜이 무너지고 끝내는 종묘사직이 멸망하였다. 사마도자는 실로 진나라의 재비(宰嚭)였다.
― 『진서』, 「(간문삼자전(簡文三子傳)」, 사신왈(史臣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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