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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3:04:35

은중감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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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殷仲堪
(? ~ 399)

동진 말기 서부군을 관할하던 군벌. 예주 진군(陳郡) 장평현(長平縣) 출신. 서진 시기 태상경을 지낸 은융(殷融)의 손자. 동진 시기 진릉태수를 지낸 은사(殷師)의 아들.

형주의 서부군을 바탕으로 나름 세력을 떨치면서 명성과 인망이 높았고, 병자가 있으면 직접 진맥해 약을 처방해주었을 정도로 의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종교에 심취해있던 나머지 수많은 재산을 신에게 공양하는 데에 쓰고, 막상 인의를 베풀거나 위급한 이들을 돕는 것을 소홀히 해 인심을 잃었으며, 생각이 너무 번잡하여 책략을 능히 헤아리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환현에게 패하고 말았다.

2. 생애

은중감은 일찍이 청담에 능하고 문장을 좋아해, 매번 "3일 동안 《도덕경》을 읽지 않으면 혀가 굳는다"라 말하고 다녔다. 그가 한백(韓伯)과 더불어 담론을 펼치며 현학가로서 명성을 떨치니, 당시 현학에 빠져있던 동진의 뭇 사대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임관해 좌저작랑이 되었다.

태원 4년(379년) 5월, 관군장군 사현이 경구(京口)를 진수할 때 은중감은 그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얼마 후, 조정에서 상서랑으로 삼으려 했지만 은중감이 사양하고 사현의 곁에 머무르니, 사현은 그를 장사로 옮기고 예우를 더했다. 은중감은 사현에게 서신으로 천하통일의 포부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계책을 설명했는데, 사현 또한 그의 의견에 깊이 동의했다. 이후 은중감은 진릉태수에 임명되었다.

은중감이 진릉(晉陵)에 부임하여 군을 다스릴 때, 아들을 낳고도 관아에 보고하지 않거나, 죽은 가족의 시신을 오랫동안 매장하지 않거나, 부모를 인질로 삼고 군을 이탈해 도망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하자, 지역은 비로소 교화되어 의리가 바로 세워졌다. 은중감은 지역을 다스리면서도 여러 해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걱정하여 몸소 의술을 익히며 그 정묘함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약이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는 실수를 범해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은중감은 상을 치르면서도 게을리함이 없어 결국 몸까지 상하니, 나라 안에서 효심이 깊기로 명성을 떨쳤다. 상을 무사히 마친 후, 효무제의 부름에 응해 태자중서자에 제수받았고, 효무제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아 황문랑으로 옮겨졌다.

태원 17년(392년) 11월, 효무제는 회계왕 사마도자가 사직을 맡은 신하답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과 친한 이들을 높은 관직에 올려 조정을 지키고자 했다. 이에 은중감을 도독형익영3주제군사(都督荊益寧三州諸軍事), 진위장군, 형주자사, 가절로 삼고 강릉(江陵)을 진수케 했다. 은중감이 강릉으로 떠나기 직전, 효무제는 조서 내려
장차 경을 오랫동안 만날 수 없다 생각하니, 짐의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구나. 그대는 항상 영원한 조정의 보배라 불렸는데, 갑자기 형초(荊楚)의 보배가 되어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라 하였다. 은중감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이와 같았다.

비록 몇몇 이들이 은중감은 명성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 중임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평을 내렸으나, 이미 은중감의 명성은 조정 내외로 드높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중감이 대단한 공적을 세우게 될 것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형주에 부임하게 된 은중감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은혜를 베풀어 형주의 이민족들을 복종시키면서 그럭저럭 평안한 통치를 이어갔다. 또, 예법을 강조하여 성씨가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금지하고, 아들이 없는 집안은 친족의 자제를 양자로 들여서라도 제사를 지내게 하며, 호적에 낱낱이 이를 적시해 부역을 회피하는 이가 없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당시 조정에서 익주자사 곽전(郭銓)을 중앙으로 소환하자, 건위태수 변포(卞苞)가 곽전에게 이 기회에 촉 땅을 들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했다. 은중감은 이를 보고받고 변포를 공격해 처형한 뒤 중앙에 보고를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되려 응양장군으로 강등시켰다. 이후 홍수로 강물이 넘치는 바람에 강릉의 민가 수천 호가 떠내려 가는 참사가 일어나니, 조정에서는 또 엄히 방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은중감을 영원장군으로 강등시켰다.

융안 원년(397년) 4월, 당시 남군공 환현은 관직을 버리고 봉국에 내려와 있었는데, 은중감은 형주에서의 환씨 가문의 위세를 두려워해 그와 깊이 사귀었다. 그때 연청2주자사 왕공이 사자를 보내 함께 거병하여 간신 왕국보 등을 토벌하자 청하자, 환현은 은중감에게 왕공과 함께 거병해 제환공, 진문공의 공을 이룰 것을 건의했다. 은중감 또한 환현의 의견이 타당하다 여기고 왕공의 청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선 옹주자사 치회에게 사람을 보내 거사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고, 부하들을 불러모아 앞으로의 작전을 회의했다. 남만교위 은의, 남군상 강적이 모두 거사에 반대했고 뒤이어 치회마저 진의를 의심해 거절했으나, 은중감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강적을 양전기로 대체하고 왕공과 뜻을 같이하였다.

한편, 은중감의 지지 의사를 전달받은 왕공은 크게 기뻐하며 왕국보의 죄상을 널리 공표하고 경구(京口)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은중감은 비록 왕공과 함께하겠다 약조하였지만, 경구에서 도성까지의 거리가 200리 밖에 되지 않으니, 만약 자신이 훨씬 거리가 먼 형주에서 거병한다 해도 도성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상황이 끝나있을 것을 우려해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회계왕 사마도자가 왕국보를 주살하자, 은중감은 거사가 성공했음을 알고 그제서야 용양장군 양전기를 파릉(巴陵)으로 출격시키면서 왕공에게 호응했다. 이윽고 사마도자가 사죄의 서신을 보내 중지케 하니, 은중감은 만족하고 군대를 거두었다.

융안 2년(398년) 7월, 사마도자가 사마상지 형제와 왕유를 측근 삼아 노골적으로 은중감과 왕공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사마도자에게 불만이 있던 예주자사 유해가 왕공을 찾아가 다시 거병해 조정을 장악할 것을 유세하자, 이미 한 번 반란을 성공시킴으로써 전국에 위명을 떨치고 있던 왕공은 야심을 품고 유해의 건의대로 거병을 준비하면서 은중감과 환온에게 이를 알렸다. 은중감은 정해진 기일에 함께 거병해 건강을 치기로 약조하는 동시에, 그를 맹주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을 비단에 적어서 유해를 통해 왕공에게 전했다. 하지만 왕공은 은중감이 작년처럼 간 볼 것이라 예상하고 기한이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거병해버렸다.

더이상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았던 은중감은 왕공의 거병 소식을 듣자마자, 빠른 시일 내에 군대를 정비하고 출격 준비를 마쳤다. 다만 그는 군사 통솔에 익숙치 않았기에, 전쟁 경험이 있는 양광(楊廣)과 양전기 형제에게 5,000 군사를 배속시켜 선봉으로 삼고, 환현에게 그 뒤를 잇게 한 뒤, 자신은 20,000 군사를 이끌며 후미에 섰다. 양전기와 환현의 군대가 분구(湓口)에 이르렀을 때,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던 강주자사 왕유는 놀라 임천(臨川)으로 달아나다가 환현이 보낸 별동대에 의해 사로잡혔다.

융안 2년(398년) 9월, 유해가 우저(牛渚)에서 사마상지의 관군과 맞붙었다가 크게 패하고 환현과 양전기의 군영으로 도망쳐 왔다. 사마상지는 승세를 타고 내친 김에 동생 사마회지(司馬恢之), 사마윤지(司馬允之)와 함께 환현까지 공격했다. 환현은 백석(白石)에서 관군과 교전해 대파하고 횡강(橫江)으로 진격하니, 사마상지는 도망치고 사마회지의 수군은 모두 침몰해 익사하고 말았다. 양전기와 환현은 계속 진군해 건강 코앞인 석두성(石頭城)에 도착했고, 은중감의 군대는 무호(蕪湖)에 이르렀다. 하지만 양전기와 환현이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사이, 왕공의 장수 유뢰지가 왕공을 배반하고 장당호(長塘湖)에서 그를 사로잡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뢰지가 북부군을 거느리고 건강 서남쪽에 위치한 신정(新亭)에 진영을 늘어뜨리자, 환현과 양전기는 놀라 채주(蔡洲)로 군대를 물리고 관군과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동진 조정은 반란군의 맹주인 왕공이 사망했음에도 은중감이 이끄는 서부군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안팎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이때 환현의 사촌형 환수가 사마도자에게 환현과 양전기를 관직으로 유혹하고, 은중감을 좌천시켜 서로 다투게 만들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사마도자는 이를 받아들여 환현을 강주자사, 양전기를 옹주자사, 환수를 형주자사로 삼고, 은중감을 광주자사로 좌천시킨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은중감의 숙부인 태상 은무(殷茂)로 하여금 그 조서를 은중감의 군영으로 전달하고, 퇴각을 종용하게 했다. 당연히 분노한 은중감은 비록 왕공이 패했지만 자신의 군대는 아직 무사하니, 곧장 수도로 진격해 관군과 싸워볼 만하다 여기고, 환현과 양전기에게 진군을 재촉했다. 그러나 관직을 받으면 그만둘 생각이었던 환현과 양전기는 망설이며 진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은중감의 동생 은휼(殷遹)은 양전기의 사마였는데, 밤에 선봉에서 빠져나와 은중감에게 양전기가 조정의 명을 우선시하여 새로 임명된 형주자사 환수를 받들려 한다 보고했다. 환현 등이 배반할 것을 염려한 은중감은 무호에서 군대를 물리고, 다시 형주로 돌아가면서 선봉군의 진영으로 사람을 보내 환현 등에게 알렸다.
"그대들이 각자 흩어지지 않고 돌아와 대군(大軍)이 강릉(江陵)에 이르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그대들의 가족을 모두 주살할 것이다."
은중감의 협박에 장수 유계(劉系)가 제일 먼저 자신의 휘하 2,000 병력을 이끌고 선봉에서 이탈하니, 나머지 장수들도 선봉에서 나와 은중감을 따르려 했다. 환현 등은 비로소 두려운 마음을 품고, 황급히 은중감의 뒤를 쫓아 심양(尋陽)에 이르러서야 그의 군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당시 은중감은 이미 형주자사 직책을 잃은 상황이었고, 환현 또한 은중감의 병력에 의지하는 상황이었으니, 둘은 속으로는 서로를 의심하고 꺼렸으나 일단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은중감은 환현, 양전기와 심양에 제단을 쌓고 삽혈로 맹약을 맺은 후, 서로의 자제를 인질로 교환하고 환현을 맹주로 추대했다. 그리고 표문에 각자 서명하고 조정에 보내, 왕공의 억울함을 변명하면서 유뢰지와 사마상지 등의 처형을 구했다. 이들이 다시 연합해 반란을 재개하자, 조정은 하는 수 없이 조서를 내려 환수의 형주자사 직책을 은중감에게 돌리고 화의를 구했다. 은중감이 조서를 받드니, 환현과 양전기도 회군해 각자의 부임지로 돌아갔다.

융안 2년(398년) 11월, 하루아침에 직책을 박탈당한 치회는 양전기가 옹주자사가 되는 것에 반발하여 남양태수 여구선(閭丘羨)과 그를 막을 방법을 모의했다. 하지만 양전기가 먼저 여구선을 붙잡아 참수하자, 치회와 그 무리들은 항복을 청했다. 양전기는 치회를 용서하고 도성 건강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은중감이 은밀히 자객을 보내 양구(楊口)에서 치회와 그 아들 4명을 전부 암살하고 인근 오랑캐의 소행으로 위장했다.

융안 3년(399년) 12월, 형주에 홍수가 나 민생이 피폐해지자 은중감은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호시탐탐 세력 확장의 기회를 노리던 환현은 은중감이 식량을 털었다는 사실을 알고, 거짓으로 낙양 정벌을 선포하면서 군대를 보내 형주의 곡창지대 파릉(巴陵)을 점령해 버렸다. 이후 조정의 명령을 사칭해, 부임지로 향하던 양주자사 곽전(郭銓)을 속여 자신의 선봉이 되게 했다. 그리고 은중감에게는 양전기를 공격하는 척, 사람을 보내 말했다.
"오늘 마땅히 면수(沔水)로 들어가 양전기를 토벌하기 위해 이미 군대를 장강 어귀에 주둔시켰소. 만약 그대가 나와 이견이 없다면 가히 양광을 죽일 수 있을 것이나,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통해 쳐들어갈 것이오."
하지만 이를 믿을 리 없었던 은중감이 군대를 모으고 환현을 막을 준비를 하니, 환현은 곽전에게 강하의 병력을 주어 은중감이 있는 강릉으로 진군하게 하는 동시에, 은중감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형 환위에게 밀서를 보내 강릉성 내부에서 호응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심약했던 환위는 두려운 마음에 은중감에게 밀서를 바치며 자수했고, 은중감은 그로 하여금 환현에게 당장 진군을 멈추라는 서신을 쓰게 했다. 형의 서신을 받은 환현이 말했다.
"은중감은 홀로 결단할 능력이 없어, 항상 계책의 성패에 걱정을 품고 자신의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니, 우리 형은 반드시 안전할 것이다."
환현의 본대가 마침내 파릉에 이르렀다. 은중감이 보낸 은휼이 수군 7,000명을 거느리고 서강구(西江口)에 도착하자, 환현은 곽전과 부굉[1]을 파견해 은휼을 격파했다. 환현이 양구(楊口)로 진격하자 이번엔 양광, 은도호(殷道護) 등이 나아가 막았으나 또 환현에게 패했다. 환현은 은중감이 보낸 모든 군대를 무찌르고 파죽지세로 영구(零口)에 도착하니, 강릉성과의 거리가 20리 밖에 되지 않았다.

은중감은 환현에 대비해야 했지만 이미 구휼한 일로 인해 성내 군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은중감은 양전기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양전기는 강릉에 식량이 없으니 양양(襄陽)으로 와 자신과 함께 환현에 맞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형주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은중감은 양전기에게 성 안에 저축된 식량이 있다 속이고 당장 구원군을 보낼 것을 종용했다. 이에 양전기는 은중감을 믿고 보•기 8,000여 명을 이끌고 강릉에 도착했다. 이때 은중감이 구원군에게 말린 밥풀 따위를 대접하는 것을 본 양전기는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격노해 은중감을 만나주지도 않고 형 양광과 함께 곧바로 환현과 싸우려 출격했다.

본래 어릴 적부터 독실한 천사도 신자인 은중감은 양전기가 나가서 싸울 동안 성 안에 머물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바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양전기와 양광이 환현의 군대에게 대패하자, 은중감은 강릉성을 버린 채 조카 은도호를 데리고 찬성(酂城)으로 도주했다. 이윽고 환현이 양전기를 붙잡아 참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은중감은 관군성(冠軍城)으로 이동해 후진의 장안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환현의 명을 받고 추격해온 장수 풍해(馮該)에게 사로잡혔다. 그렇게 포로가 되어 환현이 있는 강릉성으로 이동하던 중, 작계(柞溪)에 이르렀을 때 풍해가 갑자기 은중감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은중감은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하고, 함께 사로잡혔던 조카 은도호는 풍해에게 살해당했다.

은중감 사후, 그의 아들 은간지(殷簡之)가 환현으로부터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받아 단도(丹徒)에 매장하고, 아버지의 묘지 옆에 거주하며 은밀히 무리를 모았다. 이후 유유의 의군에 참가해 환현 토벌에 공을 세웠고, 환현이 죽자 그 시신을 받아 생으로 씹어먹음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2]


[1] 선소제 부견의 아들이자 장안을 버리고 동진으로 망명한 전진의 태자다.[2] 다만 은간지도 얼마 안가 환현의 잔당을 이끌던 환진에게 패하고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