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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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庾楷 | 유해 | |
성 | 유(庾) |
이름 | 해(楷) |
출신 | 영천군(潁川郡) 언릉현(鄢陵縣) |
생몰 | ? ~ 402년 |
부친 | 유희(庾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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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장군으로 영천군 언릉현 출신.2. 생애
유해의 집안은 영천 유씨로 유량의 손자이며 유희(庾羲)의 아들이었다. 처음에 시중으로 임명되었으며, 뒤에 형인 유준(庾准)을 대신하여 서중랑장, 예주(豫州) 자사, 가절(假節)이 되었고 역양에 진수하였다. 융안 연간에는 좌장군이 되었다.당시 동진 조정은 사마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마도자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사실상 왕국보를 중심으로 한 사마도자의 측근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397년, 왕공이 왕국보의 토벌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도자는 왕국보 일파를 주벌했다. 이후 사마도자는 한편으로 왕공을 두려워하여 왕유를 강주(江州)로 전출시키고 유해가 맡은 예주 지역에서 4군을 나누어 왕유에게 도독을 맡겼다. 유해는 사마도자의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여기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유해는 자신의 아들인 유홍(庾鴻)을 왕공에게 보내 초왕(譙王) 사마상지 형제가 다시 주요 직위와 대권을 장악하여 그 위세가 왕국보를 넘어섰다고 이야기했다. 왕공 또한 사마상지를 꺼렸기에 유해와 함께 거병하기로 했으며, 여기에는 은중감, 환현, 양전기도 참여했다. 사마도자는 사람을 보내 유해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유해는 사마도자의 설득을 뿌리쳤다.
조정에서 반란을 토벌할 때 유해는 여남군 태수 단방(段方)을 사마원현의 군대에 맞서게 했으나, 단방은 자호(慈湖)에서 사마원현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고 유해 또한 우저에서 사마상지에게 패배하여 달아났다. 뒤에 조정에서 환현, 은중감 등을 사면했으나 유해는 사면되지 못하고 결국 환현에게 의탁하여 환현에 의해 무창군 태수로 기용되었다.
401년, 손은의 난이 일어나자 환현은 손은의 토벌을 요청하며 유해를 우장군으로 삼았으며, 손은이 격퇴된 뒤에 유해는 해임되었다. 유해는 환현이 반드시 실패할 것으로 예측하여 몰래 사마원현에게 사람을 보내 만약 조정에서 환현을 토벌한다면 내응하겠다고 약조했다. 그러나 402년, 조정에서 환현을 토벌할 때 유해는 자신의 계획이 누설되어 환현에 의해 구금되었고 사마도자 부자가 살해된 뒤 얼마 안 있어 환현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