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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9:05:50

왕국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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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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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王國寶
(350 ~ 397)

동진의 인물. 국보(國寶)는 자이고 휘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왕탄지의 아들로, 아버지와 달리 선비의 지조가 없었고 부정을 자주 저질렀다고 한다. 형인 왕개, 왕유와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2. 생애

명재상 사안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사안은 사위 왕국보의 품행이 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미워하였으므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지 않았다. 사안은 그래도 태원 왕씨 가문의 체면을 고려해서 왕국보를 상서령으로 삼으려 했으나, 고작 이부의 랑(郞)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왕국보는 장인어른을 매우 원망하며 관직을 사양했다. 그는 효무제의 친동생인 회계왕 사마도자와 자주 어울리면서, 함께 효무제 사마요에게 간사하게 아첨했다. 당시 효무제는 친동생인 사마도자와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왕국보는 이를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사마도자로 하여금 사안을 참소하게 했다. 이로써 효무제는 사마도자의 이간질에 흔들려 사안을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

태원 10년(385년) 8월, 태보 사안이 사망하고 사마도자가 집권하자, 왕국보는 비서승(秘書丞)에 임명되어 사마도자를 보좌했다. 이후 낭야내사, 영당읍태수(領堂邑太守)를 차례로 지내면서 보국장군이 더해졌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시중에 임명되었다. 아첨과 참소로 사마도자의 총애를 독차지한 왕국보는 한발 더 나아가 조정의 대신들을 선동해, '사마도자를 승상, 양주목(揚州), 가황월(假黃鉞)에 앉혀야 한다'며 8좌(八座)[1]에게 건의하게 했다. 효무제는 선을 넘어버린 왕국보의 행태에 분노하며, 이에 반대하고 서명하지 않은 호군장군 차윤을 칭찬했다.

태원 14년(389년) 11월, 중서시랑 범녕은 고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효무제에게도 자주 충언을 바쳐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자신의 생질이기도 한 왕국보가 사마도자에게 빌붙어 아첨하자, 그를 더욱 혐오하여 효무제에게 왕국보를 내칠 것을 권했다. 이를 알게 된 왕국보는 원열지에게 왕국보를 가까이라하는 내용의 서신을 쓰게 하고, 그것을 태자의 모친인 진숙원(陳淑媛)과 효무제가 신임하는 비구니 지묘음(支妙音)에게 보내게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효무제는 격노하여 원열지를 참수하니, 왕국보는 크게 두려워 사마도자를 찾아가 외삼촌 범녕을 헐뜯었다. 결국 사마도자까지 왕국보에 가세해 범녕을 공격하기 시작하니, 범녕은 그들의 패악질을 견디지 못하고 자청하여 예장태수로 부임했다.

태원 15년(390년) 9월, 시중에서 중서령으로 옮겨지고 중령군을 겸직하게 되었다.

태원 17년(392년), 동생 왕침(王忱)이 세상을 떠나자, 왕국보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의 상을 치르기 위해 조정에 사직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사직을 거부하는 대신 특별히 조서로 휴가를 내려 상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왕국보가 머뭇거리면서 출발을 지체하니, 어사중승 저찬(褚粲)은 이를 빌미로 왕국보를 탄핵했다. 조정에서 죄를 물을 것이 두려웠던 왕국보는 회계왕 집안의 하녀로 여장하고, 몰래 사마도자를 만나 용서를 빌었다. 결국 사마도자가 효무제를 만나서 왕국보를 위해 변호해주면서 왕국보는 겨우 사면받을 수 있었다. 또 한번은, 표기참군 왕휘(王徽)의 초청을 받아 잔치에 참여했다가 술에 취해 응석을 부렸다. 보다못한 상서좌승 조대지(祖台之)가 노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고 크게 호통을 치자, 왕국보는 술잔과 주변에 있는 악기를 조대지에게 집어 던졌다. 이 일로 인해 저찬에게 다시 탄핵당했고, 이번에는 제대로 걸려 면직을 피할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복직되었으나 더 오만해져서 법을 어기고 황궁 청서전(清暑殿) 옆에 자신의 저택을 지으니, 효무제가 그를 대단히 싫어했다. 이에 왕국보가 눈치를 보며 효무제에게 아첨해 그의 환심을 사고, 사마도자를 점차 피하기 시작했다. 사마도자는 이러한 태도에 크게 노하여, 궁중에서 왕국보를 대면했을 때 그를 향해 크게 꾸짖으며 칼을 던졌을 정도로 과거의 우정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한편, 왕국보의 아첨에 완전히 넘어간 효무제는 그를 충성스럽다 여겨, 장차 자신의 아들 사마덕문과 왕국보의 딸을 이어주려 했으나, 그 전에 불의의 사고로 붕어하면서 혼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다급해진 왕국보는 유조를 조작해서라도 뜻을 이루기 위해 야밤에 궁궐 문을 두드리자, 황궁을 수비하던 시중 왕상(王爽)이 외쳤다.
"아직 황태자께서 이르시지 아니 하였는데, 제멋대로 행차하여 감히 궐에 들어오는 자는 참할 것이다!"
왕상의 엄포에 깜짝 놀란 왕국보는 계획을 포기하고 곧바로 도망쳤다.

태원 21년(396년), 효무제 사후 다시 사마도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촌동생인 낭야내사 왕서(王緖)와 함께 곁에서 아첨하였다. 안제 사마덕종의 섭정을 맡은 사마도자는 두 간신배에게 미혹되어, 왕국보를 다시 조정의 실세로 삼으니, 왕국보와 왕서 무리의 위엄이 조정 안팎으로 진동하고 나란히 나라의 질병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태원 21년(396년) 10월, 융평릉(隆平陵)에서 효무제의 장사를 지내고 돌아갈 때, 연청2주자사 왕공이 사마도자에게 왕국보를 멀하라 간했다. 이를 전해들은 왕국보는 더욱 왕공을 두려워하였다.

융안 원년(397년) 정월, 조정에서 왕국보를 상서좌복야로 삼아 관리 선발을 담당하게 하는 동시에 후장군, 단양윤도 겸하게 하고, 동궁(東宮)의 병사를 그의 휘하로 배속시켰다.

융안 원년(397년) 4월, 왕국보는 왕공과 은중감이 두려워 사마도자에게 그들의 병권을 삭탈하라 권했다. 때마침 왕공이 갑옷을 수선하고 병사를 점검한 뒤 조정에 북벌을 청하자, 사마도자는 이를 의심하고, 여름에 백성들의 농사를 방해하지 말고 병사를 해산시킨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왕공은 군대를 해산시키기는 커녕 왕국보의 죄상을 널리 폭로하고, 은중감과 연합해 경구(京口)에서 거병했다.

왕국보의 죄상이 적힌 표문이 도성 건강(建康)에 도착했다. 왕국보는 몹시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일단 죽리(竹里)에 군사 수백 명을 보내 수자리를 세우게 했는데, 하필 그 날 밤에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 진영을 세우지도 못하고 복귀했다. 그때 왕서가 왕국보에게 사마도자의 명을 고쳐 왕순과 차윤을 제거하고, 건강에서 군대를 발동해 왕공과 은중감을 토벌하자 제안했다. 왕국보는 왕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왕순과 차윤을 불렀지만, 차마 그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차윤에게 왕공을 토벌할 계책을 물으니, 차윤이 답했다.
"남북이 동시에 거병했으나, 아직 은중감의 형주군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면 왕공은 반드시 성만 수비할 것이오. 과거 환공(桓公, 환온)이 수양(壽陽)을 포위했을 때, 기한이 거의 다 지나고 나서야 겨우 이겼을 정도로 공성전은 어려운 법인데, 만약 경구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형주군까지 도착하면 그대는 장차 어찌하려 하시오?"
차윤의 말을 들은 왕국보는 더욱 겁을 먹고, 조정에 상소해 해직을 청했다. 그러나 금세 후회하고 조서를 조작해 복직한 뒤, 어떻게든 왕공의 병권을 박탈시킬 방법만 고민했다.

본래 나약한 성격인 사마도자는 왕국보가 왕공을 막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일시적인 안정을 위해 왕국보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왕국보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울 심산으로 초왕 사마상지를 보내 왕국보를 체포하고 그대로 정위에게 넘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옥에 갇혀있던 왕국보는 사마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일파인 사촌동생 왕서도 붙잡혀 저자에서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왕국보 무리를 제거한 사마도자는 왕공에게 사자를 보내 깊이 사죄하니, 왕공은 병사를 거두어 경구로 돌아갔다.

훗날 왕공이 2차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했을 때,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왕국보의 원래 관직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대권을 장악한 환현이 조정에 상표해, 건강에 거주하던 왕국보의 가족들을 교주(交州)로 추방시켰다.

3. 기타



[1] 재상급에 해당하는 8명의 고위 관료를 말한다. 시대마다 팔좌의 구성원은 제각각으로, 동한~진(사마씨) 시기까지는 6조(六曹)의 상서(尙書)와 좌우복야, 령(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