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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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愷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 자는 무인(茂仁).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왕탄지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남전현후 작위를 습작했다. 동생 왕유와 함께 청렴하게 관직 생활에 임했다고 한다.
2. 생애
태원(376년 ~ 396년) 말기, 시중에 임명되어 우위장군을 겸했다. 비슷한 시기 동생 왕유를 비롯한 동생들도 임관하여 고위직을 지내니, 태원 왕씨 가문의 위세가 자못 융성했다.융안 원년(397년) 4월, 왕공이 왕국보, 왕서(王緖)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자, 이에 겁을 먹은 사마도자는 그들을 사사했다. 이때 왕국보는 왕개, 왕유의 이복동생이었으므로, 왕개와 왕유는 나란히 조정에 나아가 해직을 청했다. 그러나 사마도자는 원래 왕국보는 왕개, 왕유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이유로 들어 용서하였다. 왕국보 처단 이후 왕개는 오국내사에 임명되어 도성을 떠났다가, 얼마 뒤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단양윤에 제수받았다.
융안 2년(389년) 9월, 왕공이 2차로 일으킨 난에 호응한 은중감의 선봉, 환현, 양전기의 군대가 석두성(石頭城) 인근에 이르렀다. 당시 사마도자를 대신해 토벌군을 지휘하던 사마원현은 왕개로 하여금 도성 건강(建康)의 백성 수만 명을 징발하게 하고, 석두성으로 가 환현과 양전기를 막게 했다. 그 무렵, 유뢰지가 반란군의 맹주 왕공을 처단하는 바람에 환현과 양전기는 물러나 형세를 관망했다.
융안 2년(389년) 10월, 사마원현의 회유에 넘어간 은중감, 환현, 양전기는 내려진 보상에 만족하며, 다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반란이 얼추 마무리 되고, 왕개는 다시 오국내사에 임명되어 오군(吳郡)에 부임했다. 이후 병사하니, 조정에서 그를 태상으로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