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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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愉(? ~ 404)
동진의 인물. 자는 무화(茂和).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왕탄지의 차남으로, 환온의 차녀 환백자(桓伯子)와 혼인하면서 환현의 매부가 되었다.
2. 생애
표기사마에 제수받고 보국장군이 더해지면서, 형 왕개를 비롯한 형제들이 고위 관직에 올랐고, 사촌 여동생 왕씨 또한 안제 사마덕종을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회계왕 사마도자의 처였기에, 태원 왕씨 가문의 위세가 제법 빛났다.융안 원년(397년) 4월, 연청2주자사 왕공이 동생인 왕국보, 왕서(王緖)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사마도자는 그들을 사사함으로써 왕공을 달랬다. 이때 왕유는 형 왕개와 함께 조정에 나아가 해직을 청했으나, 사마도자는 왕국보는 원래 왕개, 왕유와 이복동생인데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이유로 들어 죄를 묻지 않았다.
융안 2년(398년) 7월, 사마도자가 초왕(譙王) 사마상지의 조언에 따라, 왕공, 유해와 같은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해 왕유를 강주자사, 도독예주4군제군사(都督豫州四郡諸軍事)로 임명했다. 예주자사 유해는 사마도자가 자신의 관할이었던 4개의 군을 떼어내는 것에 분노하여, 아들 유홍(庾鴻)을 보내 일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왕공을 꼬드겼다. 왕공이 유해의 말에 넘어가 왕유와 사마상지 토벌을 명목으로 또다시 거병하니, 이번엔 형주자사 은중감 등도 왕공에게 호응해 군대를 거느리고 건강으로 진격했다.
융안 2년(398년) 8월, 은중감군의 선봉인 양전기와 환현의 5,000 군사가 강주 분구(湓口)에 이르렀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던 왕유는 반란군이 온다는 소식에 당황해 허둥지둥 임천(臨川)으로 달아났지만, 이내 환현이 파견한 별동대에게 사로잡혔다.
융안 2년(398년) 10월, 환현과 은중감이 심양(尋陽)에서 맹약을 맺을 때, 왕유는 제단을 쌓는 임무를 맡았는데, 스스로 이를 심히 수치스러워 하였다. 이후 환현, 은중감, 양전기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하사받고 흩어지면서 반란이 종료되었다. 조정에서는 환현을 위무한답시고 그를 강주자사에 임명했기 때문에, 왕유는 강주자사에서 해임되고 회계내사로 강등되었다.
원흥 2년(403년) 12월, 환현이 안제 사마덕종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초나라(楚)의 황제로 즉위했다. 환현은 매부인 왕유를 중앙으로 불러 상서좌복야로 삼았다.
원흥 3년(404년) 3월, 유유가 기의해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한 뒤, 왕유에게 전장군 직책을 겸하게 했다. 하지만 왕유는 자신이 환씨 집안의 사위라 환온, 환현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었고 또, 과거 유유를 깔봤던 적이 있었기에, 항복한 뒤에도 숙청당할까 내심 불안에 떨었다. 왕유는 아들 왕수, 사주자사 온상(溫詳)과 유유를 습격할 작전을 세우다가 일이 누설되면서 유유에게 주살당했다.
이때 왕유의 아들인 왕수, 왕납(王納), 왕집(王緝) 등도 붙잡혀 모두 주멸당했으나, 왕집의 아들 왕혜룡만이 승려 빈(彬)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 더이상 동진에 머물 수 없게 된 왕혜룡은 북위로 망명했고, 훗날 북위의 장군이 되어 송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유송의 장수인 단도제와 도언지가 침략해올 때마다 누누이 꺾는 등, 죽기 전까지 가문의 원수나 다름없는 송나라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