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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8:14:08

치회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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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郗恢
(? ~ 398)

동진의 인물. 자는 도윤(道胤). 아명은 아걸(阿乞). 연주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출신. 태위 치감의 손자. 서연2주자사 치담의 아들.

2. 생애

치회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동안현백(東安縣伯)의 작위를 습작하였다. 장성한 뒤에는 산기시랑으로 임관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급사황문시랑, 영 태자좌위솔(領太子右衛率)을 역임하였다. 치회는 키가 8척이나 되는 장신에, 아름답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어 외모가 위엄 있었고, 학식과 문장까지 뛰어나 효무제 사마요가 그를 촉망받는 인재로서 매우 중히 여겼다.

태원 17년(392년) 10월, 옹주자사 주서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구했다. 이에 효무제 사마요는 치회를 양진옹사형양병등주제군사(梁秦雍司荊揚並等州諸軍事), 건위장군, 옹주자사, 가절로 삼아 주서를 대신해 양양(襄陽)을 진수하게 하였다. 치회는 관롱(關隴) 지방의 민심을 얻어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귀순해왔다. 이때 전진의 고제 부등이 자천(茲川)에 주둔하고 있는 두충(竇衝)을 좌승상으로 삼고, 화음(華陰)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였다. 이에 치회는 장수 조목(趙睦)을 금용성(金鏞城)으로 보내 전진의 침입에 막았다. 두충은 여러 번 공격을 펼쳤으나 나아가지 못 했고, 그 틈에 하남태수 양전기가 호성(湖城)에 주둔하여 두충을 격파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태원 19년(394년) 8월, 서연의 황제 모용영이 후연의 모용수에게 포위당해 곤궁한 상태에 놓였다. 모용영은 양양의 치회에게 구원을 청하는 동시에 아들 상산공 모용홍(慕容弘) 등의 인질과 옥새 한 묶음을 바쳤다. 치회는 옥새를 중앙으로 보내면서 모용영을 구원하여 후연을 견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적어 첨부하였다. 효무제 또한 치회의 의견이 그러하다 여기고 왕공, 유해를 파견해 서연을 구원하려 했지만, 구원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모용수가 서연의 수도인 장자(長子)를 함락시키고 모용영을 참수하였다.

이후 하남태수 양전기가 병에 걸려 변경 방어의 임무를 맡을 수 없게 되어 사직하자, 이에 치회는 수군(隨郡) 태수 하후종지(夏侯宗之)를 하남태수로 삼아 양전기 대신 낙양을 지키게 하였다.

융안 원년(397년) 4월, 백치 황제인 안제 사마덕종의 보정을 맡은 회계왕 사마도자가 정권을 잡고, 연청2주자사 왕공과 형주자사 은중감을 심히 경계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왕공과 은중감은 반란을 일으켜 사마도자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은중감은 치회도 반란에 기꺼이 따를 것이라 확신하였지만, 막상 치회는 소극적으로 나오면서 가담하지 않았다.

융안 원년(397년) 9월, 후진의 황제 요흥이 호성(湖城)과 섬성(陝城)을 공격해 빼앗음으로써 상낙군(上洛郡)을 전부 장악하였다. 요흥이 뒤이어 동생인 제공(齊公) 요숭(姚崇)을 파견해 낙양을 공략하니, 하후종지는 낙양의 금용성에 주둔하여 후진군의 공격을 막았다. 치회는 건무장군 신공정을 보내 낙양을 구원케 하고, 양주자사(梁州刺史) 왕정윤(王正胤)으로 하여금 무리를 거느리고 자오곡(子午谷)에서 나와 낙양을 돕게 하였다. 요숭은 동진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후퇴하면서 낙양 인근의 유민 20,000여 호를 거두었다. 치회는 후진의 공격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정로장군으로 승진하고, 영 진주자사(領秦州刺史), 독롱상군(督隴上軍)을 겸하였다.

융안 2년(398년) 7월, 왕공, 은중감, 환현, 유해, 양전기가 강주자사 왕유, 초왕 사마상지 등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난을 일으켰다. 사마도자는 회계왕세자 사마원현에게 황월을 내리며 정토도독으로 삼아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으나, 환현이 사마상지와 사마휴지의 군대를 모두 대파하여 관군의 형세가 매우 불리하였다. 이때 왕공의 장수인 유뢰지가 배반해 반란군의 맹주인 왕공을 죽였고, 치회가 반란군의 편에 서자는 양양태수 하후종지와 정로사마 곽비(郭毗)를 처단한 뒤 조정의 편에 서자,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반란군의 허실을 몰라 불안했던 사마도자는 이내 양전기, 환현 등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것으로 협상을 보았다.

협상의 결과로 양전기가 옹주자사에 임명되고 치회는 상서로 옮겨졌다. 하루아침에 직책을 박탈당하게 된 치회는 남양태수 여구선(閭丘羨)과 더불어 양전기를 막을 방법을 궁리했으나, 양전기가 먼저 나아가 옹주를 장악하고 치회를 따르던 자들의 항복을 받으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양전기는 여구선만 참살하고 치회와 그 아들들은 놓아주어 건강(建康)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치회가 양구(楊口)에 이르렀을 때 은중감이 암살자를 보내 치회와 4명의 아들들을 죽여버리고, 인근 만족의 소행으로 둔갑시켰다. 그의 장례는 도성에서 치러졌고, 운 좋게 살아남은 아들 치순(郗循)이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