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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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伏滔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현도(玄度). 청주 평창군(平昌郡) 안구현(安丘縣) 출신.
2. 생애
복도는 학문에 재능이 있어 어렸을 때부터 명성을 얻었다. 주(州)에서 수재로 천거받고 별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이후 대사마 환온이 복도를 불러 참군으로 삼고, 상당한 예우를 더해 연회가 열리거나 여행을 가야할 때면 반드시 그를 데리고 다녔다.태화 4년(369년) 10월, 예주자사 원진(袁真)이 환온과 갈등하다가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수양(壽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환온은 친정하여 회남 지역에서 반란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복도도 환온을 수행하여 토벌군에 참여하였다. 복도는 회남에서 원정을 수행하면서 《정회》(正淮) 상, 하편을 지어 끝나지 않는 상란에 대해 한탄하였다.
함안 원년(371년) 정월, 원진 사후 반란군을 이끌던 그 아들 원근(袁瑾)이 마침내 패배하여 수양성은 동진군에게 함락되었다. 환온은 반란의 주모자인 원근과 주보(朱輔)를 붙잡아 건강으로 복귀하고 모두 참수하여 그 일족을 멸하였다. 복도는 반란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문희현후(聞喜縣侯)에 봉해지고, 영세(永世) 현령에 제수받았다.
영강 원년(373년) 7월, 권신 환온이 고숙(姑孰)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복도는 서북장군 환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가 화용(華容) 현령으로 옮겨졌다.
태원 연간(376년 ~ 396년)에는 저작랑에 임명되어 나라의 역사를 관장하였다. 이후 영 본주대중정(領本州大中正), 유격장군을 역임하고, 저작랑은 그대로 겸직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아들 복계(伏系)도 문학적 재능이 있어 황문랑, 시중, 상서, 광록대부를 역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