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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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孫楚(? ~ 293)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자형(子荊). 병주 태원군 중도현 출신. 손자의 손자.
2. 생애
재능이 탁월하고 성품이 시원해 무리에서 벗어났으며, 남을 업신여기고 거만해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손초는 40여세에 들어서 진동군사가 되었다가 사마소의 지시로 손호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이후 좌저작랑이 되었다가 석포의 군사로 참가했고 손초는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을 가져 석포를 얕보았는데, 손초와 갈등한 석포가 손초가 오나라 사람인 손세산(孫世山)과 함께 진나라를 비판한다는 상주를 했다. 손초는 이에 맞서 몇 년 동안 논리를 갖춰 상주했지만 결말이 나지 않았다.
고향 사람인 곽혁과도 분쟁을 일으켰고 사마준의 참군, 양의 현령, 위장군의 사마 등을 역임했으며, 양의 현령으로 있을 때 무기고의 우물 속에서 용이 목격되자 군신이 축하를 했고 손초는 이 징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작은 잘못을 용서하고 풍속을 바로잡아 선정을 펼치라는 상주를 했다.
아내가 죽고 상을 치르다가 상을 벗을 때가 되자 시를 지어 왕제에게 보여줬는데, 왕제가 문장을 칭찬하면서 시를 보고 서글픈 마음에 배우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더 생겼다고 말했다. 자신의 재주에 자부심이 강해 존경하는 인물은 적었지만, 왕제 만은 인정했고 왕제가 죽자 눈물을 흘렸다가 왕제가 나귀 울음소리 흉내내는 것을 좋아했기에 흉내냈다.
사람들이 모두 웃자 손초는 그대들을 살아남게 했기에 이 사람이 죽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290년에 빙익태수가 되었다가 293년에 사망했다.
3. 기타
세설신어 「배조(排調)」편에 손초와 왕제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손자형(孫子荊=손초)은 젊어서부터 은둔할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한번은 왕무자(王武子=왕제)에게 "마땅히 침석수류(枕石漱流: 돌을 베개로 삼고 흐르는 물에 이를 닦아야 할 것이다. 은거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라고 해야 할 것을 "마땅히 수석침류(漱石枕流)"라고 잘못 말했다. 왕무자가 이를 듣고 말했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건 뭔 소리고, 돌로 양치를 한다는 건 또 뭔 소리여?" 그러자 손자형이 대꾸했다.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것은 귀를 닦기 위함이요, 돌로 이를 닦는다 함은 이를 갈고 싶어서이다!"
고사를 좀 읽어본 사람들은 저 '귀를 씻는다'는 말에서 손초의 센스를 짐작했을 것이다. 바로 요순시대 은자로 유명한 허유의 일화에서 나온 표현이기 때문. 그래서 수석침류라는 말은 순간의 실수를 덮는 재치있는 임기응변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그리고 이 일화에서 유래된 일본어가 流石(さすが)으로 '과연, 역시'의 뜻으로 쓰인다.
손씨(孫氏)의 족보에 따르면: 손굉(孫宏)은 남양(南陽)태수가 되었다. 손굉의 아들은 손초(孫楚)인데, 자는 자형(子荊)이다.
손초는 토로호군(討虜護軍), 빙익(馮翊)태수까지 관직이 승진했다. 손초의 아들 손순(孫洵)은 영천(潁川)태수가 되었는고, 손순의 아들인 손성(孫盛)은 자를 안국(安國)이라 하고, 급사중(給事中), 비서감(祕書監)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