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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4 20:25:33

정담(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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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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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丁潭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세강(世康). 양주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출신.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사도를 지낸 정고의 손자. 서진 시기 양주자사(梁州刺史)를 지낸 정미(丁彌)의 아들.

2. 생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으로 임관했다가, 오래지 않아 승상서각좨주(丞相西閣祭酒)로 승진하였다.

건흥 3년(315년) 2월, 낭야왕 사마예가 승상에 임명되어 칭제(稱制)하자, 정담은 작금의 사실에 대한 손익에 관해 상소를 올려,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인재의 중요성과 관리들의 경쟁력을 설파했다.

건무 원년(317년) 3월, 사마예가 건강(建康)에서 진왕(晉王)으로 즉위하자, 정담은 부마도위, 봉조청, 상서사부랑에 임명되었다. 기존 낭야왕 작위는 사마예의 아들인 사마부가 수봉하였는데, 사마예는 조정 내의 현명한 인사를 낭야국의 상경(上卿)으로 삼고자 했다. 사마예는 내심 정담을 후보로 생각하고 중서령 하순에게 질문하니, 하순이 말했다.
"낭중령 직책은 매우 중요한 자리인지라, 이를 선발할 때 마땅히 심사숙고하여야 합니다. 정담은 청순하고 고상한 기품이 있어 명철한 판단을 할 것이니, 실로 적합한 재능이라 할 수 입니다."
하순의 의견을 들은 사마예는 정담을 낭야국의 낭중령으로 삼았다.

건무 원년(317년) 10월, 낭야왕 사마부가 사망했다. 정담은 조정에 상소하여 낭야왕에 대한 종상(終喪)의 예를 거행하길 청했다. 조정에서 국자좨주 두이(杜夷), 태상 하순 등의 대신들이 의논한 끝에 낭야왕의 장례는 3년상에 의거하는 것으로 의결하고, 정담에게 조서를 내려 이에 따라 장례를 거행하도록 했다.

대흥 3년(320년), 사마부의 장례를 모두 마친 후, 표기장군 왕도의 사마로 옮겨졌다가, 중서랑, 광무장군, 동양태수를 역임했다. 정담이 지역을 다스릴 때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으니, 조정에서 그를 징소해 태자좌위솔로 삼으려 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녕 3년(325년) 8월, 명제 사마소가 붕어하고, 성황제 사마연이 황위를 계승하자, 정담은 산기상시, 시중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

함화 4년(328년) 5월,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건강을 장악한 역양내사 소준이 성제 사마연을 핍박해 석두성(石頭城)으로 끌고 갔다. 정담은 유초, 종아와 함께 성제를 수종하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함화 5년(329년) 2월, 형주자사 도간이 이끄는 의병이 승리하여 석두성을 탈환하고, 소준에게 호응했던 서양왕 사마양, 팽성왕 사마웅 등을 붙잡아 그 일족을 주살했다. 비록 유초와 종아는 소준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정담만은 살아남아 성제를 모시고 도성 건강으로 귀환했다. 소준의 반란이 완전히 평정된 후에는 영안백(永安伯)에 봉해지고, 대상서(大尚書)로 승진하였다. 이후 정위, 좌광록대부, 영국자좨주(領國子祭酒), 회계국대중정을 역임했으며, 산기상시도 겸했다.

함강 8년(342년) 6월, 성제 사마연이 붕어하고 강황제 사마악이 즉위했다. 정담이 표를 올려 노환을 이유로 은퇴를 구하자, 조정에서 정담을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은퇴를 허락하였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그의 문 앞에 행마(行馬)를 둘 수 있게 하고, 녹을 재직 중에 받던 것과 똑같이 지급하였으며, 돈 20만 전과 침대와 이불을 하사했다.

관직에서 내려온 정담은 집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다가 80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다. 조정에서 그를 시중으로 추증하고, 광록대부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시호는 '간(簡)'. 승상 왕도는 정담에게 삼공(三公)에 오를 만한 명망은 있어도 재주는 없다고 평했다.

아들로는 정화(丁話)가 있고, 관직은 산기시랑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