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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1 12:16:47

원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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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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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袁瓌
생몰연도 불명

서진동진의 인물. 자는 산보(山甫). 예주 진군 양하현 출신. 조위 시기 낭중령을 지낸 원환(袁渙)의 증손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일찍 요절하여 기록이 없다.

2. 생애

서진 말기에 원괴는 동생 원유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강회(江淮) 일대의 현으로 피난가고, 여현(呂縣)의 현령에 임명되었다. 이후 강도(江都) 현령으로 전임되었으나, 원괴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 낭야왕 사마예에게 귀순하니, 사마예는 그를 단양현령으로 삼았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등극하고 동진 정권을 세우자, 원괴는 봉조청에 제수받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서어사로 옮겨졌다. 당시 동해왕 사마월의 시신은 석륵에 의해 불 타 없어졌는데, 동해왕비 배씨(裴氏)는 동진 조정에 저승에 있는 사마월의 혼을 불러들여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락해달라 청했다. 동진 조정은 배씨를 의심하면서 결정을 보류하던 중, 원괴는 박사 부순(傅純)과 의논하여 강령술에 의한 장례는 이른바 "매신(埋神)"이라는 금기라 허락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사마예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배씨에게 사마월을 기리는 장례는 허용하되, 혼백을 불러서 장례를 치르는 건 금지했다. 이후 원괴는 여강태수, 대장군 왕돈의 자의참군, 임천태수를 역임했다.

태녕 2년(324년) 8월, 왕돈의 반란이 모두 평정된 후, 진남장군 변돈(卞敦)의 군사(軍司)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하고 회계(會稽) 땅을 유람했다.

함화 3년(328년) 5월, 역양내사 소준의 반란으로 도성 건강(建康)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회계내사 왕서가 소준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원괴도 의병에 참가해 반란군과 싸우니, 그 공을 인정받아 장합향후(長合鄉侯)에 봉해지고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사농을 거쳐, 국자좨주에 제수받았고, 산기상시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함강 3년(337년) 정월, 왕돈, 소준 등의 연이은 반란으로 동진은 황폐해졌고, 설상가상으로 후조의 실권자인 중산왕 석호가 호시탐탐 변경을 어지럽히면서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에 더해 귀족 지배층 사이에서 현학이 널리 유행하면서 유학의 예교를 쇠퇴시키자, 원괴는 성제 사마연에게 태학을 설립해 유학자들이 그곳에서 제자를 양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박사에게 벼슬을 더해 뭇 관리들이 유학을 존중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성제는 그의 말대로 시행했으나, 이미 널리 퍼져버린 현학의 영향력에 때문에 유학은 동진에서 주류 학문으로까지 자리잡지는 못 했다.

원괴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성제를 모시다가 노령을 이유로 은퇴를 구했다. 그리고 이내 사망하니, 광록대부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공(恭)'. 아들 원교가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