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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7:10:04

사마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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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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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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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밀효왕(高密孝王)
司馬略 | 사마략
시호 (孝)
작위 고밀왕(高密王)
최종직위 승상(丞相)
성씨 사마(司馬)
(略)
원간(元簡)
아버지 친아버지:사마태(司馬泰)
생몰기간 ? ~ 309년
고밀왕 재위기간 299년 ~ 309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의의 넷째 동생인 동무대후(東武戴侯) 사마규(司馬馗)[1]의 손자이고 고밀문헌왕(高密文獻王) 사마태(司馬泰)[2]의 셋째아들이다. 자는 원간(元超).[3] 시호는 효(孝), 작위는 고밀왕(高密王)으로 모두 더해 고밀효왕(高密孝王)이다.

2. 생애

부모를 공경하고 자비롭고 자상한 성격이었다.현인에게는 조심스럽고 겸허하며 예의 바르게 응대하였으며, 아버지 사마태의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원강 1년(291년)에 서진 초대 황제 사마염에 의해 부마도위 화항(華恒), 기마도위 양준, 동안왕 사마요, 사마략의 형 동해왕 사마월과 함께 황태손 사마휼의 교육을 담당했다.

원강 9년(29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작위를 이어 고밀왕에 봉해졌다. 산기황문시랑·산기상시·비서감을 역임하고 낙양을 나와 안남장군·지절·도독면남제군사에 맡겨졌다가 이윽고 안북장군·도독청주제군사로 옮겼다. 사마략은 청주자사 정목(程牧)을 위압하여 이를 추방하고 스스로 청주를 영유하게 되었다.

영흥 3년(306년)에는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적이 되었고, 진조에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여 현공이라 자칭하였다. 직후에 치하를 따라 침공하자 사마략은 진군장군 유우에게 요격을 명했으나 유우는 반격을 당해 낙양으로 패주하였다. 이어 유백근이 사마략을 공격하자 사마략은 요성으로 도주했다. 이후 유백근은 안북장군 왕준이 토벌하였다.

영가 2년(308년) 사마략은 양양을 진수했다. 유민 왕수(王逌)는 수족의 황락(郝洛)과 결탁하여 수천의 군사를 모으고 관군에 주둔하여 성곽을 침범하였다. 사마략은 참군 최광(崔曠)에게 토벌을 명했으나 왕수의 계략에 빠져 패배하였다. 사마략은 다시 좌사마 조터[4]로 하여금 최광 등을 통솔시켜 다시 왕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터가 왕수와 교전하자 최광은 이에 가담하지 않고 몰래 철병해 버렸고, 엄호가 없는 조터는 결국 싸움에서 패해 전사했다. 사마략은 최광의 죄를 묻지 않고 다시 최광에게 군을 이끌게 하여 토벌을 가게 하자 왕수는 마침내 항복하였다.

그 공으로 승진하여 개부 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영가 3년(30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시중 태위로 추증, 후사는 그의 아들 사마거(司馬據)가 이었다.


[1] 자는 계달(季達)이다.[2] 자는 자서(子舒)다.[3] 원(元)은 고밀문헌왕의 아들들에게 돌림이름처럼 붙은 것이고 간(簡)는 이름과 뜻이 같다.[4] 조휴의 증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