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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01:12:15

사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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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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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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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무애왕(新蔡武哀王)
司馬騰 | 사마등
시호 무애(武哀)
봉호 동영공(東瀛公) → 동연왕(東燕王) → 신채왕(新蔡王)
최종직위 안북장군(安北將軍)
성씨 사마(司馬)
(騰)
원매(元邁)
아버지 친아버지:사마태(司馬泰)
생몰기간 ? ~ 307년
동연왕 재위기간 306년 ~ 307년
신채왕 재위기간 307년 ~ 30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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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의의 넷째 동생인 동무대후(東武戴侯) 사마규(司馬馗)[1]의 손자이고 고밀문헌왕(高密文獻王) 사마태(司馬泰)[2]의 둘째아들이다. 자는 원매(元邁).[3] 봉호는 신채왕이고 시호는 무애로 모두 더해 신채무애왕(新蔡武哀王)이다. 형으로는 팔왕의 난의 8왕중 한명인 동해효헌왕 사마월이 있으며 동생들로는 사마략, 사마모가 있다.

2. 생애

젊은 나이에 용종복야(冗從僕射), 동영공(東瀛公)에 봉해져 남양태수, 위군태수를 역임하고 부임지에서 행정처리 능력을 칭찬받았다. 그 결과로 중앙에 입조하자 종정(宗正)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태상(太常)이 되었으며, 다시 지절·영북장군·도독촉주제군사·병주자사로 승진하였다.

태안 2년(303년)경 병주는 기근을 겪었는데, 사마등은 이민족들을 잡아 팔아넘겨서 군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석륵이 사마등에게 잡혀 산동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영안 원년(304년) 7월 형 동해왕 사마월은 성도왕 사마영이 업성에서 향락에 빠져 사느라 수도 낙양을 비워둔 틈을 타 진진에게 군대를 이끌고 운용문을 통해 궁궐을 장악하게 한 뒤 삼공과 백관들, 그리고 전중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서 계엄령을 내리고 사마영을 토벌하게 했다. 이후 사마월은 7월 3일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사마영이 폐위시켰던 황후 양씨와 태자 사마담을 복위시켰다. 사마등은 형의 명을 받아 사마영에게 반기를 든 유주제군사도독 왕준에게 가서 선비, 오환족과 연합하여 사마영을 치게 했다. 사마영은 이에 맞서 흉노족과 연합했으나 흉노족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왕준, 사마등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업에서 달아났다. 그 공으로 사마등은 안북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석에서 거병한 유연에 대항하여 사마등은 선비족 탁발의타에게 요청하여 군사를 빌렸다. 유연을 공격했고, 몇번의 승리를 거뒀으나 결국 격파당하였고 병주를 뺏기고 말았다.

영가 원년인 307년 5월, 반란군인 급상이 부하 장수 석륵을 앞세워 위군태수 풍숭을 격파하고 업성을 공략했다. 당시 업성을 지키고 있던 사마등은 업성이 공략되자 도망치다가 급상의 장수 이풍에게 살해되었다.

[1] 자는 계달(季達)이다.[2] 자는 자서(子舒)다.[3] 원(元)은 고밀문헌왕의 아들들에게 돌림이름처럼 붙은 것이고 매(邁)는 이름과 뜻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