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인물이자 해당인물의 증조부에 대한 내용은 사마준(후한) 문서
, 서진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사마준(화용왕) 문서
, 동진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사마준(동진) 문서
, 북위의 귀족에 대한 내용은 사마준(북위) 문서
, 유희왕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인섹터 하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 사마준 관련 틀 ''' | ||||||||||||||||||||||||||||||||||||||||||||||||||||||||||||||||||||||||||||||||||||||||||||||||||||||||||||||||||||||||||||||||||||||||||||||||||||||||||||||||||||||||||||||||||||||||||||||||||||||||||||||||||||||||||||||||||||||||||||||||||||||||||||||||||||||||||||||||||||||||||||||||||||||||||||||||||||||||||||||||||||||||||||||||||||||||||||||||||||||||||||||||||||||||||||||||||||||||||||||||||||||||||||||||||||||||||||||||||||||||||||||||||||||||||||||||||||||||||||||||||||||||||||||||||||||||||||||||||||||||||||||||||||
<colbgcolor=#ece5b6><colcolor=#800080>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 부풍무왕(扶風武王) ''' 司馬駿 | 사마준 | ||||
출생 | 232년[1][2] | |||
조위(曹魏) 사례(司隸)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現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샤오징진) | ||||
사망 | 286년 11월 2일[3] (향년 54세) | |||
시호 | 무(武) | |||
재위기간 | 서진의 여음왕 | |||
266년 2월 9일[4] ~ 277년 10월 5일 | ||||
재위기간 | 서진의 부풍왕 | |||
277년 10월 5일[5] ~ 286년 11월 2일 | ||||
정보 더보기{{{#!wiki style="margin: 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 .93em;" | <colcolor=#ece5b6> 정보 | 성씨 | 사마(司馬) | |
휘 | 준(駿) | |||
자 | 자장(子臧) | |||
가족 | 부친: 사마의(司馬懿) 모친: 복부인(伏夫人) 아내: 태비 장씨(臧氏) 자식: 사마창(司馬暢), 사마흠(司馬歆) 외 8명 | |||
작위 | 조위 | 평양정후(平陽亭侯) → 평양향후(平陽鄕侯) → 평수후(平壽侯) → 동모후(東牟侯) | ||
서진 | 여음왕(汝陰王) → 부풍왕(扶風王) | |||
직위 | 조위 | 산기상시(散騎尙侍) → 보병교위(步兵校尉)[6] → 둔기교위(屯騎校尉) → 평남장군(平南將軍)[7] → 안동장군(安東將軍)[8] →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9] | ||
서진 |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10] →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11] →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개부벽소(開府辟召), 의동삼사(儀同三司)[12] → 표기장군(驃騎將軍)[13] → 대사마(大司馬)[14] | }}}}}}}}}}}} |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서진(西晉)의 황족. 자는 자장(子臧). 출신지는 사례 하내군 온현. 사마의의 7남으로[15] 어머니는 복부인이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사마간(司馬幹), 사마융(司馬肜), 사마륜(司馬倫)과는 이복형제이다. 동복형제로는 사마량(司馬亮), 사마주(司馬伷), 사마경(司馬京)이 있다. 서진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 사마염(司馬炎)은 사마준의 조카다. 최종 작위는 부풍왕.[16] 시호는 무(武).[17] 작위와 시호를 따 부풍무왕준(扶風武王駿)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사마준의 부인으로는 태비 장씨가 있으며, 장씨 소생으로 자식을 10명이나 두었다. 이들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는 사마창[18]과 사마흠[19]이 있다.사마준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해서 논문을 쓸 수 있었고, 조위의 명사 순의(荀顗)[20]와 인(仁)과 효(孝) 중에 무엇이 앞선 것인가를 논한 바 있어 글에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마다 사마준이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고 여겼다. 또한 사마준은 효행에 있어서 누구보다 밝았다. 형 사마량이 임관하여 어머니 복태비가 형을 따라 궁정으로 들어갔을 때, 사마준은 자주 눈물을 흘리며 복태비를 사모했고, 모친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때에 따라 관직을 위임하고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문안했다고 한다. 이렇듯 장성해서도 비뚤어지지 않아 청렴결백하고 도를 지켰기에 서진 사마씨 종실 내 최고의 준걸로 기대를 받았는데, 이 평은 결과적으로 사마준의 행보에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21]
양호(羊祜), 두예(杜預), 마륭(馬隆), 왕준(王濬) 등과 더불어 서진의 명장, 그리고 관중 일대에서 진정으로 우러른 덕장. 그런데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진다. 분명 양호와 비견되는 인물인데도 매체에서는 사마준을 잘 다루지 않는 것은 기본인 데다[22] 삼국지연의에서는 사마준이 아예 등장하지를 않는다. 이런 이유로 사마준은 뛰어난 공적을 세운 것에 비해 인지도가 아예 없다.[23][24]
2. 진서
2.1. 초기 생애
사마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은혜로웠다. 이미 대여섯 살 무렵 글을 쓰고 문서를 해석하며 경전을 낭독할 수 있었으며, 문장(文章)과 교양(敎養)을 높이 존중받게끔 향상하였고, 더불어 효도(孝道)를 실천하는 모습 때문에 세간에 이름을 날렸다. 이 때문에 사마팔달(司馬八達)을 배출한 당대의 명문가 사마씨 가문에서도 사마준은 촉망받는 기대주였다.조위 경초(景初) 연간.[25] 아직 유년기에 불과했던 사마준은 일찍이 평양정후로 봉해졌다.
조위 경초 3년.[26] 사마준은 고작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관직을 받아 산기상시가 되어 이제 막 즉위한 조위의 황제 조방(曹芳)에게 글을 강론했다.[27][28] 이윽고 보병•둔기교위 등을 역임하면서도 사마준은 산기상시를 유지하였다. 작위가 평양향후로 오른 뒤에는 평남장군, 가절, 도독회북제군사[29]가 되었다. 이후에는 평수후로 고쳐 봉해 안동장군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조모 시해 사건이 일어났으나, 사마주의 기록만 나와 있을 뿐, 사마준은 뭐 하고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위 함희(咸熙) 원년.[30] 33살이 된 사마준은 동모후로 옮겨 봉해졌고 직위도 안동대장군으로 전임되어 허창(許昌)을 진수(鎭守)하였다.[31][32]
2.2. 서진의 개국, 황족으로 격상
조위 함희 2년 12월 병인(丙寅).[33] 조위의 말제 조환(曹奐)이 사마염에게 선양(禪讓)을 하면서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진무제 사마염은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그들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즉위 직후부터 가까운 종친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거나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어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34]그리하여 건국 다음 날인 정묘(丁卯)일에 사마염은 공신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하면서 도합 27명의 종친을 제후왕(諸侯王)으로 책봉했고, 총 157,939호(戶)가 그들에게 식읍으로 분봉 되었다. 동모후 사마준도 이때 여음왕에 봉해지며 식읍이 1만 호가 되었고, 도독예주제군사가 되어 예주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같은 시기, 그의 형 사마주도 진동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도독서주제군사(都督徐州諸軍事)가 되어 하비(下邳)를 진수하였다. 형제가 각각 예주와 서주의 방위를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35]
2.3. 석포를 구명하고, 정봉의 공세를 격퇴
서진 태시(泰始) 4년 11월.[36] 동오 황제 손호(孫皓)의 명으로 합비(合肥) 침공을 준비 중이던 손오(孫吳)의 대장군(大將軍) 정봉(丁奉)이 이간책으로 동요를 퍼뜨려 당시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로 수춘에 주둔 중인 대사마(大司馬) 석포(石苞)가 오나라와 내통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회북감군(淮北監軍) 왕침(王琛)에게서 올라왔다. 평소 왕침은 석포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석포를 모함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정봉이 국경에서 움직임을 보이자, 석포는 군을 소집하고, 성루를 쌓으며 전쟁에 대비하였는데, 사마염이 이를 수상하게 여겼다.[37] 이에 양호가 석포를 열심히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염이 여전히 석포를 의심하니 결국 그의 아들, 석교(石喬)를 상서랑(尙書郞)에 임명, 중앙으로 불렀다. 그러나 석포가 아들 석교를 보내지 않자, 사마염은 분노하여 곧 그를 파면했고, 태위(太尉) 의양왕(義陽王) 사마망(司馬望), 동완왕(東莞王) 사마주에게 대군을 주어 석포가 있는 수춘을 정벌케 하였다.한편, 같은 시기에 회현(懷縣) 출신의 손삭(孫鑠)이라는 자가 석포 소속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석포가 있는 임지가 수춘에 있었기에, 손삭은 수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손삭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면, 일찍이 태수(太守) 오분(呉奮)밑에서 일하던 현리였지만, 혈통이 미천해서 귀족 출신인 동료들은 그와 함께 앉지 않았고, 이에 오분이 분노하여 손삭을 사례교위부(司隷校尉部)에서 유눌(劉訥)의 도관종사(都官從事)로 일하게 하였다. 사예교위 유눌이 손삭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오분은 석포에게 손삭을 수시로 추천하다가 마침 이 시기에 천거가 되었다. 이에 손삭이 명을 받들어 출발했는데, 손삭이 허창에 닿았을 때는 이미 소수의 군사를 모아 은밀히 석포를 습격하러 보낸 뒤였다.
그때, 사마준은 허창을 지키고 있었다. 손삭이 사마준을 알현했고, 사마준은 손삭을 먼저 알아봤다. 둘은 동향(同鄕)[38]인 사이였다. 그리고 상황을 모르고 있던 손삭은 사마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수춘에 있는 석포의 임지로 부임했기에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이라 말했다. 사마준은 이미 조정으로부터 석포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상황이었는데, 손삭을 이대로 보내버렸다가는 그가 수춘에 도착하자마자 모반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을 것이 뻔하였다.[39] 사마준은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인 자신의 동향 친구를 눈감고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손삭에게 귀띔하길, 조정에서는 비밀리에 군사를 파견해 석포를 토벌하려 하나, "화를 없애야 한다."[40]라고 하였다. 즉, 군사를 집결시키고 있지만 단순한 제스처일 뿐이지, 석포를 정말로 무찌를 생각은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41]
그 말을 듣고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된 손삭은 곧장 석포한테 갔고, 석포에게 조정에서 토벌군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수춘을 나와도 죽지는 않을 것이니 병사를 풀고 도정에 걸어가 죄상을 알리도록 권하자 석포는 이를 따랐다. 사실 석포에게 다른 마음이 없더라도 죄를 인정하면 죽음이라는 상황에 몰렸었다면 만에 하나 살아남기 위해 석포가 거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준과 손삭의 기지로 석포가 군권을 내려놓고 수춘을 나오니, 사마염이 이 소식을 듣고 의심을 풀어 석포의 병권만을 빼앗고 낙릉공(樂陵公)의 신분으로 집에 돌아가게 했다.
이로써 석포를 실추시켜 그의 반란을 유도하려는 정봉의 계략은 실패했다. 하지만 정봉의 합비공략은 계략의 성패와 상관없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작피(芍陂)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그런데 정봉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사마준의 존재였다. 분명 허창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마준이 이미 수춘으로 출발했던 사마망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정봉의 공격 루트를 미리 예측이라도 했는지, 작피를 공격한 오나라의 군대를 격퇴하여 합비에서 정봉, 제갈정의 침공을 막아 냈다. 그러자 기껏 준비한 일을 모두 그르치고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정봉은 곧 철수하였다. 이렇게 사마준은 속전속결로 국난을 타개하였다.
이 짧은 순간에 사마준이 이룩한 공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오나라의 백전노장 정봉이 꾸민 흉계로 사마염과 석포가 그대로 놀아난 그사이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질 뻔했으나, 사마준은 간단한 조언을 손삭에게 전해서 이를 사전에 차단했다. 그리고 수춘의 지휘 공백이 생긴 상황에 뒤이어 덮친 정봉의 공세를 막으러 간 사람도 수춘을 토벌하러 먼저 출발한 사마망이 아닌, 허창을 지키고 있었던 사마준이며, 정봉의 공격 루트는 또 어찌 알았는지, 사마준은 수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작피로 향해서 오나라 군을 요격했다. 이처럼 오나라 군의 침략을 사마준이 노련한 대응으로 깔끔하게 막아내자, 종실의 공적이 필요했던 사마염은 물론이요, 서진 조정도 그의 신예답지 않은 활약에 일제히 주목하니, 이는 나중에 이민족이 일으킨 반란 진압에 그가 투입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서진 태시 5년.[42] 오나라 군의 공격을 깔끔하게 막아낸 사마준은 뛰어난 군공을 인정받아, 마침 군권을 포기하고 조정으로 간 석포를 대신해서 사지절, 도독양주제군사 자리를 이어받으며 수춘을 지키며 양양(襄陽)의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 양호, 임치(臨淄)의 도독청주제군사(都督靑州諸軍事) 위관(衛瓘), 하비의 도독서주제군사 사마주와 함께 대오전선(對吳戰線)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윽고 사마준은 다시 도독예주제군사로 복귀해 수춘에서 임지를 옮겨 허창을 진수했다.
2.4. 독발수기능의 난
동년. 서진은 관농(關隴) 지방의 옹•량주 일부를 떼어내 진주(秦州)라는 주를 신설했다. 이곳에는 과거부터 선비족(鮮卑族)[43] 사람들이 관중의 주민들과 섞여 살았었다. 일찍이 조위 시절, 등애(鄧艾)가 선비족의 투항자 수만 명을 옹주와 량주 사이에 살게 하였었는데, 시간이 지나 촉한(蜀漢)이 멸망하였고, 얼마 안 가 조위의 황제가 사마염에게 선양해서 서진이 들어섰다. 때문에 사마염은 위•촉 최전선에서 행해지던 둔전(屯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폐지를 결정, 대신 점전(占田)•과전(科田)제를 실시하여 유목민족이던 선비족들에게 강제로 농사를 시켜 조세를 바치도록 했다. 당연히 선비족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우려하여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호열(胡烈)이 그쪽 지방에 밝기에 안심하고 그를 진주자사로 부임시켰다.[44]서진 태시 6년 7월.[45] 호열이 진주자사에 부임한 지 1년이 채 지나서, 진주 일대에서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 호열이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려 나섰고, 만곡퇴(万斛堆)(오늘날의 감숙성 고란현)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하지만, 오히려 호열이 수세에 몰렸고, 호열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도독옹량이주제군사 사마량이 호열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사마량의 명을 받고 호열을 지원하러 온 유기(劉旂)가 군을 이끌고 가다가 독발수기능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 나와 호열을 도와주러 가지 않았다. 유기가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한 채 멀찍이 머물러 앉아 호열이 다시 패하는 것을 그저 관망하니 결국 호열은 버티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동시에 금산(金山)을 침공, 량주자사 소유(蘇愉)를 금산에서 패사시켰다.[46]
이 일로, 호열과 소유의 구원에 실패한 유기는 참형(斬刑)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사마량은 유기를 통제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허물이 나온 것이니 책임을 대신 지겠다며, 그의 죽음을 면해달라고 하였다. 유기는 죽음을 면하고, 그 대신 평서장군으로 강등될 뻔 했던 사마량은 아예 면직되면서 작위도 잃었다. 이렇게 호열이 죽고 사마량이 파면된 상태에서 진주, 량주 등이 무너지자 이번에는 안서장군, 도독진주제군사로 석감(石鑒)이, 안서군사, 진주자사로 두예가 토벌군으로 부임했다. 석감은 평판이 훌륭했고, 두예는 군을 지휘하는 것이 능했다. 때문에 서진 조정은 이 둘의 조합을 믿고 토벌을 보냈으나, 석감과 두예는 진압 작전에 대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곧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결국 석감이 두예를 모함해서 날려버리며 자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독발수기능을 공격했는데, 오히려 대패하고 목숨만 건진 채 퇴각하였다. 이렇게 석감마저 독발수기능 토벌에 실패하자 그제야 서진 조정은 일이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서진 태시 6년 7월 정미(丁未).[47] 사마염은 대오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던 예주의 사마준을 급히 빼내어 그에게 서방의 이민족 반란 토벌을 명하였다. 조정은 면직된 사마량을 대신해 사마준을 관중에 진수시키고, 곤면시중(袞冕侍中)의 옷 등을 더한 다음 진서대장군, 사지절, 도독옹량등주제군사(都督雍涼等州諸軍事)[48]로 옮겨 옹주, 량주의 모든 군사를 총괄시켰다. 한편, 그러면서 청주의 위관을 유주(幽州)로 배치해 동쪽의 이민족 방면을 맡기기도 하였다.[49] 이 기간 동안 사마준은 선정을 베풀어 부하를 좋게 어루만져 거느려 위엄과 은혜가 있었고 농사, 양잠을 권해서 노역을 함께 했으며, 사졸들과 고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관리, 병사 등도 사인과 같이 밭 열 이랑을 가지런히 갈게 했는데, 이를 모두 갖추자, 겉으로 소문이 퍼졌다. 이에 사마염이 진나라의 주, 현들에 조서를 내려 사람을 보내 관리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했다.
서진 태시 7년.[50] 첫 1년 동안은 사마준이 독발수기능과 대치하며 전선을 소강상태로 끌어냈고, 량주자사로 견홍(牽弘)이 합류하였다.[51] 이후 관중 지역의 기근과 더불어 독발수기능이 금성(金城)을 침공하자 견홍은 패기있게 독발수기능과 격돌하였으나 도리어 패퇴하고 금성의 후방인 청산(青山)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간을 보며 아직 독발수기능에게 동조하지 않고 있던 여러 이민족이 견홍의 패배를 목격하고서는 우르르 반란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리되니, 금성에서 추격하는 독발수기능과 만곡퇴에서 호응하는 이민족들에게 견홍은 청산에서 앞뒤로 포위되었고, 조여오는 적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견홍의 전사로 사마준은 이민족들에게 진주와 옹주의 약탈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실 호열과 견홍의 기용을 두고 일찍이 진건(陳騫)이 우려를 표한 바 있었다. 진건은 사마염에게 간언하길, 호열과 견홍은 용기가 있으나 지모가 없어 스스로 쓸모 있다고 억지를 부리니 변방을 안정시킬 재목은 되지 못하고, 달리 좋은 사람을 찾아 교체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의 치욕이 될 거라고 하였다. 당시 견홍은 강동면 양주자사[52]를 역임하면서 상사였던 진건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었는데, 평소에 이를 알고 있던 사마염이 두 사람에 대한 진건의 언행을 두고 단순히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만을 품어서 일어난 장수간의 불화로 여겼다. 그 때문에 사마염은 일단 진건을 존중하여 견홍을 조정으로 불러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량주자사로 임명했을 정도로 진건의 의견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건은 사마염의 결정을 알고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탄식했다. 결국 진건의 말대로 호열과 견홍 이 두 사람은 변경을 지키던 중 이민족과 충돌하여 둘 다 전사하고, 이러한 난은 토벌 끝에 수년간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니, 그제서야 사마염도 이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어쨌든, 난의 조기 진압은 물 건너간 셈이 됐으며 결국 그 패전의 책임은 굴욕적이게도 견홍의 상관인 사마준이 지게 되었다.[53]
독발수기능이 난을 일으킨 이래, 앞서 보낸 서진의 최고 인재들이 1년 사이에 줄줄이 썰려 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사령관 후보로는 양호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그를 대오전선에서 빼 오면 서진의 대오전략은 붕괴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고민으로 사마염은 근심에 빠졌다. 그러자 시중(侍中) 임개(任愷)가 앞으로 나와 간언하길, 옹•량주의 관중 쪽을 바로 잡으려면 명망과 지략이 있는 중신(重臣)을 보내야 한다면서 가충(賈充)으로 하여금 사령관이 되도록 추천하였다. 물론 실상은 임개가 가충을 끔찍이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변방으로 보내어 중앙의 권력에서 멀어지게 해서 실각시킨 다음에 가충이 독발수기능과 싸우다 패하거나 죽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사마염이 상서령(尙書令)이던 가충을 사령관으로 발탁하여 도독옹량이주제군사로 임명하였고, 조정의 현량들은 기뻐하였다. 하지만 가충으로서는 난데없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내정을 다스리는 문관보고 갑자기 최전방에서 나가 싸우라고 하니 가충은 죽을 맛이었다. 임개가 꾸민 모략으로 생각지도 않던 반란 토벌을 떠맡게 된 것도 억울한 데다가, 밖으로 나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는 것도 자기 능력에서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가충 자신이 실권을 잃게 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파견을 회피하자니 황제의 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로 인해, 가충은 임개에게 깊은 한을 품었으나 이에 복종했다. 가충은 이를 우려하여 순욱(荀勗)에게 상담하자 순욱이 그 일환으로 가충의 딸 가남풍(賈南風)을 사마충(司馬衷)의 황후 후보로 내밀자는 제안하였다. 가충은 그 제안을 수락했고, 물밑 작업 끝에 마침내 혼인이 성사되자 가충은 황제와 사돈이 됐다는 조건으로 다시 중앙에 눌러앉아 진주, 옹•량주행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서진 태시 8년.[54] 낙양(洛陽)에 돌아와 있던 사마준은 결국 경질된 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가충의 파견이 취소되자, 다시 공석이 되어버린 사령관직에 복귀했다. 또한 량주자사에는 양흔(楊欣)이 임명되어 사마준의 새로운 파트너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사마준이 평로호군(平虜護軍) 문앙(文鴦)에게 명하여 옹•량주, 진주의 군사들을 감독하게 하니, 이로써 사마준은 양흔과 문앙이라는 A급과 S급 장수를 양옆에 낀 채로 독발수기능 토벌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55][56]
전임 담당자들인 호열, 석감, 견홍 등이 독발수기능을 얕보고 무작정 진압하려다가 패했던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던 사마준은 독발수기능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발수기능과의 직접 대결을 피했으며, 전번의 기근을 교훈 삼아 각지에 둔전을 설치하여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사마준은 방비를 철저히 하여 자잘한 이민족들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강족(羌族)의 수령 약라발능(若羅拔能)을 비롯하여 아직 독발수기능에게 확실히 편들지 않은 이민족들과 화친을 맺었다. 이 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독발수기능은 더 이상 세력 확장을 위한 탄력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약화했으며, 사실상 파탄이 났었던 관중의 기반 복구에 공헌했다.
서진 태시 10년.[57] 형주를 지키던 육항(陸抗)이 마침내 병으로 사망하였다. 오나라 군대의 중심축이 사라졌지만, 양호는 옹•량주에서 독발수기능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 등 뒤의 문제를 떠안고 긴장을 세우고 있는 오나라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마준이 옹•량주에 있는 동안 최소 1, 2년은 안정될 것으로 보였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옹•량주의 정세가 안정되고 나면 오나라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황제 손호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 말했는데, 그 말대로였다. 사마준은 이런 양호의 믿음대로 이민족들에 대한 본격적인 거센 반격에 나섰으며, 4년에 걸친 그의 공세에 독발수기능은 엄청난 피해를 보고 퇴각했다. 이때의 전공을 대강 정리해 보자면,
- 서진 태시 10년 8월.[58] 금성군(金城郡) 주위의 여러 군을 침공하여 노략질하던 오랑캐를 진서장군[59] 여음왕 사마준이 토벌하고 그 수령 걸문니(乞文泥)를 참수(斬首).
- 서진 함녕(咸寧) 원년 5월.[60] 강족 오랑캐들이 독발수기능 등에게 호응해 난을 일으키자, 여음왕 사마준은 대군을 보냈다. 전임자들과 다르게, 사마준은 도리어 독발수기능의 군사를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그의 본대 3,000여 명을 참수. 독발수기능은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고 휴전을 맺는다. 한편으로는 그의 연맹을 해체하기 위해 사마준은 다른 연맹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간다.
- 동년 6월. 여음왕 사마준은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마순(馬循)을 보내 배반한 선비족을 토벌해 그 수령(其渠帅)을 참수.
- 서진 함녕 2년 5월.[61] 진서대장군 여음왕 사마준이 북쪽의 오랑캐를 토벌해 그 수령 토돈(吐敦)을 참수.
- 동년 7월. 아라다(阿羅多)가 이끄는 선비족이 변방을 어지럽히자, 사마준은 서역무기교위 마순을 보내 변경을 침범한 오랑캐를 격파. 4,000명을 죽이고 9,000명의 포로를 사로잡으며 아라다의 항복을 받아냄.
- 동년 겨울 10월. 양호[62]와 사마준은 각각 정남대장군과 정서대장군으로 진급, 둘은 동시에 의동삼사[63]가 되었다. 또한 사마준의 기존 직책인 지절, 도독도 예전과 같이 하였다. 사마염은 사마준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 7,000명을 보내 량주 방위군과 교대하도록 명하였다.
- 서진 함녕 3년 3월.[64] 입지가 좁아진 독발수기능은 후탄발(侯彈勃)과 함께 둔전 하는 병사를 위협하였다. 그러자 사마준은 문앙을 시켜 옹•량주, 진주의 군사들을 전진배치하며 독발수기능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세력을 거꾸로 위협하니, 독발수기능은 바로 자신의 휘하에 있던 20부에 각각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도록 명한다. 그리고 이에 저항한 후탄발을 군문에 면박하자[65] 20부는 각각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낸다. 이듬해까지 그 여파가 이어졌으며, 독발수기능을 따르던 세력은 그에게 신뢰를 거두고 안정군(安定郡), 북지군(北地郡), 금성군 등지에서 길가라(吉軻羅), 후금다(侯金多), 열경(熱冏)등의 선비족들이 독발수기능을 등지고 서진에 항복하며 선비족 연맹은 와해하였다. 이때의 투항자 수만 무려 200,000여 명.
사실상 독발수기능의 몰락은 사마준 대에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함녕 2년 겨울 10월. 사마준이 서방 이민족들의 반란을 한참 토벌하던 시기에 오나라 정벌에 관한 얘기가 점차 나오기 시작했다. 사마준과 함께 사정장군, 의동삼사로 임명된 양호는 육항이 병으로 죽은 이래, 자신이 2년 전에 했던 예측대로 동오 황제 손호의 폭정은 더 심해졌고, 이에 따라 강동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다. 따라서 사마염에게 손오 정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탁지상서 두예와 중서령 장화(張華)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가 이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중에서도 가충과 순욱등이 독발수기능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에 대해 양호는 사마준이 옹•량주 방면 사령관으로 복귀한 이래 4년, 독발수기능의 세력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반론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자 사마염은 정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양호는 하늘이 주는 기회를 받지 않는다면서 한탄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사마준이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기도 전에, 문앙은 중앙으로 불러들여졌다.[66] 사마준 또한 8월 즈음에 사마염의 부름으로 조정에 입조하여 중앙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사마준이 10여 년 가까이 기반을 옹주에 두었기에 서진 조정에서는 사마량과 사마준의 봉국을 맞바꾸기로 결정하였다.[67]
서진 함녕 3년 8월 계해(癸亥).[68], 이날 조정은 종실 제후들의 대대적인 인사 이동을 실시하였다. 먼저 거평후(鉅平侯) 양호를 남성후에 책봉[69], 그리고서 사마염의 황자들인 사마위(司馬瑋), 사마윤(司馬允), 사마해(司馬該), 사마하(司馬遐) 이하 4명을 새로운 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기존 종실 제후 11명의 봉국을 교체하였다. 사마주, 사마륜, 사마보(司馬輔), 사마옹(司馬顒), 사마릉(司馬陵), 사마빈(司馬斌), 사마탐(司馬耽), 사마위(司馬威), 사마간(司馬柬), 사마량 그리고 사마준이 그 대상이었다. 사마준은 부풍왕에 진봉되어 정서대장군, 가절, 도독옹량이주제군사의 자리를 지켰다. 또한 옹•량주 국경 주변에 사는 또 다른 이민족집단 저족(氐族)의 호수가 사마준에게 증봉되었으며, 추가로 우보(羽葆)•고취(鼓吹)를 하사하였다.
서진 함녕 4년 6월 정미.[70] 아직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끝내버리지 못했을 때 일이었다. 당시 사마준의 부재로 량주자사 양흔이 혼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양흔이 가만 생각 해보니 이민족들의 세력은 이젠 약해져서 더 이상 독발수기능을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강족의 약라발능과의 화친을 일방적으로 끊었다. 이렇게 양흔이 강족과의 화합을 잃자, 마륭은 양흔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 말했다. 과연 마륭의 말한 대로, 양흔은 무위군(武威郡)에서 약라발능 등과 전투하였으나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양흔이 엉뚱하게 공격을 감행했다가 죽어버리자 졸지에 옹•량주의 진나라군은 리더를 잃었는데, 변방의 약소 군세로 몰락한 독발수기능은 그 틈을 타 끝내 재기에 성공했다.
서진 함녕 5년 정월 을축(乙丑).[71] 비어버린 량주를 독발수기능이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서진의 총병력 1/3에 달하는 량주 방위군 전원이 10,000명이 채 안 되는 독발수기능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투 불능이 된 것이었다. 심지어 량주는 위나라 시기부터 여러 이민족과 촉한의 위협을 지속해서 받았던 지역이지만 함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량주의 상실로 근심에 빠진 사마염은 탄식하며 신하들에게 량주를 되찾을 수 있는 자를 물었으나 아무도 답하지 못하였다. 그때 마륭이 나서자, 사마염은 기뻐하며 마륭을 무위태수로 삼고 옹•량주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동년 12월.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그를 참수하니 마침내 량주가 평정되었다. 이때 마륭에게 주어진 군사가 3천 명뿐이었는데, 정예병이라지만 고작 소수의 병력만으로 마륭은 반란 진압에 성공하였다. 남들이 그토록 쩔쩔매던 독발수기능을 고작 삼천의 병력으로 토벌한 마륭도 대단했지만, 선비족의 세력을 약화해서 그 독발수기능이 마륭에게 패할 정도로 몰락하는 실마리를 제공한 요인은 바로 사마준에게 있었으니, 그의 공도 또한 컸다.
2.5. 이민족 진압 이후
서진 함녕 6년.[72] 오나라 정벌에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충은 오나라 정벌을 반대[73]했었으나 반대의 명분이 되어줄 독발수기능이 끝내 토벌되었다. 장화가 다시 강력히 요청하자 마침내 사마염은 오나라를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가충은 황제의 명으로 대오전선의 대도독을 강제로 맡아야 했다.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대오 진나라군을 총괄하는 것은 오랫동안 오나라 정벌을 같이 외쳤던 장화와 두예가 맡았다. 10여 년 간 대오정벌을 준비하던 양호가 병으로 죽기 전 모든 작전 계획을 장화에게 인수인계했으며, 이 전략을 지휘할 사령관으로는 두예를 낙점하였다. 이후 오나라 정벌에 두예를 필두로 익주자사 왕준, 왕혼(王渾), 왕융(王戎), 호분(胡奮)[74], 낭야왕 사마주가 종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점은, 사마준 또한 오나라 정벌에 분명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지만 어째선지 오나라 정벌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사마준은 이미 대오전선에서 정봉의 군세를 격퇴한 경험과 더불어 독발수기능의 기세까지 꺾어 놓은 대활약을 했음에도 참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불명하다.
다만 추측을 해보자면, 일단 사마준은 280년 당시에도 도독옹량이주제군사로서 서북면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입장이라 이민족의 동향을 계속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곧바로 오나라 정벌까지 맡기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과거 조위 시절 대촉전선을 담당했던 하후연(夏侯淵), 장합(張郃), 곽회(郭淮)가 대오전선에 참전하지 않은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다른 점을 굳이 따지자면 있긴 있었다. 일단 그들이 상대한 촉한은 여전히 건재했던 반면, 사마준은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을 토벌해서 진압을 마무리했다는 것이다.[75] 그러니 서진 입장에서는 오나라를 상대로 최상의 전력을 발휘하기 위해 서쪽을 평정해 놓은 사마준을 잠시 대오전선으로 돌려서 투입해 봄 직한 것도 분명했다.[76]
하지만 사마준을 굳이 오나라 정벌에 참전시킨다 해도 정서대장군인 그가 대오전선의 사령관을 맡으면 맡았지 야전에서 일개 부대만 움직이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마염의 명으로 명목상 지휘관이 된 가충을 사마준이 제낄 리도 없었고, 결국 사마준은 대외적으로나마 가충의 부관으로서 참전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민족 토벌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해 왔던 가충이 강제로 대도독을 맡게 된 상황에 인제 와 전군을 통솔하는 막중한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리가 없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거기에다 더불어 직무 유기는 기본이요, 사사건건 딴죽만 걸어대며 사마준의 정벌전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77]
이러한 점들을 보면 요는 가충의 결재하에 사마준 본인이 오롯이 작전 계획과 지휘•전략을 구상해야 하며 거기에 더불어 이른 시일 내에 완성케 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 수 있냐는 말이 된다. 물론 이러한 점들을 다 감수하고 사마준의 주도하에 실제로 오나라 정벌을 성공시킨다면 북방의 적과 남방의 적을 평정한 사마준의 입지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명성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확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가정이 무색하게도 사마준에게 그런 번거로운 일을 맡길 일은 진작부터 없었다. 일단 사마준이 이민족 토벌을 멈추고 중앙으로 돌아왔던 때부터가 대오전선에서 손을 뗀 지 10년이나 넘은 시기였다. 그 기간에 대오전선 사령관이었던 양호가 이미 오나라 정벌 전략을 구상했을뿐더러, 양호가 병에 걸려 요양하고 있을 때 장화에게 자신의 전략을 전수한 후 후임으로는 두예를 직접 지명했다.[78]
그 말은즉슨, 이미 완성된 오나라 정벌의 작계와 지휘•전략에 사마준이 끼어들 껀덕지가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다 보니 오나라 정벌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은 사실상 두예란 건데,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준이 참전을 할 유일한 방도는 자처하여 종군하는 형식으로 군을 이끄는 것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이상해지는 것이, 두예는 이때 진남장군이었으므로 사마준보다 직급이 아래였다. 아무래도 하급자인 두예에게 사마준이 명령받는 모양새가 돼버리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억지들을 전부 감수하고 도독관중제군사 자리까지 내려놓으며 종군할 리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마준이 원하든 원치 않든 오나라 정벌에 참전하기에는 상당한 무리수가 뒤따른다.
서진 태강(太康)초.[79] 사마준은 표기장군으로 진급했고, 독발수기능은 이미 토벌되었지만, 개부•사지절•도독옹량등주제군사 직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옹•량주에서 선정을 베풀며 얻은 민심과 사마준이 다스리던 부풍군이 그 곳에 있기도 했으니 이민족 토벌을 완료했어도 아예 옹•량주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서진 태강 3년.[80] 태자 사마충(司馬衷)이 아닌 제왕(齊王) 사마유(司馬攸)가 후계자로 지명될 것을 염려한 순욱, 풍담(馮紞)은 사마염에게 건의하여 사마유를 대사마 겸 도독청주제군사로 임명해 청주로 쫓아내려 하였다. 이에 맞서 부풍왕 사마준은 제왕 사마유, 국공(國公) 왕혼, 왕혼의 아들이자 황제의 부마(駙馬) 왕제(王濟), 광록대부(光祿大夫) 이희(李憙), 중호군(中護軍) 양수(羊琇), 부마 진덕(甄德) 등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며 황제에게 뜻을 재고하기를 상주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81]
서진 태강 4년.[82] 결국 사마유는 청주로 보내지고 이를 반대했던 신하들은 오히려 사마염의 분노만 부채질한 꼴이 되었다. 부마인 왕제 등을 비롯하여 간언한 여러 인물이 좌천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유가 봉국에 부임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울분이 생긴 사마준은 결국 병을 얻었다.[83][84]
서진 태강 7년.[85] 흉노족(匈奴族)의 도대박(都大博)과 위사(萎莎) 등이 합하여 대략 100,000여 명에 이르는 각자의 부족을 이끌고 사마준에게로 와서 귀부하였다.
2.6. 사망
서진 태강 7년 9월 무인(戊寅).[86] 표기장군 부풍왕 사마준이 지병을 앓다가 끝내 훙서(薨逝)했다. 그 소식은 사마준의 봉지에 있는 관리와 백성들에게도 전해졌고, 서쪽 땅에서는 그의 죽음을 듣고 우는 자가 길에 가득했으며, 백성과 관리들은 사마준의 덕(德)을 찬양하고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는데, 만일 장로가 그것을 보면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후에 알려지는 역사를 보면 험한 꼴 보기 전에 적절히 잘 간 셈이다.사마준 사후 조정에서는 사마준을 대사마로 추증하였고 시중, 황월[87]이 더해졌다. 시호는 무(武)라고 하였다, 그의 후사는 사마준의 장남 사마창이 이어받아 부풍왕으로 봉해졌다. 또 다른 아들 사마흠은 형 사마창의 요청으로 식읍을 분봉받아 신야현공으로 봉해졌다.[88]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도 8명이 있었지만, 이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행적도 불명하다. 그리고 사마준이 관리했었던 관중은 그의 사촌 농서왕(隴西王) 사마태(司馬泰)가 이어받았다.
3. 평가
아버지 사마의와 큰형 사마사, 둘째 형 사마소에 비교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로 평가된다.[89] 출세도 형들인 사마량과 사마주보다 빠르기도 했으며, 사마준에 관련된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종실 제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0]
진서 열전(列傳) 38권(三八券) 열전제8(列傳第八) 선오왕 부풍무왕준전에 적혀있는 기록에 따르면 사마준은 일단 떡잎부터가 남달랐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인자한 성품과 더불어 문채에도 밝았고, 이를 보는 사람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여덟 살에는 산기상시가 되어 조위의 황제 조방에게 글을 강론했던 것으로 일찍이 문재(文才)를 드러냈었지만, 보병교위로 임관하여 차례대로 승진한 끝에 실무적으로 대오전선 방면을 담당하는 중임을 맡으며 무재(武才)에도 두각을 나타냈었다.
당시 대오전선을 책임지던 중책으로는 사마준을 포함해, 사마준의 동복형인 동완왕 사마주, 양호, 위관이 있었다. 이 중에 위관은 촉한멸망전에 참전한 이력과 더불어서 종회•강유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1등 공신이었다. 그리고 양호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이들에 비해 딱히 두드러진 전공이 없었던 사마준이 대오전선을 함께 책임졌다는 점에서 사마염이 사마준의 잠재력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마염의 종실 밀어주기로 인해 직위가 평탄하게 상승하는 등, 사마주, 사마준 형제에게도 특혜가 없지는 않았으나, 서진의 개국 이래 왕으로 책봉되어 군권을 얻고 관직에 진출한 종실의 인원은 27명이나 되었고, 그 후로도 몇몇 인원들이 추가로 꾸준히 관직에 진출했지만, 사마주와 사마준 형제만큼이나 출세를 빨리하거나 능력을 보여준 인물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두터운 신망을 받던 사마준만이 그 기대에 부응하였고, 전공에 있어서 종실 내에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사서에서 보여준 어릴적 일화를 제외하고 사마준의 활약을 처음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바로 석포 구명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과, 오나라 명장이자 전쟁터에서 50년을 구른 정봉의 합비 공세를 여유롭게 막아낸 것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사마준의 기량이 본격적으로 만개하게 된다.
이후 사마준이 이민족 토벌을 맡게 되었을 때는 전임자들이 독발수기능에게 처참히 깨진 이후였다. 사마준은 이를 반면교사 삼았고, 이민족들을 무작정 토벌하려 하기보다는 이이제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상대방이 방심할 때 빈틈을 노려 공격해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반란 세력을 약화시켰고, 동시에 둔전을 통해 진나라 군대의 전력을 다듬으면서 독발수기능의 반격에도 대비하였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사마준은 병법에 밝은 것은 물론이고, 실패를 겪으면 순순히 받아들인 후에 그 원인을 냉철히 분석할 줄 아는 인물이라 평가된다. 또한 사마준은 사마사의 죽음을 초래하고, 사마소와 여러 번 충돌했었다는 이유로 사마씨로부터 중용받지 못하던 문앙을 적극적으로 써먹었는데, 이를 보아 사마준이 인재를 등용할 때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고 능력에 주목하는, 그릇이 큰 인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가충등의 실권자들의 내부 암투로 인해 독발수기능 토벌이 오랫동안 늦춰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서진 조정에서 내세운 인재중, 그 강력한 독발수기능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건 사마준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입증된 셈이다.[91] 물론 이런 사마준에게 맥없이 당한 독발수기능이 마냥 호구인가 하면 또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사마준을 제외한 그 누구도 독발수기능에게 반격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마준이 진압에 나서게 되기 전, 진압, 진압 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진주자사 호열과 소유를 기점으로 사마량, 석감이 줄줄이 진압에 나섰으나 전부 실패했다.
- 두 번째. 다음 타자로 사마준과 견홍이 독발수기능 진압에 나섰지만, 사마준이 뭘 해보기도 전에 견홍이 이른 패배로 전사하였고, 사마준은 그 책임을 물어 경질되었다.
- 세 번째. 가충이 부담을 느껴 진압을 회피하고 다시 사마준에게로 기회가 오자 양흔, 문앙, 마순을 기용하여 재차 토벌에 나섰다. 사마준은 일련의 실패들을 따져보니 모두 상대의 기세에 말렸음을 간파, 이에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사마준은 자기만의 전략을 짜서 대응했고, 처음으로 독발수기능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양호는 사마준의 활약 덕분에 옹•량주가 안정화되었다고 판단, 약해진 오나라를 토벌하기로 결심하는 바탕이 되었다.
- 네 번째. 사마준이 선비족, 강족들을 포섭해 기껏 독발수기능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었지만, 사마준과 문앙이 조정에 불려 가 자리를 비우자, 양흔은 독단으로 강족과의 화친을 일방적으로 끊은 후 공격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되려 역습을 당해 죽고 말았다. 이렇게 양흔이 자충수를 두며 자멸한 사이에 그 틈을 타 독발수기능이 량주를 점거하며 다시 재기했다.[92]
즉, 이러한 전임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민족들의 기세에 말려들어 갔다는 거나[93], 실책을 저지르거나[94], 상관과 부하의 대립으로 일을 그르친 것[95]들이 있다. 하지만 사마준은 기세에 말려들지 않은 것을 물론이요, 실책을 저지르지도, 부하들과 대립하지도 않으며 기본을 지켰다.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독발수기능을 말 그대로 압살했다. 때문에 사마준의 전장장악능력은 물론, 그의 차분하고 성실한 태도도 높이 평가된다.
또한, 세설신어 덕행 편에 나온 일화로는 당시 서진의 명사 유보가 죄를 지어 도형에 처하면서 노역하고 있었는데, 사마준이 오백 필의 베로 대속시켜 풀어준 다음, 유보를 자신의 종사중랑으로 기용하자 사람들이 사마준의 미덕에 대해 칭찬하며 훌륭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마준은 부하를 좋게 어루만져 거느려 위엄과 은혜가 있었고, 뽕나무 농사를 감독할 때는 사졸(士卒)과 더불어 일을 나누었다는 일화와 그가 졸(卒)했을 때는 서쪽 땅에서 그의 죽음을 듣고 우는 자가 길에 가득했고, 사람들이 슬퍼하며 비석을 세웠다는 것만 봐도 인품 또한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헌왕 사마유의 좌천을 유일하게 반대한 종실 인물이었다. 평소 사마유의 인품과 명망을 알기에 사마준이 그를 지지[96]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사마염은 사마준의 간언을 듣지 않았고, 사마유는 그대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죽고 말았다. 이후 사마준은 별다른 행적 없이 울분으로 병사했다는 기록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사마준 또한 그 일로 사마염의 신뢰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목소리를 냈던 종실 인물은 결과적으로 사마준이 유일했다는 점에서 그의 강단과 소신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앞서 말했듯이 성격이 더러워서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손초, 혈통이 미천해서 귀족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했던 손삭, 집안이 가난하여 한량으로 살다가 죄를 지어 노역하던 유보, 자기 형을 죽게 만들었던 문앙, 자신의 조카이자 황제에게 밉보여 좌천당하게 생겼던 사마유까지 생각해봤을 때, 사마준은 사람의 배경을 안따지고 사람 자체만을 평가해서 마음에 들면 자기와 가까이 두거나 기용하여 한 치의 거짓없이 소신껏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사마준은 인품, 성실, 충효, 문무를 모두 겸비한 꽉 찬 육각형인데, 이를 어릴 적부터 실천해서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보통 초년에 출세하면 말년에 초라해지는 꼴이 많은데[97] 사마준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완벽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사마준의 활약은 지방을 통치하면서 이민족 토벌을 했던 게 주를 이루었고, 오나라 정벌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준은 등장하지도 못했는데,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에 언급이 되질 않는다.[98]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면모들을 보면 가히 특급 인재였다 할 수 있겠다.[99] 사마준이 사마염 사후까지 살아서 사마충의 후견 역할을 맡았으면 팔왕의 난이나 오호십육국시대 같은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건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지략이 돋보이는 군재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빠짐없는, 지장과 덕장의 면모를 두루 갖춘 서진의 명장이다. 이 점에서 굳이 다른 인물과 비교하자면, 연의에서 업적이 모조리 묻혀버렸지만, 정사에서는 뛰어난 명장이자 덕장이었던 주연과 전예가 그와 대응될 것이다.
4. 기타
서진 태시 6년(270년) 이래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이 진서대장군 도독옹량주등제군사(都督雍凉等州諸軍事)로 관중을 진수할 때, 사마 고평(高平, 연주 산양군 고평현)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 하남윤 형양현)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諸葛亮)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금성(金城)사람 곽충(郭沖)은 '제갈량의 임기응변과 지혜, 뛰어난 지략이 관중(管仲), 안영(晏嬰)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에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촉기」《蜀記》
금성(金城)사람 곽충(郭沖)은 '제갈량의 임기응변과 지혜, 뛰어난 지략이 관중(管仲), 안영(晏嬰)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에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촉기」《蜀記》
왕은이 편찬한 촉기에 곽충오사와 관련해서 사마준이 곽충의 말에 납득하는 모습이 나온다. 주 내용을 보자면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라는 자들은 제갈량에 대해 실제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비웃으며 떠들다가 곽충의 5가지 일화를 듣고도 감히 제갈량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못해 반박하지 못하고 더 이상 비웃지 못했다는 것. 곽충의 일화를 그저 옳다고 한 사마준 역시 제갈량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곽충삼사(郭沖三事)[100]를 인용하면서, 해당 일화의 배경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곽충이 상급자인 사마준을 상대로 발언하는 상황에 사마준의 아버지인 사마의가 조롱당한 일을 어떻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냐면서, 『촉기』가 허황된 일화를 기록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참고로 사마준은 사마의의 일곱째 아들이자 종실의 준걸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니 아버지 사마의의 일화를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 앞에서 부친이자 진나라의 추존 황제인 사마의를 비방하는 데다가 내용도 잘못된 말을 할 이유가 곽충에겐 전혀 없고 설령 말했다고 해도 사마준이 납득했을 리도 없다. 실제로 곽충오사는 1사를 제외하고는 자치통감에도 들지 못했다. 심지어 사마준은 부풍왕이라고 되어있지만 270년이면 아직 여음왕이었다. 그 때문에 왕은은 와전된 일화를 촉기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준은 석숭과도 한 가지 일화가 있었다. 과거 사마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던 석포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셋째아들인 낙릉공 석통이 부풍왕 사마준에게 거스르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대신들이 그 사안을 사마염에게 아뢰어 석통한테 엄벌을 내려달라 하였지만, 사마염은 석통을 사면해 주었다. 그러나 사면받은 이후 석숭이 궐에 찾아와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대신들은 석통에게 엄벌을 다시 내려달라 청하였다. 하여 석숭이 본인을 상소하며 말하길,
"신(臣)의 형은 선친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우대받았으며, 입•퇴궐할 때마다 정직하게 모든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겸허히 성심으로 봉양하였고, 이를 천명으로 받아들일 것임을 감안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부풍왕준(扶風王駿) 전하의 흔들리는 소문에 휘말려, 사예중승 등이 급하게 붓을 휘둘러 죄를 깊이 기록한 문서들을 적고 있으니, 그 내용은 심오하고 매우 복잡하여 고발 사례가 폐하의 귀로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소신들은 실로 불안해하며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부풍왕 전하와 전하의 가족은 명성이 특출나시며 권력의 중심에 위치하십니다. 그 내외에 있는 관료들은 명령에 따라 일을 실행하기에, 만약 어떤 악한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소신의 형이 불공평한 고발을 당한 이후로, 저희 형제는 조금이라도 말로 자기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다물어 침묵을 지킬 것이며, 처벌이 필요하다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옛 말에 이르길 '영화(榮華)는 순응과 일치에서 나오고, 고고(枯槁)는 거스름과 어긋남에서 생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참으로 생각되며, 오늘날에 이르러도 믿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따라 처단해야 하는 건 맞지만, 허위를 안고 억울한 비방을 품게 된 상황에 제 주장을 내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온 천하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지혜와 통찰력이 밝고 넓게 퍼져 선조의 공적과 덕목을 중히 여기시며, 소신들의 힘찬 노력과 의지를 철저히 살펴보십니다. 그러니 중앙에서 칙령을 내려 사료를 면밀히 살펴서, 죄를 명백히 규탄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신들의 몸을 가르고 머리를 부수어도, 아직은 상소를 올리기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당장 이번 달 14일에 형제들과 함께 궁전 문 앞으로 나아가, 폐하를 접견해 절을 하고 표를 통해서 감사의 뜻을 밝히려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저희의 간곡한 호소를 폐하께서는 듣고 계셨습니다."
"이달 20일에 갑작스럽게 난대(蘭台)의 제지 조치를 받았습니다. 소신들은 폐하께 용서를 받아 특별한 은혜를 얻게 되었지만, 특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신들은 두문불출하며 사과하지 않아 다시 고발당하는 수치를 겪었고, 이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신은 처음에 이를 듣고 놀랐으며 두려워서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고요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놀라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약 소신들이 권력을 따라 몰려간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의 곧은 지침을 따르기를 기대해 봐도, 그건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의 소질은 평범하고 짐을 맡아온 것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어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고발과 비난이 빈번히 더해지고 있었습니다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제 계획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뉘우치면서 친족을 섬기지 못해, 신 스스로 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천하의 사물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수소자》(隨巢子)에서 말하기를, 「明君之德,察情為上,察事次之」(명군지덕, 찰정위상, 찰사차지)라 하였습니다. 신의 마음에 품은 것은 성스러운 폐하의 뜻에 충실하며,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기를 겸허히 기다리겠습니다. 더 이상 말씀드릴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형의 허물을 대신 사과한 석숭은 사마염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시중•산기상시 등을 역임하면서 중용 받았다.
「진서」 석숭 열전
"신(臣)의 형은 선친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우대받았으며, 입•퇴궐할 때마다 정직하게 모든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겸허히 성심으로 봉양하였고, 이를 천명으로 받아들일 것임을 감안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부풍왕준(扶風王駿) 전하의 흔들리는 소문에 휘말려, 사예중승 등이 급하게 붓을 휘둘러 죄를 깊이 기록한 문서들을 적고 있으니, 그 내용은 심오하고 매우 복잡하여 고발 사례가 폐하의 귀로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소신들은 실로 불안해하며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부풍왕 전하와 전하의 가족은 명성이 특출나시며 권력의 중심에 위치하십니다. 그 내외에 있는 관료들은 명령에 따라 일을 실행하기에, 만약 어떤 악한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소신의 형이 불공평한 고발을 당한 이후로, 저희 형제는 조금이라도 말로 자기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다물어 침묵을 지킬 것이며, 처벌이 필요하다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옛 말에 이르길 '영화(榮華)는 순응과 일치에서 나오고, 고고(枯槁)는 거스름과 어긋남에서 생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참으로 생각되며, 오늘날에 이르러도 믿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따라 처단해야 하는 건 맞지만, 허위를 안고 억울한 비방을 품게 된 상황에 제 주장을 내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온 천하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지혜와 통찰력이 밝고 넓게 퍼져 선조의 공적과 덕목을 중히 여기시며, 소신들의 힘찬 노력과 의지를 철저히 살펴보십니다. 그러니 중앙에서 칙령을 내려 사료를 면밀히 살펴서, 죄를 명백히 규탄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신들의 몸을 가르고 머리를 부수어도, 아직은 상소를 올리기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당장 이번 달 14일에 형제들과 함께 궁전 문 앞으로 나아가, 폐하를 접견해 절을 하고 표를 통해서 감사의 뜻을 밝히려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저희의 간곡한 호소를 폐하께서는 듣고 계셨습니다."
"이달 20일에 갑작스럽게 난대(蘭台)의 제지 조치를 받았습니다. 소신들은 폐하께 용서를 받아 특별한 은혜를 얻게 되었지만, 특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신들은 두문불출하며 사과하지 않아 다시 고발당하는 수치를 겪었고, 이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신은 처음에 이를 듣고 놀랐으며 두려워서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고요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놀라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약 소신들이 권력을 따라 몰려간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의 곧은 지침을 따르기를 기대해 봐도, 그건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의 소질은 평범하고 짐을 맡아온 것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어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고발과 비난이 빈번히 더해지고 있었습니다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제 계획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뉘우치면서 친족을 섬기지 못해, 신 스스로 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천하의 사물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수소자》(隨巢子)에서 말하기를, 「明君之德,察情為上,察事次之」(명군지덕, 찰정위상, 찰사차지)라 하였습니다. 신의 마음에 품은 것은 성스러운 폐하의 뜻에 충실하며,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기를 겸허히 기다리겠습니다. 더 이상 말씀드릴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형의 허물을 대신 사과한 석숭은 사마염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시중•산기상시 등을 역임하면서 중용 받았다.
「진서」 석숭 열전
이것으로 보건대 당시 석통이 사마준에게 어떤 불충을 저질렀었고, 사마준이 이를 함구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석통을 비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기가 과거에 구명해 줬던 사람의 자식이 자신한테 대든 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거나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석통의 여론은 무척 안 좋았고 석숭이 눈치 없는 형 대신에 재빨리 엎드려 사죄하는 형식으로 일을 마무리하였다. 이 일로 기지를 발휘하여 형제의 변호를 잘한 석숭은 사마염의 신뢰도 얻었고, 이런 석통 형제를 용서한 사마염에게도 알려진 대로 관대한 성격을 여전히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아직 미등장. 사마씨 가문에 흔치 않은 호걸형 인물이기 때문에 나오면 충분히 인기가 있을 법하지만 아직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 일단 매력하고 통솔만은 80대 이상을 응당 받아야 하는 인물이기에 인물 부족에 시달리는 삼국지 후반부에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진삼국무쌍 시리즈에도 당연히 나오지 못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형들이 청의 엑소시스트으로 패러디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서 A 엔젤로 패러디됐다. 독발수기능의 난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사마의의 7남으로 여러모로 완벽한 능력자라고 서술되어 있다.
전투외편 8편에서 처음 등장. 석포가 의심을 받아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서 손삭이 대책을 물으러 찾아오자 싸울 필요가 없는 싸움은 피하라고 조언했다. 이후에는 작피로 공략을 들어온 정봉과 제갈정을 개발살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군사권을 포기한 석포 대신 도독양주제군사로서 수춘에 주둔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는 호열, 석감/두예 콤비가 전부 독발수기능의 난 제압에 실패하자 견홍과 함께 세 번째로 옹•량주에 보내졌다. 그러나 사마준이 뭘 해 보기도 전에 견홍이 싸우러 뛰쳐나갔다 죽어버리면서(...) 난의 조기 진압은 물 건너 가게 되었고, 사마준은 견홍의 상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그러나 이후 후임으로써 옹•량주로 향할 예정이었던 가충이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게 되면서 이번에는 양흔과 문앙 등을 데리고 다시 옹량이주 방면의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사마준 본인은 이를 하늘이 다시 준 기회로 여겨 이번엔 반드시 성공시킬 것임을 다짐하며 다시 옹•량주로 향했다. 사마준은 옹•량주에 도착한 뒤 독발수기능의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일찍이 호열, 석감, 견홍 모두 상대 페이스에 말리고 실패하며 그때마다 주변 이민족들이 독발수기능에게 가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으니 일단 독발수기능이 상대의 뻘짓에 편승하지 않고도 세력을 키울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고 생각하여 직접 대결을 피하고 둔전을 다시 시작해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사마준의 판단은 적중하여 독발수기능은 더 이상 세력 확장을 위한 탄력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대치 상태에서 몇 년의 세월이 쭉쭉 흘러갔다고 묘사됐다. 사마준은 자잘한 공격은 철저한 방비로 막아내고, 양흔 등을 시켜 아직 독발수기능의 편에 붙지 않은 이민족들과 화친을 맺었으며, 이에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해가 갈수록 힘이 떨어졌다고 언급되었다. 결국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독발수기능이 선제공격을 해 오자 문앙을 보내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박살 냈다. 이 승리로 인해 독발수기능 휘하의 이민족이 20만 명 가까이 투항했지만, 이 엄청난 대승리가 역으로 작용해 중앙에서는 독발수기능의 난을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겨 사마준을 다시 중앙으로 불렀으며, 결국 미처 난을 다 제압하기도 전에 중앙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1] 태화(太和) 6년생.[2] 빠르면 229년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정황상 232년으로 추정된다.[3] 음력 9월 29일이다.[4] 음력 12월 18일이다.[5] 음력 8월 21일이다.[6] 산기상시 겸직, 작위는 평양정후. 둔기교위까지 동일.[7] 가절(假節),도독회북제군사(都督淮北諸軍事) 겸직, 작위는 평양향후.[8] 도독예주제군사(都督豫州諸軍事) 겸직. 작위는 평수후.[9] 사지절, 도독양예주제군사 겸직, 작위는 동모후.[10] 사지절(使持節), 도독양예주제군사(都督揚豫州諸軍事) 겸직, 작위는 여음왕. 작위는 정서대장군까지 동일.[11] 사지절, 도독옹량이주제군사(都督雍凉二州诸军事) 겸직.[12] 사지절, 도독옹량이주제군사 겸직.[13] 개부, 사지절, 도독옹량이주제군사 겸직, 작위는 부풍왕.[14] 사후 추증.[15] 세설신어에 따르면 17남이라고 한다.[16] 지금의 산시 바오지 푸펑현.[17] 동복형 사마주와 같은 시호이다.[18] 부풍왕 직위를 이었고, 후에 순양왕(順陽王)에 봉해졌으나, 사마창은 아버지와 달리 성품이 포악하기에 그지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생에게는 우애가 있었는지 부풍왕에 봉해졌을 당시에 어린 소년이었던 사마흠에게도 식읍(食邑)을 분봉하길 원했다고 한다. 후에 사마창은 영가의 난에 휘말려 생사 불명.[19] 이 작은아들 사마흠이 팔왕의 난에 휘말리게 되는데, 신야현공으로 분봉을 받은 후 제왕 사마경(司馬冏)의 조왕 사마륜 토벌에 참여하여 신야군왕이 되었다. 이후로 이렇게 저렇게 줄타기하다가 장창(張昌)의 난 때 반란군에게 살해당한다. 또한 사마흠은 그의 형 사마창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성품을 지녔는데, 그의 폭정이 반란의 원인이었다.[20] 순욱(荀彧)의 아들로 그 역시 기이한 인재라고 평가받았다. 사마준과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인데, 이런 사람들이 토론을 벌였다는 점에서 사마준의 돋보이는 천재성과 순의의 꼰대 기질 없는 사람됨을 알 수 있다.[21] 사마준 열전에 그대로 적혀있는 말이었다. 이런 높은 평가는 종실중에서도 아버지 사마의, 조카 사마유를 제외하면 없다.[22] 그나마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나름 비중있게 다뤄지긴 했다.[23] 삼국지로 따지자면 후반부에 태어난 인물인 데다 오나라군을 한번 격퇴한 것 말고는 주로 활약한 무대가 마이너 취급받는 이민족 토벌이라서 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걸 고려해도 인지도가 너무 없다.[24] 그리고 진서 부풍무왕준 열전 자체는 내용이 그리 세세하지 않고, 타인의 열전이나 자치통감(資治通鑑), 태평어람(太平御覽), 동서진연의(東西晉演義) 등 다른 서적들을 참고해야 그나마 사마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25] 237 ~ 239년이다.[26] 239년.[27] 『진서』 38권 『부풍무왕준전』-
부풍무왕 사마준의 자는 자장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은혜로웠고, 오륙 세가 되었을 때는 능히 글을 써 소통하며 경서를 읽고 외울 수 있었기에 그를 본 이는 모두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해서도 청정한 뜻으로 도를 지켰기에 종실 가운데 제일의 준걸로 기대를 받았다. 위 경초중 평양정후에 봉해졌다. 제왕 조방이 황제로 세워졌을 때 사마준은 여덟 세였지만 산기상시가 되어 황제에게 글을 강론했다. (扶風武王駿,字子臧。幼聰惠,年五六歲能書疏,諷誦經籍,見者奇之。及長,清貞守道,宗室之中最為俊望,魏景初中,封平陽亭侯。齊王芳立,駿年八歲,為散騎常侍侍講焉。)
『태평어람』 224권 『진제공찬』(晋諸公贊)-
사마준은 다섯에서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쓰고 숫자를 셀 수 있었으며, 조방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마준은 여덟 살의 나이로 산기상시로 임명되어 상시 교육을 담당했다.(司馬駿五六歲能書數,魏王爲帝,駿八歲爲散騎常侍,常侍講。)
『태평어람』 248권 『진제공찬』-
부풍왕이 여덟 살일때 총명하고 어질고 시부를 잘지으니 내외종사촌 가운데서도 기이한 재능이었다. 이로써 위열조 조예가 제왕 조방의 문학으로 평가했다.(扶風王,年八歲,聰明善詩賦,中表奇之,魏烈祖以爲齊王芳文學。)[28] 이를 두고서 어떤 이는 조방이 사마준과 동갑이었기에 사마씨 입장에서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던 조위 황제를 조롱할 의도로 그랬다는 말이 있는데,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자기와 또래인 조방에게 글을 가르쳐준 사마준이 나이에 비해 명석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롱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인 것이 조방이 즉위할 즈음엔 조상과 사마의가 서로 협력한 상태였고, 사마씨가 권력을 잡게 된 고평릉 사변은 이로부터 10년 뒤였다. 따라서 이때만큼은 사마씨가 황제를 조롱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오히려 사마씨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일단 사마준이 사마씨 가문에서도 손꼽히는 기대주인 만큼 사마의는 아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찍부터 관직 생활을 시키고 싶었겠지만, 사마준이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아직은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조종하기 쉬운 어린 황태자가 이제 황제로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런 상황을 사마의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의 교육 담당을 사마준에게 맡기려 했고, 이를 사마의가 진지하게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어린아이가 황제를 가르쳤다는 사례는 역사를 통틀어 봐도 분명 흔치 않았는데, 아들과 마찬가지로 여덟 살에 불과한 조방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역사를 만들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조방과 똑같이 어리지만, 재능은 누구보다 출중한 사마준에게 그 기회가 왔으니, 사마의로서는 더더욱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사마준의 재능과 경력을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딱 맞게 조성된 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도 이참에 아들의 명성이 높아지면 본인한테 자랑거리가 생길뿐더러, 사마준의 입지를 미리 키울 수 있을 것이고, 사마씨 가문의 영향력 또한 이것으로 더 커지게 된다.[29] 동흥 전투 당시 사마준의 형인 사마소가 맡았던 직책이다. 준 사령관급 위치라고 하며 사마소 이후에는 진태, 진건, 노흠이 순차적으로 맡았다. 노흠과 사마준이 언제 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59년 당시에는 진건이 이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260년 이후임은 확실하다.[30] 264년.[31] 초년 시절 주위에서 받았던 높은 기대와는 다르게 사마준이 이 정도로 승진하는 데만 20여 년이 넘게 걸렸다. 물론 사마준이 맡은 직무에 성실히 임했기에 늦게라도 승진을 한 거였겠지만, 그러는 동안에 동흥 전투, 수춘삼반, 촉한멸망전이 벌어졌다. 사마준은 분명 군사적 업무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투들에 군대를 지휘했다거나, 종군했다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사마준이 33살이 될 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준이 보병•둔기교위를 맡는 동안 산기상시는 유지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보아 일단 조방의 치세 동안에는 궁중 안에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확실하다. 산기상시라는 업무 특성상 황제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대외 활동을 못 했을 것이고, 실제로 조방이 폐위되고 나서야 도독회북제군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초반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추측된다.[32] 사실 사마준은 따져 보자면 승진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8살 때부터 관직 생활을 해서 그렇지, 오히려 누구보다 승진이 빠른 게 바로 사마준이었다. 그의 형 사마소가 도독회북제군사를 역임했을 때 나이가 40살이었는데, 군재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은 사람이 바로 사마소였다. 그런 사마소보다 사마준이 오히려 10년 빨리 도독회북제군사를 달았으며, 그 시기에 동복형 사마주는 아직 둔기교위였다. 게다가 사마준의 이후 행보를 보면 사마준은 그 어떤 이들보다 빨리 승진 가도를 달렸다.[33] 양력 266년 2월 8일.[34] 이를 이봉취진(移封就鎭) 정책이라고 한다.[35] 이런 쾌속 승진은 다른 이들은 물론, 종실을 통틀어도 이 둘이 유일했다. 이 당시 그의 형 사마량이 수춘(壽春)에서 제갈탄(諸葛誕)을 칠 때 실수를 범하여 면직되었던 경험이 있었고, 사마간은 겨우 무군중랑장이었으며, 사마융과 사마륜은 관직을 맡았다는 기록이 없고, 그들과 동 세대의 종실 친척도 주, 준 형제의 절반만큼도 따라잡지 못하였다.[36] 268년.[37] 이는 수춘삼반의 영향도 컸다.[38] 사마준은 온현 출신이고 손삭은 회현 출신인데 두 곳이 하내군에 속하는지라 고향이 같았다.[39] 참고로 사마준이 석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마준 휘하에 있는 손초(孫楚)라는 자가 일찍이 석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손초는 곽혁(郭奕)과도 분쟁을 일으켜 사마염이 손초를 질책해 그는 한동안 관직을 떠났었으나 사마준은 예전부터 손초와 사이가 좋아 그를 다시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이런 기록을 보아 사마준과 석포와의 사이가 완만했을지 아니면 나빴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준이 누군가를 미워했다거나 사이가 안 좋았다는 기록도 없는 것을 보면 석포와도 관계가 나쁘진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단, 석포의 아들인 석통(石統)은 무슨 이유인지 사마준에게 대든 적은 있었다. 그것도 부친의 은인을 상대로 시전한 거라 파면당할 뻔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후술.[40] "無與禍."[41] 분명 손삭은 혈통이 미천하여 귀족 출신 동료들이 그와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사마준은 귀족 출신을 넘어서 아예 나라의 군권과 명예를 모두 쥐고 있었던 사마의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손삭을 먼저 알아보고 동향의 정으로 나랏일을 누설했다는 건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마준이 손삭의 출신이나 배경을 전혀 신경 안 쓰고 오랫동안 손삭과 친구로 지냈다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42] 269년.[43] 서량[101](西涼) 이민족집단 중 하나[44] 형주자사로 지내던 호열은 정봉의 합비 침공 당시, 이에 호응하여 강하를 침공한 시적(施積)을 물리치며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45] 270년.[46] 송서(宋書) 오행지(五行志)에 따르면 '태시 6년에 반란을 일으킨 적병들이 진주와 량주를 침입했고, 진주자사 호열과 량주자사 소유는 나란히 죽임을 당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으나, 진서 재기(載記)에서는 독발수기능이 량주를 침공하여 소유를 금산에서 패배시켰다고만 나오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47] 양력 270년 8월 27일.[48] 도독옹량이주제군사라고도 한다.[49] 이쪽에도 선비족 집단의 하나인 탁발부가 있었다.[50] 271년.[51] 사마준과 견홍, 둘 다 대오공략의 핵심이었으니, 이들의 대오전선 이탈은 차후 서진의 대오전략에 큰 차질을 빚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52] 흔히 서량이라고 불리는 양주가 아니라 강동에 있는 양주이다.[53] 사마준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경질이지만, 서진 종실의 기대주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도 없잖아 있다.[54] 272년.[55] 양흔은 촉한멸망전 당시 강유를 추격해 패주 시켰던 전적이 있으며, 문앙은 삼국지 후반부를 대표하는 맹장이다.[56] 문앙은 사마사를 간접적으로 죽게 만든 원수이기 때문에 제갈탄의 난때 위나라로 투항한 이후 15년 동안 사마씨에게 중용 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토사구팽할 목적으로 독발수기능 토벌에 기용했다고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다른 전투에 진작 기용했을 것이다. 사마준에게는 그런 계산 없이 순수히 실력만으로 그를 기용한 것으로 본다.[57] 274년.[58] 274년.[59] 진서대장군으로 임명된 후인데도 진서 무제기에서는 진서장군으로 기록 되어있다.[60] 275년.[61] 276년.[62] 4년 전, 손오의 서릉독(西陵督) 보천(步闡)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실패와 패전으로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었었다.[63] 대체로 공훈이 많은 원로대신에게 수여하는 1품계 직책.[64] 277년.[65] 얼굴에 두건을 쓰고 손을 뒤로 묶은 항복 표시.[66] 일설로는 사마씨의 원수인 문앙의 공적이 너무 높아질 것을 우려한 조치라고한다.[67] 사마량이 다스리는 부풍군은 옹주에 있고, 사마준이 다스리는 여음은 예주에 있었다.[68] 양력 277년 10월 5일.[69] 다만 양호가 이를 사양했다.[70] 양력 278년 7월 16일.[71] 양력 279년 1월 30일.[72] 280년.[73] 반대 이유로는 표면적으로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지만, 실상은 밖에 적을 두어야 안이 조용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점을 가충의 노린 것이다.[74] 호열의 형이다.[75] 독발수기능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양흔의 실책 덕분이지 그 트롤링만 아니었으면 량주점거는 없을 일이었다.[76] 다만 사마준의 부재로 이민족에게 량주점거를 당했던 것에 PTSD가 생긴 조정이 사마준을 도독관중제군사에 그대로 두어 이민족을 계속 감시하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긴 하다.[77] 물론 사마준은 종실 인원이라 가충이 대놓고 대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78] 사마준은 그 당시 옹•량주 등지에서 이민족들 때려잡느라 바빴으니, 양호는 사마준을 어차피 후임으로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79] 손오 멸망 이후 280년~286년.[80] 282년.[81] 진서 부풍무왕준 열전에서는 간략하게 사마유의 좌천을 반대했다고만 나오며, 동서진연의에서는 사마유 좌천에 반대한 인물이 자세하게 나온다.[82] 283년.[83] 여기서 한가지 짚어가야 할 점이 있다면, 종실중에서 사마유의 좌천에 반대 목소리를 낸 사람은 사마준이 유일했다는 것이다. 사마유야 어려서부터 총명해 할아버지 사마의가 그를 집안의 큰 그릇이라고 칭찬한 데다 커서도 재능이 뛰어났고 온화하며 명성이 자자했던 반면, 사마충은 아예 백치로 소문이 났다. 그러니 이 둘을 비교했을 때 서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마충이 아닌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는 게 종실과 사마염한테 현명한 선택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염은 사마유의 좌천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사마준이 표를 올려 사마염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는데, 이 행동이 과연 종실의 여론과 상관없이 독단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종실의 암묵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한 것인지는 다소 모호하나, 일단 전자에 무게가 실린다. 후계자 선정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실의 묵인하에 사마염이 사마충을 확고하게 후계자로 정한 것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왜냐하면 사마염은 종실에게 봉지와 군권을 줬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신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후계자 선정에 간섭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사마씨들이 후계자 선정에 작정하고 반발했다면 아무리 그 사마염이라도 결정을 재고하거나 철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지고도 반대 여론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결국엔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는 것에 대해서 사마씨 대부분이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설사 불만이 있다고 해도 여론에 짓눌려 이를 표출하지 않고 얌전히 수용했다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따라서 종실은 정치적 판단력을 상실한 집단이었고, 그게 아니라 한들 황제의 눈치만 보며 간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소신도 없었다. 왕혼같은 뛰어난 대신, 신하들이 아무리 좌천을 반대하고 권신을 견제하고 싶어도 그들은 힘이 없었고, 그들 대신에 권신 견제에 힘을 보태줘야 할 종실이 오히려 침묵 하에 사마염의 후계 선정을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 종실의 인물로서 유일하게 사마준만 사마유를 지지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84] 결과적으로 사마염이 사마충을 후계로 삼았다가 결국 화북이 갈가리 찢기고 관중과 파촉까지 잃은 후에 강남으로 쫓겨난 것을 생각한다면, 사마준의 판단이 옳았으며, 그가 상당한 정무감각과 소신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마준의 군권은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아서 만약에 종실이 황제의 결정에 반발했더라도 그들에게 위해가 가할 일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85] 286년.[86] 양력 286년 11월 2일, 음력으로는 9월 29일.[87] 노란 도끼[88] 나중에 사마흠은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줄타기 끝에 죽고 말았다. 사마창은 영가의 난 당시 실종되었다.[89] 사실 큰형과 둘째 형과는 아버지뻘, 아버지와는 할아버지뻘의 나이 차이다. 큰조카인 사마염하고 나이 차이가 고작 3살이니. 결국 사마준의 세대는 사마의의 손자 세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세 아들 모두 아버지 사마의 능력을 잘 물려받은 케이스이지만, 각각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준다. 사마사는 정치력, 사마소는 군사능력, 사마준은 인품이다.[90] 사마씨에서도 기이하다 여겼고, 위명제 조예도 자기 아들인 조방과 또래인 사마준을 높이 평가하였다.[91] 호열, 견홍, 석감은 독발수기능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해버렸다. 사마량은 호열을 구원하기 위해 유기를 파견했으나 유기가 독발수기능에 겁을 먹고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호열이 전사하였고 그 책임으로 면직되었다.[92] 호열, 견홍, 양흔은 촉한멸망전때 군공을 세웠던 나름 서진의 A급 베테랑 장수들이었음에도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삽질끝에 목숨을 잃었다. 석감의 경우, 병주자사를 역임하며 흉노족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 온 경력이 있었고, 같이 갔던 두예도 유주 출신이라 이민족 상대 경험이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둘의 의견 충돌로 한쪽을 날려 버리는 바람에 석감도 패배하며 진압에 실패했다.[93] 호열, 견홍, 석감, 소유[94] 사마량, 유기, 양흔[95] 석감, 두예[96] 흥미롭게도 사마준과 사마유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들 대로도 이어졌다. 사마준의 차남 신야왕 사마흠이 팔왕의 난 당시에 사마유의 삼남 사마경과 결탁했기 때문. 물론 그들도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97] 멀리 보면 공손찬, 제갈각등이 있고 동시대로는 사마염으로 예를 들 수 있다.[98] 그의 형 사마주는 오나라 정벌에 참전한 이력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긴 했다.[99]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준에게 빌빌 기던 이민족들은 사마준이 죽고 10여 년이 지난 영가의 난 시기에 서진을 말 그대로 먹어버렸다. 일단 사마준의 동생 사마융, 사마륜부터가 관중 지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100]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제갈량이 1만 병력으로 성을 지키던 중 사마의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제갈량의 허세에 속아 군을 물리자, 제갈량이 박장대소하며 사마의를 겁쟁이라 조롱했다는 내용이다. 배송지는 제갈량전에서 228년에 기산으로 출병하기 직전 대목에 이 일화를 인용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가정 전투 패전 직후 제갈량이 성문을 열어두고 문루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추격군을 이끄는 사마의를 물러나게 한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부풍무왕 사마준의 자는 자장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은혜로웠고, 오륙 세가 되었을 때는 능히 글을 써 소통하며 경서를 읽고 외울 수 있었기에 그를 본 이는 모두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해서도 청정한 뜻으로 도를 지켰기에 종실 가운데 제일의 준걸로 기대를 받았다. 위 경초중 평양정후에 봉해졌다. 제왕 조방이 황제로 세워졌을 때 사마준은 여덟 세였지만 산기상시가 되어 황제에게 글을 강론했다. (扶風武王駿,字子臧。幼聰惠,年五六歲能書疏,諷誦經籍,見者奇之。及長,清貞守道,宗室之中最為俊望,魏景初中,封平陽亭侯。齊王芳立,駿年八歲,為散騎常侍侍講焉。)
『태평어람』 224권 『진제공찬』(晋諸公贊)-
사마준은 다섯에서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쓰고 숫자를 셀 수 있었으며, 조방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마준은 여덟 살의 나이로 산기상시로 임명되어 상시 교육을 담당했다.(司馬駿五六歲能書數,魏王爲帝,駿八歲爲散騎常侍,常侍講。)
『태평어람』 248권 『진제공찬』-
부풍왕이 여덟 살일때 총명하고 어질고 시부를 잘지으니 내외종사촌 가운데서도 기이한 재능이었다. 이로써 위열조 조예가 제왕 조방의 문학으로 평가했다.(扶風王,年八歲,聰明善詩賦,中表奇之,魏烈祖以爲齊王芳文學。)[28] 이를 두고서 어떤 이는 조방이 사마준과 동갑이었기에 사마씨 입장에서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던 조위 황제를 조롱할 의도로 그랬다는 말이 있는데,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자기와 또래인 조방에게 글을 가르쳐준 사마준이 나이에 비해 명석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롱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인 것이 조방이 즉위할 즈음엔 조상과 사마의가 서로 협력한 상태였고, 사마씨가 권력을 잡게 된 고평릉 사변은 이로부터 10년 뒤였다. 따라서 이때만큼은 사마씨가 황제를 조롱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오히려 사마씨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일단 사마준이 사마씨 가문에서도 손꼽히는 기대주인 만큼 사마의는 아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찍부터 관직 생활을 시키고 싶었겠지만, 사마준이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아직은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조종하기 쉬운 어린 황태자가 이제 황제로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런 상황을 사마의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의 교육 담당을 사마준에게 맡기려 했고, 이를 사마의가 진지하게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어린아이가 황제를 가르쳤다는 사례는 역사를 통틀어 봐도 분명 흔치 않았는데, 아들과 마찬가지로 여덟 살에 불과한 조방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역사를 만들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조방과 똑같이 어리지만, 재능은 누구보다 출중한 사마준에게 그 기회가 왔으니, 사마의로서는 더더욱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사마준의 재능과 경력을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딱 맞게 조성된 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도 이참에 아들의 명성이 높아지면 본인한테 자랑거리가 생길뿐더러, 사마준의 입지를 미리 키울 수 있을 것이고, 사마씨 가문의 영향력 또한 이것으로 더 커지게 된다.[29] 동흥 전투 당시 사마준의 형인 사마소가 맡았던 직책이다. 준 사령관급 위치라고 하며 사마소 이후에는 진태, 진건, 노흠이 순차적으로 맡았다. 노흠과 사마준이 언제 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59년 당시에는 진건이 이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260년 이후임은 확실하다.[30] 264년.[31] 초년 시절 주위에서 받았던 높은 기대와는 다르게 사마준이 이 정도로 승진하는 데만 20여 년이 넘게 걸렸다. 물론 사마준이 맡은 직무에 성실히 임했기에 늦게라도 승진을 한 거였겠지만, 그러는 동안에 동흥 전투, 수춘삼반, 촉한멸망전이 벌어졌다. 사마준은 분명 군사적 업무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투들에 군대를 지휘했다거나, 종군했다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사마준이 33살이 될 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준이 보병•둔기교위를 맡는 동안 산기상시는 유지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보아 일단 조방의 치세 동안에는 궁중 안에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확실하다. 산기상시라는 업무 특성상 황제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대외 활동을 못 했을 것이고, 실제로 조방이 폐위되고 나서야 도독회북제군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초반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추측된다.[32] 사실 사마준은 따져 보자면 승진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8살 때부터 관직 생활을 해서 그렇지, 오히려 누구보다 승진이 빠른 게 바로 사마준이었다. 그의 형 사마소가 도독회북제군사를 역임했을 때 나이가 40살이었는데, 군재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은 사람이 바로 사마소였다. 그런 사마소보다 사마준이 오히려 10년 빨리 도독회북제군사를 달았으며, 그 시기에 동복형 사마주는 아직 둔기교위였다. 게다가 사마준의 이후 행보를 보면 사마준은 그 어떤 이들보다 빨리 승진 가도를 달렸다.[33] 양력 266년 2월 8일.[34] 이를 이봉취진(移封就鎭) 정책이라고 한다.[35] 이런 쾌속 승진은 다른 이들은 물론, 종실을 통틀어도 이 둘이 유일했다. 이 당시 그의 형 사마량이 수춘(壽春)에서 제갈탄(諸葛誕)을 칠 때 실수를 범하여 면직되었던 경험이 있었고, 사마간은 겨우 무군중랑장이었으며, 사마융과 사마륜은 관직을 맡았다는 기록이 없고, 그들과 동 세대의 종실 친척도 주, 준 형제의 절반만큼도 따라잡지 못하였다.[36] 268년.[37] 이는 수춘삼반의 영향도 컸다.[38] 사마준은 온현 출신이고 손삭은 회현 출신인데 두 곳이 하내군에 속하는지라 고향이 같았다.[39] 참고로 사마준이 석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마준 휘하에 있는 손초(孫楚)라는 자가 일찍이 석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손초는 곽혁(郭奕)과도 분쟁을 일으켜 사마염이 손초를 질책해 그는 한동안 관직을 떠났었으나 사마준은 예전부터 손초와 사이가 좋아 그를 다시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이런 기록을 보아 사마준과 석포와의 사이가 완만했을지 아니면 나빴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준이 누군가를 미워했다거나 사이가 안 좋았다는 기록도 없는 것을 보면 석포와도 관계가 나쁘진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단, 석포의 아들인 석통(石統)은 무슨 이유인지 사마준에게 대든 적은 있었다. 그것도 부친의 은인을 상대로 시전한 거라 파면당할 뻔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후술.[40] "無與禍."[41] 분명 손삭은 혈통이 미천하여 귀족 출신 동료들이 그와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사마준은 귀족 출신을 넘어서 아예 나라의 군권과 명예를 모두 쥐고 있었던 사마의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손삭을 먼저 알아보고 동향의 정으로 나랏일을 누설했다는 건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마준이 손삭의 출신이나 배경을 전혀 신경 안 쓰고 오랫동안 손삭과 친구로 지냈다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42] 269년.[43] 서량[101](西涼) 이민족집단 중 하나[44] 형주자사로 지내던 호열은 정봉의 합비 침공 당시, 이에 호응하여 강하를 침공한 시적(施積)을 물리치며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45] 270년.[46] 송서(宋書) 오행지(五行志)에 따르면 '태시 6년에 반란을 일으킨 적병들이 진주와 량주를 침입했고, 진주자사 호열과 량주자사 소유는 나란히 죽임을 당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으나, 진서 재기(載記)에서는 독발수기능이 량주를 침공하여 소유를 금산에서 패배시켰다고만 나오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47] 양력 270년 8월 27일.[48] 도독옹량이주제군사라고도 한다.[49] 이쪽에도 선비족 집단의 하나인 탁발부가 있었다.[50] 271년.[51] 사마준과 견홍, 둘 다 대오공략의 핵심이었으니, 이들의 대오전선 이탈은 차후 서진의 대오전략에 큰 차질을 빚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52] 흔히 서량이라고 불리는 양주가 아니라 강동에 있는 양주이다.[53] 사마준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경질이지만, 서진 종실의 기대주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도 없잖아 있다.[54] 272년.[55] 양흔은 촉한멸망전 당시 강유를 추격해 패주 시켰던 전적이 있으며, 문앙은 삼국지 후반부를 대표하는 맹장이다.[56] 문앙은 사마사를 간접적으로 죽게 만든 원수이기 때문에 제갈탄의 난때 위나라로 투항한 이후 15년 동안 사마씨에게 중용 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토사구팽할 목적으로 독발수기능 토벌에 기용했다고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다른 전투에 진작 기용했을 것이다. 사마준에게는 그런 계산 없이 순수히 실력만으로 그를 기용한 것으로 본다.[57] 274년.[58] 274년.[59] 진서대장군으로 임명된 후인데도 진서 무제기에서는 진서장군으로 기록 되어있다.[60] 275년.[61] 276년.[62] 4년 전, 손오의 서릉독(西陵督) 보천(步闡)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실패와 패전으로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었었다.[63] 대체로 공훈이 많은 원로대신에게 수여하는 1품계 직책.[64] 277년.[65] 얼굴에 두건을 쓰고 손을 뒤로 묶은 항복 표시.[66] 일설로는 사마씨의 원수인 문앙의 공적이 너무 높아질 것을 우려한 조치라고한다.[67] 사마량이 다스리는 부풍군은 옹주에 있고, 사마준이 다스리는 여음은 예주에 있었다.[68] 양력 277년 10월 5일.[69] 다만 양호가 이를 사양했다.[70] 양력 278년 7월 16일.[71] 양력 279년 1월 30일.[72] 280년.[73] 반대 이유로는 표면적으로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지만, 실상은 밖에 적을 두어야 안이 조용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점을 가충의 노린 것이다.[74] 호열의 형이다.[75] 독발수기능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양흔의 실책 덕분이지 그 트롤링만 아니었으면 량주점거는 없을 일이었다.[76] 다만 사마준의 부재로 이민족에게 량주점거를 당했던 것에 PTSD가 생긴 조정이 사마준을 도독관중제군사에 그대로 두어 이민족을 계속 감시하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긴 하다.[77] 물론 사마준은 종실 인원이라 가충이 대놓고 대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78] 사마준은 그 당시 옹•량주 등지에서 이민족들 때려잡느라 바빴으니, 양호는 사마준을 어차피 후임으로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79] 손오 멸망 이후 280년~286년.[80] 282년.[81] 진서 부풍무왕준 열전에서는 간략하게 사마유의 좌천을 반대했다고만 나오며, 동서진연의에서는 사마유 좌천에 반대한 인물이 자세하게 나온다.[82] 283년.[83] 여기서 한가지 짚어가야 할 점이 있다면, 종실중에서 사마유의 좌천에 반대 목소리를 낸 사람은 사마준이 유일했다는 것이다. 사마유야 어려서부터 총명해 할아버지 사마의가 그를 집안의 큰 그릇이라고 칭찬한 데다 커서도 재능이 뛰어났고 온화하며 명성이 자자했던 반면, 사마충은 아예 백치로 소문이 났다. 그러니 이 둘을 비교했을 때 서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마충이 아닌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는 게 종실과 사마염한테 현명한 선택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염은 사마유의 좌천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사마준이 표를 올려 사마염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는데, 이 행동이 과연 종실의 여론과 상관없이 독단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종실의 암묵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한 것인지는 다소 모호하나, 일단 전자에 무게가 실린다. 후계자 선정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실의 묵인하에 사마염이 사마충을 확고하게 후계자로 정한 것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왜냐하면 사마염은 종실에게 봉지와 군권을 줬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신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후계자 선정에 간섭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사마씨들이 후계자 선정에 작정하고 반발했다면 아무리 그 사마염이라도 결정을 재고하거나 철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지고도 반대 여론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결국엔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는 것에 대해서 사마씨 대부분이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설사 불만이 있다고 해도 여론에 짓눌려 이를 표출하지 않고 얌전히 수용했다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따라서 종실은 정치적 판단력을 상실한 집단이었고, 그게 아니라 한들 황제의 눈치만 보며 간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소신도 없었다. 왕혼같은 뛰어난 대신, 신하들이 아무리 좌천을 반대하고 권신을 견제하고 싶어도 그들은 힘이 없었고, 그들 대신에 권신 견제에 힘을 보태줘야 할 종실이 오히려 침묵 하에 사마염의 후계 선정을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 종실의 인물로서 유일하게 사마준만 사마유를 지지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84] 결과적으로 사마염이 사마충을 후계로 삼았다가 결국 화북이 갈가리 찢기고 관중과 파촉까지 잃은 후에 강남으로 쫓겨난 것을 생각한다면, 사마준의 판단이 옳았으며, 그가 상당한 정무감각과 소신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마준의 군권은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아서 만약에 종실이 황제의 결정에 반발했더라도 그들에게 위해가 가할 일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85] 286년.[86] 양력 286년 11월 2일, 음력으로는 9월 29일.[87] 노란 도끼[88] 나중에 사마흠은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줄타기 끝에 죽고 말았다. 사마창은 영가의 난 당시 실종되었다.[89] 사실 큰형과 둘째 형과는 아버지뻘, 아버지와는 할아버지뻘의 나이 차이다. 큰조카인 사마염하고 나이 차이가 고작 3살이니. 결국 사마준의 세대는 사마의의 손자 세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세 아들 모두 아버지 사마의 능력을 잘 물려받은 케이스이지만, 각각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준다. 사마사는 정치력, 사마소는 군사능력, 사마준은 인품이다.[90] 사마씨에서도 기이하다 여겼고, 위명제 조예도 자기 아들인 조방과 또래인 사마준을 높이 평가하였다.[91] 호열, 견홍, 석감은 독발수기능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해버렸다. 사마량은 호열을 구원하기 위해 유기를 파견했으나 유기가 독발수기능에 겁을 먹고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호열이 전사하였고 그 책임으로 면직되었다.[92] 호열, 견홍, 양흔은 촉한멸망전때 군공을 세웠던 나름 서진의 A급 베테랑 장수들이었음에도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삽질끝에 목숨을 잃었다. 석감의 경우, 병주자사를 역임하며 흉노족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 온 경력이 있었고, 같이 갔던 두예도 유주 출신이라 이민족 상대 경험이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둘의 의견 충돌로 한쪽을 날려 버리는 바람에 석감도 패배하며 진압에 실패했다.[93] 호열, 견홍, 석감, 소유[94] 사마량, 유기, 양흔[95] 석감, 두예[96] 흥미롭게도 사마준과 사마유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들 대로도 이어졌다. 사마준의 차남 신야왕 사마흠이 팔왕의 난 당시에 사마유의 삼남 사마경과 결탁했기 때문. 물론 그들도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97] 멀리 보면 공손찬, 제갈각등이 있고 동시대로는 사마염으로 예를 들 수 있다.[98] 그의 형 사마주는 오나라 정벌에 참전한 이력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긴 했다.[99]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준에게 빌빌 기던 이민족들은 사마준이 죽고 10여 년이 지난 영가의 난 시기에 서진을 말 그대로 먹어버렸다. 일단 사마준의 동생 사마융, 사마륜부터가 관중 지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100]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제갈량이 1만 병력으로 성을 지키던 중 사마의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제갈량의 허세에 속아 군을 물리자, 제갈량이 박장대소하며 사마의를 겁쟁이라 조롱했다는 내용이다. 배송지는 제갈량전에서 228년에 기산으로 출병하기 직전 대목에 이 일화를 인용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가정 전투 패전 직후 제갈량이 성문을 열어두고 문루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추격군을 이끄는 사마의를 물러나게 한 장면으로 각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