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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1:30:20

문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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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앙(文鴦)
文俶
문숙
작위(조위) 관내후(關內侯)
최종직위 조위장군
서진 가절(加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성씨 (文)
(俶)
차건(次騫)
아버지 문흠(文欽)
생몰연도 238년 ~ 291년
고향 예주(豫州) 초국(譙國) 초현(譙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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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서진의 장수로 는 차건(次騫).[1] 문흠의 아들, 문호의 형으로 예주 초국 초현 사람. 삼국지 후반부를 대표하는 맹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단편적인 사건만으로도 시대 최강의 맹장으로 꼽힐 만큼 재능은 뛰어난 인물이였지만, 여러 주군을 섬겼으면서도[2] 그의 재능을 펼쳐준 이가 없어서 더 대성하지 못 한 비운의 맹장이다.

본명은 문숙(文俶)이고, 문앙(文鴦)은 아명이다.[3] 하지만 사서에 거의 문앙이라고만 기록되었고 연의도 이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문숙이라는 이름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2. 정사 삼국지

2.1. 관구검의 난

진서》 <경제기>에 따르면 정원 2년(255년) 관구검문흠사마사에 대항해 수춘에서 반기를 들자 사마사는 연주자사로 있던 등애를 파견해 반란군을 막도록 시켰다. 등애는 거느린 군세가 약해 보이게 가장해 낙가성으로 유인해서 쳐부수려는 계책을 세웠고 사마사도 대군을 은밀히 낙가성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속은 문흠이 낙가성에 가보니 이미 사마사의 대군이 주둔한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문앙은 당시 나이가 18세로 아직 어렸으나 용력과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문앙이 아버지 문흠에게 말했다.
성에 올라 북을 쳐 기세를 돋우길 청합니다. 적군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때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관구검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따르면 이에 문흠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밤중에 양갈래로 공격했다. 문앙이 이끈 군사가 먼저 도착했고 문앙이 사마사를 큰 소리로 부르자 사마사군은 혼란에 빠졌다. 문앙은 북을 울려 병사들을 고무하며 세 번 연달아 공격한다.

이전에 사마사는 눈에 종기가 나서 의원에게 자신의 종기를 째게 했었는데 문앙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눈이 빠져 나왔다. 그러나 군사들이 두려워할까봐 옷으로 눈을 가리고 통증이 심해지자 이빨로 옷을 물어뜯으며 참아 주변인에게 이를 숨겼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에 늦은 문흠은 도착하지 못해서 싸움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날이 밝자 문앙이 물러났고 문흠 또한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문앙과 문흠이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자. 사마사는 문흠이 도망갈 것이라 말하며 장수들에게 정예병으로 이를 추격하도록 명했다. 여러 장수들은 문흠은 경험 많은 장수고 문앙은 어려도 날래고 용맹하며 병사를 이끌고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손해본 것도 없으니 도망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마사는 세 번째 북소리에 기세가 바닥나는 법이라는 춘추좌씨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문앙이 세 번 북을 울려도 문흠이 응전하지 못했으니 기세가 이미 꺾여 달아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흠은 달아나려고 했는데 문앙이 말했다.
먼저 그 기세를 꺾지 않으면 달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날랜 기병 10여 기를 데리고 적군의 선봉을 꺾고 진세를 무너뜨렸다. 문앙이 가는 곳마다 적군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 결국 퇴각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문앙이 다시 필마단기로 추격군의 수 천명의 기병 속으로 뛰어들어 단번에 100명을 죽이고 빠져나왔다. 문앙은 이와 같은 행동을 예닐곱 차례 반복하였고 추격하던 기병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고 한다.[4]

진서》 <경제기>에는 "사마사가 좌장사 사마련에게 날랜 기병 8천을 주어 문흠군의 옆을 추격하게 하고 장군 악침에게 하여금 보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끊게 하였고 문흠의 군대는 사양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 차례 군진이 무너졌고 노화살이 비가 오는 듯이 쏟아지자 문흠은 큰 방패로 몸을 가리고 달아났다. 문흠군이 대파되니 병사들은 모두 항복했고 문흠 부자와 휘하의 장수들은 달아나 항성을 지켰다. 문흠이 패배했다는 것을 들은 관구검은 무리를 버리고 밤에 회남으로 달아나다가 추격을 당하여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게 경제기만의 기록이라면 진서 특유의 문제상 의심할만도 한데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에서도 똑같이 "(사마) 대장군이 효기(驍騎)[5]를 풀어 추격하여 그를 대파하였고 문흠은 달아났다. 이 날 관구검은 문흠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밤중에 달아나고 무리가 붕괴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즉, 사마사가 보낸 기병이 한창 문흠군을 철저히 측면에서부터 개박살내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에 문앙 혼자서 목숨걸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죽어라 분투했던 상황인 것인데, 전장터의 혼란 상황에서 위군의 기병이 문흠군의 후열을 박살내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로 들어가서 혼란한 틈을 타고 이같이 수백명 격파에 성공했다. 도주하던 와중에 이렇게 혼자서 분투하면서 기병 수백명을 박살냈고 전술적인 식견도 있었던 것이 보이니만큼, 당시 문앙이 어린나이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좋은 주군을 만났다면 충분히 명장으로 대성했을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문앙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문흠군은 위군에게 대패했고 문흠 부자는 항성에서 결국 오나라로 달아나 손준에게 망명했다. 관구검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병세가 위독해진 사마사는 얼마 후 죽었다.

2.2. 제갈탄의 난

감로 2년(257년), 정동장군 제갈탄사마소에 대항해 반기를 들고 오의 손침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문흠 부자는 응원군으로 참가했다.

<제갈탄전>에 따르면 문흠은 평소 제갈탄과 사이가 나빴을 뿐만 아니라 전략의 견해 차이로 인해 제갈탄에게 죽임을 당했다. 문흠의 아들인 문앙과 문호 형제는 병사들을 작은 성 속에 주둔시켰는데 문앙 형제는 아버지 문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강제로 군사들을 진군시키려고 했지만 병사들은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문앙과 문호는 단독으로 도주하고 성벽을 넘어서 사마소에게 귀순했다. 주변에서 그들을 죽이라고 했으나 사마소는 문흠의 죄가 커서 그의 아들도 죽여야 하겠지만 문앙과 문호는 달아날 수 없어 귀순한 것인데 만약 그들을 죽이면 지금 공략되지 않은 수춘성이 굳은 마음으로 지킬 것이라고 했다.[6] 사마소는 문앙과 문호를 사면하고 그들에게 수백 명의 병사와 기마를 이끌고 성을 순찰하면서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문흠의 아들조차도 살해되지 않았는데,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시오?
또한 사마소는 표를 올려 문앙과 문호를 장군으로 삼게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사마소군은 제갈탄군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문앙과 문호에게 수레와 소를 주어, 문흠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조상의 묘까지 옮겨 장례를 지내도록 했다.

2.3. 독발수기능의 난

문앙은 서진에서 평로호군이 되었다. 태시 6년(270년), 서북방의 선비족 독발수기능이 난을 일으킨다.

<사마준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준은 평로호군 문앙에게 명하여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들을 감독하게 하고 독발수기능을 격파하니 이때 이민족 20만 명이 항복하였다.

2.4. 죽음

<제갈탄전>에 주석으로 달린 《진제공찬》에 따르면 양주에서 이민족을 격파하여 명성을 얻은 문앙은 태강 연간(280년 ~ 289년)에 동이교위가 되고 가절을 받았다. 그 직무를 맡게 되자 사마염에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사마염은 문앙을 보고 싫어해서 다른 일을 빌어 문앙의 관직을 빼앗았다.

사마염이 어떠한 이유로 문앙을 싫어했는지는 불명이지만 삼촌인 사마사의 죽음을 초래하고, 아버지인 사마소와 여러 번 충돌했던지라 원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인정상 이해못할 일도 아닌셈. 다만 이러한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아군 진영으로 항복해 온 장수인데다가 이미 아버지 사마소 대에 사면을 받았고 나름대로 제갈탄 토벌의 공신인 것을 감안했는지 사마염이 문앙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마요전>에 따르면 제갈탄의 외손자 사마요는 문앙이 자신의 어머니인 제갈태비의 일족에게 복수를 할까 봐 근심했다. 291년가남풍양준 일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문앙은 사마요에게 양준 일파로 몰려 삼족이 멸족을 당했다.

3. 삼국지연의

8척 장신의 소년 장군이자 동편과 창의 명수로 그려지고 있으며 심지어 그를 조운과 견준 시[7]까지 창작되어 실렸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에게 얼마나 버프가 들어갔는지를 감안하면 후반기+위나라 인물치고는 엄청나게 고평가를 해준 셈.

혼자서 위군을 상대로 무쌍을 벌여 사마사의 병세를 악화시킨 장면과 문흠 사망 후 사마소에게 항복해 제갈탄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장면도 그대로 나왔다. 다만 또다른 문앙의 주요 전공인 독발수기능 토벌은 해당 파트 자체가 연의에서 생략되었고 문앙의 사망은 삼국통일 이후 시점이라 연의에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갈탄의 난 이후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단신으로 사마사의 추격병을 격퇴할 때[8], "쥐 같은 놈들이 어찌 목숨을 아끼지 않느냐!"라는 대사를 내뱉었는데, 후반부 인물이라서 쉽게 묻히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삼국지의 멋진 대사 중 하나로 꼽힌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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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파일:조조전 온라인 문앙.png
병종은 경기병. 성우는 정성훈. 문앙전 연의의 주인공으로 실제 행적대로 일당백의 무쌍을 보인다.

연의 이외의 컨텐츠에서는 일격필살과 인도공격, 피해범위확장 특성으로 적진을 쓸어버리는 컨셉으로 한때는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오버밸런스 장수와 병종이 많아지면서 메타에서 뒤처진 케이스.

4.3. 삼국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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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진삼국무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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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킹덤 스토리

문앙
파일:문앙.png
자세한건 킹덤 스토리/위나라참고

4.6. 반삼국지

문앙이 한 때 사마의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점에 착안해서, 결국 촉에 합류한다. 제갈량도 죽은 다음에 태어난 문앙이 어떻게 유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시공을 달리는 소설. 영웅집결 본문에서는 촉이 주인공 보정을 강하게 받는지라 문앙 역시 맹활약하게 된다.

[1] 출처: 태평어람 인용 진기.[2] 관구검, 손침, 제갈탄, 사마소, 사마염을 섬겼다.[3] 출처: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주석 위씨춘추.[4] 동네 유력자가 긁어모은 깡패나 도적떼 수준이던 삼국지 초반부 병사들과 달리 후반부 병사들은 엄연한 관군, 즉 한 나라에서 정식으로 양성된 군대이다. 훈련 좀 시킨 도적떼에 불과한 청주병이 나 정예병이오 하고 다니던 초반부의 오합지졸에 비해 훈련도던 편제던 장비던 간에 꽤 정예해져서 상당히 전투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초반부처럼 개인 무력이 뛰어난 용장들이 무쌍 찍으면서 날뛰기 힘들어진 환경. 그런데 이놈은 삼국지 최후반부에 관군 상대로 이 짓을 한 거다.[5] '용맹한 기병'이라는 뜻이다.[6]삼국지연의》에서는 반대로 사마소가 문앙을 죽일 생각을 품었다가 종회의 귀띔으로 문앙을 용서하고 벼슬을 주어 수춘성 주변을 돌게 한다.[7] 조운의 재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장판파에서 조운이 명성을 떨쳤고 오늘날 낙가성에서는 문앙이 용맹을 보였다'정도의 내용이다.[8] 심지어 이때 문앙은 홀몸, 상대는 수백 명이었다. 처음에 한 번 격퇴당했지만 한 명에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다시 덤볐고, 이에 문앙이 아래 대사를 내뱉으며 또다시 무쌍을 찍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