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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8:02:56

사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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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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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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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5b6><colcolor=#800080>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min-height: 28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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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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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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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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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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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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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2]사마랑창무정후하간평왕[3]의양왕
장무왕
의양성왕[4]하간평왕[5]
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세종 경황제[추존]제헌왕[8]동래왕[9]
북해왕[10]
제무민왕
태조 문황제[추존]세조 무황제(초)비릉도왕[12]
효혜황제(2)민회태자
진헌왕진왕[13]
효민황제(4)[14][15]
성양회왕
성양상왕
초은왕
동해충왕
시평애왕
회남충장왕진왕[16]
한왕
신도회왕
청하강왕[17]
장사려왕
성도왕화용왕[18]
오효왕효민황제[19]
발해상왕[20]
예장왕효회황제(3)[21]
대애왕
제헌왕[22]
성양애왕청하강왕[23]
요동도혜왕동래왕[24]화용왕[25]
광한상왕북해왕[26]
낙안평왕
연왕 기[27]
사마영조
낙평왕
여남문성왕[28]사마수
여남회왕
낭야무왕낭야공왕중종 원황제(5)[29]
무릉장왕
동안왕
회릉원왕
연왕 경연왕 기[30]
부풍무왕순양왕
신야장왕
평원왕
양효왕
조왕[31]
안평헌왕안평정왕남궁현왕[32]
안평왕 돈[33]
의양성왕[34]
태원성왕하비왕[35]
사마익남궁현왕안평왕 우[36]
하비헌왕하비왕
태원열왕하간왕
상산왕안평왕 돈안평왕 우[37]
패순왕
동무대후팽성목왕팽성원왕
고밀문헌왕동해효헌왕
신채무애왕
고밀효왕
남양왕진원왕 보[38]
범양왕
사마순제남왕중산왕
사마진초강왕초정왕초왕
초민왕
단수현후안평정후[39]
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서하무왕
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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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px -10px -5px; min-height: 28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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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진 종실 27인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부(孚) 숙달(叔達) 180 사마팔달 삼남 안평왕(安平王) 40,000
사마망(望) 자초(子初) 205 부(孚)의 차남 의양왕(義陽王) 10,000
사마홍(洪) 공업(孔業) 불명 망(望)의 차남 하간왕(河間王) 없음
사마무(楙) 공위(孔偉) 불명 망(望)의 사남 동평왕(東平王) 3,097
사마보(輔) 불명 불명 부(孚)의 삼남 발해왕(渤海王) 5,379
사마황(晃) 자명(子明) 불명 부(孚)의 오남 하비왕(下邳王) 5,176
사마괴(瓌) 자천(子泉) 불명 부(孚)의 육남 태원왕(太原王) 5,496
사마규(珪) 자장(子璋) 235 부(孚)의 칠남 고양왕(高陽王) 5,570
사마형(衡) 자평(子平) 불명 부(孚)의 팔남 상산왕(常山王) 3,790
사마경(景) 자문(子文) 불명 부(孚)의 구남 패왕(沛王) 3,400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권(權) 자여(子輿) 불명 규(馗)의 장남 팽성왕(彭城王) 2,900
사마태(泰) 자서(子舒) 불명 규(馗)의 차남 농서왕(隴西王) 3,200
사마수(綏) 자도(子都) 불명 규(馗)의 삼남 범양왕(范陽王) 없음
사마수(遂) 자백(子伯) 불명 순(恂)의 장남 제남왕(濟南王) 없음
사마손(遂) 자제(子悌) 불명 진(進)의 장남 초왕(譙王) 4,400
사마목(睦) 자우(子友) 불명 진(進)의 차남 중산왕(中山王) 5,200
사마릉(陵) 자산(子山) 불명 통(通)의 장남 북해왕(北海王) 4,700
사마빈(斌) 자정(子政) 불명 통(通)의 차남 진왕(陳王) 1,710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량(亮) 자익(子翼) 불명 의(懿)의 삼남 부풍왕(扶風王) 10,000
사마주(伷) 자장(子將) 227 의(懿)의 사남 동완왕(東莞王) 10,600
사마간(幹) 자장(子良) 232 의(懿)의 육남 평원왕(平原王) 11,300
사마준(駿) 자장(子臧) 232 의(懿)의 칠남 여음왕(汝陰王) 10,000
사마융(肜) 자미(子微) 불명 의(懿)의 팔남 양왕(梁王) 5,358
사마륜(倫) 자이(子彛) 불명 의(懿)의 구남 낭야왕(琅邪王) 없음
사마기(機) 태현(太玄) 불명 소(昭)의 칠남 연왕(燕王) 6,663
사마유(攸) 대유(大猷) 248 소(昭)의 차남 제왕(齊王) 없음
사마감(鑒) 대명(大明) 246 소(昭)의 육남 낙안왕(樂安王) 없음
}}}}}} ||
역임한 관직

조위의 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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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ece5b6>1대2대3대3대 대리4대
가후종요화흠장패사마의
<rowcolor=#ece5b6>5대6대7대8대9대
만총장제왕릉사마부고유
<rowcolor=#ece5b6>10대11대추증추증
등애왕상위진순욱
※ 둘러보기: 한의 대장군 (大將軍) · 후한의 태위 (太尉) · 후한의 대사공 (大司空) · 후한의 대사농 (大司農) · 조위의 사도 (司徒) · 조위의 사공 (司空) · 손오의 승상 (丞相) · 촉한의 재상 (宰相)}}}}}}}}}



조위의 사공(司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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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81818,#e5e5e5
1대 2대 3대 4대 5대
왕랑 진군 위진 최림 조엄
6대 7대 8대 9대 10대
고유 왕릉 손례 사마부 정충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노육 제갈탄 왕창 왕관 왕상
16대
순의
※ 둘러보기: 한의 대장군 (大將軍) · 후한의 태위 (太尉) · 후한의 대사공 (大司空) · 후한의 대사농 (大司農) · 조위의 태위 (太尉) · 조위의 사도 (司徒) · 손오의 승상 (丞相) · 촉한의 재상 (宰相) }}}}}}}}}}}}}}}
}}}}}} ||
<colbgcolor=#800080>
사마팔달(司馬八達)
안평헌왕(安平獻王)
司馬孚 | 사마부
시호 안평헌왕(安平獻王)
작위 관내후(關內侯) → 창평정후(昌平亭侯) → 장사현후(長社縣侯) → 장락공(長樂公) → 안평왕(安平王)
최종직위 태재(太宰)[1] 겸 지절(持節) 겸 도독(都督) 중외제군사(中外諸軍事)
성씨 사마(司馬)
(孚)
숙달(叔達)
아버지 사마방
생몰기간 180년 ~ 272년
고향 사례(司隸)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재임기간 조위의 사공
251년 3월 ~ 7월 28일
조위의 태위
251년 6월 28일 ~ 256년 8월 29일
조위의 태부
256년 8월 29일 ~ 265년 12월
재위기간 서진의 안평왕
265년 12월 ~ 272년 2월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조비 시절 친위세력2.2. 조예 시절 문관으로서2.3. 형의 죽음 이후 지휘관으로2.4.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인지에 관하여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형과의 기묘한 2인3각4.2. 삼국지의 산 증인
5. 기타6.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이자 진나라의 황족으로 자는 숙달(叔達). 경조윤 사마방삼남, 사마랑사마의의 동생[2]으로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맏형인 사마랑이 당대의 명사였고, 둘째 형인 사마의가 모략의 명수였다면 사마부는 겸허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적이 없었으며 학문과 경전에 해박하여 사마팔달의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2. 정사 삼국지

사마부의 관직생활을 보면 문,무 양면에서 충실하게 형과 사마씨를 서포트 한 인물이다.

조식의 문학연으로 관직을 시작한[3] 사마부는 조조 직속으로 일하게 된 형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조비의 태자중서좌로 전임된다. 중히 쓰여 가 세워지자 상서우복야, 상서령, 사공, 태부 등 요직을 역임했다.[4]

2.1. 조비 시절 친위세력

조조가 죽자 아직 위나라는 다들 울며 다들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사마부는 화흠과 함께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했고 조비가 빠르게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덕에 중서랑,[5] 급시상시를 맡고, 성내에서 오래 일해 황문시랑[6]으로 임명되고 기도위[7]로 일했다고 한다. 모두 황제 직속의 근위하는 벼슬이다.

이때 손권이 조비에게 항복할 때 이를 받아들이라고 조언했으며 그 후는 하내의 전농이 되고 관내후가 되고 청하태수로 근무한다.

2.2. 조예 시절 문관으로서

이후 조예가 사마의와 같은 풍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마부를 높게 평가하고 [8] 그에게 탁지상서 직을 제수했다. 탁지는 다름아닌 재정부로 조예는 이 두 형제들에게 집착한 나머지 군권이고 재정권이고 모두 사마씨에게 내준 셈.

그는 형 사마의를 내정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촉한의 침공 때마다 멀리 떨어진 수도로부터 주력을 지원받아야 했고 사마부 본인도 지원군을 이끌고 가야했던 서부 전선의 방어태세 보완을 위해 보기 20,000명을 추가로 뽑아 배치하고, 또한 피폐해지는 관중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상규에 기주 농부 5,000명을 이주시켜 둔전한다는 정책을 실시한 것.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관중의) 장정들에게 가을과 겨울에 전진(戰陣)하는 법을 배우고, 봄과 여름에는 밭과 뽕나무를 일구도록 하였다. 말미암아 이에 관중(關中)의 군국(軍國)에 여분이 있게 되었으며, 적들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했다. 여기에 비슷한 시기(233년) 사마의가 진나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개수로인 성국거를 진창에서 견수까지 확장시켰다는 기록이 진서에 있는데, 이것은 사마부가 제안한 관중 부흥책과 연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거나 이 덕분에 사람이 없어 비었다던 관중에는 백성들이 충원될 수 있었고, 제갈량은 5차 북벌에서 이를 역이용해 오장원에 눌러 앉아 백성들과 촉군들을 한데 섞어 둔전을 하면서 수많은 양곡을 수확하면서 장기전 태세에 돌입하여 위수 남쪽을 점거하다시피 했다. 결국 견벽거수로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제갈량이 죽고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주둔했던 기지에서 많은 양곡을 노획한다. 하염없이 제갈량의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견벽거수를 노리던 사마의, 사마부 형제에게는 이 상황이 씁쓸하게 다가 올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어쨌든 이후 조용히 지내던 사마부는 고평릉 사변에서 사마의가 조상과 대립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상서령으로 태위 장제(蔣濟)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했고 이후 사공-태위-태부 코스를 찍었다.[9]

2.3. 형의 죽음 이후 지휘관으로

태위 시절, 대오전(對吳戰)에서는 관구검 등을 지휘하며 제갈각과 교전했으며 대촉한전선에는 왕경의 패배이후 최고사령관으로 임했으며 등애의 후속 부대로써 교전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형 사마의와 조카들을 도와 사마씨의 적들을 상대로 창업을 도운 최고 공신이나 원로나 다름없다. 그런데...

2.4.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인지에 관하여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킬 때 표에 따르면 조방 폐위 당시 사마부는 조방의 폐위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를 전송했다'고 하고 260년 조모가 피살되자 태부였던 그는 상서복사 진태와 함께, 죽은 조모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대성통곡하며 '폐하(陛下)를 살해한 것은 신(臣)의 죄입니다.'라며 시해를 주관한 사람을 규명하자고 주청하였다.(진서 안평헌왕부열전)

265년 종손[10]사마염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아 서진을 세우자 황제에서 퇴위한 진류왕 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진의 신하들 모두가 진류왕 조환이 퇴위된 후, 새로 황제가 된 사마염에게 밉보일 수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부만이 사마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환을 방문하였다. 사마부는 공신이자 황족 중에서도 큰어른[11]이었기에, 황제인 사마염도 그를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사마부는 폐위된 조환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위나라의 신하입니다. 신은 평생 위나라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사마부는 조환의 거처를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사마염으로부터 안평왕에 봉해지고, 태재·지절·독중외제군사에 임명되어 황족 및 신료들의 최고 원로 대우를 받았다.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근심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위나라의 신하였음을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사마씨가 정권을 잡고 조방 폐위를 기점으로 그는 갑자기 사마씨 창업의 공신에서 조위의 충신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조방의 폐위를 부른 고평릉 사변의 최고 공신 중 하나가 사마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묘하다고 밖엔 할 수 없으나, 사마부의 진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사마부가 사마순과 함께 위나라의 마지막 사마씨 충신였는지 여부에 대해선 개개인의 평가가 나뉜다.

3. 삼국지연의

조비가 위왕 자리를 이어 받는 논의 내지 조방을 쫓아내고 조모를 세울 때 개입하는 등 선위하는 자리에서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또 조모가 살해당하자 그 시체를 얼싸안고 통곡하는가 하면 정사와 달리 사마염이 선양받는 자리에서 안평왕 자리를 사양하고 물러나는 등, 사마씨 집안에서 가장 양심적인 인물로 서술되어 있다.

4. 평가

정사, 연의를 통틀어 충심을 강조하는 '충신'으로의 행보가 강조되나 행적으로 보면 고평릉 사변부터 일관되게 조위에 대한 충심과는 관련없는 행보를 걸었다. 형인 사마의가 조예 때부터 군권을 손에 쥔 것과 대비되게 재정권을 손에 쥐었는데 이는 사마의 파벌을 위시한 귀족세력에 힘을 몰아주는 행보였다. 사마의의 정변 이후에는 오히려 관직이 빠르게 올라갔으니 사마씨 정권과 사마씨 가문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과의 대립 또한 없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표면적으로라도 조씨를 위해 나선 것은 조모가 시해당했을 때 소극적인 진상규명 요구 뿐이었다.[12] 사마부는 그냥 울며 주관자를 규명하자는 건의한 게 끝.[13][14] 고평릉 사변때는 형을 도와 조상을 몰아냈고 사마사가 진짜 조위 마지막 충신이라 할 만한 하후현을 죽일 때는 사마소조차 말리는 와중에 사마부는 죽이라고 부추겼다.[15]

결정적으로 그가 다리 위에 올려놓고 슬퍼했다는 고귀향공 조모의 장례에 대해서 올린 상소를 보면 그가 과연 조모를 위해 흘린 눈물이 진실인지 의문이다.
8일, 태부 사마부, 대장군 사마문왕, 태위 고유, 사도 정충 등이 머리를 조아려 상주하였다.

신 등은 황태후의 칙령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된 고귀향공은 악역무도하고 스스로 커다란 재화 속에 빠졌는데, 한 창읍왕(昌邑王)이 죄를 지어 쫓겨난 선례에 따라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했습니다.

신 등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난을 구하여 혼란을 바로잡지도, 사악한 반란을 제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칙령을 받고 두려워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춘추(春秋)의 대의에 의하면, 왕 노릇하는 자에게는 천하가 집입니다. 그러나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에서 거주하였다 -춘추(春秋) 희공(喜公) 24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의 자격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 고귀향공은 충동적으로 행동하여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했으며, 스스로 멸망하여 사람과 신을 모두 버렸습니다.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하는 것은 확실히 옛날 제도와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등은 황태후 전하의 자애로움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대의가 있지만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이 있으니, 신들도 마음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해 고귀향공을 왕의 예의로써 안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태후는 이 의견을 따랐다.
위서 삼소제기 고귀향공 감로 5년(260) 5월 8일 부분

이 상소는 고귀향공 조모가 죽은 지 하루 만에 올라간 상소이다.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선 이 상소에 대해 '태후가 조모를 서인으로서 예장하려 하자, 사마부와 공(公)의 무리들이 상표를 올려, 왕으로서 예장을 할 것을 빌어 이를 좇았다'라고 했다. 그런데 무릎에 조모의 목을 올려놓고 폐하가 시해된 것은 자신의 죄라며 울었다는 양반이 '그' 고귀향공 조모의 장례에 대해서 하루만에 '조모는 죽어마땅한 천하의 죄인이나, 태후의 체면을 봐서 왕으로 장례해주겠다'며 깎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은 상소문을 상주한 점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사마부가 정말로 고귀향공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최소한 앞장서서 저런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귀향공을 위해 조금 울고 실권도 뭣도 없는 어린 폐황제 조환 몇 번 방문한 것으로 서진의 안평헌왕 사마부는 '조위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휘황찬란한 명예를 받아가는 데 성공했다. 참된 충신들은 역적으로 몰리고(하후현, 왕경)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진태) 유배되지만(사마순) 조위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사마씨의 중진은 조위의 충신으로 둔갑한 것이다. 사마씨가 고아와 과부를 속여가며 천하를 얻은 집안이라던 석륵의 평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황제시해라는 대역무도로 누대에 걸쳐 욕될 사마씨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자 충신인 척한 정객에 가깝다. 딱히 위나라의 충신 포지션이었던지도 의문이던 인물이,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주구에게 시해되자 위나라의 충신으로 태세전환했다는 것은 자못 섬뜩한 일이다. 형 사마의에 뒤지지 않는 처세술의 인물인 셈. 사마부의 처세술 탐구

과거 시대에도 사마부의 충성심에 의문을 표한 사람이 있었다.

정작 조위에 끝까지 진심어린 마음으로 절의를 굽히지 않은 사마씨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의 조카 사마순이다.

4.1. 형과의 기묘한 2인3각

사마의는 조비의 문학연으로 관직을 시작했고 사마부는 조식의 문학연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 후 사마의가 조조 직할로 옮기자 조비 휘하로 옮겼으며 조비 시절 기도위, 중서랑,황문시랑으로 사마의를 서포트했다. 그후 조예 시절 도지상서로 재정권을 장악해 군권을 잡은 형을 도왔다.

사마의 사후에는 형의 벼슬을 그대로 이으면서 최고지휘관으로도 활동했다.

4.2. 삼국지의 산 증인

272년 93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는데,[16] 삼국지의 서막이었던 후한 영제 치세에 태어나 삼국지가 막을 내린 서진무제 치세에 사망하는, 사실상 삼국지의 시작과 끝을 모두 살다간 인물이다. 3개의 왕조(후한, 조위, 서진)에서 살았으며 그가 살아있는 동안 겪었던 황제만 9명[17]에 사마씨가 조위에서 집권하게 되는 고평릉 사변에 벌써 70세라는 고령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씨 정권에서만 4명[18]의 수반을 모셨다.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보자면:
대충 대표적인 사건들만 해도 이 정도다. 후한이 망할 때 벌써 41세의 장년이었으며, 조위 역사 45년을 다 겪고도 생존해 서진 초기의 치세까지 겪고서 갔다. 종증손자인 사마충가남풍과 혼인하는 사건까지 겪었으며 만약 8년만 더 살았으면 정확히 100년을 살고 오의 멸망과 서진의 삼국통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멸망전만 빼면 삼국지의 주요 사건들의 사실상 전부가 사마부의 일생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야말로 삼국지의 산 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21]

5. 기타

형인 사마랑 관련 기록인 사마랑전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때(12세) 시험을 보는데 하도 덩치가 커서 나이를 속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게다가 역시 한 덩치하는 동탁이 사마랑에 대해 '내 아들이랑 꼭 닮았다'고 평가했다고. 사마랑 본인 말에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의 집안 유전이라니 동생들인 사마의와 사마부도 꽤 한 덩치 했을것이라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그의 후손으로 자치통감의 편찬자인 사마광이 유명하며,[22] 손자 중 하나나라를 말아먹는다.

후손 중 사마순은 명나라 시대 조선사신으로 한국에 오기도 했다.

6. 미디어 믹스

6.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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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23]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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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언제나 고만고만한 능력치를 지닌 내정형 문관이지만, 수명이 긴지라 성장할 여지는 많다. 작은 형인 사마의만은 못하지만, 큰형인 사마랑보단 능력치가 좋은 편. 말년에 군대도 이끌어봐서 통솔도 어느정도는 찍어준다. 연의에서의 충절을 반영했는지, 정작 가장 높은 능력치는 지력, 정치가 아닌 매력이다. 그런데 어찌 일러스트는 선함과는 거리가 있는 은근히 독해보이는 인상이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7에서는 81/70/63/85에 첩보, 회복, 수복, 불화살,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사령관형이다. 성장경향도 장군, 전략경향은 균형, 인물경향은 능력중시.

삼국지 9에서는 67/49/78/87의 준수한 문관. 투석,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원한다면 전장에서 써먹을 수도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72/35/77/79/87의 좋은 문관으로 등장. 명사 특기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보수, 진정, 유인, 명사. 총 5개다.

삼국지 11에서는 전반적으로 조금 너프 당했지만 70/37/76/79/85로 여전히 쓸만하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오른손을 두 개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정황상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사마염을 꾸짖는 모습으로 보인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으며 중신특성은 없고 특기는 상업 2, 농업 3, 문화 6, 언변 4인 쓸만한 B급 문관. 전수특기는 문화이며 전법은 위무.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1, 무력 37, 지력 76, 정치 79, 매력 84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 상승했다. 개성은 조달, 문화, PK에서는 자비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왕도, 정책은 세출개선 Lv 3, 진형은 방원, 충차, 전법은 연노, 고무, 충차, 친애무장은 조모, 혐오무장은 없다.

6.2.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7에서는 고평릉 사변에 아군 클론무장으로 참전한다. 장성모드에서 형 사마의와 특수대사가 있는데, 형과 사상적으로 대립한다. 사마의도 인정할 정도의 재능을 가졌지만 재능있는 자에게만 충성하는 사마의와 달리 어떤 상황에서든 진심으로 섬기는 인물로 캐릭터가 잡혀있다.

진삼국무쌍8에서는 11~13장에 걸쳐 진나라 스토리에서 플레이어 대신 임무의 주요 NPC 역할을 수행하는 대타로서 쓰인다.[24] 클론 중에서 인지도가 있는 편이고, 장수하였으며, 사마일족의 일원이라는 특징들 덕에 대타 역할로 채용된 것으로 보인다.[25]

6.3. 반삼국지

뜬금없이 무장으로 등장해서 형 사마의를 도와서 싸우다가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죽는다.

6.4. 삼국전투기

캐릭터 자체가 원래 나올 예정이 없다가 갑자기 나와서인지 형 사마랑과 더불어 오리지날 캐릭터로 등장한다. 당대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나게 장수했다는 걸 반영했는지 젊은이로 나온 형 사마랑과 달리 백발에 수염 난 노인으로 등장했다. 큰형 사마랑과 함께 전투외편 7-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전투외편 7편에서 처음 등장. 조모 사후 매우 애통해하는 모습으로만 살짝 등장한다. 위 항목에도 쓰여 있듯 현재는 그냥 립서비스라는 설이 주류 해석이지만 일단 본작에서는 진심으로 비통해한 것으로 묘사했다.[26]

전투외편 8편에서는 왕조가 위에서 진으로 교체되며 태재로 임명됐다고 묘사된다. 본래 태사였던 관직명이 태재로 바뀐 이유는 피휘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27]

6.5. 화봉요원

사마의와 바둑을 두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달고 나온다.

6.6. 대군사 사마의

지나치게 이미지가 미화된 모습을 보인다. 사마사와 더불어 실제 역사와 작중에서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큰 인물이다.[28] 극초반부에는 형 두 명에 비해 꽤 아둔한 듯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경험이 쌓이면서 꽤 믿음직스러운 캐릭터로 변화한다. 이후 시즌 2 초중반부는 제갈량 북벌 때문에 비중이 줄어들지만 이후 사마의가 조상과의 정치싸움을 시작하게 되면서 점차 비중이 증가하고 고평릉 사변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이후 흑화한 형과 반목하고 조상,왕릉의 삼족을 멸하고 하우현까지 죽이는걸 보고 형님의 초심은 아직 남아있냐며 묻고 자신은 끝까지 위의 신하로 남겠다고 말하고 끝내 결별한다.


[1] 본래 태사(太師)로 사마사(司馬師)의 이름을 피휘하였기에 태재라 한다.[2] 바로 위의 형 사마의가 179년생인데, 본인은 180년생으로 즉 연년생이다.[3] 형인 사마의는 조비의 문학연으로 시작했다.[4] 사마팔달이라곤 하지만 사마부 밑으론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5] 조서의 초안을 잡는 벼슬이다.[6] 황제를 곁에서 모시면서 궁궐 안팎을 연락하는 벼슬이다.[7] 황제의 경호군인 우림기병을 감독하는 벼슬이다.[8] 사마의와 닮았다는 평가를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9] 심지어 문학연으로 시작해 태위-태부로 관직 생활이 끝난건 형과 똑같다.[10] 從孫, 형제의 손자, 조카의 아들. 사마염은 사마부의 조카인 사마소의 장남이다.[11] 사마염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사마의와 그 조카들을 훌륭히 보필하였다는 점에서 공이 크고 게다가 서진이 건국된 시점에서 무려 86세의 고령이기도 했다.[12] 진태가충을 처형해야 한다고 아니하면 사마소 자신이 책임을 지라고 진언하기라도 했다.[13] 똑같이 권신 집안의 출신인 헌목황후 조씨는 오빠인 조비후한을 멸망시킬 때 남편인 헌제보다도 더 격렬히 저항한 것과 비교하면 더 명확하다. 참고로 이때 조 황후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4] 게다가 그 주관자는 다름아닌 본인의 조카이자 사마씨 정권의 수장이었던 사마소였고, 그 사마소는 사실상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넘어갔음에도 이를 규탄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15] <속담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주살하려고 할 때 뜻을 정하지 못해 숙부 사마부에게 하후현에 대해서 "나의 재주로 족히 (하후현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사마부가 조엄이 자식의 장례를 치를 때를 언급하며 "네가 거기에 왔을 때 좌중의 절반만 일어섰지만 하후현이 왔을 때는 전부 일어섰다. 너는 하후현보다 못한 거 같다" 사마사가 이를 듣고 하후현을 주살했다.[16] 평균수명이 많이 올라간 지금 시대에도 90이 넘으면 꽤 장수했다고 여겨지는데, 그 당시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장수한 격이었다.[17] 영제, 소제, 헌제,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사마염이다.[18]사마의, 조카들 사마사 & 사마소, 조카손자 사마염이다.[19] 형인 사마랑에게 입적되었다, 다만 생물학적 친부는 사마부기에, 사마망도 66세로 꽤 장수한 케이스인데 아버지에는 못미치는게 함정[20] 육항양호가 제대로 맞붙어 육항이 승리를 거둔 그 전투다.[21] 물론 사마부가 가장 오래산것은 아니며 같은 시대의 장천이나 탁발역미는 사마부보다 더 장수했다.[22] 하지만 사마광은 위진정통론, 촉한정통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삼국지 시대를 언급했다.[23] 이 일러스트는 삼국지 14의 오범의 일러스트로 재활용된다.[24] 예를 들어 사마의를 플레이 중이라면 사마의가 등장하는 임무에 사마의 대신 NPC로 배치된다.[25] 비슷한 예시들로 위의 조홍, 오의 주치, 촉의 간옹이 있다. 모두 스토리 시작부터 오랫동안 플레이어의 대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특징. 다만 본인이 활약한 전투에서 대타로 못 뛰는 조홍, 주치, 간옹과 달리, 사마부는 큰 활약이 없어 대타 역할에 공백이 안 생긴다는 독보적인 장점이 있다(...).[26]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작가가 원래 사마부는 그릴 생각이 없었는데 그리게 되었다는 식으로 묘사됐었다. 원래 그릴 예정이 없던 인물을 급하게 끼워넣으려다 보니 사료 분석이 좀 미흡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치는 않다.[27] 사마부는 사마염(司馬炎)의 사(司) 때문에 그런 거라고 설명했지만 사실 사마사(司馬師)의 이름 사(師)와 똑같은 글자라서 피휘한 거다.[28] 사마사가 사서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실상 동생 사마소가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똑같다. 사마부 역시 형이 밟은 출세루트를 같이 밟았으며, 고평릉 사변에서도 적극 참여했다. 또한, 작중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살육을 혐오하기는 커녕 하후현과 그 일당들의 살육에 앞장섰으며, 조방 폐위와 조모 살해를 옹호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