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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4:02:18

사마수(초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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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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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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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隨
(?년 ~ 302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자제(子悌)로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진의 손자, 사마손의 아들이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작위는 초왕(譙王).

2. 생애

사마수는 266년에 아버지 사마손이 죽자 초왕으로 즉위하였고, 벼슬은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양주제군사, 안동대장군에 이르렀다.

영녕 2년 정월 경자(302년 3월 5일), 사마수가 사망하자 시호를 정(定)이라 하였으며, 그 아들 사마수(司馬邃)가 후사를 이었다.

수경주에 따르면 위문제의 대향지비 동북쪽이자 과수 남쪽인 초현에 장사지내 309년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으며, 박주지에 따르면 그의 묘는 청나라 때까지도 있었다.

그는 초왕을 36년 동안 지내 초왕 중에서는 40년 동안 지낸 후손인 사마염(恬)의 뒤를 이어 2번째로 초왕을 오랫동안 지냈으며, 그의 봉국인 초국은 후손들이 대대로 이었고 영가의 난까지 휘말렸음에도 살아남다가 그 후손이 후진에 투항한 415년까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