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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22:04:26

후사광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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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史光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 청주 동래군 액현 사람으로 자는 효명(孝明). 참고로 후사는 성씨이다.[1]

2. 생애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어 사물에 대한 이해가 좋았고 동향 사람 유하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인이 되고 효렴에 천거되어 주에서 별가로 부름을 받았다.

264년, 낙양 전농중랑장이 되고 관중후에 봉해졌다. 265년에는 산기상시, 시중을 겸임했으며, 황보도(皇甫陶), 순고(荀暠) 등과 함께 천자의 사자로 부절을 들고 민간의 풍속을 시찰해 그 풍속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낙양으로 귀환해서 무제 사마염에게 보고를 올리니, 성문교위, 어사중승에 올랐고 임해후로 개봉되었다.

후사광은 직위가 높아졌음에도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태보 왕상이 병으로 오랫동안 조정에 참여하지 않아 파면을 상주했지만, 사마염은 오히려 조서로 왕상을 우대하면서 후사광의 상주는 기각되었다. 이후 소부로 옮겼다가 사망하니, 사마염은 조서를 내려 그의 일가에게 조복 1구와 상복 1벌, 돈 50만 전, 베 100필을 모두 하사하였다. 장남 후사현(侯史玄)이 대를 이었고 현도태수를 지냈다.


[1] 후사씨의 시조는 진나라의 태사 동호(董狐)로, 조돈의 권세에 굴하지 않고 '임금을 시해한 자'라 적은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다. 동호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중국에서 사관들의 롤모델로 길이 남았으며, 진후(晉侯)의 사관(史官)을 지냈다 하여 그 자손들은 후사(侯史)씨로 개성되었다.